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_2012.04.1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5.)

 

(삼상 20:37, 개역)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가로되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분명 고난이다. 가끔 나는 현재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지나온 발걸음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눈물의 흔적들을 떠올릴 때 깊은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왜 그렇게 많은 흔적들이 있는지. 둘러서 가야 했고, 치여서 가야 했던 것들이 많았다. 내가 가장 많이 힘들어했던 것은 왜 나는 무난하지 못할까?’ 그런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별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질문이 가장 피곤한 질문이란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원망한적도 있었지만 모짐과 교만함을 벗지 못해서이다.

 

사울이 수 차례에 걸쳐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다. 점점 사태가 심각해져 가자 요나단은 다윗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정말 사울이 다윗을 죽일 의도가 있는지 시험해보고 정녕 그러하다면 활을 쏘아서 암시해주겠노라고 말이다. 만약에 활을 쏘아서 수종 드는 소년에게 가지고 오라고 하면 다윗 너도 올 것이고. 오히려 네 앞편에 활이 있어서 나아가야 한다면 너 역시 네 길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 에셀 바위 곁에 다윗은 숨어 있었다. 그리고 슬픔에 가득 찬 요나단은 힘껏 활시위를 당겨 멀리 저 멀리 아이의 머문 자리를 훌쩍 넘겨 활을 쏘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자 저기 보라. 화살이 네 앞편에 떨어졌도다. 어서 가서 주워오라!’

 

그렇게 요나단은 외치고 눈물을 훔쳐 흐느꼈다. 다윗도 울었다. ‘그렇구나! 정녕 사울왕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가야만 하는구나!’

 

이때부터 다윗은 그의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한 대적 사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험난한 고난의 여정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분명한 정체성은 아마도 고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성경 속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들마다 험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는 것을. 보라. 다윗과 모세, 아브라함과 요셉.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 누구 하나 고난에 치를 떨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왔다. 그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종노릇하던 삶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 보라빛 미래를 꿈꾸며 홍해를 건넜던 그들. 그러나 그들이 만난 것은 젖과 꿀의 가나안이 아니라 메마른 광야였다. 그렇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삶의 축복이 아니었다. 우리는 반드시 광야를 지나야만 했다. 그러므로 광야를 만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서글픈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는 웃을 수는 있을 것이다. 마냥 행복해하지 마시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신앙생활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광야는 비롯된다. 우리는 요나단의 외침을 동일하게 들어야 될 것이다.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이제 영광을 얻으며 왕궁에 거하던 그 사치와 호화로움과 연락하는 기쁨이 문을 닫는다. 고난의 길을 떠나야 할 그 시간이 왔다.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를 그 막막함을 벗삼아 그저 가야 한다. 피하지 말고 가야 한다.

 

다윗이 가장 먼저 떠났던 곳이 블레셋 지경의 가드였다. 사울의 영향력일 벗어나가 위한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곳에서 생명의 직접적인 위협을 만났다.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이다.

 

아니, 저 자는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할 때 그 다윗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생명의 위험을 느낀 다윗은 추태를 부려야 했다. 침을 흘려 수염에 침 범벅이 되면서 미치광이 흉내를 냈다. 천지 다윗의 모습 좀 구경해보자. 그리고 다윗은 도망쳐 모압 왕에게로 갔다. 그리고 선지자 갓을 만났다. 다윗이 들은 대답은 단 하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안타깝게도 화살은 쏘아졌다. 나를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채 말이다. 고난의 길을 시작해야 할 때 우리는 그만큼 소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직 고난을 통과할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안전을 위해 적은 고난을 위해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이방의 땅으로 갔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수와 추태를 벌이는 자신을 보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기 들을 대답은 유일하다. 사울왕이 칼을 들고 서 있는 그 유대로 들어가는 것. , 고난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을 때 그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때야 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건이 온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사실 그건 한 번이 아니었다. 14년이라는 신앙의 세월이 오면서 몇 번이나 그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진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흐느꼈다.

 

, 그 외로움이라니! 정말 힘들어. 이젠 정말 지친다구. 지겹다구.’

