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이웃 돕기는 하나님의 은혜 받는 비결이다 - 조나단 에드워즈 명설교 시리즈 7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백금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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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명설교 시리즈'란 테마로 발행된 소책자이다. 구입한 건 아닌데 괜찮은 독자였는지 증정품으로 삽입되어 왔다. 얇은 책자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원제는 'Much in Deed of Charity' 뭐, 풍성한 자선행위. 그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굳이 '불우이웃돕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이다.'라고 설교가 전달하는 중심메시지로 제목을 바꿨는지는 모르겠다. 부제 정도로 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에드워즈가 맘에 들어할까? 본문으로 채택된 말씀은 고넬료이다.

 

(행10:4-6)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본문으로 부터 고넬료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게된 동기, 성령을 입은 계기가 바로 그의 기도와 구제의 풍성함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더불어 잠언의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잠11:25). 세례요한의 가르침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 등 자선과 관계되는 여러 말씀들을 병행인용하며 자선이 신자에게도 매우 필요한 행위이며,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통로라고 말씀한다.

 

분명, 이 설교의 메시지로 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 대한 자선과 성도에게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설교 그대로를 인용하자면 자선은 신자의 의무이다.)

 

한편, 내용 중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도 있었다. 의구심이라고 해야겠다.

 

(마 7:13-14, 개역)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자선을 의무사항으로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라는 것이다.(p.37)

 -(본문중)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원칙이 아주 좁고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문과 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언뜻보면 평범해보인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흐름에서 이 구절이 자선이 의무임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에 정리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5장, 6장에서 자선을 언급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러나 산상수훈에는 수많은 메시지들이 담겨있다. 팔복. 율법. 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사랑. 구제. 주기도문. 재물. 걱정마라. 비판하지 마라.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 좁은문 등등.

그러므로 이 좁은 문에 대한 구절이 자선과 연관된다는 해석은 나로서는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내가 볼 때는 이 구절은 여러 산상수훈 중 하나인 좁은 문에 대한 교훈. 천국에 가는 길이 그만큼 좁고 협착해 천국에 가는 사람이 적다는 그 교훈일 뿐이다.

 

두 번째,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로 인해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말한다.(p.44)

 -(본문중) 고넬료처럼 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고넬료와 같이 성공하는지, 성령이 충만해지는지, 그리스도와 친밀해지는지를 보십시오.

 첫째, 자선 행위는 성령이 특정 개인의 영혼에 신령하고 달콤한 영향력으로 다가오게 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둘째, 만일 부모나 가장들이 자기 집의 소유를 자선하는 데 많이 사용한다면 자선 행위는 성령이 가족 위에 부어지는 좋은 방법입니다.

 셋째, 한 집단이 사람들이 자선 행위를 풍성히 하면 성령이 사람들 위에 충만히 부어집니다.

 

그리고 휫필드나 어떤 부흥사들의 자선행위를 통한 부흥과 성공적인 사역도 말한다.

다만, 다소 모호한 것은 있다. 우선,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그 들으심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베드로를 초빙하게 되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이 임했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에서 처럼 자선행위 자체가 성령의 개인적인 임재나 가족단위의 임재가 된 근거라고 정의하는 것에는 애매하다. 그것이 성령을 받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수는 있겠지만, 자선행위 자체가 성령충만을 받는 직접적인 동기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느낌이다. 오히려 직접적인 동인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고넬료의 구제가 성령충만의 결과를 얻기 위한 최초의 동기제공은 됐지만, 그 자체가 성령충만의 직접적인 동인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베드로를 초빙해 설교를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 성령충만의 직접적인 동기였다는 것이다.

 

성전의 미문의 앉은뱅이는 자선행위는 커녕 자선을 받아서 살아갔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을 때 그는 성령충만하여 뛰고 걸으며 찬양했다. 성령은 자유롭게 일하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임재하신다. 물론, 에드워즈는 자선행위가 성령충만을 받는 하나의 유력한 방편이 된다는 얘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만, 본문에서 처럼 '자선행위=성령충만' 과 같이 자선행위 자체가 직접적인 성령충만의 동기라고 단정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단순히 에드워즈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접근하는 그리스인들에게 편견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머지 판단은 또다른 독자들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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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하나님의 격려 한마디 365 매일 아침 365 시리즈 4
찰스 H. 스펄전 지음, 장남혁.심광수 옮김 / 두란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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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하는 우스개소리지만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똑똑했던 걸까?'

