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받지 않는 교회 속에 불완전한 그리스도인_2013.01.2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7.)

 

( 1:22-23, 개역)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헬라어 에클레시아. 구별된 무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라는 간판이 붙어진 건물은 은밀히 교회가 아니라 교회당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신약의 세계는 교회시대, 성령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종료된 후, 성령께서 그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으셨고 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기록을 담은 복음서에서는 교회란 표현이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단 두 번 나타난다.

 

(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18:17, 개역)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울 것을 베드로에게 설명하는 장면과 범죄한 형제에 대한 마지막 권면의 권위가 교회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부터 실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오순절 강림하시면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와 역사의 그 종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는 영혼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감당케 될 것이다. ?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분신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존재와 의미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에 대한 중요하고 수많은 진리가 있겠지만 오늘 이 지면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는 과연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성경은 판단하는 것을 특별히 경계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기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이 판단한다라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정리해야 할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과연 우리가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판단하는 존재이다. 무엇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살아서 지정의(知情意)를 본능과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이상 우리가 판단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행위일 뿐이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판단을 경계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준과 가치관, 지식의 고저(高低) 정도에 따라 모든 현상과 사물과 사람과 상태들을 판단하고 비평할 수 있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판단치  말라라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정죄하지 말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이다. ,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이 있지만, 그것을 정죄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삼가란 의미이다. ? 하나님께서 만물을 판단하셔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시고, 상 주실 것과 벌 주실 것을 판단하셔서 정의롭게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지식으로 무엇을 판단해 비평하고, 정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다툼과 분열이고 오판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을 잘 모르면서 옳은 것도 그른 것으로 판단하고 비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었다고 해 안식일을 범한 자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일 뿐 아니라 안식일에 누구든지 자기 양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겠느냐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되물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선을 행하는 것조차도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으로 정죄하는 것이 율법적 사고였다. 누구나 이러한 고정관념이 있다. 자기 기준에서 옳고 그른 것으로 사람을 비평하는 본성이 있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 어떤 일련의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던 적이 있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제물에 피를 섞은 일과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이 죽었던 사건을 언급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오판을 정확히 꿰뚫고 권면해주었다. 그들이 너희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너희들 역시 회개치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이다. , 그들은 그 망한 자들이 특별히 더 죄가 많아서 그런 횡사를 당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이는 오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판단치 말 것을 우리에게 종용한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어떤 누군가가 교회를 판단할 수 있을까? 분명, 그 대답은 ‘NO’이다. 교회를 판단하게 되고,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사람은 교회의 구성원들 즉, 성도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완전에 대해 지적한다. 그러나 분명이 잊지 말고,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며, 교회를 판단하는 근거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며, 교회가 그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현현이다.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다만, 교회 안에 판단할만한 일들이 있는 것은 아직은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이 완전해진 것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영혼과 내세의 문제일 뿐이다. 여전히 연약한 본성과 죄의 유혹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8:10) 그러므로 우리가 혹 성도간의 허물이 있을 수는 있고,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판단케 되는 경우가 혹 생길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불완전한 사람에 대한 판단이 교회에 대한 판단으로 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그 초점을 일직선상에 놓는 것은 명백한 패착이다. 불완전한 사람의 부족으로 인해 마치 교회 자체가 잘못되고, 큰일이나 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백한 실언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은 아무 사람에게도 판단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날에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각 사람 마음의 은밀한 것이 다 드러나고 판단하시게 될 것이다.(고전4:5)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교회와 성도를 판단하기 좋아하는 그리스도인 본인은 완전한 것일까? 우리가 역사와 위인에 대한 조금의 지식만 가지게 되어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없었으며, 완벽한 교회가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그 권위와 권세 있어서 완벽하다.(1:22,16:18) 다만, 구별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써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 불완전한 사람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란 차원에서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 종교암흑의 시기, 카톨릭의 이단적인 교리 아래에서 영혼들이 죽어갈 때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방아쇠를 당긴 존 칼빈. 그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아버지처럼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시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러한 재세례파의 신념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재세례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핍박을 허용했던 것이다. 카톨릭이란 거대 세력으로부터 박해받던 프로테스탄트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모순이 나타났던 사건이었다. 위대한 부흥사 조지 휫필드는 노예제도의 찬성론자였다. 영국대각성운동의 또 다른 중심인물인 존 웨슬리는 구원받은 성도도 또 다시 타락하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전했다. 개혁신앙의 정통진영의 주요 인물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에 있어서 후천년설을 믿었다. , 어느 세대 어느 위대한 인물이 되었든 그 어디에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어 꼬투리 잡힐 그 어떤 허물과 약점이 없이 주님을 섬겨왔던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교회로부터 부족함이 있을 수 있고, 우리의 형제 자매로부터 연약함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교회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실로 인정한다 라면, 하나님은 각 세대와 각 족속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모습과 모양으로 그 세대에 충분한 교회를 허락하신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완전하신 나의 하나님을 믿는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복음이다. 복음 하나면 충분하다. 복음이 아니고서 도대체 뭘 더 바란단 말인가. 충분히 말했다. 칼빈도, 휫필드도, 웨슬리도, 에드워즈도 그 누구도 완벽한 교리, 완벽한 신앙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모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다 그 나름의 부족과 연약함이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복음이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가 교회를 판단할 수 있으며, 누가 교회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대해서는 혹 흠을 잡을지언정 그것조차 그렇게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다. 동일한 복음을 나누었기 때문에 말이다.

