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정한 빛_2012.10.2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5.)

 

( 6:1-3, 개역)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음란한 여인 고멜과 신실한 호세아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영적으로 음행하는 이스라엘과 신실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주신다. 이방신을 쫓는 것. 그것은 영적간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는 꼴이 하나님을 떠나 음란히 떠났다고 말이다. 참나무와 버드나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비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러므로 딸들이 행음하고 며느리가 간음할 것이라고 했다. , 우상숭배는 딸과 며느리가 간음하는 모습처럼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간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외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찢으시다가도 싸매신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했다. 그들의 영적간음과 무지와 고집과 타락이 너무 깊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찢으셨다. 그러나 호세아는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자라고. 다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 찢김을 싸매준다고 말이다. , 놀라운 일이다.

 

세상에서 이해관계에 있는 어떤 두 사람이 배신을 당하고 복수를 하였다고 할 때, 돌아간다고 해서 싸매줄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오히려, 평생 원수로 남는 경우가 더 많다. 부부간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셨는데도 돌아가면 싸매주시는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구제불능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지독했다. 구약의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그 역사를 쭉 훑어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을 때보다 그렇지 못하고 수없이 매맞고 얻어터진 적이 더욱 많았다. 그렇게 밉상인데도 하나님은 다시 돌아오면 싸매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서 이틀 후에는 살아나고 제삼일에는 일으키시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 것이라고 말한다.

 

지독한 망나니. 난봉꾼 같은 이스라엘도 그 결국에 돌아갈 곳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진정 영원한 안식처이셨던가. 이스라엘의 모습은 종종 그리스도인의 대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님을 늘 언제나 잘 믿고, 따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 속에서 믿음은 지켰고, 신앙은 유지했더라도 그 마음과 생각. 그 의지와 열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지 못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뜨겁지 않았던 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 생활의 은밀한 곳에서. 우리 양심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영적간음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라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러므로 그 찟김도 낳을 것이며, 싸매주실 것이다. 다시 살고, 일어서게 될 것이다.’

 

정말 기막힌 희망의 찬가 아닌가. 못난 우리가 일정한 빛 같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 정신만 있다라면 우리는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은 일정한 빛 같은 분이심이 증명된다.

 

하나님께서 변함 없는 일정한 빛이 아니시라면, 변함 없는 신실하심이 아니셨더라면 우리가 영원히 긍휼을 입을 수 있을까. 늘 언제나 어느 때 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 치료받는다는 확답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그 결국에도 가야 할 곳은 주님 앞이다. 머물러야 할 곳은 주님 앞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믿음의 시험을 받는다. 신앙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다.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당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알아야만 한다. 일정한 빛 같은 주님께서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는 그 모습으로 그 일정한 빛으로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이다.

 

교제를 떠난 누군가 말했다고 한다. ‘방황을 해도 교회 안에서 방황하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이 방황할 수 있다. 그것조차 그리스도인이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그리스도인 머물 곳은 교회이다. 하나님의 품 안이다. 떠나본들 별 수 있으리. 그것은 떠나본 자의 아픈 고백이다. 차라리 교회 안에서 방황하고, 세상으로 가는 것만이라도 이겨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을. 바로 그 고백이다. ?

결국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곳은 주님 앞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떠날 수 없다. 죽지 않기 위해서도, 찢김을 싸매임 받고 치유되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인이 있을 자리는 오직 주님 앞이다.

 

일정한 빛 같이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안식처. 치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그런 하나님을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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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는 이름, 그리스도인_2012.10.1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4.)

 

( 3:3, 개역)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아모스서에서 하나님은 열방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신다. 아모스는 유다 출신의 목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부패해가는 이스라엘을 경고하는 도구로 아모스를 불러다가 이스라엘까지 건너가서 선포하게 하셨다. 어찌보면 유다 출신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 가서 설교해야 할 만큼 북이스라엘의 영적침체가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하며 외쳤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뇨

두 사람이 연합하려면 분명 생각과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연합이 되었든 그것이 두 사람의 연합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상호의 양보와 이해, 동의와 의견일치. 신뢰와 사랑. 관심.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지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동행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의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지만, 이스라엘은 변해 버렸다.

