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진 말씀_2012.04.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2.)

 

(삼상 15:23, 개역)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사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울은 일찌감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 같다. 다윗 역시 큰 죄를 범했는데도 긍휼로 다가오셨으면서 말이다. 차별?

 

말씀은 우리 삶의 표준이다. 우리 삶의 이정표이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길로 인도해준다. 말씀은 그래서 우리의 양식이다. 우리의 힘과 능력의 샘터다. 사울에게 하나님은 왜 그토록 멀었던 걸까.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동시에 말씀의 사람이었다. 시편1편에서 이미 다윗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얘기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그가 다윗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성령 밖에서 행하는 사람이었다. 그 차이로부터 사울이 왜 하나님의 긍휼에서 먼 사람이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군대를 진멸하라고 하셨다.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말렉을 정복하고, 그 왕 아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논쟁은 여기서부터 불거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노라고 주장하는 사울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무엘과의 공방전을 보게 된다.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하나님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다.그러나 사울은 아각을 살려두고, 좋은 짐승들을 제사 드린다는 명목으로 살려두었다. 그런 결정은 사울에게 괜찮은 결정이었다. 사무엘을 만났을 때 사울이 말했다. ‘보십시오.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하하하(방긋)’ 그러나 안타깝게 짐승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각왕이 살아 있었다. 사무엘은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뭐야? 다 살려놓고 준행했다니?’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사울이란 사람이 어째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없었는지 분명히 알게 된다. 만약에 사울이 진멸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사무엘을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렵게 생각했다면 그는 긍휼을 입을 자격이 있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엄청난 사실이다. 사울에게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다라는 의미와 기준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기에 떳떳하고 당당했다는 것이다. , 사울은 전혀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조금도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자기 편에서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뤄진 순종이 아니었다. 철저히 자기의 관점과 자기 논리 안에서 완전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언제든지 자기 주관과 자기 논리대로 행동해 놓고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 제사드릴 명목으로 살려 둔 것이니 그건 불순종의 사유가 되지 않으며, 전혀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이러한 사울의 논리와 사고의 관점을 생각해볼 때, 심하게 놀라게 된다. 사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것이다. 사무엘의 말처럼 사울은 말씀을 던져버린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던져 버렸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불어 그로 인해 그 역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버린 죄인의 후손들이다. 그대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말씀을 버린 그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이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나단의 지적에 한 마디 변명할 것도 없이 꼬꾸라져 울부짖었던 사람이다. 말씀이 그에게는 버려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긍휼은 그런 자에게 있다.

 

교회 안에 사울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꽤 있다. 놀라지 말라. 사실이다. 그리고 또 놀라자. 그럴 수가!

 물론, 말씀은 그렇긴 한데…’ 얼마나 익숙한 표현인가. 그리고 무엇인가. 자기의 생각과 주관대로 자기의 논리와 가치관대로 해석하고 말씀을 배척한다. 본질의 하나님 말씀을 버린다. 그리고 무서운 사실은 때로는 그것이 나의 논리이기도 했다. 나는 고백한다. 슬프게도 나 역시 사울 일 때가 있다. 다시 말해, 나 역시 하나님의 버리시는 경계선에 넘나들었다. 내가 영원히 안전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내가 사울처럼 될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를 심하게 두렵게 한다. 나도 사울이라니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던 사울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생각해보자. 그는 가책이나 거리낌이 없었다. 마음이 자유로웠다. 나아온 사무엘을 즐거이 맞으러 나가면서 소리쳤다. ‘보십시오. 제가 다 행했습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대로지요. 껄껄껄하나님 말씀을 버린 자의 여유와 자유로움. 눈 뜬 봉사. 그리고 그는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의 말씀 버린 자의 교만과 독선. 자기 주관대로 지켜놓고 하나님 주관대로 지켰다는 외식과 거짓. 속임과 자기기만. 그렇다. 하나님 말씀을 버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인다. 자기 기만에 빠져 자기의 추악을 보지 못한다. 슬픔! 하나님의 제사를 위함이라는 보기 좋은 명목이 모든 거짓과 변명을 대신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훼손시킨 죄. 나 역시 그렇게 합리화 시켰다. 사실은 이기적인 결정이었고, 사실은 육신적인 선택이었고,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면서 몇 가지 하나님과 연결 시킬 수 있는 빌미를 찾아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속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독했다. 나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미화시켰다. 나의 거짓과 위선을 하나님을 위한 선행으로 포장했다. 책망 받는 사울이 백성들 때문이었다고 핑계했다. 자기 죄와 책임을 최소화 시키고자 하며, 회피했다. 내 죄에 대해 두둔하기 위해 사람과 환경을 이유 삼았다. 그 모든 사울의 거짓과 구차한 변명 뒤에 사무엘이 일러 주었다.

 

(삼상 15:22, 개역)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마음이 아프다. 결국 그 모든 변명과 합리화와 속임과 미화를 반복했을지라도 들을 수 있는 답변은 오직 이것 뿐이거늘.

 

제사를 위한답시고 진멸 안 하셨다구요? 하나님께 올릴 제사를 위한 것이라구요? , 그래요? 근데, 저기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거든요. 순종은 그냥 단순한 거예요. 뭐 갖다 붙이지 마세요. 멋들어지게 제사 안 지내도 되니까. 그냥 진멸하라면 그냥 진멸하면 되는 거예요. , 말이 많아요? 그게요. 지금 그런 행동방식과 변명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거예요. 두려워하세요! 지금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됐다구요. 이제 하나님이 당신을 버릴 차례예요. 이 악한 사람!’

 

죄송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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