 

교회를 폄하하고, 교회를 판단하면서 무엇이 옳고 바른지를 말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생각이 다른 또 누군가는 불평할 것이다. 사람은 다 기준이 다르다. 생각하는 범위와 넓이도 다르고,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관도 다 크고 작게 다르다. 그러므로 복음 하나만 생각하면 그 모든 오해와 차이를 뛰어넘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만물보다 가장 높고 존귀한 교회를 그렇게 쉽게 비평하지 않을 수 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역할, 그 질서에 대해서도 우리는 존중할 수 있다. 불완전한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그 안에 종종 어려움과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교회의 질서와 윤리를 벗어난 불만표출이나 반항과 같은 어떤 것이 되었을 때는 숭고해질 수 없는 법이다.

 

(엡 4:11-12, 개역)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주홍글씨 청목 스테디북스 44
나사니엘 호손 지음, 김종건 옮김 / 청목(청목사) / 2001년 1월
절판


나다나엘 도호손의 대표작.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식민지. 지금의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 중심의 어느 청교도 마을에서 벌어진 한 유부녀의 부정을 놓고 사건은 시작된다. 아름다운 유부녀 헤스터 프린은 남편보다 먼저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고, 남편은 1년 이나 뒤에 온다. 그 사이 헤스터는 다른 남자와 부정을 맺고 아이를 출산한다. 그리고 그 마을을 담당하는 유능하고 경건한 딤즈데일 목사는 헤스터를 최대한 보호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드는 헤스터와의 협상을 통해 자기 존재를 숨긴 채 이 마을에 의사행세를 하며 자리를 잡고, 도대체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른 그 남자가 누구인지 집요하게 추적하기 시작한다. 헤스터는 간음한 여인이라는 표식으로 가슴에 곱게 수놓은 주홍글씨 A를 늘 달고 다니며 사람들의 정죄를 받는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부정을 저지른 남자는 어딘가에서 숨어 자신의 죄값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 칠링워드는 복수심에 불탄다. 그리고 그 상대남자를 알아내게 되고 철저히 복수를 일삼는다. 드러내지 않고, 교묘히 그 자의 곁에서 그 양심과 도덕성과 정신을 후벼파면서 죄책감에 시다려 죽어가도록 한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그 남자가 헤스터와 그들의 딸 펄을 끌어안고 마을의 처형대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죽는다. 작가가 말하는 의도는 이것이다. '죄는 반드시 밝혀지고 자백되어져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영화 '폰부스'의 원작가 래린 코헨이 의도하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나 래리 코헨은 폰부스에서 '죄를 깨닫고, 정직하게 자백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라면 나다나엘 도호손은 구원의 가치까지는 다가서지 않는다. 오히려 딤즈데일 목사의 이중인격을 비웃는다. 소설에서 딤즈데일은 시종일관'경건하고 유능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그러나 이면에는 정욕을 참지 못하고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르며, 그 죄를 용감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의지박약한 한 명의 위선자'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설이 청교도적 가치관의 세대에서 자라난 작가가 청교도적 가치를 보여준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다나엘 도호손은 청교도의 그러한 엄격한 경건주의를 일종의 위선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실패한 경건한 목사 딤즈데일로 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죄를 자백해야 된다'는 그의 논리는 청교도적인 경건주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조차 근본적으로는 죄의 욕망을 가진 것에 불과하며, 그럼에도 경건한 척하는 위선을 자백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나다나엘 도호손은 청교도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 청교도적 문화에서 자라면서 그 청교도적 가치에 대해 위선적이라고 결론내린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른 상대방을 굳이 목사로 설정했겠는가. 