 

종교적으로는 뿔 달린 금송아지 우상이 하나님을 밀어냈다. 누룩으로 제사를 드렸다. 바산의 암소들처럼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를 학대했다. 부당한 세를 취하여 집을 건축하고, 포도원을 심었다. 전당 잡은 것은 그 밤이 되면 돌려줘야 되는 것이 율법이었지만, 그 전당물을 깔고 누워잤다. , 사회와 도덕. 종교.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법은 짓밟혔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의합치 않았다. ,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일치되는 의합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그 계명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와 정신. 도덕과 가치관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그 가치관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역시 삶 속에서 그 가치관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과 의합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세상의 분주함. 근심. 고민. 어떤 갈등. 때로는 하나님과 홀로 독대하는 그 소중한 기회들을 잃어버리는 시간들 속에서 어느덧 하나님과 의합되어 가는 삶의 윤리마저 잃어버리는 우울한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위기를 겪는다. 그러므로 그 옛날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던 그 선포는 오늘 나에게도 외치는 음성이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끝없는 위기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사한다. 아모스의 마지막장에도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신실한 하나님은 영원히 버리시는 법이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향해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떠나시지 않는다. 영영히 잊어버리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시다.

 

( 9:11, 개역)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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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올의 뱃속에서_2012.10.0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3.)

 

(욘 2:4-7, 개역)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선지자 요나의 인생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뽑자면, 분명 물고기 뱃속에서 보낸 사흘일 것이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그는 하나님도 이겨먹으려 드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단단한 요나를 꺾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두셨다. 큰 물고기. 그리고 그 물고기의 뱃속.

도대체 그 물고기 뱃속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장과 함께 시작하는 요나의 회개와 기도를 보면 도저히 1장에서 만났던 요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도대체 요나에게 물고기뱃속은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위험한 도주와 지중해 횡단조차 시도할 만큼 반항적이었다.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 그는 죽을 각오했을 것이다. 설마, 큰 물고기가 자신을 삼킬 것을 기대하고 뛰어들었을까.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그 거대한 물고기가 요나 자신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이후 처음으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반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물고기 뱃속은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그 벼랑의 끝에 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장소였으며, 동시에 그에게 극한 공포와 좌절감.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끝에 도착했음이 그곳이었으며, 요나가 더 이상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의 극치가 있는 장소였다. 요나는 죽지 않는 한,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완고한 요나를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 그를 그 고통의 끝에 던지셨던 것이다.

 

요나는 말했다. ‘내가 받는 이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그리고 스올의 뱃속에서 하나님을 불렀다고 했다. 요나가 삼일동안 경험한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며, 하나님 앞에 무모한 자신의 교만과 오만을 깨닫는 시간이며, 자기성찰과 회개, 겸손과 눈물, 근신과 회복의 그 모든 것이 이뤄지는 시간이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제 나는 끝이구나.’. 그렇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다. 사방은 어두웠고, 축축했다. 물고기의 위액이 그를 괴롭혔고, 위가 운동했기에 그는 멀미도 했을지 모른다. 그는 쉴 수가 없었다. 위액의 냄새. 각종 음식물이 소화되는 냄새가 진동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었든지 요나에게 있어서 물고기의 뱃속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지옥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왜 그가 이 지옥에 왔던가. 바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게 도전하려 했던 자신의 오만과 교만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는 고통의 구렁텅이 빠져 하나님을 거절한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라고 했다.