 

그렇게 말했었다. 할 수 있다면 고난을 적게 받아보려고 가드왕을 찾아갔다. 그래서 나 역시 추태를 부렸다. 모압왕에게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 ‘유대로 되돌아가렴!’ 고난 받을 때, 고난 받는 그 땅에서 너무나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맴돌았다. 그러나 결국 유대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고난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곤 한다. 나 역시 그러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다. 소심하게는 교회를 옮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답은 유일했다. 도망치고 싶을 때, 신앙을 포기해버리고 싶을 바로 그 때, 머물러야 된다는 것.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노라고 울부짖을 그때부터가 참기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제 내 뒷편이 아닌 나의 앞편에 쏘여진 화살을 다시금 바라보자. ‘화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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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성령과 소유_2012.04.1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4.)

 

(삼상 16:13-14, 개역) [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다윗은 성령을 소유했고, 사울은 성령을 잃어버렸다. 익숙한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3위이시다. 마땅히 성령님 역시 하나님이시다. 은혜의 시기 아직은 성령님께서 이 땅위에서 사역하신다. 구약의 하나님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육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이제 성령님께서 이 땅에 사역하신다. , 하나님은 여전히 성령님의 모습으로 동서고금 현재 이곳에서도 일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없듯이 성령께서도 그렇게 사역하신다고. 성령님은 자유롭다. 또한, 굉장히 다양한 방법과 특별하고 예기치 않은 섭리 안에서 영혼을 인도하신다. 우리 가운데 행하신다. 우리는 어떤 모양이든지 단정지어 가둘 수 없다. 위대하신 성령님.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그는 40년을 통치했다. 그러나 오늘 성령님은 사울을 떠나셨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권과 왕좌의 사람에게서 떠나셨다. 그렇다고 해서 사울이 바로 왕좌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울 여전히 육신의 왕이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지는 않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방랑자의 신세로 비참한 몰골로 도망다녀야 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성령님께서 어디로 이동하셨는지 보게 된다. 마땅히 왕에게 있어야 할 성령님께서 도망자 다윗에게로 옮기셨다.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같았지만 그러했다. 그렇다. 성령님은 왕이든 목동이든 그런 육신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님은 자신의 위대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권위에 귀속되어 운행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 성령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떠나실 수도 있다. 그가 지옥을 간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떠나실 수는 있다. 그 역사하심과 권세와 능력과 신성이 떠난다.

 

시험에 든 그리스도인들. 거짓 교리와 이단에 미혹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성령께서 그들을 떠나신다. 왕보다도 목동이 될 수 있었다. 왕 같은 제사장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성령은 떠나실 수 있다. 내가 비록 목동처럼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성령께서 머문다면 그의 정체성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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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반응하다_2012.04.1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3.)

 

본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떻게 시선처리를 하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삼상 17:24, 개역)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삼상 17:42, 개역)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골리앗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심한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3m짜리 골리앗 형을 봤기 때문.

 

한편,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고 업신여겼다. 왜냐하면 그가 이쁘장한 땅꼬마 다윗이 싸우러 나온 것을 봤기 때문.

 

See. 본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수단이며, 정보를 분석하기 위한 뛰어난 방법이다. 또한, 보는 것을 통한 정보의 취득과 분석은 특별히 사람의 심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이스라엘 군대나 골리앗이나 모두 보았다. 그것이 그들의 심리를 결정지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보는 것을 통한 정보의 취득이 정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심리적인 요인이 반드시 결과적인 요인인 것은 아니었다.

 

보는 것을 통해 얻었던 결론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 믿음의 증명을 보는 것으로부터 찾으시는지 모르겠다. 보는 것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보편적인 습관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믿음의 눈을 말씀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진영에서나 골리앗에게서나 보편의 절차를 따라 심리적인 결과와 반응의 결과에 이르는 것을 본다. 매우 친근한 현상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역시 달랐다.

 

(삼상 17:45, 개역)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은 골리앗을 보자 놀라 자빠진 것이 아니었다. 분노하기 시작했다.

어쭈 저것 봐라. 3m짜리 인간도 아니고, 무슨 괴물 같은 놈이 하나님의 사시는 군대를 모독해? ? 감히, 뭐 저런 게 다 있어? 이 자식 오늘 잘 걸렸어. 내가 너 가만 안 두겠어!!!’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 앞에서 꼬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다윗은 엄청나게 키 크고 힘 세 보이는 골리앗을 못 본게 아니었다. 정정당당하게 보았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심장은 믿음의 눈을 열어주었고, 전혀 그러한 외적인 공포가 문제 되질 않았다.

