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그 자유함._2012.11.1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7.)

 

( 8:1-2, 개역)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다. 정작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라고 듣고 배우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오히려,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런 건 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무엇이 자유로워진 것일까?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매우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로운 건 율법에 대해 자유로운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언뜻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비춰진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래선 안 돼. 저래선 안 돼. , 그리스도인은 구속되어 있다. 무엇이 자유롭고, 무엇이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만끽할까?

 

구약의 시대는 가장 자유롭지 못한 시대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자유함을 덜 느끼는 이유 중에 하나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주말이면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 정기적인 제사. 각종 의례들.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엄격히 통제되고, 규칙적인 희생과 반복을 요구하는 기계적인 삶이었다. 너무나 피곤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또, 죄인에게 완전한 의를 제공하심으로써 모든 율법준수의 족쇄가 풀어졌다.

 

무엇보다 죄의 족쇄가 풀어졌다. 그것은 자유함의 최고봉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성령의 인치심. 거듭남을 통해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죄의 권세는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정죄함이 사라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존재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성도는 교회이다. , 교회가 소유한 법. 성도가 소유한 법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인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주는 법이다. 정죄란 것은 오직 죄와 사망의 법이 유효할 때 성립되는 것이다. 성도와 교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하였기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죄로 부터의 자유. 해방. 그것은 그리스도인만 경험하는 최고의 자유이다. 교회 밖에 있는 그들은 여전히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고, 정죄함을 받는다. 그들은 그 아래 구속되어 있다.

 

죄로 부터의 완전한 자유.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그러면 이것인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전부인가. 어떤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에 구속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윤리를 위해 그리스도인 모든 것에서 절제할 것을 요구 받는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실제 생활에서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죄는 더 이상 무효하기 때문에 원하는 모든 것을 육체의 소욕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새로운 양심. 새로운 윤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이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윤리에 부합되기 위해 매사에 절제가 요구된다. 도덕과 윤리가 수반된다. 정죄받기 때문이 아니라, 죄의 지옥의 심판을 받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말이다.

 

그렇게 절제와 삼가 행하는 것. ‘그리스도인 답다.’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교훈을 받는다. 설교의 많은 부분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가치 실현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것에 할애되기도 한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이 자유하다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정녕, 무엇에서 자유로워졌는지. 그리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만큼 어떤 책임감과 의무가 다시 수반되고 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어떻게 해야 하지??’의 문제.

 

어떤 한 가지의 사안을 놓고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바른 결정인지를 알 수 없어 고민하게 되는 수많은 사례들이 실제의 생활에서 벌어진다. 오히려 이런 것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많다. 신앙은 너무 어려워요의 이유들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자신의 사례를 대입해 보려해도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딱 맞는 케이스를 찾기가 힘들다. 어떻게 적용할지가 막막하다.’ 성경은 정말 추상적일까?

 

그런 의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성경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실제적이기에 추상적이란 표현과는 너무나 동떨어진다. 물론, 성경은 모든 케이스를 다 다루고 있지는 않다. ‘case by case’로 접근하면 추상적이다라는 옆 길로 빠진다. 성경은 1900년 전 기록이기 때문에 그런 접근으로는 당연히 답이 안 나오는 것이 많다. 문화도 다르고, 환경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당연히 안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불변의 진리는 바로 원리이다.

 

‘case by case’로 접근할 때는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 6:3, 개역)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 23:31, 개역)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럼, 그럼. 그리스도인은 포도주는 안 되지. 술은 안 되는 고얌.

(딤전 5:23, 개역)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빠밤! 이건 머지…-_-;;

 

 그리스도인은 술을 마셔야 되나요? 안 마셔야 되나요?’ YES, NO로 답하시오. 이런 방식은 그 자체로 시험에 들게 한다. 정답은 원리로 부터 찾아야 한다. 포도주를 마시는 그 이유, 동기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의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의 기준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와 같다.

