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진 말씀_2012.04.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2.)

 

(삼상 15:23, 개역)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사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울은 일찌감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 같다. 다윗 역시 큰 죄를 범했는데도 긍휼로 다가오셨으면서 말이다. 차별?

 

말씀은 우리 삶의 표준이다. 우리 삶의 이정표이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길로 인도해준다. 말씀은 그래서 우리의 양식이다. 우리의 힘과 능력의 샘터다. 사울에게 하나님은 왜 그토록 멀었던 걸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동시에 말씀의 사람이었다. 시편1편에서 이미 다윗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얘기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그가 다윗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성령 밖에서 행하는 사람이었다. 그 차이로부터 사울이 왜 하나님의 긍휼에서 먼 사람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군대를 진멸하라고 하셨다.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말렉을 정복하고, 그 왕 아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논쟁은 여기서부터 불거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노라고 주장하는 사울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무엘과의 공방전을 보게 된다.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하나님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다.그러나 사울은 아각을 살려두고, 좋은 짐승들을 제사 드린다는 명목으로 살려두었다. 그런 결정은 사울에게 괜찮은 결정이었다. 사무엘을 만났을 때 사울이 말했다. ‘보십시오.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하하하(방긋)’ 그러나 안타깝게 짐승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각왕이 살아 있었다. 사무엘은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뭐야? 다 살려놓고 준행했다니?’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사울이란 사람이 어째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없었는지 분명히 알게 된다. 만약에 사울이 진멸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사무엘을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렵게 생각했다면 그는 긍휼을 입을 자격이 있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엄청난 사실이다. 사울에게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다라는 의미와 기준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기에 떳떳하고 당당했다는 것이다. , 사울은 전혀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조금도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자기 편에서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뤄진 순종이 아니었다. 철저히 자기의 관점과 자기 논리 안에서 완전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언제든지 자기 주관과 자기 논리대로 행동해 놓고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 제사드릴 명목으로 살려 둔 것이니 그건 불순종의 사유가 되지 않으며, 전혀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이러한 사울의 논리와 사고의 관점을 생각해볼 때, 심하게 놀라게 된다. 사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것이다. 사무엘의 말처럼 사울은 말씀을 던져버린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던져 버렸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불어 그로 인해 그 역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버린 죄인의 후손들이다. 그대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말씀을 버린 그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이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나단의 지적에 한 마디 변명할 것도 없이 꼬꾸라져 울부짖었던 사람이다. 말씀이 그에게는 버려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긍휼은 그런 자에게 있다.

 

교회 안에 사울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꽤 있다. 놀라지 말라. 사실이다. 그리고 또 놀라자. 그럴 수가!

 물론, 말씀은 그렇긴 한데…’ 얼마나 익숙한 표현인가. 그리고 무엇인가. 자기의 생각과 주관대로 자기의 논리와 가치관대로 해석하고 말씀을 배척한다. 본질의 하나님 말씀을 버린다. 그리고 무서운 사실은 때로는 그것이 나의 논리이기도 했다. 나는 고백한다. 슬프게도 나 역시 사울 일 때가 있다. 다시 말해, 나 역시 하나님의 버리시는 경계선에 넘나들었다. 내가 영원히 안전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내가 사울처럼 될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를 심하게 두렵게 한다. 나도 사울이라니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사울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생각해보자. 그는 가책이나 거리낌이 없었다. 마음이 자유로웠다. 나아온 사무엘을 즐거이 맞으러 나가면서 소리쳤다. ‘보십시오. 제가 다 행했습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대로지요. 껄껄껄하나님 말씀을 버린 자의 여유와 자유로움. 눈 뜬 봉사. 그리고 그는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 버린 자의 교만과 독선. 자기 주관대로 지켜놓고 하나님 주관대로 지켰다는 외식과 거짓. 속임과 자기기만. 그렇다. 하나님 말씀을 버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인다. 자기 기만에 빠져 자기의 추악을 보지 못한다. 슬픔! 하나님의 제사를 위함이라는 보기 좋은 명목이 모든 거짓과 변명을 대신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훼손시킨 죄. 나 역시 그렇게 합리화 시켰다. 사실은 이기적인 결정이었고, 사실은 육신적인 선택이었고,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면서 몇 가지 하나님과 연결 시킬 수 있는 빌미를 찾아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속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독했다. 나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미화시켰다. 나의 거짓과 위선을 하나님을 위한 선행으로 포장했다. 책망 받는 사울이 백성들 때문이었다고 핑계했다. 자기 죄와 책임을 최소화 시키고자 하며, 회피했다. 내 죄에 대해 두둔하기 위해 사람과 환경을 이유 삼았다. 그 모든 사울의 거짓과 구차한 변명 뒤에 사무엘이 일러 주었다.

