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습관_2012.04.0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0.)

 

이스라엘이 구하던 왕이 세워진 후 일정기간이 흐른 뒤 사무엘은 백성들 앞에서 회고의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왕을 구했던 그 외침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임을 천명했다. 백성들은 탄식했다. 사무엘은 우레와 비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왕을 구한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증명해주실 거라고 했고, 실제 하나님은 우레와 비를 보내어서 증거해주셨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왕을 구했다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하나님께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고, 두려워 떨었다.

 

모든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호소했다. 하나님께 기도해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가 정녕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죄를 더 했노라고. 그러자 사무엘이 말했다.

 

(삼상 12:20, 개역)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삼상 12:22, 개역)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범죄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엄위하신 증거 앞에서 두려움을 품지 않을 사람이 그 누구일까? 만약,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의 죄와 그릇됨을 명백히 발견하고, 하나님의 징계 앞에 서게 되었다고 느껴질 때 두렵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주는 사무엘의 답변은 긍휼과 위로의 말씀이었다. ‘두려워 말라그렇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죄와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에 대해 벌벌 떨었다. 마치, 매를 든 아버지의 눈앞에 서있는 어린 아이가 맞기도 전에 울먹이듯. 그들에게 두려움을 거두라고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비록 범죄했고, 두렵더라도 그렇다고해서 여호와 좇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도망치려 하지 말라고.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두 가지의 갈등의 기로에 서곤 한다. 정직하게 자백하고 벌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거짓말하고 책임에서 도망칠 것인지. 정직해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정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는 거짓말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주어진 갈등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사무엘은 그들의 그런 심리적인 압박, 쫓기는 마음의 공포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었다. 그들이 범죄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식했을 때, 그들은 동요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려워졌고,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며, 사무엘의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었다. 사무엘의 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사무엘은 그들이 왕을 구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했다. 그것은 영원히 묻어둘 송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들의 죄를 물고 늘어져 그들을 공포로 몰아가서 정죄하고, 형벌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무엘은 단지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인식하되, 돌이키고 다시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두려워 말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너희를 내쫓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하나님 좇는 신앙에서 떠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며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잘못된 습관, 못된 습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인식하고 발견할 때, 그 무안함. 두려움. 징계에 대한 공포. 부끄러움. 수치. 그 모든 우리의 숨고 싶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좇는 신앙이 퇴보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과 망설임. 그래서 누군가는 교회와 교제에서 떨어지곤 한다. 그렇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죄를 범했다는 사실보다 더 나쁜 습관이며, 못된 습관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안에서는 내가 어떠한 상태와 모습이 되었든지.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더라도. 공포와 두려움이 올라올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쫓으려는 신앙의 삶에서는 돌이키려 해서는 안 된다. 진득히 하나님을 따르는 습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습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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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을 위한 우연_2012.04.0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9.)

 

(삼상 9:3, 개역) 『사울의 아비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그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너는 한 사환을 데리고 일어나 가서 암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자 기스의 아들 사울을 택하셨다. 성경은 사울이 준수한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보기 드문 장신(長身)에다가 두드러지는 준수한 용모를 지녔는데, 소위 몸짱얼짱이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을 갈망했던 만큼 아주 흡족한 신체조건을 갖춘 뽀대나는 왕이 준비된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섭리를 통해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게 하심으로써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섭리하셨던 하나님만의 특별한 방법론이 인상 깊다.

 

인과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원인과 결과. 반드시 결과는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사울은 왕이 되기 위해 택정을 받았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될 거란 기대나 상상, 어떤 제도적인 장치, 환경 등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가 결과적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면, 원인은 대체 무엇이 되어야 할까? 정치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그를 하나님은 이끄셔야 했고, 사무엘을 이해시키셔야 했으며, 그와 만나게 해야 했다.

 

사울의 아버지는 베냐민 사람 기스였다. 그는 유력한 자라고 되어 있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암나귀들이 많이 있었는데 한날 잘 키웠던 암나귀 몇 마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방목을 했었던지 나귀떼를 치던 종들이 놓친 것 같다. 방목을 하면서 한 마리도 아닌 몇 마리의 나귀떼를 잃어버릴 정도였다면 분명 소유한 나귀무리가 적은 무리는 아니었음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상당히 많은 나귀들이 있었고, 다스리는 종들 또한 한 명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몇 명인지 몰라도 적어도 두 명 이상, 세 명? 종들이 나귀 무리를 다스렸다. 그러나 평소에는 흔히 없던 일이 생겼던 것이다.