 

절망 속에서 그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즉, 회개하였던 것이다.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자신을 고백했다. 절망의 장소에서 희망을 다시 보았다. ‘이제라도’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절망은 없다. 회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다시 이룰 수 있다. ‘재기’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신앙 안에 포기는 없는 법이다. 요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요나의 기도 속에서 그가 처했던 상황을 보자. 물은 그의 영혼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는 스올의 뱃속에서 극심한 영적침체에 빠졌다. 그는 거의 죽을 사람처럼 낙심해버렸다. 그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 무겁고 고통스러웠기에 그는 분명 거의 자신의 운명에 한탄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현실이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내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다니…’ 그는 절망했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이 모두 깊음의 수렁 속에 빠져들어갔다. 그는 도무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이런 죽음이야 말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바다풀이 그의 머리를 감싸듯 고난의 흔적이 가득했다. 절망의 장소에서 파생된 고통의 흔적들이 그를 둘렀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 진토까지 내려갔다. 바다의 산 아래 그 바닥까지 치고 내려갔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만큼 그는 추락하고 있었다. 산의 빗장이 자신을 가로막았다. 절망 가운데 모든 희망과 가능성조차 거절당하는 것만 같았다. 구원의 여망을 걷어차버리는 그런 장애물들에 휘둘려 그 어떤 여망을 품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영혼이 피곤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했다. 누구나 너무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면 영혼의 극심한 피곤과 무거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야 말로 진정을 토해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때야 말로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절망의 그 끝에는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 그것이 꺾여 부러진 그리스도인이 재기하게 되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되는 매우 훌륭한 기회이다. 요나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만약, 요나가 배에서 던져저 그냥 물에 빠져 죽었다면. 하나님께서 교만한 요나를 그런 식으로 심판해버리셨다면, 요나는 죽어서도 하나님과 언쟁했을지 모른다. 아마, 영원히 하나님과 불편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니다. 요나는 달라져야만 했다. 요나는 그 마음 심보가 새로워져야만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객기와 오만함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회개하고 마음을 되돌이켜 먹을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계셨다.

 

스올의 뱃속. 바로 그곳에서 요나는 그날이 될 때까지 이겨보지 못한 오만한 자아를 스스로 벗게 되었다. 선지자 요나로 기억되기 위해 그는 반드시 그 스올을 경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실패한 선지자 요나가 되고 말았을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항상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행복할 때보다는 힘들고 지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삶 속에서는 더 자주 더 많이 일어나곤 한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요나와 같이 그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한다. 자아가 강한 그리스도인. 오만과 객기 부리기를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 중에 누군가는 스올의 뱃속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절망의 벽에 부딪히고,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내린다. 절망 중에서 희망의 이름을 부른다. 비록, 아무 면목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찾는다. 요나를 이해하게 된다. 요나의 마지막 기도는 이와 같았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이 무능하고 무익함을 깨달았음을 알리는 고백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유일한 자신의 소망이 될 것을 기대하는 믿음에 이르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다운 믿음과 겸손,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에게 인생 중에 스올의 뱃속이 필요할지 모른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잘 굴복되지 않는 자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배우고, 알지만 좀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훈련되지 않는 자신과 자아의 끈질김을 본다. 피곤한 일이다. 그것이 한걸음 한걸음 스올의 뱃속으로 향해가는 걸음이거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무소불위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무능력과 오만과 굴복되지 않는 자아의 파렴치한 추태를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못한다. 성숙하지 못했다. 여전히 자아가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는 순간이 많다. 우리는 여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생각보다 훨씬 교만하다. 이기적이고 자기 안전을 더 사랑한다. 순수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 의뢰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요나를 사랑하신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를 듣자 그를 꺼내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증거였다. 스올의 뱃속에 넣는 것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요나가 새로워지길 바랬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그러하시다. 스올은 우리가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해지길 바라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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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BIG FISH PROJECT_2012.09.21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2.)

 

( 1:3, 개역)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성경에서 발견하는 선지자 가운데 가장 고집 세고, 모진 마음을 가진 선지자가 있다라면 나는 주저 없이 요나를 뽑을 것이다. 쉽게 말해, 요나는 못된 선지자’(?)’였다.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요나의 객기는 여타의 선지자들이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선지자이지만 전혀 다른 DNA를 가졌다고 할까? 한편으론, 꽤나 용감하고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코믹한 선지자일 수도 있다. 또한, 요나의 그러한 모습은 매력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요나 같은 그리스도인을 보게 해주는 거울이기에.