물론, 지금이 더 많은 학문과 다양한 분야를 배우고, 더 새롭고 세련된 고급지식을 배우기 좋을 것이다. 전반적인 지식수준은 오늘날이 훨씬 높은 것은 분명하다. 상대적으로 과거 사람들의 지식수준은 근대적이지는 못했고, 평균적으로 높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수의 인물들에게는 유독 두드러지는 학문적인 우수함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듯이.

 

신앙의 많은 위인들을 보면 그들이 비교적 당대의 보편적인 지식수준보다 굉장히 우수한 인재들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글쎄, 그것인 단지 머리가 비상하다는 의미로 제한할 수는 없지만 학문적인 열의와 탐구심이 투철했다고 할 수 있겠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선구자였던 칼빈, 루터, 츠빙글리 등 그들이 그러했고 수많은 청교도들도 그러했다. 그리고 이 사람 스펄전도 마찬가지.

 

과거 많은 설교자들이 신학교라든지 정규학업이라든지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던 사례와 같이 스펄전도 17세 때 부터 설교를 했다. 20세 담임목사로 청빙되었다. 상당히 놀라운 일 아닌가? 휫필드도 소위 소년목사로 데뷔했다. 오늘날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정규학업을 국가 보장하고 있고, 정규대학이 일반적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지적부족함' 내지 '불량'으로 오인되기 쉽상이다. 비록 어린 나이에 목회의 일선에서 설교를 감행했지만 그렇게 능력있는 설교와 목회로 후세대에 귀감을 주는 많은 신앙위인들에게 은혜를 입는다.

 

본서는 스펄전의 3000편의 설교 중 2000편을 집중분석해 1일 1주제별로 메시지를 담고 있다. 365일 하루 한 편 씩 읽고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총 365편의 메시지가 실렸다. 성경구절 한 절과 설교의 메시지. 읽기에 부담도 없고, 대중적인 설교인데다가 위로와 묵상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기에 아주 훌륭한 편집이라 생각된다. 좀 쉽게 풀어보면, 설교를 듣는 중 은혜가 되는 말씀을 적어두듯이 이 책은 조각설교모음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내가 얻는 묵상과 위로의 메시지 뿐 아니라, 형제자매님에게 위로의 문자 하나를 보내고 싶을 때도 유용하게 활용되어질 수 있는 이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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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받지 않는 교회 속에 불완전한 그리스도인_2013.01.2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7.)

 

( 1:22-23, 개역)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헬라어 에클레시아. 구별된 무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라는 간판이 붙어진 건물은 은밀히 교회가 아니라 교회당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신약의 세계는 교회시대, 성령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종료된 후, 성령께서 그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으셨고 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기록을 담은 복음서에서는 교회란 표현이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단 두 번 나타난다.

 