 

어느 날 암나귀들이 잃어지고 없었다. 특히, 암나귀는 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중요했을 것이다. 나귀를 잃어버리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게 되는 건. 중요한 재산이기 때문에 특별히 종들이 나귀무리가 잃어지지 않도록 잘 관리했을 것이며, 암나귀들을 잃어버렸을 때 기스가 그의 아들 사울을 내보내 찾으라고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재산이기에 아들을 보내기도 했겠지만, 나귀를 잃어버리는 일이 흔한 것이었다면 으레 종을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일이고, 암나귀였기에 기스는 특별히 사울에게 암나귀를 찾는 일을 맡겼을 것 같다.

 

아무튼 사울은 그 사환을 데리고 암나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 상황을 조금 상상해보게 된다. 기스에게나 사울에게나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은 결코 익숙한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사건들에서는 일정부분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두 사람 다 웬일로 암나귀를 한 마리도 아니고 몇 마리씩이나 잃어버리게 됐을까?’라고 의구심을 품을 만 했다. 그러나 이 일상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사무엘을 만날 수 있도록 유도하시는 섭리이자 동인이었다고 생각해 볼 때, 이는 분명 우리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일깨워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동일한 의구심을 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일까?’란 아주 익숙한 질문 말이다.

 

사울의 일행이 에브라임과 살리사, 사알림 숩 땅 까지 두루 다녔다. 그리고 암나귀는 없었으며, 사울은 되레 그들이 집에서 너무 멀리 왔음으로 해서 아버지 기스가 오히려 암나귀보다 자기들의 행방을 더 걱정하게 될 것이란 방향으로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 그때는 갤럭시S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사울은 돌아가기로 맘 먹었다. 그러나 그때 사환이 권유했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 가까운 곳에 선지자가 있으니 만나보고라도 가자고 말이다. 사실 사울은 선지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여기서는 사환이 하나님의 역사를 도왔다.

 

한편,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에게는 직통전화로 일러두었다. 내일 이 맘 때 사울이 찾아올 것이며,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정말 재미있다. 사무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이라는 준수하고 철없는 젊은 청년이 왕으로 기름부음 받기 위해 멋 모르고 올 것을 말이다. 정작 당사자였던 사울만이 자신 앞에 펼쳐질 엄청난 사건에 대해 전혀 무지몽매했을 뿐. 사울에게는 단지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이 지금 현재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최대의 쟁점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놀라운 것이다. 우리 역시 고민으로만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

 

우리 역시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을 종잡을 수 없다. 우리가 미래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 아니면 불행히도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가정을 이루고 살며, 어떤 자녀들이 태어날지. 모든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상상불허이다.

 

또한, 우리가 겪는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그것이 어떤 계획과 섭리로부터 말미암았던 것인지 몰랐다. 결코 기스나 사울에게 있어서 암나귀를 잃어버렸다는 사건은 유쾌한 일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소 예외적이었고 생각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으며, 시간과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불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그 무모해 보이는 사건을 통해 왕의 꿈을 꿔보지도 않았던 사울로 하여금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예비적인 작업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사울은 무모해 보이는 일상의 사건으로 해서 자신을 허비한다고 느끼는 가운데 기름부음을 받기 위한 최선의 행보를 하고 있었다. , 무모해 보이는 소모가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 최선의 투자였던셈.

 

우리는 우리가 겪는 일상에 대해서 질문한다. , 왜 그런 거지?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지?’, ‘? 이건 웬일?’. 놀랍지 않은가. 바로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뤄지고 있는 순간이라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우연이라고는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그것은 필연을 위한 우연이었던 것이라고. 그렇다. 우연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 필연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적인 모든 것들은 필연을 위한 우연인 셈 인 것이다.

 

룻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가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 마침 우연처럼 보아스가 밭으로 나왔다가 룻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야 말로 분명, 필연을 위한 우연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연 같은 모든 삶의 예외적이고, 의구심을 일으키는 생소함에 대해서조차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필연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생각해볼 때, 무모해 보이는 일상의 사건과 현상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부여와 해석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암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기름부음을 받을 거라고 상상이라도 해봤겠는가. 너무 소모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손해라든지, 실패하든지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해보지 말자.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보자. 하나님의 섭리를 성취하는 최선의 투자라고 생각을 달리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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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빛 미래, 계약서 한 장_2012.04.0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8.)