물론,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죄의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성경도 인정하는 법이다. 그러나 오히려 래리 코헨과 같이 '자백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결말이다. 그러나 도호손은 그것은 외면했다. 그는 단지 경건하고 유능한 목사이나 타락한 본성의 인간으로 그를 그려내고 전혀 죄의 죄책감에서부터 해방되지 못한 채 죽음까지 이르는 나약한 인간으로만 그려낸다. 위선을 폭로하고 싶은 그 갈망만으로 소설을 그려낸다는 점이 안타까운 것이다.

한편, 이 소설은 영화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비추이다. 원작을 파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원작에서 부정을 저지른 상대방이 드러나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독자들의 궁금증과 치밀한 내면세계의 묘사. 죄로 인해 갈등하는 딤즈데일의 심리와 갈등을 조금도 그려내지 못한 치졸한 작품이다. 주홍글씨란 작품은 적어도 그 목적하는 바와 논리에서 씁쓸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갈등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심리소설이란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노인과 바다 청목 스테디북스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혜리 옮김 / 청목(청목사) / 2010년 11월
판매중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해밍웨이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어부로서의 인생이 지고 있는 한 노인을 다루고 있다. 아내도 먼저 죽고, 낚시를 가르쳐주던 소년은 더 이상 노인이 수확이 없자 그 부모의 요구로 다른 배에 승선한다. 그렇게 쓸쓸히 홀로 낚시를 나간 노인은 자기 조각배보다도 더 큰 녹새치가 낚시에 걸리게 된다.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놈은 쉽게 지치지 않고 노인과 실랑이를 벌이며 멀리멀리 바다로 더 나아간다. 그 넓은 바다에서 꼬박 이틀을 노인과 씨름한 녹새치는 결국 잡히게 된다. 그러나 얼마뒤 피냄새를 맡은 상어가 덮치고 노인은 사투를 벌인다. 상어를 이겼지만 녹새치도 어느 정도 뜯겨져 버렸다. 또 상어떼가 나타난다. 노인은 또 싸운다. 그러기를 세 번. 항구에 닿았을 때 녹새치는 뼈가 앙상히 드러나 있다. 노인은 오두막으로 올라와 깊은 잠에 빠진다. 인생이 저물어가는 노인과 녹새치와의 기나긴 사투를 투박하면서도 치열하게 묘사하고 있는 동시에 그 많은 수고를 무색케하는 허무한 귀항은 치열한 인생과 그 뒤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에 대한 사색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헤밍웨이 역시 자살로 그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헤밍웨이의 파란만장한 삶의 자서전 같이 느껴질 법하다. 한편, 수많은 번역본이 있지만 이 번역본은 그리 수월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번역자체가 좀 더 작품의 감수성을 살려주지 못한 채 너무 투박하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 얘기도 나왔는데 이쁜 보라보라 바다 구경 한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적독서를 위한 지침_since2005

 

 

(고후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 나는 균형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여 어느 극단으로 기울지 않는다.