(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18:17, 개역)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울 것을 베드로에게 설명하는 장면과 범죄한 형제에 대한 마지막 권면의 권위가 교회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부터 실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오순절 강림하시면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와 역사의 그 종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는 영혼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감당케 될 것이다. ?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분신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존재와 의미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에 대한 중요하고 수많은 진리가 있겠지만 오늘 이 지면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는 과연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성경은 판단하는 것을 특별히 경계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기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이 판단한다라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정리해야 할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과연 우리가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판단하는 존재이다. 무엇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살아서 지정의(知情意)를 본능과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이상 우리가 판단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행위일 뿐이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판단을 경계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준과 가치관, 지식의 고저(高低) 정도에 따라 모든 현상과 사물과 사람과 상태들을 판단하고 비평할 수 있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판단치  말라라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정죄하지 말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이다. ,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이 있지만, 그것을 정죄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삼가란 의미이다. ? 하나님께서 만물을 판단하셔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시고, 상 주실 것과 벌 주실 것을 판단하셔서 정의롭게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지식으로 무엇을 판단해 비평하고, 정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다툼과 분열이고 오판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을 잘 모르면서 옳은 것도 그른 것으로 판단하고 비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었다고 해 안식일을 범한 자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일 뿐 아니라 안식일에 누구든지 자기 양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겠느냐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되물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선을 행하는 것조차도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으로 정죄하는 것이 율법적 사고였다. 누구나 이러한 고정관념이 있다. 자기 기준에서 옳고 그른 것으로 사람을 비평하는 본성이 있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 어떤 일련의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던 적이 있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제물에 피를 섞은 일과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이 죽었던 사건을 언급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오판을 정확히 꿰뚫고 권면해주었다. 그들이 너희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너희들 역시 회개치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이다. , 그들은 그 망한 자들이 특별히 더 죄가 많아서 그런 횡사를 당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이는 오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판단치 말 것을 우리에게 종용한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어떤 누군가가 교회를 판단할 수 있을까? 분명, 그 대답은 ‘NO’이다. 교회를 판단하게 되고,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사람은 교회의 구성원들 즉, 성도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완전에 대해 지적한다. 그러나 분명이 잊지 말고,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며, 교회를 판단하는 근거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며, 교회가 그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현현이다.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다만, 교회 안에 판단할만한 일들이 있는 것은 아직은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이 완전해진 것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영혼과 내세의 문제일 뿐이다. 여전히 연약한 본성과 죄의 유혹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8:10) 그러므로 우리가 혹 성도간의 허물이 있을 수는 있고,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판단케 되는 경우가 혹 생길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불완전한 사람에 대한 판단이 교회에 대한 판단으로 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그 초점을 일직선상에 놓는 것은 명백한 패착이다. 불완전한 사람의 부족으로 인해 마치 교회 자체가 잘못되고, 큰일이나 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백한 실언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은 아무 사람에게도 판단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날에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각 사람 마음의 은밀한 것이 다 드러나고 판단하시게 될 것이다.(고전4:5)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교회와 성도를 판단하기 좋아하는 그리스도인 본인은 완전한 것일까? 우리가 역사와 위인에 대한 조금의 지식만 가지게 되어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없었으며, 완벽한 교회가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그 권위와 권세 있어서 완벽하다.(1:22,16:18) 다만, 구별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써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 불완전한 사람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란 차원에서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 종교암흑의 시기, 카톨릭의 이단적인 교리 아래에서 영혼들이 죽어갈 때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방아쇠를 당긴 존 칼빈. 그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아버지처럼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시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러한 재세례파의 신념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재세례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핍박을 허용했던 것이다. 카톨릭이란 거대 세력으로부터 박해받던 프로테스탄트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모순이 나타났던 사건이었다. 위대한 부흥사 조지 휫필드는 노예제도의 찬성론자였다. 영국대각성운동의 또 다른 중심인물인 존 웨슬리는 구원받은 성도도 또 다시 타락하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전했다. 개혁신앙의 정통진영의 주요 인물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에 있어서 후천년설을 믿었다. , 어느 세대 어느 위대한 인물이 되었든 그 어디에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어 꼬투리 잡힐 그 어떤 허물과 약점이 없이 주님을 섬겨왔던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교회로부터 부족함이 있을 수 있고, 우리의 형제 자매로부터 연약함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교회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실로 인정한다 라면, 하나님은 각 세대와 각 족속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모습과 모양으로 그 세대에 충분한 교회를 허락하신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완전하신 나의 하나님을 믿는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복음이다. 복음 하나면 충분하다. 복음이 아니고서 도대체 뭘 더 바란단 말인가. 충분히 말했다. 칼빈도, 휫필드도, 웨슬리도, 에드워즈도 그 누구도 완벽한 교리, 완벽한 신앙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모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다 그 나름의 부족과 연약함이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복음이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가 교회를 판단할 수 있으며, 누가 교회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대해서는 혹 흠을 잡을지언정 그것조차 그렇게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다. 동일한 복음을 나누었기 때문에 말이다.