 

요나서는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참 절묘하게도 1-2장과 3-4장이 같은 상황의 출발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요나의 상반된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마치, 인생극장처럼.(그래 결정했어!)

그와 동시에 공통의 요소도 있는데, 요나의 회개와 니느웨의 회개가 비교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겸비했다. 두려워 떨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요나님은 보란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지는 다시스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니느웨는 동편에 위치한 곳으로 육로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개구리 요나는 지중해 욥바항에서 배를 타고 서쪽 다시스로 항로를 이용했다. , 하나님께서 가라신 방향과 정반대의 그것도 끝으로 가려고 했다. 아주 작정하고, 하나님 명령을 무시하려고 했던 것이다.(이렇게 작심하고 하나님 명령에 청개구리로 행동하는 선지자를 봤는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실 때 요나의 기막힌 도주가 꽤나 흥미로우셨을 것 같다. ‘어허, 고 놈 꽤나 알차게 튀기 시작하는구나 아주’. 그리고 지중해를 흔드셨다. 요나와 함께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이 요나 덕분에 고래밥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도 요나는 안하무인이었다. 배 밑층으로 내려가 잠을 청했다. 그것도 깊이 잠들었다고 했다. 불순종이라든지 자기 때문에 모두가 위기에 처했다든지 그런 것은 안중에 없었다. 요나의 모진성품을 엿볼 수 있다. 그냥 마음 편히 잠만 잤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 명령을 거부하는 것. ‘니느웨? 난 결사반대!’ 거의 뭐, 하나님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겨뤄보자식 같다. 그리고 친히 하나님은 겨뤄주신다.

 

제비뽑기에서 요나가 색출, 검거되었다. 짧은 청문회에서 요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로 말하자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요!. 일종의 선지자라 할 수 있죠...’-_-;;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주문했다. 결연한 요나. ‘내가 죽을지언정 하나님 명령을 따르진 않으리!’

 

요나의 결연한 의지. 불굴의 의지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도 방법은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두신 숨은 병기. 일명 ‘BIG FISH PROJECT’-‘초특급 대작, 뱃속에서 회개하리라 주연 요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3일만에 눈물 쏙 빼고, 하나님께 항복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요나 같을 수 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기에 바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힘겨워 불순종의 길로 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쩜 그렇게.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분명히 있다. 룰루랄라. 이건 필연이야. 그렇게 배를 타고 나간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고 불순종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우리의 그릇된 결정이 처음에는 옳은 것인냥 술술 풀리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기로 맘먹고 욥바항에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행 배가 요나님, 타시옵소서. 기다리고 있었나이다.’라고 반겨주었던 것처럼. 그러나 결코 그것이 요나의 선택을 옹호해주는 것도, 인정해주는 현상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물고기 뱃속이 어디였던가. 요나는 그곳을 스올이라고 표현했다. , 죽음과 지옥의 고통 같은 장소였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불순종, 우리의 고집, 오만, 모진성품. 그 모든 것들이 버려지게 될 만큼 고통스러운 징계와 연단, 고난과 훈련을 받게 되는 장소 바로 그곳이다. 우리의 불순종은 우리를 바로 그런 연단의 처소로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바항에서 다시스행 배를 만났다고 기뻐 날 뛸 것이 아니다. 그 배 입구로 들어서면 물고기 뱃 속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나 또,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도 이겨 먹으려는 못된 자아가 모진 성품이 드디어 항복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 아래 있다. 그 다스리심과 통치하심 그 아래에 있다. ‘뛰어봐야 벼룩이란 속담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선 그리스도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요나 같은 마음이 있다. 그 언젠가, 때때로 우리는 요나 같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스올의 뱃속을 경험해야 했다. 그 외로움, 그 고통, 그 눈물, 그 좌절감. 그 시련. 하나님 앞에서 겸비할 수 없었던 그 하나의 모진 마음과 교만과 이기심과 도전정신과 어리석음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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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그리스도인_2012.09.17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1.)