2. 나는 지나친 비난을 주의한다. 긍정할 바 긍정하고 주의할 바 주의한다.

3. 나는 칼빈주의나 알마니안주의와 같은 어떤 주의에 연연치 않는다. 신학의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관점에서 신학을 이해한다.

4. 나는 나 자신이 됨으로서 그 누구를 답습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내게 비춰주시는 성령님께 의존한다.

5. 나는 거성들의 체험 및 그들을 이끄신 하나님의 섭리를 내게 무분별하게 적용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을 주의한다.

6. 나는 경직된 사고를 조심한다. 소위 ‘A는 반드시 B이다’라는 논리에 완전히 지배되지 않도록 한다. 어느 지식이든 완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한다.

7. 나는 주님이 머리 되신 교회를 신뢰하며 배척하지 않도록 유의한다. 불완전한 사람과지식으로 인해 교회 자체를 폄훼하지 않는다.

8. 나는 영적독서가 내 삶에 있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배움에 그 목적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지적 역량으로  헛된 자랑과 가르치기지적 우월감과 독단적 사고, 망상의 교만에 빠지는 것을 주의한다.

9.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음의 분량을 넘지 않도록 주의한다. 영적독서는 지식의 최고를 얻는 것이 아님을 안다.

10. 나는 책의 저자들이 목회자로서 그 가르치는 방식과 방향이 목회적 태도이며 타 목회자들에게 주는 가르침 역시 많음을 고려할 때내 위치를 넘어 판단하는 것을 주의한다.

11. 나는 혹 지금껏 알지 못한 어떤 새로운 교리나 교훈을 발견함으로써 흥분에 휩싸여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주의한다.

 

 

많이 연구하는 사람은 많이 기도할 줄 알아야 하고, 배우는 만큼 경험할 줄 알아야 한다. 영적독서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의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BH,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7.14일 간의 항해_2011.04.14.

 

 

사도행전 27:8-44까지 바울이 로마로 가면서 승선한 배의 위기로부터 발견하는 징계와 회복의 묵상

 

 

1.

(27:8-12, 개역)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성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 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바울을 태운 배가 시돈에서 항해를 시작해 이제 미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미항이 불편했고, 그래서 가능한대로 뵈닉스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금식기간이 지난 9-10월 이었으므로 바다의 풍세는 좋지 못했고, 항해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경계시켰으나 그들은 한낱 죄수 바울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뱃꾼의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뵈닉스로 재차 출항했던 것이다.

 

바울이 그들의 출항을 경계시킨 것은 객관적으로 항해하기에 힘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말미암는 권면이었다. 그러나 황실군대 백부장 율리오는 뱃꾼의 말을 더 존중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권면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바울은 뱃꾼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존중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장과 선주는 뱃꾼이기 때문에 좀 힘들지만 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린 것을 존중해주었다. , 무엇보다 미항은 아름답지만 불편했기 때문에 그들은 편하게 머물 수 있는 뵈닉스로 가길 원했다. 그러므로 무리한 항해를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2가지 주요 원인을 살펴보게 된다. 먼저, 우리는 현재의 상태에 불만족하고,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과 교만, 허영심과 명예욕 때문에 하나님의 권면을 무시하고 무리한 항해를 시도하게 된다. 또한, 그들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항해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배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배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다며 그들은 애초에 무리한 항해를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능력과 달란트로 말미암아 쉽게 교만해지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높임으로써 불순종하게 된다. 우리는 쉽게 우리의 재능으로 상대적인 비교우위에 서고, 조건들을 따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정의내려 버린다. 그럼으로 불순종하고 시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1:14-16, 개역)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과 능력을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 한편, 모세의 경우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12:3, 개역)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20:10-12, 개역) [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의 최대 장점은 온유함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내면서 분노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함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을 잃어버렸다. , 모세는 자신이 가진 최대의 장점을 제어하지 못한 한번의 결정적인 실수로부터 가나안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장점과 재능이 있다. 그러나 이 재능이 오히려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뱃꾼들이 그들의 항해술을 믿고 무리한 항해를 시도한 것처럼.