 

(삼상 15:22, 개역)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마음이 아프다. 결국 그 모든 변명과 합리화와 속임과 미화를 반복했을지라도 들을 수 있는 답변은 오직 이것 뿐이거늘.

 

제사를 위한답시고 진멸 안 하셨다구요? 하나님께 올릴 제사를 위한 것이라구요? , 그래요? 근데, 저기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거든요. 순종은 그냥 단순한 거예요. 뭐 갖다 붙이지 마세요. 멋들어지게 제사 안 지내도 되니까. 그냥 진멸하라면 그냥 진멸하면 되는 거예요. , 말이 많아요? 그게요. 지금 그런 행동방식과 변명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거예요. 두려워하세요! 지금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됐다구요. 이제 하나님이 당신을 버릴 차례예요. 이 악한 사람!’

 

죄송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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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조급,경솔_2012.04.0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1.)

 

사울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신앙의 실패자였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울에게서 부터 신앙적인 미덕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오직 기름부음을 받을 그 초창기 몇 장에서 밖이다. 실제적인 대관식이 있은 이후 그의 행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책과 끝없는 추락이었다. 사울을 살펴보면 좀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허술함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점투성이였다.

 

사울의 행보 속에서 우리는 그의 인격적인 부분들 중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결함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것들 중에는 평생을 다윗을 투기함으로써 죽이기 위해 평생을 소모하는 무모함과 지나친 투기심도 해당된다. 또한, 사울의 철저한 성급함과 조급함, 경솔한 성품이 그것이다.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고 공식적인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후 기록된 첫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그의 성급하고 조급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그의 미래를 구부러뜨리고 말았다. 3대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가지 이레를 기다려야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너무 정확히 이레에 맞춰 왔던 사무엘 덕분에 사울은 시험에 빠져버렸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다고 느껴졌던 사울은 이레가 찬 마지막 날 사무엘의 코빼기가 보이지 않자 심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지막 이레까지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 사무엘이 당도하기까지는 기다리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오직 제사장만 드리는 제물을 번제로 드려버렸다. 그럼으로써 그의 나라는 영영히 서지 못하게 되었다.

 

(삼상 13:12-13, 개역)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사무엘의 책망은 조금도 긍휼이 섞이지 않았다. 냉혹히 단정했다. 부득이고 뭐고 핑계 댈 것 없이 망령되이 행했노라고 단죄했다. 절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확언했다. 그의 나라가 서지 못할 것임을 결론 지어버렸다. 사울은 유독 심리적으로 매우 쫓기는 사람이었다. 흔히 빨리빨리에 가까운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 사울은 성품적으로 굉장히 성급하고, 조급한 성격으로 매사에 있어서 지나치게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해버림으로써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자신을 궁지에 빠트렸으며 더불어 스스로를 시험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바로 사울의 이러한 인격적인 단점이 현대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결함이란 것.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되어 가기에 도태되면 버려질 정도가 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조차 빨리라는 것은 습관적이 되어야 할 정도이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배우고 훈련 되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이 잠잠히 기다려야 된다라는 본연의 의무를 충분히 배우지 못하게 된다. 배우기에 앞서 너무 조급하게 굴게 된다.