 

누가 환경을 바라볼 때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이다. 또는 성령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이다. 다윗은 감동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었다. 믿음의 눈을 감고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든지, 믿음의 눈을 뜨고 환경을 우리가 물맷돌로 때려 눕히든지 둘 중 하나였다. 세상 속에서 옹졸한 그리스도인, 세상 앞에서 새 가슴이 되어버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많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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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진 말씀_2012.04.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2.)

 

(삼상 15:23, 개역)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사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울은 일찌감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 같다. 다윗 역시 큰 죄를 범했는데도 긍휼로 다가오셨으면서 말이다. 차별?

 

말씀은 우리 삶의 표준이다. 우리 삶의 이정표이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길로 인도해준다. 말씀은 그래서 우리의 양식이다. 우리의 힘과 능력의 샘터다. 사울에게 하나님은 왜 그토록 멀었던 걸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동시에 말씀의 사람이었다. 시편1편에서 이미 다윗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얘기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그가 다윗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성령 밖에서 행하는 사람이었다. 그 차이로부터 사울이 왜 하나님의 긍휼에서 먼 사람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군대를 진멸하라고 하셨다.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말렉을 정복하고, 그 왕 아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논쟁은 여기서부터 불거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노라고 주장하는 사울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무엘과의 공방전을 보게 된다.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하나님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다.그러나 사울은 아각을 살려두고, 좋은 짐승들을 제사 드린다는 명목으로 살려두었다. 그런 결정은 사울에게 괜찮은 결정이었다. 사무엘을 만났을 때 사울이 말했다. ‘보십시오.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하하하(방긋)’ 그러나 안타깝게 짐승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각왕이 살아 있었다. 사무엘은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뭐야? 다 살려놓고 준행했다니?’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사울이란 사람이 어째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없었는지 분명히 알게 된다. 만약에 사울이 진멸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사무엘을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렵게 생각했다면 그는 긍휼을 입을 자격이 있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엄청난 사실이다. 사울에게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다라는 의미와 기준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기에 떳떳하고 당당했다는 것이다. , 사울은 전혀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조금도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자기 편에서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뤄진 순종이 아니었다. 철저히 자기의 관점과 자기 논리 안에서 완전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언제든지 자기 주관과 자기 논리대로 행동해 놓고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 제사드릴 명목으로 살려 둔 것이니 그건 불순종의 사유가 되지 않으며, 전혀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이러한 사울의 논리와 사고의 관점을 생각해볼 때, 심하게 놀라게 된다. 사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것이다. 사무엘의 말처럼 사울은 말씀을 던져버린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던져 버렸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불어 그로 인해 그 역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버린 죄인의 후손들이다. 그대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말씀을 버린 그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이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나단의 지적에 한 마디 변명할 것도 없이 꼬꾸라져 울부짖었던 사람이다. 말씀이 그에게는 버려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긍휼은 그런 자에게 있다.

 

교회 안에 사울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꽤 있다. 놀라지 말라. 사실이다. 그리고 또 놀라자. 그럴 수가!

 물론, 말씀은 그렇긴 한데…’ 얼마나 익숙한 표현인가. 그리고 무엇인가. 자기의 생각과 주관대로 자기의 논리와 가치관대로 해석하고 말씀을 배척한다. 본질의 하나님 말씀을 버린다. 그리고 무서운 사실은 때로는 그것이 나의 논리이기도 했다. 나는 고백한다. 슬프게도 나 역시 사울 일 때가 있다. 다시 말해, 나 역시 하나님의 버리시는 경계선에 넘나들었다. 내가 영원히 안전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내가 사울처럼 될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를 심하게 두렵게 한다. 나도 사울이라니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사울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생각해보자. 그는 가책이나 거리낌이 없었다. 마음이 자유로웠다. 나아온 사무엘을 즐거이 맞으러 나가면서 소리쳤다. ‘보십시오. 제가 다 행했습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대로지요. 껄껄껄하나님 말씀을 버린 자의 여유와 자유로움. 눈 뜬 봉사. 그리고 그는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 버린 자의 교만과 독선. 자기 주관대로 지켜놓고 하나님 주관대로 지켰다는 외식과 거짓. 속임과 자기기만. 그렇다. 하나님 말씀을 버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인다. 자기 기만에 빠져 자기의 추악을 보지 못한다. 슬픔! 하나님의 제사를 위함이라는 보기 좋은 명목이 모든 거짓과 변명을 대신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훼손시킨 죄. 나 역시 그렇게 합리화 시켰다. 사실은 이기적인 결정이었고, 사실은 육신적인 선택이었고,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면서 몇 가지 하나님과 연결 시킬 수 있는 빌미를 찾아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속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독했다. 나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미화시켰다. 나의 거짓과 위선을 하나님을 위한 선행으로 포장했다. 책망 받는 사울이 백성들 때문이었다고 핑계했다. 자기 죄와 책임을 최소화 시키고자 하며, 회피했다. 내 죄에 대해 두둔하기 위해 사람과 환경을 이유 삼았다. 그 모든 사울의 거짓과 구차한 변명 뒤에 사무엘이 일러 주었다.