 

(고전 10:31, 개역)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어떤 행위를 하고자 하는 모든 동기 안에 바로 이 원리가 적용된다. 건강을 위해 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정당하게 취할 수 있다. 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안 된다. 라는 법은 존재한 적이 없다. 흑백논리는 율법시대의 원리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바로,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한 가지 자유로움을 찾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시대가 ‘A는 되고, B는 안 된다.’란 식으로, 흑백의 논리로 정답의 경계선을 그어놓았었다면, 지금은

어떤 동기로 부터인가에 따라 A가 될 수도 있고, B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십계명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것이 원리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원리를 알면 어떤 사례를 막론하고 적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직한 동기. 그것밖에 살필 것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통해 다양한 사례에 적용해보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경우도 있다. ‘A도 괜찮고, B도 괜찮은데 어떤걸 하는게 더 좋을까요? 두 가지 사례 모두 하나님 앞에 문제될 것이 없는 경우에도 고민은 있다. 뭘 선택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 올바르냐는 문제말이다. 이에 대한 답은 죄송하지만, ‘너 알아서 하세요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양심에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라 한다라면. 사실 그건 크게 고민할 문제가 전혀 아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되는 것이란 확신이 선다면 좀 더 좋고, 좀 덜 좋고의 차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면 이런 결론이 나는 것이다. ‘신앙은 너무 어렵고, 힘들어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 판단할 수가 없군요. 머리 아파요. 구원 안 받았을 땐, 내 마음대로 하니까 쉬웠는데.’

 

그러므로 신앙을 쉽게 누리자. 비록, 죄는 마음대로 못 짓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절제의 고난이 수반된다. 그건 감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조차 성령충만 안에 들어가면 즐거움이 된다.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 ‘정직한 동기의 원리를 적용해보자. 그러면 답은 금방 나온다. 어떤 것이든 꺼리낌이 없는 것이라면 쓸데없이 많이 고민하지 말자.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자. 그러면 신앙생활이 훨씬 자유로워진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요청했다. ‘시장에서 내다파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바울은 드세요또는 드시지 마세요라고 답을 준 적이 없다. 바울은 오히려 조금은 생뚱맞게 동문서답을 했다.

저기요. 하나니은 한 분이시고, 모든 만물이 그 분께 났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달라서 어떤 사람은 우상의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알면서도 먹어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먹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도 그만, 못 먹어도 그만입니다. 다만, 먹는 자들로 인해 약한 자들이 문제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것이 죄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첫 서신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언급된다.

누군가는 혼인도 금하고, 어떤 식물은 금지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 사람들은 바울에게 요청하기를 어떤 식물을 먹느냐, 마느냐 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논쟁하고 있었지만 바울에게는 그것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 자체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식물을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감사함으로 먹으면 뭔들 못 먹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우상의 제물인 줄 알면서 먹는다면 먹는 사람도 마음이 꺼리끼고, 그걸 보는 약한 형제가 마음에 문제가 되니. 정작 죄가 되는 것은 먹었느니, 안 먹었느니가 아니라 다른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이다.

 

살인, 간음, 도둑질. 십계명에 언급하는 죄는 당연히 NO라는 답을 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실제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 YES, NO로 답하기보다는 어떤 목적과 동기에 따르느냐가 더 높은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도 있고, 삼가할 수도 있고 그것은 자유로운 문제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무엇이든지 먹을 수도 있고, 할 수도 있고. 누릴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정직과 양심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누리는 또 하나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을 알면, 신앙생활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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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그 마음._2012.11.04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6.)

 

( 10:12, 개역)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라는 말은 너무나 익숙하다. 잠언은 말씀한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라고.

마음이 왜 소중한 것인가 생각해본다면.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깊은 처소이다. 그래서 종종 영혼과 마음은 같은 의미로도 쓰여진다. 심령이라고 한다.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섬기지 않는 것이 나뉘는 그 처음이다. 마음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 뿌리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면서 마음의 상태를 땅의 상태에 비유하셨다.

돌짝 같은 마음, 가시덤불이 우거진 마음, 바위 같은 마음, 잘 밭갈아진 마음. 그 모든 비유들은 실제 마음의 상태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호세아도 외친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묵은 땅이라고 했다. 마음을 밭갈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듬고 돋아나는 잡초를 솎아내지 않으면 마음에 잡초가 무성이 우거진다. 잡초가 뿌리깊게 땅에 파고들어 질겨진다. 그래서 씨를 뿌릴 수 없다. 실과를 얻기 위해 유실수를 심을 수 없다. 먹을 채소를 기를 수 없다. 소득 없이 잡초로 무성한 죽은 땅. 그것이 묵은 땅의 의미이다. 우리 마음을 계속해서 밭갈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기다린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묵은 땅을 기경하는 일이다. 그랬을 때, 그 땅에 하나님의 의가 비처럼 쏟아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가 스스로 묵은 땅을 기경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때때로 하나님은 모든 섭리를 초월해 일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들은 먼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과 방식들은 너무나 위대하고 다양하시다. 물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이해하는 일반적인 원리와 방식들을 따라 일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은 전혀 우리가 예상할 수 없고 또, 일반적인 원리에 초월하는 방식으로도 일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떤 하나의 형식과 틀 안에 가둬놓고 공식화 시킨다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실지언정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의무에는 스스로 충실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마음을 밭갈고 깨우는 일은 우선은 우리가 할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종종 우리에게 의를 비처럼 내려주시고 싶어 하시지만 우리 마음의 너무나 무성한 잡초들과 돌맹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주실 수가 없다.