 

(삼상 14:24, 개역)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사울의 성급하고 조급한 성품은 결과적으로 그의 판단과 언행에 있어서 경솔함을 야기시켰다. 블레셋과의 전투가 치열해질 때 사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아무 식물도 먹지 말고 전쟁에 올인 하라고 하면서 금식령을 선포했다. 지금보다도 더 과거의 전장에서는 체력전의 양상이 두드러졌다. 칼과 창으로 맞부딪혀야 했다. 그런 병사들에게 금식령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지휘관의 올바른 판단이었을까? 천만의 말씀. 배고픈 병사들이 힘을 다해서 싸울 수 없었음은 당연지사. , 사울은 전쟁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명목 하 어리석은 금식령을 선포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사울의 가진 경솔함의 단면이었으며 동시에 이러한 그의 어리석은 결정은 그의 신중하지 못한 성급함과 조급한 성향에서 비롯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차분히 신중히 충분히 고려해서 이 전쟁에서 지휘관으로서 어떤 결정을 내려 주는 것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것인지 숙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매우 즉흥적이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모든 병사들을 대신해 금식령을 내려버림으로써 모든 병사들로 하여금 올무에 걸리게 만들었다. 배가 고프고 지친 병사들은 결국 블레셋을 완전히 소탕할 수 없었고. 남은 블레셋 군대를 놓침으로써 훗날 블레셋 군대가 재기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요나단과 그의 일행이 블레셋 군대를 격파하고 수플에 들어갔을 때 꿀을 본 요나단이 그것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사울의 금식령을 들은 다른 병사들은 군침만 흘릴 뿐. 요나단은 사울의 금식령을 못 들었기에 먹을 수 있었노라고 했다. 여하튼.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심한 탈진과 탈수 상태에 이르게 된 병사들은 탈취한 짐승들을 그 피 있는 채 먹고, 소와 송아지를 아울러 취하였다.

 

, 지나치게 허기진 그들은 금식령도 잊어버린 채 미친 듯이 먹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피 있는 채로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게 되었다. 또한,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취하지 말라는 율법도 어기게 되었다.(22:28) 이 모든 것이 사울의 경솔한 판단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든 병사들의 비참한 퇴보였다.

 

(삼상 14:39, 개역)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병사들이 금식령을 어기고 먹었을 뿐만 아니라 피 채 먹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들렸다. 그러자 사울은 진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심판하겠노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누구든지 이 죄가 드러나면 죽일 것이되 자기 아들 요나단이라도 죽이겠노라고 했다. 실제로 요나단은 금식령을 어겼다. 그것도 제일 먼저. 그러나 최종 요나단이 죽었을까? 아니다. 백성들이 블레셋 군대를 이기도록 하나님이 쓰신 요나단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요나단을 죽음에서 면케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엇인가. 사울은 금식령을 어긴 자는 아들 요나단 일찌라도 죽이겠노라고 호언장담하며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결국 그 큰소리도 허공에 울리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속된 말로 쪽 팔린다.

 

, 사울은 성급,조급,경솔함의 대명사였다. 그는 신중하고 숙려해서 비중 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급하고 성급한 그의 기질적인 부족은 종종 그의 행동에 있어서 기다림을 걷어 차버리고 경솔히 행동하게 했으며, 동시에 경솔하게 말을 내뱉곤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황에 맞지 않는 금식령을 선포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또한, 병사들이 피 채 짐승을 먹는 시험에 들게 하였으며, 더불어 요나단을 죽이겠다는 경솔한 호언장담을 내뱉었다가 실천하지 못하는 수치를 자초했다. 왕으로서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신중하고 무게 있는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을 그였지만 그의 인격적인 부족은 결국 오점을 남기는 것들 것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울의 이러한 인격적인 부족과 경솔함을 생각해볼 때, 과연 오늘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비중 있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떤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그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좀 기다리면서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말해야 했어야 했을 때, 쉽게 단정해버림으로써 경솔하게 결정하고 말해 버리곤 했다. 스타트 총성이 울리기 전에 뛰쳐 나가려 했다가 부정출발에 대한 경고의 휘슬을 들어야 했다. 성급함과 조급함, 그리고 경솔함은 친구이다. 그것들은 함께 동고동락하는 형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진득함과 기다림이다. 하나님께 묻고 답변을 충분히 기다리는 인내와 느긋함이다. 그것은 나태하거나 무관심하란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비중 있게 사물과 현상을 살펴보고 결정하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가 성령 안에서 다스림을 받지 않고 성령께 의탁하지 않을 때 우리는 육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기질을 따라 성급하고 조급하게 행동해버리고 만다. 그것은 죄인의 본성이다. 원래 우리는 잠잠하고 진득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즉흥적이고, 너무 자기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다스림이 필요하다. 성령께 의탁하자.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생각하자. 항상 하나님을 앞에 두고 반 템포 느리게 가자. 때로는 한 템포를 늦춰도 보자. 오직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분별되어질 때 충분히 부족함 없이 신속하게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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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습관_2012.04.0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0.)

