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을 위한 우연_2012.04.0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9.)
(삼상 9:3, 개역)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자 기스의 아들 사울을 택하셨다. 성경은 사울이 준수한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보기 드문 장신(長身)에다가 두드러지는 준수한 용모를 지녔는데, 소위 몸짱얼짱이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갈망했던 만큼 아주 흡족한 신체조건을 갖춘 뽀대나는 왕이 준비된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섭리를 통해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게 하심으로써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섭리하셨던 하나님만의 특별한 방법론이 인상 깊다.
‘인과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원인과 결과. 반드시
결과는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사울은 왕이 되기 위해 택정을 받았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될 거란 기대나 상상, 어떤 제도적인
장치, 환경 등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결과적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면, 원인은 대체 무엇이 되어야 할까? 정치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그를 하나님은 이끄셔야 했고, 사무엘을 이해시키셔야 했으며, 그와 만나게 해야 했다.
사울의 아버지는
베냐민 사람 기스였다. 그는 유력한 자라고 되어 있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암나귀들이 많이 있었는데 한날 잘 키웠던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방목을 했었던지 나귀떼를 치던 종들이 놓친 것 같다. 방목을
하면서 한 마리도 아닌 몇 마리의 나귀떼를 잃어버릴 정도였다면 분명 소유한 나귀무리가 적은 무리는 아니었음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상당히 많은 나귀들이 있었고, 다스리는 종들 또한 한 명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몇 명인지 몰라도 적어도 두 명 이상, 세
명? 종들이 나귀 무리를 다스렸다. 그러나 평소에는 흔히
없던 일이 생겼던 것이다.
어느 날
암나귀들이 잃어지고 없었다. 특히, 암나귀는 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중요했을 것이다. 나귀를 잃어버리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게 되는 건. 중요한 재산이기 때문에 특별히 종들이 나귀무리가 잃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했을 것이며,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을 때 기스가 그의 아들 사울을 내보내 찾으라고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재산이기에 아들을 보내기도 했겠지만, 나귀를 잃어버리는 일이
흔한 것이었다면 으레 종을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일이고, 암나귀였기에 기스는 특별히 사울에게 암나귀를 찾는 일을 맡겼을 것 같다.
아무튼 사울은
그 사환을 데리고 암나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 상황을 조금 상상해보게 된다. 기스에게나 사울에게나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은 결코 익숙한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사건들에서는 일정부분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두 사람 다 ‘웬일로 암나귀를 한
마리도 아니고 몇 마리씩이나 잃어버리게 됐을까?’라고 의구심을 품을 만 했다. 그러나 이 일상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사무엘을 만날 수 있도록 유도하시는 섭리이자 동인이었다고
생각해 볼 때, 이는 분명 우리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일깨워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동일한 의구심을 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일까?’란 아주 익숙한 질문 말이다.
사울의 일행이
에브라임과 살리사, 사알림 숩 땅 까지 두루 다녔다. 그리고
암나귀는 없었으며, 사울은 되레 그들이 집에서 너무 멀리 왔음으로 해서 아버지 기스가 오히려 암나귀보다
자기들의 행방을 더 걱정하게 될 것이란 방향으로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 그때는 갤럭시S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사울은 돌아가기로 맘 먹었다. 그러나 그때 사환이 권유했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 가까운 곳에 선지자가 있으니 만나보고라도 가자고 말이다. 사실 사울은 선지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기서는 사환이 하나님의 역사를 도왔다.
한편,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에게는 직통전화로 일러두었다. 내일 이 맘 때
사울이 찾아올 것이며,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정말
재미있다. 사무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이라는 준수하고
철없는 젊은 청년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기 위해 멋 모르고 올 것을 말이다. 정작 당사자였던 사울만이
자신 앞에 펼쳐질 엄청난 사건에 대해 전혀 무지몽매했을 뿐. 사울에게는 단지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이
지금 현재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최대의 쟁점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것이다. 우리 역시 고민으로만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
우리 역시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을 종잡을 수 없다. 우리가 미래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 아니면 불행히도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가정을 이루고 살며, 어떤 자녀들이
태어날지. 모든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상상불허이다.
또한, 우리가 겪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그것이
어떤 계획과 섭리로부터 말미암았던 것인지 몰랐다. 결코 기스나 사울에게 있어서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은 유쾌한 일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소 예외적이었고 생각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으며, 시간과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불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그
무모해 보이는 사건을 통해 왕의 꿈을 꿔보지도 않았던 사울로 하여금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예비적인 작업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사울은 무모해 보이는 일상의 사건으로 해서 자신을 허비한다고 느끼는 가운데 기름부음을 받기 위한 최선의
행보를 하고 있었다. 즉, 무모해 보이는 소모가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 최선의 투자였던셈.
우리는 우리가
겪는 일상에 대해서 질문한다. ‘아, 왜 그런 거지?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엉? 이건 웬일?’. 놀랍지 않은가. 바로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뤄지고 있는 순간이라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우연이라고는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그것은 필연을 위한 우연이었던 것이라고. 그렇다. 우연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 필연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적인 모든 것들은 ‘필연을 위한 우연’인
셈 인 것이다.
룻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가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 마침 우연처럼 보아스가 밭으로 나왔다가 룻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야 말로 분명, 필연을 위한 우연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연
같은 모든 삶의 예외적이고, 의구심을 일으키는 생소함에 대해서조차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필연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생각해볼 때, 무모해 보이는 일상의 사건과 현상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부여와 해석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암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기름부음을 받을 거라고 상상이라도 해봤겠는가. 너무 소모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손해라든지, 실패하든지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해보지 말자.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보자.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 최선의 투자라고 생각을 달리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