 

 

2.

(27:13-17, 개역)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그들의 무리한 항해는 그 첫 출발이 매우 좋았다. 그들은 바울을 비웃었을 것이다. 죄수 주제에 뱃길도 모르는 녀석이 나섰다고 말이다. 그들은 거만했고, 득의한 줄 알고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그 다음 14절이 된 것이다. 불과 오래지 않아, 전혀 예기치 않은 갑작스런 유라굴로 북동풍이 바다에 내려치기 시작했다. , 징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징계의 전부가 아닌 처절한 징계의 시작에 불과했다.

 

한편, 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목적으로 니느웨의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하고자 욥바항으로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던 것이다. 분명, 요나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가 다시스로 출항했을 때 풍랑(아마도 유라굴로일 것이다.)을 만났으며, 요나는 바다에 던져져 고래 뱃속에서 징계를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 나아갈 때, 우리의 능력을 의지해 보다 나은 이기심을 쫓아갈 때 처음 그 시작은 득의한 것처럼 순조로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내 유라굴로가 대작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 중 누군가는 이 유라굴로 앞에 있을 수 있다.

 

이내 배는 밀려 바람에 휩쓸리는데로 흘러갔다. 이는 징계에 휘말려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유라굴로를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바람을 일으키고 물결을 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모든 환경을 움직이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치심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그리고 가우다란 작은 섬 아래로 지나는데 그들은 가우다로 갈 수 없었다. 징계 중에 작은 소망이 보이지만 그것은 다가서기에 멀고, 징계의 물살로부터 다가서 안전을 얻기에 불가능하다. 그들은 가우다로 향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우다를 지나면서는 겨우 거루를 잡아끌어 올려 단단히 묶을 수 있었는데 마치 이 모습은 징계에 놓이면서 근신하고, 회개하고, 경계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동시에 거루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징계는 있으나 멸망은 없을 것임을 암시해준다.

 

두렵고 조심스레 그들은 풍랑에 휩쓸리면서도 스르디스 곧, 모래톱에 걸릴 것을 조심한다. 그러나 그냥 물살에 쫓겨 갈 뿐이다. 징계 중에 있을 때 우리 역시 더 큰 징계, 더 큰 난관에 처하지 않을까 근신하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징계의 물살에 갈피를 못 잡고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징계 중의 우리 모습인 것이다.

 

 

3.

(27:18-19, 개역)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선장과 선원들, 율리오와 군인들까지 모두가 심한 풍랑으로 심한 애를 써야만 했다. 그 밤낮으로 휘몰아치는 광풍과 비와 성난 파도의 한 가운데서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키를 잡고, 각자 배에서 사투를 벌였다. 이와 같이 징계의 풍랑은 우리의 영혼 깊은 것을 뒤흔들고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고뇌와 괴로움, 고통과 쓴 잔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원들은 짐을 바다에 벌었다. 자발적으로 배의 기구들마저 버렸다. 그들이 버린 짐 가운데는 매우 중한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징계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근신하는 가운데 우리가 평소 귀중품처럼 끼고 있던 자기의 오만과 허영심, 교만과 욕심, 불순종하는 마음을 버린다. 그리고 선원들은 배의 기구마저 버렸다. 그것은 배의 장치들이었다. 장치들에는 배를 운용하고, 수리하고, 배가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마저 버렸다. 마치 치열한 징계속에서 우리는 짐을 버릴 뿐만 아니라 차츰 자기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자아마저도 포기하고 버리게 된다. 저희 손으로 버렸던 것처럼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전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의지하게 된다. 자기 생각과 뜻을 버린다.