 

이스라엘이 구하던 왕이 세워진 후 일정기간이 흐른 뒤 사무엘은 백성들 앞에서 회고의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왕을 구했던 그 외침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임을 천명했다. 백성들은 탄식했다. 사무엘은 우레와 비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왕을 구한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증명해주실 거라고 했고, 실제 하나님은 우레와 비를 보내어서 증거해주셨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왕을 구했다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하나님께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고, 두려워 떨었다.

 

모든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호소했다. 하나님께 기도해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가 정녕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죄를 더 했노라고. 그러자 사무엘이 말했다.

 

(삼상 12:20, 개역)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삼상 12:22, 개역)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범죄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엄위하신 증거 앞에서 두려움을 품지 않을 사람이 그 누구일까? 만약,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의 죄와 그릇됨을 명백히 발견하고, 하나님의 징계 앞에 서게 되었다고 느껴질 때 두렵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주는 사무엘의 답변은 긍휼과 위로의 말씀이었다. ‘두려워 말라그렇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죄와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에 대해 벌벌 떨었다. 마치, 매를 든 아버지의 눈앞에 서있는 어린 아이가 맞기도 전에 울먹이듯. 그들에게 두려움을 거두라고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비록 범죄했고, 두렵더라도 그렇다고해서 여호와 좇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도망치려 하지 말라고.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두 가지의 갈등의 기로에 서곤 한다. 정직하게 자백하고 벌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거짓말하고 책임에서 도망칠 것인지. 정직해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정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는 거짓말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주어진 갈등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사무엘은 그들의 그런 심리적인 압박, 쫓기는 마음의 공포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었다. 그들이 범죄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식했을 때, 그들은 동요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려워졌고,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며, 사무엘의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었다. 사무엘의 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사무엘은 그들이 왕을 구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했다. 그것은 영원히 묻어둘 송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들의 죄를 물고 늘어져 그들을 공포로 몰아가서 정죄하고, 형벌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무엘은 단지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인식하되, 돌이키고 다시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두려워 말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너희를 내쫓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하나님 좇는 신앙에서 떠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며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잘못된 습관, 못된 습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인식하고 발견할 때, 그 무안함. 두려움. 징계에 대한 공포. 부끄러움. 수치. 그 모든 우리의 숨고 싶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좇는 신앙이 퇴보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과 망설임. 그래서 누군가는 교회와 교제에서 떨어지곤 한다. 그렇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를 범했다는 사실보다 더 나쁜 습관이며, 못된 습관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안에서는 내가 어떠한 상태와 모습이 되었든지.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더라도. 공포와 두려움이 올라올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쫓으려는 신앙의 삶에서는 돌이키려 해서는 안 된다. 진득히 하나님을 따르는 습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습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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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을 위한 우연_2012.04.0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9.)

 

(삼상 9:3, 개역)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자 기스의 아들 사울을 택하셨다. 성경은 사울이 준수한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보기 드문 장신(長身)에다가 두드러지는 준수한 용모를 지녔는데, 소위 몸짱얼짱이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갈망했던 만큼 아주 흡족한 신체조건을 갖춘 뽀대나는 왕이 준비된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섭리를 통해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게 하심으로써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섭리하셨던 하나님만의 특별한 방법론이 인상 깊다.

 

인과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원인과 결과. 반드시 결과는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사울은 왕이 되기 위해 택정을 받았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될 거란 기대나 상상, 어떤 제도적인 장치, 환경 등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결과적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면, 원인은 대체 무엇이 되어야 할까? 정치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그를 하나님은 이끄셔야 했고, 사무엘을 이해시키셔야 했으며, 그와 만나게 해야 했다.

