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정한 빛_2012.10.2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5.)
(호 6:1-3, 개역)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음란한 여인 고멜과 신실한 호세아의 상반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영적으로 음행하는 이스라엘과 신실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주신다. 이방신을 쫓는 것. 그것은 영적간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는 꼴이 하나님을 떠나 음란히 떠났다고 말이다. 참나무와 버드나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비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러므로 딸들이 행음하고 며느리가 간음할 것이라고 했다. 즉, 우상숭배는 딸과 며느리가 간음하는 모습처럼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간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외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찢으시다가도 싸매신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했다. 그들의 영적간음과 무지와 고집과 타락이 너무 깊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찢으셨다. 그러나 호세아는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자라고. 다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그 찢김을 싸매준다고 말이다. 참, 놀라운 일이다.
세상에서 이해관계에 있는 어떤 두 사람이 배신을 당하고 복수를 하였다고 할 때, 돌아간다고 해서 싸매줄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오히려, 평생 원수로 남는 경우가 더 많다. 부부간에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셨는데도 돌아가면 싸매주시는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구제불능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지독했다. 구약의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그 역사를 쭉 훑어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을 때보다 그렇지 못하고 수없이 매맞고 얻어터진 적이 더욱 많았다. 그렇게 밉상인데도 하나님은 다시 돌아오면 싸매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서 이틀 후에는 살아나고 제삼일에는 일으키시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 것이라고 말한다.
지독한 망나니. 난봉꾼 같은 이스라엘도 그 결국에 돌아갈 곳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진정 영원한 안식처이셨던가. 이스라엘의 모습은 종종 그리스도인의 대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님을 늘 언제나 잘 믿고, 따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 속에서 믿음은 지켰고, 신앙은 유지했더라도 그 마음과 생각. 그 의지와 열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지 못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뜨겁지 않았던 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 생활의 은밀한 곳에서. 우리 양심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영적간음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라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러므로 그 찟김도 낳을 것이며, 싸매주실 것이다. 다시 살고, 일어서게 될 것이다.’
정말 기막힌 희망의 찬가 아닌가. 못난 우리가 일정한 빛 같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 정신만 있다라면 우리는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은 일정한 빛 같은 분이심이 증명된다.
하나님께서 변함 없는 일정한 빛이 아니시라면, 변함 없는 신실하심이 아니셨더라면 우리가 영원히 긍휼을 입을 수 있을까. 늘 언제나 어느 때 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 치료받는다는 확답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그 결국에도 가야 할 곳은 주님 앞이다. 머물러야 할 곳은 주님 앞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믿음의 시험을 받는다. 신앙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다.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당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알아야만 한다. 일정한 빛 같은 주님께서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는 그 모습으로 그 일정한 빛으로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이다.
교제를 떠난 누군가 말했다고 한다. ‘방황을 해도 교회 안에서 방황하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이 방황할 수 있다. 그것조차 그리스도인이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그리스도인 머물 곳은 교회이다. 하나님의 품 안이다. 떠나본들 별 수 있으리. 그것은 떠나본 자의 아픈 고백이다. 차라리 교회 안에서 방황하고, 세상으로 가는 것만이라도 이겨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을. 바로 그 고백이다. 왜?
결국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곳은 주님 앞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떠날 수 없다. 죽지 않기 위해서도, 찢김을 싸매임 받고 치유되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인이 있을 자리는 오직 주님 앞이다.
일정한 빛 같이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안식처. 치유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자. 그런 하나님을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