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올의 뱃속에서_2012.10.0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3.)

 

(욘 2:4-7, 개역)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선지자 요나의 인생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뽑자면, 분명 물고기 뱃속에서 보낸 사흘일 것이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그는 하나님도 이겨먹으려 드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단단한 요나를 꺾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두셨다. 큰 물고기. 그리고 그 물고기의 뱃속.

도대체 그 물고기 뱃속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장과 함께 시작하는 요나의 회개와 기도를 보면 도저히 1장에서 만났던 요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도대체 요나에게 물고기뱃속은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위험한 도주와 지중해 횡단조차 시도할 만큼 반항적이었다.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 그는 죽을 각오했을 것이다. 설마, 큰 물고기가 자신을 삼킬 것을 기대하고 뛰어들었을까.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그 거대한 물고기가 요나 자신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이후 처음으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반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물고기 뱃속은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그 벼랑의 끝에 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장소였으며, 동시에 그에게 극한 공포와 좌절감.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끝에 도착했음이 그곳이었으며, 요나가 더 이상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의 극치가 있는 장소였다. 요나는 죽지 않는 한,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완고한 요나를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 그를 그 고통의 끝에 던지셨던 것이다.

 

요나는 말했다. ‘내가 받는 이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그리고 스올의 뱃속에서 하나님을 불렀다고 했다. 요나가 삼일동안 경험한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며, 하나님 앞에 무모한 자신의 교만과 오만을 깨닫는 시간이며, 자기성찰과 회개, 겸손과 눈물, 근신과 회복의 그 모든 것이 이뤄지는 시간이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이제 나는 끝이구나.’. 그렇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다. 사방은 어두웠고, 축축했다. 물고기의 위액이 그를 괴롭혔고, 위가 운동했기에 그는 멀미도 했을지 모른다. 그는 쉴 수가 없었다. 위액의 냄새. 각종 음식물이 소화되는 냄새가 진동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었든지 요나에게 있어서 물고기의 뱃속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지옥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왜 그가 이 지옥에 왔던가. 바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게 도전하려 했던 자신의 오만과 교만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는 고통의 구렁텅이 빠져 하나님을 거절한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라고 했다.

 

절망 속에서 그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즉, 회개하였던 것이다.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다. 자신을 고백했다. 절망의 장소에서 희망을 다시 보았다. ‘이제라도’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절망은 없다. 회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다시 이룰 수 있다. ‘재기’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신앙 안에 포기는 없는 법이다. 요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요나의 기도 속에서 그가 처했던 상황을 보자. 물은 그의 영혼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는 스올의 뱃속에서 극심한 영적침체에 빠졌다. 그는 거의 죽을 사람처럼 낙심해버렸다. 그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 무겁고 고통스러웠기에 그는 분명 거의 자신의 운명에 한탄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현실이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내게 이런 일이…,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다니…’ 그는 절망했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이 모두 깊음의 수렁 속에 빠져들어갔다. 그는 도무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이런 죽음이야 말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바다풀이 그의 머리를 감싸듯 고난의 흔적이 가득했다. 절망의 장소에서 파생된 고통의 흔적들이 그를 둘렀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 진토까지 내려갔다. 바다의 산 아래 그 바닥까지 치고 내려갔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만큼 그는 추락하고 있었다. 산의 빗장이 자신을 가로막았다. 절망 가운데 모든 희망과 가능성조차 거절당하는 것만 같았다. 구원의 여망을 걷어차버리는 그런 장애물들에 휘둘려 그 어떤 여망을 품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영혼이 피곤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했다. 누구나 너무 깊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면 영혼의 극심한 피곤과 무거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때야 말로 진정을 토해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때야 말로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절망의 그 끝에는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 그것이 꺾여 부러진 그리스도인이 재기하게 되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경험하게 되는 매우 훌륭한 기회이다. 요나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만약, 요나가 배에서 던져저 그냥 물에 빠져 죽었다면. 하나님께서 교만한 요나를 그런 식으로 심판해버리셨다면, 요나는 죽어서도 하나님과 언쟁했을지 모른다. 아마, 영원히 하나님과 불편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니다. 요나는 달라져야만 했다. 요나는 그 마음 심보가 새로워져야만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객기와 오만함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회개하고 마음을 되돌이켜 먹을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계셨다.

 

스올의 뱃속. 바로 그곳에서 요나는 그날이 될 때까지 이겨보지 못한 오만한 자아를 스스로 벗게 되었다. 선지자 요나로 기억되기 위해 그는 반드시 그 스올을 경험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실패한 선지자 요나가 되고 말았을 것.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항상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행복할 때보다는 힘들고 지치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삶 속에서는 더 자주 더 많이 일어나곤 한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요나와 같이 그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한다. 자아가 강한 그리스도인. 오만과 객기 부리기를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 중에 누군가는 스올의 뱃속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절망의 벽에 부딪히고,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내린다. 절망 중에서 희망의 이름을 부른다. 비록, 아무 면목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찾는다. 요나를 이해하게 된다. 요나의 마지막 기도는 이와 같았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이 무능하고 무익함을 깨달았음을 알리는 고백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유일한 자신의 소망이 될 것을 기대하는 믿음에 이르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다운 믿음과 겸손,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에게 인생 중에 스올의 뱃속이 필요할지 모른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잘 굴복되지 않는 자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배우고, 알지만 좀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훈련되지 않는 자신과 자아의 끈질김을 본다. 피곤한 일이다. 그것이 한걸음 한걸음 스올의 뱃속으로 향해가는 걸음이거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무소불위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무능력과 오만과 굴복되지 않는 자아의 파렴치한 추태를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못한다. 성숙하지 못했다. 여전히 자아가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는 순간이 많다. 우리는 여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생각보다 훨씬 교만하다. 이기적이고 자기 안전을 더 사랑한다. 순수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 의뢰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요나를 사랑하신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를 듣자 그를 꺼내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증거였다. 스올의 뱃속에 넣는 것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요나가 새로워지길 바랬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그러하시다. 스올은 우리가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해지길 바라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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