 

사울의 아버지는 베냐민 사람 기스였다. 그는 유력한 자라고 되어 있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암나귀들이 많이 있었는데 한날 잘 키웠던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방목을 했었던지 나귀떼를 치던 종들이 놓친 것 같다. 방목을 하면서 한 마리도 아닌 몇 마리의 나귀떼를 잃어버릴 정도였다면 분명 소유한 나귀무리가 적은 무리는 아니었음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상당히 많은 나귀들이 있었고, 다스리는 종들 또한 한 명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몇 명인지 몰라도 적어도 두 명 이상, 세 명? 종들이 나귀 무리를 다스렸다. 그러나 평소에는 흔히 없던 일이 생겼던 것이다.

 

어느 날 암나귀들이 잃어지고 없었다. 특히, 암나귀는 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중요했을 것이다. 나귀를 잃어버리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게 되는 건. 중요한 재산이기 때문에 특별히 종들이 나귀무리가 잃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했을 것이며,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을 때 기스가 그의 아들 사울을 내보내 찾으라고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재산이기에 아들을 보내기도 했겠지만, 나귀를 잃어버리는 일이 흔한 것이었다면 으레 종을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일이고, 암나귀였기에 기스는 특별히 사울에게 암나귀를 찾는 일을 맡겼을 것 같다.

 

아무튼 사울은 그 사환을 데리고 암나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 상황을 조금 상상해보게 된다. 기스에게나 사울에게나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은 결코 익숙한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사건들에서는 일정부분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두 사람 다 웬일로 암나귀를 한 마리도 아니고 몇 마리씩이나 잃어버리게 됐을까?’라고 의구심을 품을 만 했다. 그러나 이 일상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사무엘을 만날 수 있도록 유도하시는 섭리이자 동인이었다고 생각해 볼 때, 이는 분명 우리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일깨워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동일한 의구심을 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일까?’란 아주 익숙한 질문 말이다.

 

사울의 일행이 에브라임과 살리사, 사알림 숩 땅 까지 두루 다녔다. 그리고 암나귀는 없었으며, 사울은 되레 그들이 집에서 너무 멀리 왔음으로 해서 아버지 기스가 오히려 암나귀보다 자기들의 행방을 더 걱정하게 될 것이란 방향으로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 그때는 갤럭시S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사울은 돌아가기로 맘 먹었다. 그러나 그때 사환이 권유했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 가까운 곳에 선지자가 있으니 만나보고라도 가자고 말이다. 사실 사울은 선지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기서는 사환이 하나님의 역사를 도왔다.

 

한편,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에게는 직통전화로 일러두었다. 내일 이 맘 때 사울이 찾아올 것이며,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정말 재미있다. 사무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이라는 준수하고 철없는 젊은 청년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기 위해 멋 모르고 올 것을 말이다. 정작 당사자였던 사울만이 자신 앞에 펼쳐질 엄청난 사건에 대해 전혀 무지몽매했을 뿐. 사울에게는 단지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이 지금 현재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최대의 쟁점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것이다. 우리 역시 고민으로만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

 

우리 역시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을 종잡을 수 없다. 우리가 미래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 아니면 불행히도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가정을 이루고 살며, 어떤 자녀들이 태어날지. 모든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상상불허이다.

 

또한, 우리가 겪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그것이 어떤 계획과 섭리로부터 말미암았던 것인지 몰랐다. 결코 기스나 사울에게 있어서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은 유쾌한 일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소 예외적이었고 생각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으며, 시간과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불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그 무모해 보이는 사건을 통해 왕의 꿈을 꿔보지도 않았던 사울로 하여금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예비적인 작업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사울은 무모해 보이는 일상의 사건으로 해서 자신을 허비한다고 느끼는 가운데 기름부음을 받기 위한 최선의 행보를 하고 있었다. , 무모해 보이는 소모가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 최선의 투자였던셈.

 

우리는 우리가 겪는 일상에 대해서 질문한다. , 왜 그런 거지?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 이건 웬일?’. 놀랍지 않은가. 바로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뤄지고 있는 순간이라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우연이라고는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그것은 필연을 위한 우연이었던 것이라고. 그렇다. 우연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 필연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적인 모든 것들은 필연을 위한 우연인 셈 인 것이다.

