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는 이름, 그리스도인_2012.10.1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4.)
(암 3:3, 개역)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아모스서에서 하나님은 열방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신다. 아모스는 유다 출신의 목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부패해가는 이스라엘을 경고하는 도구로 아모스를 불러다가 이스라엘까지 건너가서 선포하게 하셨다. 어찌보면 유다 출신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에 가서 설교해야 할 만큼 북이스라엘의 영적침체가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하며 외쳤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뇨’
두 사람이 연합하려면 분명 생각과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연합이 되었든 그것이 두 사람의 연합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상호의 양보와 이해, 동의와 의견일치. 신뢰와 사랑. 관심.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야 한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지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동행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의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지만, 이스라엘은 변해 버렸다.
종교적으로는 뿔 달린 금송아지 우상이 하나님을 밀어냈다. 누룩으로 제사를 드렸다. 바산의 암소들처럼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를 학대했다. 부당한 세를 취하여 집을 건축하고, 포도원을 심었다. 전당 잡은 것은 그 밤이 되면 돌려줘야 되는 것이 율법이었지만, 그 전당물을 깔고 누워잤다. 즉, 사회와 도덕. 종교.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법은 짓밟혔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의합치 않았다. 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일치되는 의합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그 계명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와 정신. 도덕과 가치관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그 가치관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역시 삶 속에서 그 가치관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과 의합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세상의 분주함. 근심. 고민. 어떤 갈등. 때로는 하나님과 홀로 독대하는 그 소중한 기회들을 잃어버리는 시간들 속에서 어느덧 하나님과 의합되어 가는 삶의 윤리마저 잃어버리는 우울한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위기를 겪는다. 그러므로 그 옛날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던 그 선포는 오늘 나에게도 외치는 음성이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끝없는 위기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사한다. 아모스의 마지막장에도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 신실한 하나님은 영원히 버리시는 법이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향해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떠나시지 않는다. 영영히 잊어버리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시다.
(암 9:11, 개역)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