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빛 미래, 계약서
한 장_2012.04.0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8.)
(삼상 8:18-20, 개역) 『[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정의 건의했다. 그들의 명분은 분명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과 같은 정신과 정직함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정직하지 못한 굽은 판결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정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고의 근거를 제공해줬다. 물론, 표면적인 명분은 그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다. 사무엘의 아들들에
대한 핑계는 잘 위장된 핑계.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왕의 제도에 대해 일러주었다. 왕정 아래에서는 백성들은 자기 소유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들들을 뺏겨서 왕의 수발을 들 수 있고, 추수한
소유를 드려야 하며, 짐승을 드려야 했다. 모든 소유에 대한
제반권리를 양도해야 했다. 그것은 왕의 종이 되는 것이었다.
(삼상 8:17, 개역)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종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의 열조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지긋지긋했다. 이제 신민(神民)이 된 그들에게 유일한 왕은 하나님. 그들은 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종의 신세를 구하고 있었다. 왕의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들에게 유익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것은 소위 노예계약이나 다를 바 없었다.
최근 아이돌
가수들이 소속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사례들이 있다. 노예계약이 문제였다. 무명의 춤꾼들이 유명의 스타가 되기 위해 처음에는 노예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합의했다. 기획사들은 투자한 만큼 한시라도 빨리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심한 노동을 요구한다.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다. 처음엔 스타가 되고 싶어서 노예계약도 마다하지
않고 사인했다. 스타가 되고 싶어서. 그 이유 하나. 그러나 스타가 되고 보니 너무 고달팠다. 결국 해피엔딩이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정을 요구했다. 표면적 이유는 사무엘 아들들의 불찰. 그러나
진정한 이유 아니었다. 왕의 제도가 가져올 각종 권리와 권익의 박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길 거절하면서 맹목적으로 왕정의 필요를 말했다. 앞뒤 따질 것 없이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겠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진심을 토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즉, 그들은 열방을 닮고 싶었다. 쉽게 말해, 세상을 닮고 싶었다. 세상의 제도를 배우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펜을 들어 노예계약에 거창하게 서명을 갈겼다. 스타가
될 보라빛 미래를 꿈꾸는 아이돌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도 친절하게 안내하셨다.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할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아마, 사무엘이 이 말을 전할 때 백성들은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거절했다. 아무 것도 신중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눈에 돋보이는 세상의 제도와 원리, 있어
보이는 왕을 필두로 싸우러 나가는 군대. 그것이 너무 부러웠던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왜 그렇게 왕의 제도를 갈망했을까? 그들의 권리와 권익을
빼앗고, 학대할 수도 있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 왕을 얻고 싶었던 걸까? 바로, 부러움이다. 있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부러움, 성취감, 세상적으로 있어 보이는 것. 그것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다.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렸다. 왕이 어떻게 그들을 학대할 것인지. 그 학대로 인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판단력을 상실해버렸다. 오직 세상처럼 되는 것, 세상을 배우는 것, 세상처럼 모양새를 갖추는 것. 그것이 필요했다.
세상과의
노예계약은 비단 이스라엘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노예계약에 서명을 하고 있다. 세상과 구별된 것에 대해 말하지만, 한 켠 어떤 모양이 되었든 세상을
부러워하고 있다.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세상의 행사를 따르고 싶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된다고 했던 그들처럼.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야겠다고 했던 그들처럼. 동일하게 말하곤 했다.
비록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것이 있어야 된다고. 해야 된다고.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필요하다고. 즉, 어떤
면에서는 세상과 같은 모습과 모양이 되어야 된다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마음에서 노예계약에 펜을 올렸다. 정말 우리의 판단이 선명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세상을 향한 부러움이 있었기 때문. 거짓말
다 거짓말. 양심에서 들려왔던 사무엘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거절했다고 하신 것이다. 듣고 싶지 않았었던 양심의 소리였기 때문에.
p.s
(삼상 12:19-22, 개역) 『[19]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22]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