 

(삼상 15:22, 개역)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마음이 아프다. 결국 그 모든 변명과 합리화와 속임과 미화를 반복했을지라도 들을 수 있는 답변은 오직 이것 뿐이거늘.

 

제사를 위한답시고 진멸 안 하셨다구요? 하나님께 올릴 제사를 위한 것이라구요? , 그래요? 근데, 저기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거든요. 순종은 그냥 단순한 거예요. 뭐 갖다 붙이지 마세요. 멋들어지게 제사 안 지내도 되니까. 그냥 진멸하라면 그냥 진멸하면 되는 거예요. , 말이 많아요? 그게요. 지금 그런 행동방식과 변명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거예요. 두려워하세요! 지금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됐다구요. 이제 하나님이 당신을 버릴 차례예요. 이 악한 사람!’

 

죄송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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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조급,경솔_2012.04.0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1.)

 

사울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신앙의 실패자였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울에게서 부터 신앙적인 미덕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오직 기름부음을 받을 그 초창기 몇 장에서 밖이다. 실제적인 대관식이 있은 이후 그의 행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책과 끝없는 추락이었다. 사울을 살펴보면 좀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허술함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점투성이였다.

 

사울의 행보 속에서 우리는 그의 인격적인 부분들 중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결함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것들 중에는 평생을 다윗을 투기함으로써 죽이기 위해 평생을 소모하는 무모함과 지나친 투기심도 해당된다. 또한, 사울의 철저한 성급함과 조급함, 경솔한 성품이 그것이다.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고 공식적인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후 기록된 첫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그의 성급하고 조급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그의 미래를 구부러뜨리고 말았다. 3대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가지 이레를 기다려야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너무 정확히 이레에 맞춰 왔던 사무엘 덕분에 사울은 시험에 빠져버렸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하다고 느껴졌던 사울은 이레가 찬 마지막 날 사무엘의 코빼기가 보이지 않자 심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지막 이레까지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 사무엘이 당도하기까지는 기다리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오직 제사장만 드리는 제물을 번제로 드려버렸다. 그럼으로써 그의 나라는 영영히 서지 못하게 되었다.

 

(삼상 13:12-13, 개역)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사무엘의 책망은 조금도 긍휼이 섞이지 않았다. 냉혹히 단정했다. 부득이고 뭐고 핑계 댈 것 없이 망령되이 행했노라고 단죄했다. 절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확언했다. 그의 나라가 서지 못할 것임을 결론 지어버렸다. 사울은 유독 심리적으로 매우 쫓기는 사람이었다. 흔히 빨리빨리에 가까운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 사울은 성품적으로 굉장히 성급하고, 조급한 성격으로 매사에 있어서 지나치게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해버림으로써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자신을 궁지에 빠트렸으며 더불어 스스로를 시험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바로 사울의 이러한 인격적인 단점이 현대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결함이란 것.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되어 가기에 도태되면 버려질 정도가 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조차 빨리라는 것은 습관적이 되어야 할 정도이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배우고 훈련 되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이 잠잠히 기다려야 된다라는 본연의 의무를 충분히 배우지 못하게 된다. 배우기에 앞서 너무 조급하게 굴게 된다.