 

룻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가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 마침 우연처럼 보아스가 밭으로 나왔다가 룻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야 말로 분명, 필연을 위한 우연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연 같은 모든 삶의 예외적이고, 의구심을 일으키는 생소함에 대해서조차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필연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생각해볼 때, 무모해 보이는 일상의 사건과 현상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부여와 해석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암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기름부음을 받을 거라고 상상이라도 해봤겠는가. 너무 소모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손해라든지, 실패하든지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해보지 말자.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보자.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 최선의 투자라고 생각을 달리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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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빛 미래, 계약서 한 장_2012.04.0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8.)

 

(삼상 8:18-20, 개역) [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정의 건의했다. 그들의 명분은 분명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 같은 정신과 정직함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정직하지 못한 굽은 판결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정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고의 근거를 제공해줬다. 물론, 표면적인 명분은 그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다. 사무엘의 아들들에 대한 핑계는 잘 위장된 핑계.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의 제도에 대해 일러주었다. 왕정 아래에서는 백성들은 자기 소유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들들을 뺏겨서 왕의 수발을 들 수 있고, 추수한 소유를 드려야 하며, 짐승을 드려야 했다. 모든 소유에 대한 제반권리를 양도해야 했다. 그것은 왕의 종이 되는 것이었다.

 

(삼상 8:17, 개역)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종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의 열조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지긋지긋했다. 이제 신민(神民)이 된 그들에게 유일한 왕은 하나님. 그들은 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종의 신세를 구하고 있었다. 왕의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들에게 유익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것은 소위 노예계약이나 다를 바 없었다.

 

최근 아이돌 가수들이 소속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사례들이 있다. 노예계약이 문제였다. 무명의 춤꾼들이 유명의 스타가 되기 위해 처음에는 노예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합의했다. 기획사들은 투자한 만큼 한시라도 빨리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심한 노동을 요구한다.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다. 처음엔 스타가 되고 싶어서 노예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사인했다. 스타가 되고 싶어서. 그 이유 하나. 그러나 스타가 되고 보니 너무 고달팠다. 결국 해피엔딩이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정을 요구했다. 표면적 이유는 사무엘 아들들의 불찰. 그러나 진정한 이유 아니었다. 왕의 제도가 가져올 각종 권리와 권익의 박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길 거절하면서 맹목적으로 왕정의 필요를 말했다. 앞뒤 따질 것 없이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겠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진심을 토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 그들은 열방을 닮고 싶었다. 쉽게 말해, 세상을 닮고 싶었다. 세상의 제도를 배우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펜을 들어 노예계약에 거창하게 서명을 갈겼다. 스타가 될 보라빛 미래를 꿈꾸는 아이돌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친절하게 안내하셨다.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할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아마, 사무엘이 이 말을 전할 때 백성들은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절했다. 아무 것도 신중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눈에 돋보이는 세상의 제도와 원리, 있어 보이는 왕을 필두로 싸우러 나가는 군대. 그것이 너무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왜 그렇게 왕의 제도를 갈망했을까? 그들의 권리와 권익을 빼앗고, 학대할 수도 있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 왕을 얻고 싶었던 걸까? 바로, 부러움이다. 있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부러움, 성취감, 세상적으로 있어 보이는 것. 그것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렸다. 왕이 어떻게 그들을 학대할 것인지. 그 학대로 인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판단력을 상실해버렸다. 오직 세상처럼 되는 것, 세상을 배우는 것, 세상처럼 모양새를 갖추는 것. 그것이 필요했다.

 

세상과의 노예계약은 비단 이스라엘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노예계약에 서명을 하고 있다. 세상과 구별된 것에 대해 말하지만, 한 켠 어떤 모양이 되었든 세상을 부러워하고 있다.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세상의 행사를 따르고 싶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된다고 했던 그들처럼.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야겠다고 했던 그들처럼. 동일하게 말하곤 했다.

 

비록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것이 있어야 된다고. 해야 된다고.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필요하다고. , 어떤 면에서는 세상과 같은 모습과 모양이 되어야 된다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서 노예계약에 펜을 올렸다. 정말 우리의 판단이 선명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세상을 향한 부러움이 있었기 때문. 거짓말 다 거짓말. 양심에서 들려왔던 사무엘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거절했다고 하신 것이다. 듣고 싶지 않았었던 양심의 소리였기 때문에.

 

 

p.s

(삼상 12:19-22, 개역) [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22]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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