city life
얼마 전 목사님의 설교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사실 가장 그리스도인다워지는 중요한 방편은 말씀과 기도이다.(딤전4:5) 나는 이 원리를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와 말씀의 부족은 우리 영적 침체의 가장 실제적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게 된다. 기도와 말씀을 충분히 누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느냐는 것. 어쩌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어려움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분주할 수밖에 없는가?’
오늘날의 이 분주함. 복잡함. 다양함. 거대함을 생각해볼 때, simple life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에게 분명 최대의 위기가 온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시간이 나더라도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활용하고 개발하기 위해 시간을 소모해야 하기까지 하다. 현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사회적 인간으로 부합되기 위해 우리는 일반적인 생활에서조차 컴퓨터, 스마트폰, 운전, 세탁기, mp3, 네비게이션, 각종 기계와 기구 조작법, 법률과 상식 등 속지 않고 살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 그런 것들을 포기하면 낙오자에 가까워진다. 세상의 낙오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서글픈 현실일지 모르겠다. 차라리 머리 밀고 속세를 떠난 중이 되면 세상의 낙오자가 부처가 될지 몰라도. 목사님 말씀처럼 문명의 역기능이다. 문명이 발전하는 만큼 영적, 정신적 세계도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한다.
영혼이 피폐해지는데도 세상의 연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세상을 사랑해서? 적어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세상이 밉지만. 미워도 다시 한번. 어쩔 수 없는 굴레와 같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문명이 만들어 놓은 소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하루를 직장에 쓰는 시간보다 봉사를 하는 더 써야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저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동차나 집,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이나 우리나 그것들이 다 필요하다. 그것을 소유하려면 지불이 요구된다. 지불을 하려면 벌어야 된다. 벌이를 하려면 세상에 나가 일해야 한다.
더 이상 자급자족하던 시대는 없다. 오늘날의 life style은 자급자족을 거의 전멸시켜 놓았다. 디자인과 기능의 발달. 거기에 날개를 달아준 대량생산과 교통의 발달은 거대한 도시문명을 이룩시켰다. 그리고 이 도시 위에는 오직 소비만이 생존하게 되었다. 메이커 자동차를 대체하기 위해 직접 차를 만들어 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파트를 대체하기 위해 손수 터를 취하고, 오두막을 지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겨울 스웨터 하나도 손수 짜서 입는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 오늘의 시대는 구매와 소비의 시대이다. 모든 것이 디자인과 기능성을 갖춰야 제격이 된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투박하고 기능성이 미달되는 자급자족은 city life의 밸런스를 깨트린다. 도시의 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이 해마다 소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이 소비의 시대에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마귀가 만들어 놓은 도시문명의 미학 뒤에 숨어있는 노림수 일 것이다. 어쩌면 이 소비의 시대가 바로 오늘을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영적 침체의 원인 중 하나이진 않을까?
가나안 점령 때, 단 지파는 가장 비옥한 땅을 소유했지만 가장 먼저 우상숭배에 빠졌다. 기독교의 비율이 높은 나라가 잘 산다는 일반적인 통계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우상을 적게 숭배하고 문명이 발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문명의 발달이 우상숭배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다. 예기치 않은 어느 순간에 뒤집힌다. 어쩌면 이미 우리도 예외가 아닌 길로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문명의 발달이 편리와 만족과 자부심과 영광을 주었지만 차츰 그것을 유지하고 버티고 지키기 위해 허덕이고 있다. 영광을 지키기 위한 막대한 사회 간접자본의 충당을 위해서라도 소비와 자금의 유동이 촉진되어야 한다. 브레이크가 마모되기 시작한 미친 소비의 시대가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마치, 오늘날 위태로운 미국이 최초의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
그 소비의 거친 물결 속에서 함께 조급해지고, 다급해지고 허덕이기 시작한 우리 역시 영혼을 돌아볼 삶의 여유는 너무 부족해 보인다. 무서운 징조의 시작이다. 더 많은 복음의 역사가 이제 중국에 있고, 몽골에 있고, 파키스탄에 있고, 도시문명과 소비시대의 파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저 가난한 나라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