 

 

4.

(27:20-22, 개역)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날씨는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광풍과 비와 성난 파도와 더불어 사투해야 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질 지경이었다. 징계의 때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차츰 낙심하고 좌절하게 된다.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만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여겨질 정도가 된다. 그러므로 구원이 여망이 없어졌다는 것은 오랜 징계로 말미암아 절망에 빠진 우리의 마음상태를 말해준다.

 

또한, 오래 먹지 못했다. 밤낮을 사투하다보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 이는 징계의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발생하는 영육간의 결핍과 곤핍을 말해준다. 그리고 바울은 결정타를 날린다. ‘내 말을 들었더라면...’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처음 순종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반성에 휩싸인다. 덧붙여 바울은 순종했더라면 타격과 손상을 면했을 것이라고 뼈아픈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 징계의 기간은 사실 소모전이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징계는 안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손상이 있지만 그것이 영구적인 손상이 되지는 않는다. 징계로 인한 일시적인 손상에 불과하다. 징계로 인해 우리 영혼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2:11, 개역)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리고 바울은 이어 말하길 이제는 안심하라고 했다. 이는 징계 중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고, 오직 배만 손상될 것이라 했다. 이처럼 징계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손해를 야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징계로 인해 우리가 멸망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직 배만 손상된다. ,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그 수단이 파괴된다. 그러므로 징계의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 영혼에 어떤 손해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려고 했던 그 수단과 방법을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파괴시켜버리시는 것이다.

 

5.

(27:26, 개역)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우리가 주 안에 머물고, 올바르게 근신하고 회개할 때 징계에도 끝이 있다. 이 한 섬은 징계로부터 우리를 다시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신 하나의 기회이자, 회복의 장소, 회복의 시기이다.

 

 

6.

(27:27-32, 개역) [27]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28] 물을 재어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 이에 군사들이 거룻 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14일 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차츰 구원의 여망에 가까워지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14일 간의 항해란 것이 결론이 나서 망정이지 그들이 이 14일 이란 기간을 채우기 전까지는 도대체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막연함과 공포와 두려움 속에 그 망망대해의 바다를 해와 달조차 보지 못하고 먹구름과 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와 더불어 사투해야 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공황이자 공포, 고통과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14일의 방황이 채워져서야 그들에게 구원의 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가 징계의 기간을 보낼 때 얼마나 보이지 않는 구원의 막연함 속에서 고통 받게 되는지 짐작케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14일은 적어도 이 묵상에서는 상징적인 의미의 기간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징계의 기간이 몇 달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몇 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차츰 회복의 시기와 기회에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전히 암초에 걸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가 징계의 때에서 차츰 벗어날 시기가 될 때에도 여전히 암초와 같은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특별히 마귀는 우리가 징계를 벗어나 회복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럼으로 마귀는 우리가 좀 더 좌절해 있고, 용기를 잃고 있고, 징계 아래 놓여 있을 수 있도록 암초를 마련해둘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암초를 피하기 위해 성급히 육지로 향하기만을 선택하지 않고 조금 인내하고 날이 새길 기대했다. 날이 새어 주변이 온통 밝아지면 뱃길도 보일 것이며, 물길도 보일 것이며, 바다 아래 암초도 볼 수 있을 것이므로 그들은 암초를 피해 안전히 항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구원의 기회에 가까웠을 때 잠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밝게 나타나기를 잠시 기다려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정확히 분별해서 나아갈 수 있다.