 

기도와 회개, 자백과 탄원은 마음을 밭가는 가장 좋은 도구이다. 묵은 땅을 무엇으로 기경할까. 그것은 기도와 말씀이다. 디모데는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그렇다. 우리가 신령해지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말씀과 기도이다. 기도할 때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정직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과 위선. 속임과 방탕. 교만과 분노. 모든 죄악을 낱낱의 것을 고백하고 아뢰게 된다. 바로, 그것이 잡초를 솎아내는 모습이다. 돌맹이를 걷어내는 모습이다.

 

우리 마음 어딘가에는 죄의 처소가 있다. 성령께서도 거하시지만 불쾌한 불청객도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싸운다. 성령의 소욕과 죄의 소욕이 서로 싸우면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더욱 마음을 밭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랬을 때, 성령의 소욕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밭갈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인도 무기력하다.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지 말자. 그것만 달라고 아우성 하지 말자. 과연, 내가 내 마음을 밭갈고 있는 것이었는지 반성해보자.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해야만 한다. 오히려 구해보자. 내 묵은 마음을 기경하도록 해달라고. 그 힘을 구해보자. 어쩌면 그것이 마음을 갈지 않고, 은혜를 구하는 것보다 더 빠른 지름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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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정한 빛_2012.10.2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5.)

 

( 6:1-3, 개역)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음란한 여인 고멜과 신실한 호세아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영적으로 음행하는 이스라엘과 신실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주신다. 이방신을 쫓는 것. 그것은 영적간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는 꼴이 하나님을 떠나 음란히 떠났다고 말이다. 참나무와 버드나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비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러므로 딸들이 행음하고 며느리가 간음할 것이라고 했다. , 우상숭배는 딸과 며느리가 간음하는 모습처럼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간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외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찢으시다가도 싸매신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했다. 그들의 영적간음과 무지와 고집과 타락이 너무 깊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찢으셨다. 그러나 호세아는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자라고. 다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 찢김을 싸매준다고 말이다. , 놀라운 일이다.

 

세상에서 이해관계에 있는 어떤 두 사람이 배신을 당하고 복수를 하였다고 할 때, 돌아간다고 해서 싸매줄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오히려, 평생 원수로 남는 경우가 더 많다. 부부간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셨는데도 돌아가면 싸매주시는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구제불능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지독했다. 구약의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그 역사를 쭉 훑어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을 때보다 그렇지 못하고 수없이 매맞고 얻어터진 적이 더욱 많았다. 그렇게 밉상인데도 하나님은 다시 돌아오면 싸매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서 이틀 후에는 살아나고 제삼일에는 일으키시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 것이라고 말한다.

 

지독한 망나니. 난봉꾼 같은 이스라엘도 그 결국에 돌아갈 곳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진정 영원한 안식처이셨던가. 이스라엘의 모습은 종종 그리스도인의 대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님을 늘 언제나 잘 믿고, 따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 속에서 믿음은 지켰고, 신앙은 유지했더라도 그 마음과 생각. 그 의지와 열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지 못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뜨겁지 않았던 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 생활의 은밀한 곳에서. 우리 양심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영적간음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라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러므로 그 찟김도 낳을 것이며, 싸매주실 것이다. 다시 살고, 일어서게 될 것이다.’

 

정말 기막힌 희망의 찬가 아닌가. 못난 우리가 일정한 빛 같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 정신만 있다라면 우리는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은 일정한 빛 같은 분이심이 증명된다.

 

하나님께서 변함 없는 일정한 빛이 아니시라면, 변함 없는 신실하심이 아니셨더라면 우리가 영원히 긍휼을 입을 수 있을까. 늘 언제나 어느 때 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 치료받는다는 확답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그 결국에도 가야 할 곳은 주님 앞이다. 머물러야 할 곳은 주님 앞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믿음의 시험을 받는다. 신앙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다.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당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알아야만 한다. 일정한 빛 같은 주님께서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는 그 모습으로 그 일정한 빛으로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이다.