 

(삼상 8:18-20, 개역) [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정의 건의했다. 그들의 명분은 분명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 같은 정신과 정직함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정직하지 못한 굽은 판결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정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고의 근거를 제공해줬다. 물론, 표면적인 명분은 그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다. 사무엘의 아들들에 대한 핑계는 잘 위장된 핑계.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의 제도에 대해 일러주었다. 왕정 아래에서는 백성들은 자기 소유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들들을 뺏겨서 왕의 수발을 들 수 있고, 추수한 소유를 드려야 하며, 짐승을 드려야 했다. 모든 소유에 대한 제반권리를 양도해야 했다. 그것은 왕의 종이 되는 것이었다.

 

(삼상 8:17, 개역)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종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의 열조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지긋지긋했다. 이제 신민(神民)이 된 그들에게 유일한 왕은 하나님. 그들은 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종의 신세를 구하고 있었다. 왕의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들에게 유익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것은 소위 노예계약이나 다를 바 없었다.

 

최근 아이돌 가수들이 소속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사례들이 있다. 노예계약이 문제였다. 무명의 춤꾼들이 유명의 스타가 되기 위해 처음에는 노예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합의했다. 기획사들은 투자한 만큼 한시라도 빨리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심한 노동을 요구한다.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다. 처음엔 스타가 되고 싶어서 노예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사인했다. 스타가 되고 싶어서. 그 이유 하나. 그러나 스타가 되고 보니 너무 고달팠다. 결국 해피엔딩이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정을 요구했다. 표면적 이유는 사무엘 아들들의 불찰. 그러나 진정한 이유 아니었다. 왕의 제도가 가져올 각종 권리와 권익의 박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길 거절하면서 맹목적으로 왕정의 필요를 말했다. 앞뒤 따질 것 없이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겠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진심을 토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 그들은 열방을 닮고 싶었다. 쉽게 말해, 세상을 닮고 싶었다. 세상의 제도를 배우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펜을 들어 노예계약에 거창하게 서명을 갈겼다. 스타가 될 보라빛 미래를 꿈꾸는 아이돌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친절하게 안내하셨다.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할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아마, 사무엘이 이 말을 전할 때 백성들은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절했다. 아무 것도 신중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눈에 돋보이는 세상의 제도와 원리, 있어 보이는 왕을 필두로 싸우러 나가는 군대. 그것이 너무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왜 그렇게 왕의 제도를 갈망했을까? 그들의 권리와 권익을 빼앗고, 학대할 수도 있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 왕을 얻고 싶었던 걸까? 바로, 부러움이다. 있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부러움, 성취감, 세상적으로 있어 보이는 것. 그것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렸다. 왕이 어떻게 그들을 학대할 것인지. 그 학대로 인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판단력을 상실해버렸다. 오직 세상처럼 되는 것, 세상을 배우는 것, 세상처럼 모양새를 갖추는 것. 그것이 필요했다.

 

세상과의 노예계약은 비단 이스라엘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노예계약에 서명을 하고 있다. 세상과 구별된 것에 대해 말하지만, 한 켠 어떤 모양이 되었든 세상을 부러워하고 있다.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세상의 행사를 따르고 싶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된다고 했던 그들처럼.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야겠다고 했던 그들처럼. 동일하게 말하곤 했다.

 

비록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것이 있어야 된다고. 해야 된다고.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필요하다고. , 어떤 면에서는 세상과 같은 모습과 모양이 되어야 된다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서 노예계약에 펜을 올렸다. 정말 우리의 판단이 선명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세상을 향한 부러움이 있었기 때문. 거짓말 다 거짓말. 양심에서 들려왔던 사무엘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거절했다고 하신 것이다. 듣고 싶지 않았었던 양심의 소리였기 때문에.

 

 

p.s

(삼상 12:19-22, 개역) [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22]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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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가자_2012.04.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7.)

 

(삼상 6:7-10, 개역)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언약궤를 강탈한 블레셋은 그 언약궤로 인해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이 다치고, 언약궤가 있는 곳마다 독종이 발해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소유한 것이 재앙이 되었음을 알게 된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재앙으로 인한 것인지 알아보기로 시험코자 했다.