 

(대하 33:13, 개역)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므낫세왕은 위대한 개혁가 히스기야왕의 아들이었다. 히스기야왕은 다윗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앙회복운동을 일으킨 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의 아들 므낫세왕은 신앙의 실패자로 등장한다. 므낫세는 위대한 아버지만큼이나 위대한 불신자로 지독한 우상숭배와 종교혼합주의에 빠져 하나님 앞에서 구부러진 삶을 살아간다. 그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 왕을 보내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가버린다. 분명, 그것은 징계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므낫세는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후부터 므낫세는 하나님께 구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불신자에게 그 환난의 시간이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악했지만, 므낫세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 아무도 그 지독한 우상숭배자 므낫세가 바벨론으로 끌려가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찾게 될 거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므낫세는 그것을 성공시켰다.

 

므낫세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환난을 당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고, 회개하게 된다. 스스로를 겸비시켰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들고, 하나님은 놀랍게도 므낫세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왕위를 회복하게 해주셨다. 그 악한 왕이, 신앙의 실패자요. 쇠사슬에 결박되어 끌려간 자가 다시 왕위를 회복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바로 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바로 므낫세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참 이상한 부분이기도 하다. 므낫세의 아버지는 위대한 개혁가 히스기야 왕이 아닌가. 그런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 밑에서 자라 므낫세왕이 왜 하나님을 몰랐던 것일까?

 

히스기야왕에게도 불찰은 있었다. 그는 말년에 병들었고, 시험에 빠졌으며 그 시험에서 실패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을 아시고자 바벨론 사신들을 보냈고 거기서 히스기야는 실패했다. 히스기야는 말년에 교만에 빠져 있었고, 그런 교만한 자신으로부터 돌이키지 못했다. 분명, 그러한 내막은 성장기에 있었던 므낫세의 신앙관과 종교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 청년의 시기를 주 앞에서 온전한 열심으로 충성스럽게 살았더라도 그의 마라톤에서 뒤쳐지기 시작하여 중년과 장년에 이르러서, 신앙에 실패하기 시작한다면 사춘기와 청년기를 겪게되는 그 아들에게는 신앙의 온전한 것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아마도 히스기야왕의 우울한 말년의 신앙은 므낫세로 하여금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아버지의 초라한 말년을 보면서 여호와 신앙에 대한 회의감 내지 불신을 가졌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방향을 명백히 정립하지 못한 므낫세는 각종 우상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우상이 진짜인지 마치 찾아내기라도 하듯이 각종 우상을 혼합하여 섬겼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철저한 실패. 심지어 자신의 왕권을 잃어버리고 종으로 끌려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자신이 잘못된 결정과 신앙을 선택한 것이었다면 돌이키게 해달라고.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응답해주셨다.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이것은 므낫세의 참된 체험이었다. 지독한 우상숭배자에서 여호와 신앙으로 회귀하는데 있어서 므낫세의 체험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우상이 진짜인 것인양 맹목적으로 쫓던 때와는 달리 그는 실제 삶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다. 히스기야왕의 아들로 자랄 때에도 분명 신앙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했다. 지식은 배울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경험해볼 수 없었다. 그것은 므낫세에게 불가능한 종교였다.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자 영역이란 것을 므낫세는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므낫세는 여호와 신앙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가졌다.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답게 만드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배우며,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지식과 교리를 익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몇 가지의 진리와 신앙관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를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지식은 신앙을 가지는 가장 중요한 근본이자, 신앙을 지키게 하는 첫째 방패이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지식에 준하는 경험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능력이 된다. 그것이 참으로 신앙의 저력과 힘으로 자리잡는 실제의 근육들이다.

 

신앙은 단지 배워서만 익혀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 익혀지는 것이다. 나아가 경험은 보다 깊고, 보다 높은 신앙의 지식에도 이르게 도와주는 밑거름이 된다. 므낫세왕의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그 참 고백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숙명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워지기 위한 좋은 보약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해보는 것.’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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