 

(삼상 14:24, 개역)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사울의 성급하고 조급한 성품은 결과적으로 그의 판단과 언행에 있어서 경솔함을 야기시켰다. 블레셋과의 전투가 치열해질 때 사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아무 식물도 먹지 말고 전쟁에 올인 하라고 하면서 금식령을 선포했다. 지금보다도 더 과거의 전장에서는 체력전의 양상이 두드러졌다. 칼과 창으로 맞부딪혀야 했다. 그런 병사들에게 금식령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지휘관의 올바른 판단이었을까? 천만의 말씀. 배고픈 병사들이 힘을 다해서 싸울 수 없었음은 당연지사. , 사울은 전쟁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명목 하 어리석은 금식령을 선포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사울의 가진 경솔함의 단면이었으며 동시에 이러한 그의 어리석은 결정은 그의 신중하지 못한 성급함과 조급한 성향에서 비롯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차분히 신중히 충분히 고려해서 이 전쟁에서 지휘관으로서 어떤 결정을 내려 주는 것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것인지 숙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매우 즉흥적이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모든 병사들을 대신해 금식령을 내려버림으로써 모든 병사들로 하여금 올무에 걸리게 만들었다. 배가 고프고 지친 병사들은 결국 블레셋을 완전히 소탕할 수 없었고. 남은 블레셋 군대를 놓침으로써 훗날 블레셋 군대가 재기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요나단과 그의 일행이 블레셋 군대를 격파하고 수플에 들어갔을 때 꿀을 본 요나단이 그것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사울의 금식령을 들은 다른 병사들은 군침만 흘릴 뿐. 요나단은 사울의 금식령을 못 들었기에 먹을 수 있었노라고 했다. 여하튼.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심한 탈진과 탈수 상태에 이르게 된 병사들은 탈취한 짐승들을 그 피 있는 채 먹고, 소와 송아지를 아울러 취하였다.

 

, 지나치게 허기진 그들은 금식령도 잊어버린 채 미친 듯이 먹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피 있는 채로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게 되었다. 또한,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취하지 말라는 율법도 어기게 되었다.(22:28) 이 모든 것이 사울의 경솔한 판단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든 병사들의 비참한 퇴보였다.

 

(삼상 14:39, 개역)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병사들이 금식령을 어기고 먹었을 뿐만 아니라 피 채 먹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들렸다. 그러자 사울은 진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심판하겠노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누구든지 이 죄가 드러나면 죽일 것이되 자기 아들 요나단이라도 죽이겠노라고 했다. 실제로 요나단은 금식령을 어겼다. 그것도 제일 먼저. 그러나 최종 요나단이 죽었을까? 아니다. 백성들이 블레셋 군대를 이기도록 하나님이 쓰신 요나단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요나단을 죽음에서 면케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엇인가. 사울은 금식령을 어긴 자는 아들 요나단 일찌라도 죽이겠노라고 호언장담하며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결국 그 큰소리도 허공에 울리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속된 말로 쪽 팔린다.

 

, 사울은 성급,조급,경솔함의 대명사였다. 그는 신중하고 숙려해서 비중 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급하고 성급한 그의 기질적인 부족은 종종 그의 행동에 있어서 기다림을 걷어 차버리고 경솔히 행동하게 했으며, 동시에 경솔하게 말을 내뱉곤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황에 맞지 않는 금식령을 선포해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또한, 병사들이 피 채 짐승을 먹는 시험에 들게 하였으며, 더불어 요나단을 죽이겠다는 경솔한 호언장담을 내뱉었다가 실천하지 못하는 수치를 자초했다. 왕으로서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신중하고 무게 있는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을 그였지만 그의 인격적인 부족은 결국 오점을 남기는 것들 것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울의 이러한 인격적인 부족과 경솔함을 생각해볼 때, 과연 오늘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비중 있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떤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그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좀 기다리면서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말해야 했어야 했을 때, 쉽게 단정해버림으로써 경솔하게 결정하고 말해 버리곤 했다. 스타트 총성이 울리기 전에 뛰쳐 나가려 했다가 부정출발에 대한 경고의 휘슬을 들어야 했다. 성급함과 조급함, 그리고 경솔함은 친구이다. 그것들은 함께 동고동락하는 형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진득함과 기다림이다. 하나님께 묻고 답변을 충분히 기다리는 인내와 느긋함이다. 그것은 나태하거나 무관심하란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비중 있게 사물과 현상을 살펴보고 결정하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가 성령 안에서 다스림을 받지 않고 성령께 의탁하지 않을 때 우리는 육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기질을 따라 성급하고 조급하게 행동해버리고 만다. 그것은 죄인의 본성이다. 원래 우리는 잠잠하고 진득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즉흥적이고, 너무 자기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다스림이 필요하다. 성령께 의탁하자.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생각하자. 항상 하나님을 앞에 두고 반 템포 느리게 가자. 때로는 한 템포를 늦춰도 보자. 오직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분별되어질 때 충분히 부족함 없이 신속하게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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