 

한편, 날이 새어 주변이 밝히 보이자 사공들이 도망하려고 거룻배를 내리고자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군인들은 거룻줄을 끊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여기서 이 사공들이 도망치려는 모습은 우리가 오랜 징계를 통과하다보면 그 고난에 지쳐 섣불리 안전을 얻고, 건짐을 받고 싶어하는 성급함에 유혹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바울이 허락지 않고, 그들이 배에 있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속히 징계를 벗어나 회복되고, 안전을 얻기 위해 섣불리 나서는 실수를 제어해야 한다. 배에 그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섣부른 행동과 판단의 실수를 제어하란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거룻배의 줄을 끊어버렸다. , 구원을 얻으려는 자기수단과 방법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7.

(27:33-38, 개역) [33]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37]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인이러라 [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다시 안정을 얻은 배 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동안 그들이 심히 굶주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음식을 먹을 것을 권했다. 징계의 고난 속에서 우리는 영육간의 결핍과 곤핍을 경험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긍휼에 목마르다. 그러나 이제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회복되고, 다시 공급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다 먹고, 배부르게 먹고 남은 밀은 바다에 버림으로써 더 이상 과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징계를 통과할 때 우리는 이제 겸손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순박해지며, 자기의 분수를 알게 된다.

 

 

8.

(27:40-41, 개역) [40]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

 

그들은 접어둔 돛을 다시 올려 펼쳤다. 지난 14일 동안은 그 거친 풍랑으로 그들은 돛을 펼치 수 없었다. 만약, 그 풍랑 속에서 돛을 펼친다면 그것은 배가 뒤집힐 것이므로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이제는 돛을 펼 수 있었다. 그럼으로 바람을 받아 적절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돛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삶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우리의 목적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나아가는 방향이 달라진다. 폭풍 속에서는 이 돛을 펼 수 없다. 목적과 방향을 잃고 파도가 치는대로 휩쓸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돛을 폈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 있는 그 연안으로 돛의 방향을 맞추어 나아갔다.

 

그러나 갑자기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에 이르러 갑자기 배는 모래톱에 부딪힌 것이다. 그러므로 배의 앞편은 모래톱에 묻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배 뒤편은 파도에 깨져가기 시작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구원의 여망 앞에서 또 다른 고난과 위기일발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바울은 오직 이 배만 손상될 것이라 앞서 말해주었다. 이 배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이 배는 구원의 항구에 당도해야할까? 아니다. 이 배는 이 바다에서 파괴되고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우리가 징계의 터널을 통과해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항구에 도착할 때는 우리의 불순종하는 수단과 방법들은 버리고 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두 물이 합류한다는 것은 난관이기보다 불순종의 수단을 가로막아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그 연안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필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두 물은 아마 순종과 회개 또는 하나님 앞에 정직함 등의 의미를 내포할 것이다.

 

 

9.

(27:42-44, 개역) [42]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 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한편, 여기서 또다른 위기가 재발되고 있다. 배가 모래톱에 걸리고 파선해가지 그들은 모두 이 배에서 탈출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그러므로 죄인들이 도망칠 소지가 다분해졌고, 그래서 군인들은 죄인들을 죽이자고 말한 것이다. 이는 곧, 바울을 죽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백부장 율리와 그것을 가로막고 나섰다.

 

여기서 군사들과 율리오는 사로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큰 징계의 풍랑을 지나왔다. 심지어 군사들은 사공이 도망치려 할 때 바울이 그들을 붙잡아야 할 것을 말하자 거룻줄을 끊으면서까지 바울의 말을 존중했다. , 처음 바울을 무시했지만 바울의 말처럼 큰 어려움을 겪은 후 그들은 가난해졌고, 겸손해졌고, 바울의 말을 존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시 바울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이 군사들과 율리오는 징계를 통과한 이후에 나타나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여준다. 먼저, 군사들은 징계의 큰 고난을 통해 바울의 말을 존중하게 되는. , 회개와 큰 교훈을 얻었지만 이내 그 교훈을 망각하고 다시 오만방자해지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 큰 징계를 통과한 후 그들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해야할 것을 교훈 받았음에도 이내 다시 교만해지고, 받은 교훈을 죽여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습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한편, 이 율리오는 징계를 통과한 후 바울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존중하게 되는 즉, 하나님 말씀 앞에서 신중해지고 정직하게 되는 사람들. 징계를 통해 큰 교훈을 받고 주의 율례를 지키게 된 사람들이다.