 

그들은 암소 두 마리를 준비했다. 언약궤와 금독종 다섯마리, 금쥐 다섯마리를 싣고 이스라엘 지경인 벧세메스로 실어갈 암소였다. 특별히 이 암소 두 마리는 젖 나는 암소들로서 새끼를 먹이는 어미 암소들이었다. 그들은 이 어미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수레를 지고 벧세메스로 향하게 하되 그 새끼들을 떼버림으로써 과연 이 암소들이 새끼를 버리고 벧세메스로 향할 것인지 여부를 통해 시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암소에게 수레를 메여 보냈을 때 그 암소들은 울면서 벧세메스로 곧 바로 나아갔다.

 

(삼상 6:11-12)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암소들은 새끼들을 떼어버리고 나아감으로써 울었다. 모성본능. 암소들이 울면서도 나아간 이유가 있었다. 언약궤를 강탈해 소유한 블레셋이 겪은 재앙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재앙임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증거하셨다. 그리고 그 짐승들도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모성적 본능을 울면서까지 제어하고 순종했다.

 

그리스도인도 울면서 가야 할 때가 있고, 그 길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본성이나 인정을 포기하면서 까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순종해야 할 시기와 의무가 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부모님을 두었기에 갈등이 있고, 그래서 부모님이라는 정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미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전도할 수 있음을 알기에 갈등도 마다하지 않을 때 그것은 마치 울면서 벧세메스로 가는 모습과 같을 것이다.

 

울면서 가야된다는 것은 고난이기도 하다. 많은 고난의 길을 우리는 울면서 간다. 편한 길이 있지만 신앙을 포기할 수 없기에, 세상과 타협할 수 없기에 융통성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곧이 곧대로 울면서 벧세메스로 향해 간다.

 

삶의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고민한다.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보다 안정된 것이 무엇인지. 할 수만 있으면 갈등을 적게 겪고,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쉼이라든지 안식이란 단어에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마치 새끼를 떼버리고 벧세메스로 울면서 가야하는 암소들처럼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에게 우리의 의지에 대해 포기하라고 요구하신다. 곁길로 가고 싶은 욕망, 새끼들에게 뛰어가고 싶은 욕망을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저기에 우리의 새끼들이 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존재, 우리를 만족시키는 그 어떤 이기적인 소망들. 나의 꿈, 나의 비전, 나의 계획, 자아. 그 모든 새끼들이 내 마음을 애타게 한다.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미련을 품게 한다. 내 눈을 곁눈질 하게 하고, 때때로 당장이라도 돌이켜 되돌아가게 하고픈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그래서는 안 되기에 벧세메스로 발걸음을 옮기되 울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만 한다. 아무리 울찌라도 그 발걸음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명을 지켜내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신앙에 대한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온다. 때로는 신앙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회의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한없는 자기 무존재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기의 신앙적인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겪기도 한다. 많은 어려움들이 방해를 더 한다. 그때일지라도 그 발걸음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그렇지 못할 때가 있었다. 결국 놓았고, 포기해버렸던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직장의 분주함. 시간과 여유의 턱없는 부족. 그 가운데서 끊임 없이 되묻는 자기성찰들.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 던져보기도 하고, 나의 잘못과 실수들을 반성해보기도 한다. 지금은 많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주춤거리는 것 같지만 잠시 머물면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고, 지금 선 곳이 어딘지 살펴보며,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물어보는 시간. 벧세메스의 암소들처럼 꿋꿋이 가야 할 것이거늘.

 

그리고 회사의 팀장님을 생각해본다. 상무님의 학대를 당하시는 분. 어떤 이유가 되었든 , , 돼지새끼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호로 새끼란 수모도 당하면서 그 자리에 있는 분이시다. 상무님을 볼 때는 율법을 깨닫는다.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완벽에 대해 말하시는 분. 하나라도 틀리면 바보가 되는 분. 그리고 팀장님을 볼 때면 벧세메스 암소가 생각난다. 울면서 꿋굿이 그 길을 가시는 분. 더불어 고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저렇게 고난을 당하면서 인내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나는 고난을 얼마나 견뎌내지 못했었는지. 고난을 인내하는 것.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과 교훈을 주곤 한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은 울면서 그 길을 곧장 나아갔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의 본성과 욕망, 자기의 이상과 소망을 포기하면서 까지 꿋꿋이 나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그 모든 것이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도 벧세메스로 가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울어야만 한다. 울지 않고 갈수 있다면 그건 고난의 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다. 자기를 쫓는 길은 울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다. 자기를 버리고, 자아를 포기해서 가야 하는 길이 하나님의 길이다. 울면서 가자. 벧세메스로 향하는 발의 걸음을 돌이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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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최상단의 원형부는 오랜 세월 가운데 파손된 것이 아니라, 처음 축조 당시 파손되었다고 한다.그러나 도무지 재분리해서 다시 수정할 수 없었기에 그냥 둘 수 밖에 없었다.)