 

교제를 떠난 누군가 말했다고 한다. ‘방황을 해도 교회 안에서 방황하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이 방황할 수 있다. 그것조차 그리스도인이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그리스도인 머물 곳은 교회이다. 하나님의 품 안이다. 떠나본들 별 수 있으리. 그것은 떠나본 자의 아픈 고백이다. 차라리 교회 안에서 방황하고, 세상으로 가는 것만이라도 이겨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을. 바로 그 고백이다. ?

결국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곳은 주님 앞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떠날 수 없다. 죽지 않기 위해서도, 찢김을 싸매임 받고 치유되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인이 있을 자리는 오직 주님 앞이다.

 

일정한 빛 같이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안식처. 치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그런 하나님을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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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는 이름, 그리스도인_2012.10.1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4.)

 

( 3:3, 개역)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아모스서에서 하나님은 열방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신다. 아모스는 유다 출신의 목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부패해가는 이스라엘을 경고하는 도구로 아모스를 불러다가 이스라엘까지 건너가서 선포하게 하셨다. 어찌보면 유다 출신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 가서 설교해야 할 만큼 북이스라엘의 영적침체가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하며 외쳤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뇨

두 사람이 연합하려면 분명 생각과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연합이 되었든 그것이 두 사람의 연합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상호의 양보와 이해, 동의와 의견일치. 신뢰와 사랑. 관심.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지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동행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의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지만, 이스라엘은 변해 버렸다.

 

종교적으로는 뿔 달린 금송아지 우상이 하나님을 밀어냈다. 누룩으로 제사를 드렸다. 바산의 암소들처럼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를 학대했다. 부당한 세를 취하여 집을 건축하고, 포도원을 심었다. 전당 잡은 것은 그 밤이 되면 돌려줘야 되는 것이 율법이었지만, 그 전당물을 깔고 누워잤다. , 사회와 도덕. 종교.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법은 짓밟혔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의합치 않았다. ,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일치되는 의합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그 계명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와 정신. 도덕과 가치관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그 가치관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역시 삶 속에서 그 가치관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과 의합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세상의 분주함. 근심. 고민. 어떤 갈등. 때로는 하나님과 홀로 독대하는 그 소중한 기회들을 잃어버리는 시간들 속에서 어느덧 하나님과 의합되어 가는 삶의 윤리마저 잃어버리는 우울한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위기를 겪는다. 그러므로 그 옛날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던 그 선포는 오늘 나에게도 외치는 음성이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끝없는 위기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사한다. 아모스의 마지막장에도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신실한 하나님은 영원히 버리시는 법이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향해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떠나시지 않는다. 영영히 잊어버리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시다.

 

( 9:11, 개역)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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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올의 뱃속에서_2012.10.0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3.)

 

(욘 2:4-7, 개역)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선지자 요나의 인생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뽑자면, 분명 물고기 뱃속에서 보낸 사흘일 것이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그는 하나님도 이겨먹으려 드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단단한 요나를 꺾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두셨다. 큰 물고기. 그리고 그 물고기의 뱃속.

도대체 그 물고기 뱃속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장과 함께 시작하는 요나의 회개와 기도를 보면 도저히 1장에서 만났던 요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도대체 요나에게 물고기뱃속은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위험한 도주와 지중해 횡단조차 시도할 만큼 반항적이었다.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 그는 죽을 각오했을 것이다. 설마, 큰 물고기가 자신을 삼킬 것을 기대하고 뛰어들었을까.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그 거대한 물고기가 요나 자신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이후 처음으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반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물고기 뱃속은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그 벼랑의 끝에 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장소였으며, 동시에 그에게 극한 공포와 좌절감.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끝에 도착했음이 그곳이었으며, 요나가 더 이상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의 극치가 있는 장소였다. 요나는 죽지 않는 한,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완고한 요나를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 그를 그 고통의 끝에 던지셨던 것이다.