 

또한, 이 배를 버리고 사람들은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 배는 버려져야할 배였다. 탈출하는 사람들은 크게 2~3부류로 나뉜다.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헤엄쳐 해안가로 나아갔다. 그러나 수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널조각이나 배의 물건을 의지해 해안으로 나아갔다.

 

징계로부터 회복의 시기와 기회가 왔을 때도 그러하다. 말씀 안에 성장한 사람이나 스스로 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해안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구원의 기회 앞에 왔지만 어떻게 가야할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 교제와 권면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결국 전부다 육지에 당도해 구원을 얻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징계의 궁극적인 결과이다.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망하고 실패하고 잃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시다.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선하고 아름답다. 그들이 다시 땅을 밟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격했을까!

 

특히, 그들이 당도한 이 섬은 말타란 섬으로 결과적으로 그들이 로마로 항해하는데 있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이었다. , 그들은 그 성난 파도 속에서 휩쓸려 갔지만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떠내려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로마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징계 중에서도 우리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소원의 항구로 나아가도록 이끌어가시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그 징계의 처음과 끝까지 태연하게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며 동행했다. 바울은 그가 결코 바다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전 하나님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게 될 것을 계시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징계의 고통 속에 함께 참예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이 바울의 의롭고 완전한 모습은 우리가 징계의 크나큰 고통을 겪고 그 긴 터널을 통과해 나올 때까지 변함없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10. 결론

 

무엇보다 우리는 이 바울의 항해와 풍랑의 사건을 통해 근본적으로 이러한 큰 시련과 징계가 어디서부터 말미암았는지 되짚어보고 교훈을 삼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존중하고 순종하지 않았고, 육신적인 편리와 이기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얄팍한 시도와 가능성에 더 비중을 두었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듣고 배운다. 우리의 욕망, 자기의 뜻과 의지, 자아를 쫓지 말고 하나님을 쫓고 고난에 참예해야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아는 바지만 사실은 내 욕망과 이기심과 나의 편리와 허영심과 오만과 교만과 명예욕과 자랑을 쫓아 행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덧붙여 우리는 자기가 가진 능력을 의지하고, 과신하며 그것을 비교우위에 두고 교만해져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근거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쫓고 있진 않은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지 판단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정말 그것이 내 신앙에 유익되어 하고자 하는 것이지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오히려 고난에 참예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시고 영광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고 얄팍한 꾀를 쓰고, 고난을 피해 육신적인 영광을 얻으려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고난의 풍랑으로 휩쓸려가게 하신다.

 

한편, 배에 그 선원들이 그 풍랑의 기간 동안 배의 짐과 기구들을 내버린 것처럼. 그들은 큰 회개와 반성과 그릇된 판단으로 무리한 항해를 시도한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고후 7:10-12, 개역)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이 근심은 신령한 근심이다. 신령한 근심, 회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이다. 그들은 진실한 회개와 근심 속에서 간절했고, 자기 잘못을 쭉 열거하고 되짚어보면서 그릇된 결정에 대해 변명했다. 반성했다. 자기의 부주위와 정직하지 못함에 대해 분노했다. 두려웠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했다. 정직을 사모하고 열심 냈다. 자신의 그릇됨을 스스로 자책함으로 벌했다. , 배의 짐과 기구를 내버림으로써 그들은 일절 깨끗함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간절함과 참된 회개와 반성은 바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할 것들이다. 우리는 종종 회개와 반성을 간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말뿐으로 그칠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후회와 각성과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근신함과 회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쏟아 부어져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은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한다.

 

(7:10, 개역)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