 

 

 

 

터치고 뿜어지다_2012.03.2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6.)

 

 

석굴암은 통일신라 751년에 김대성이란 인물을 통해 창건되었다. 무려 1200년이 훌쩍 지난 유구의 세월을 간직한 문화재이자 세계문화유산이다. 몇 해 전, 모처럼 찾은 석굴암에 들어가 부처상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눈매, 콧등, 입술, 가부좌를 튼 다리, , 옷자락. 그리고 그 불상을 둘러싼 12지상들. 1200년의 세월 속에 분명 처음의 그 섬세함과 날카로운 묘사는 무뎌졌지만 그래도 세월을 무색케 하는 불상의 정교함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5분이 안 되는 시간 불상을 쳐다보고 지나칠 때, 나는 혼자 20분이 넘게 뚫어져라 그 불상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있었다.


저 엄청난 돌덩어리를 이 높은 곳에서 다듬고 다듬었다니


1200년 전, 김대성과 그의 석공들은 장구를 꾸려 이곳에 올라왔다. 아무 것도 가꾸어진 적 없는 이곳에서 울창한 나무들을 쳐내고, 터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장작을 패서 불을 떼우고, 먹을 것도 실어 날랐다. 그리고 토굴을 파서 그곳에 저 단단한 화강암을 깍아서 그들이 갈망하는 신을 모신 것이다. 그 섬세한 석굴과 덩치 큰 불상이 무려 1200년의 세월이 무색하도록 견고히 앉아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김대성과 석공들의 열망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단시간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김대성은 그의 생전에 석굴암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분명, 그들은 토함산의 그 높은 곳에서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을 보내면서 매일 일정한 작업시간을 거쳐 그의 신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무겁고 단단한 화강암을 정을 때리고 쪼을 때 전해졌을 강한 진동이 손목을 저리도록 전해져왔다. 그 돌깨는 소리와 다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겨울이 다가올 때는 산의 그 무서운 추위와 냉기, 눈발이 날려서 때로는 작업을 충분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와 바람. 여름의 잔인한 열기가 그들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랜 시간을 그 간절한 염원과 기도, 신앙의 숭고한 정신 속에서 부처상을 다듬고 만들었다.


내가 조롱해 온 한낱 돌덩어리 우상 하나가 나를 심오한 사색 안으로 이끌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너무나 많은 수고가 들어갔을 석굴, 너무나 무거워 보이는 불상. 이 높은 산에서 그 오랜 계절과 수난과 의식주의 불편, 짐승들의 위협 그 모든 것을 무릎 쓰고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불타오르는 신앙심과 종교적 열망을 따라 그 모든 것을 표출하고 표현해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1200년이란 장구의 세월이 흘러 지금 내 앞에도 견고하게에 버티고 있었다.


인간의 가슴속에 담긴 종교적 감수성과 그 뜨거운 열망. 한낱 우상을 섬기면서도 표출되는 그 놀라운 신앙심의 발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을 향한 갈망과 염원은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 그것은 그렇게 이 높은 산에서 저 거대한 석굴을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종교적 갈망은 그렇게 위대한 희생과 숭고한 갈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상상 해보았다. 석굴이 완성되고 그들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 어느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새벽이었을 것이다. 산 속의 야생짐승들이 울부짖고, 멀리서 희미하게 동트일 준비를 하면서 승려의 제복을 입은 그들은 비를 맞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석굴 앞으로 다가와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순결하고 뜨거웠던 걸까.


그리고 그곳에 선 우상의 전각지기 앞의 부끄러운 그리스도인 나를 바라봤다. 도대체 나에게 어떤 신앙심과 종교적 감수성이 있는 걸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 표출해내고 있는 걸까? 신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그토록 간절하고 뜨거울 수 있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내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왜 내겐 그것이 없을까? 그렇게 나는 쓸쓸하게 돌아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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