 

요나는 말했다. ‘내가 받는 이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그리고 스올의 뱃속에서 하나님을 불렀다고 했다. 요나가 삼일동안 경험한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며, 하나님 앞에 무모한 자신의 교만과 오만을 깨닫는 시간이며, 자기성찰과 회개, 겸손과 눈물, 근신과 회복의 그 모든 것이 이뤄지는 시간이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제 나는 끝이구나.’. 그렇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다. 사방은 어두웠고, 축축했다. 물고기의 위액이 그를 괴롭혔고, 위가 운동했기에 그는 멀미도 했을지 모른다. 그는 쉴 수가 없었다. 위액의 냄새. 각종 음식물이 소화되는 냄새가 진동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었든지 요나에게 있어서 물고기의 뱃속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지옥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왜 그가 이 지옥에 왔던가. 바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게 도전하려 했던 자신의 오만과 교만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는 고통의 구렁텅이 빠져 하나님을 거절한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라고 했다.

 

절망 속에서 그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즉, 회개하였던 것이다.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자신을 고백했다. 절망의 장소에서 희망을 다시 보았다. ‘이제라도’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절망은 없다. 회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다시 이룰 수 있다. ‘재기’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신앙 안에 포기는 없는 법이다. 요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요나의 기도 속에서 그가 처했던 상황을 보자. 물은 그의 영혼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는 스올의 뱃속에서 극심한 영적침체에 빠졌다. 그는 거의 죽을 사람처럼 낙심해버렸다. 그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 무겁고 고통스러웠기에 그는 분명 거의 자신의 운명에 한탄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현실이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내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다니…’ 그는 절망했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이 모두 깊음의 수렁 속에 빠져들어갔다. 그는 도무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이런 죽음이야 말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바다풀이 그의 머리를 감싸듯 고난의 흔적이 가득했다. 절망의 장소에서 파생된 고통의 흔적들이 그를 둘렀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 진토까지 내려갔다. 바다의 산 아래 그 바닥까지 치고 내려갔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만큼 그는 추락하고 있었다. 산의 빗장이 자신을 가로막았다. 절망 가운데 모든 희망과 가능성조차 거절당하는 것만 같았다. 구원의 여망을 걷어차버리는 그런 장애물들에 휘둘려 그 어떤 여망을 품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영혼이 피곤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했다. 누구나 너무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면 영혼의 극심한 피곤과 무거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야 말로 진정을 토해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때야 말로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절망의 그 끝에는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 그것이 꺾여 부러진 그리스도인이 재기하게 되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되는 매우 훌륭한 기회이다. 요나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만약, 요나가 배에서 던져저 그냥 물에 빠져 죽었다면. 하나님께서 교만한 요나를 그런 식으로 심판해버리셨다면, 요나는 죽어서도 하나님과 언쟁했을지 모른다. 아마, 영원히 하나님과 불편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니다. 요나는 달라져야만 했다. 요나는 그 마음 심보가 새로워져야만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객기와 오만함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회개하고 마음을 되돌이켜 먹을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계셨다.

 

스올의 뱃속. 바로 그곳에서 요나는 그날이 될 때까지 이겨보지 못한 오만한 자아를 스스로 벗게 되었다. 선지자 요나로 기억되기 위해 그는 반드시 그 스올을 경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실패한 선지자 요나가 되고 말았을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항상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행복할 때보다는 힘들고 지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삶 속에서는 더 자주 더 많이 일어나곤 한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요나와 같이 그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한다. 자아가 강한 그리스도인. 오만과 객기 부리기를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 중에 누군가는 스올의 뱃속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절망의 벽에 부딪히고,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내린다. 절망 중에서 희망의 이름을 부른다. 비록, 아무 면목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찾는다. 요나를 이해하게 된다. 요나의 마지막 기도는 이와 같았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이 무능하고 무익함을 깨달았음을 알리는 고백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유일한 자신의 소망이 될 것을 기대하는 믿음에 이르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다운 믿음과 겸손,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에게 인생 중에 스올의 뱃속이 필요할지 모른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잘 굴복되지 않는 자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배우고, 알지만 좀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훈련되지 않는 자신과 자아의 끈질김을 본다. 피곤한 일이다. 그것이 한걸음 한걸음 스올의 뱃속으로 향해가는 걸음이거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무소불위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무능력과 오만과 굴복되지 않는 자아의 파렴치한 추태를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못한다. 성숙하지 못했다. 여전히 자아가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는 순간이 많다. 우리는 여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생각보다 훨씬 교만하다. 이기적이고 자기 안전을 더 사랑한다. 순수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 의뢰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요나를 사랑하신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를 듣자 그를 꺼내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증거였다. 스올의 뱃속에 넣는 것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요나가 새로워지길 바랬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그러하시다. 스올은 우리가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해지길 바라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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