 

교회를 폄하하고, 교회를 판단하면서 무엇이 옳고 바른지를 말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생각이 다른 또 누군가는 불평할 것이다. 사람은 다 기준이 다르다. 생각하는 범위와 넓이도 다르고,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관도 다 크고 작게 다르다. 그러므로 복음 하나만 생각하면 그 모든 오해와 차이를 뛰어넘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만물보다 가장 높고 존귀한 교회를 그렇게 쉽게 비평하지 않을 수 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역할, 그 질서에 대해서도 우리는 존중할 수 있다. 불완전한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그 안에 종종 어려움과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교회의 질서와 윤리를 벗어난 불만표출이나 반항과 같은 어떤 것이 되었을 때는 숭고해질 수 없는 법이다.

 

(엡 4:11-12, 개역)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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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청목 스테디북스 44
나사니엘 호손 지음, 김종건 옮김 / 청목(청목사) / 2001년 1월
절판


나다나엘 도호손의 대표작.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식민지. 지금의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 중심의 어느 청교도 마을에서 벌어진 한 유부녀의 부정을 놓고 사건은 시작된다. 아름다운 유부녀 헤스터 프린은 남편보다 먼저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고, 남편은 1년 이나 뒤에 온다. 그 사이 헤스터는 다른 남자와 부정을 맺고 아이를 출산한다. 그리고 그 마을을 담당하는 유능하고 경건한 딤즈데일 목사는 헤스터를 최대한 보호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드는 헤스터와의 협상을 통해 자기 존재를 숨긴 채 이 마을에 의사행세를 하며 자리를 잡고, 도대체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른 그 남자가 누구인지 집요하게 추적하기 시작한다. 헤스터는 간음한 여인이라는 표식으로 가슴에 곱게 수놓은 주홍글씨 A를 늘 달고 다니며 사람들의 정죄를 받는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부정을 저지른 남자는 어딘가에서 숨어 자신의 죄값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 칠링워드는 복수심에 불탄다. 그리고 그 상대남자를 알아내게 되고 철저히 복수를 일삼는다. 드러내지 않고, 교묘히 그 자의 곁에서 그 양심과 도덕성과 정신을 후벼파면서 죄책감에 시다려 죽어가도록 한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그 남자가 헤스터와 그들의 딸 펄을 끌어안고 마을의 처형대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죽는다. 작가가 말하는 의도는 이것이다. '죄는 반드시 밝혀지고 자백되어져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영화 '폰부스'의 원작가 래린 코헨이 의도하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나 래리 코헨은 폰부스에서 '죄를 깨닫고, 정직하게 자백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라면 나다나엘 도호손은 구원의 가치까지는 다가서지 않는다. 오히려 딤즈데일 목사의 이중인격을 비웃는다. 소설에서 딤즈데일은 시종일관'경건하고 유능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그러나 이면에는 정욕을 참지 못하고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르며, 그 죄를 용감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의지박약한 한 명의 위선자'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설이 청교도적 가치관의 세대에서 자라난 작가가 청교도적 가치를 보여준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다나엘 도호손은 청교도의 그러한 엄격한 경건주의를 일종의 위선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실패한 경건한 목사 딤즈데일로 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죄를 자백해야 된다'는 그의 논리는 청교도적인 경건주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조차 근본적으로는 죄의 욕망을 가진 것에 불과하며, 그럼에도 경건한 척하는 위선을 자백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나다나엘 도호손은 청교도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 청교도적 문화에서 자라면서 그 청교도적 가치에 대해 위선적이라고 결론내린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른 상대방을 굳이 목사로 설정했겠는가. 물론,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죄의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성경도 인정하는 법이다. 그러나 오히려 래리 코헨과 같이 '자백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결말이다. 그러나 도호손은 그것은 외면했다. 그는 단지 경건하고 유능한 목사이나 타락한 본성의 인간으로 그를 그려내고 전혀 죄의 죄책감에서부터 해방되지 못한 채 죽음까지 이르는 나약한 인간으로만 그려낸다. 위선을 폭로하고 싶은 그 갈망만으로 소설을 그려낸다는 점이 안타까운 것이다.

한편, 이 소설은 영화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비추이다. 원작을 파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원작에서 부정을 저지른 상대방이 드러나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독자들의 궁금증과 치밀한 내면세계의 묘사. 죄로 인해 갈등하는 딤즈데일의 심리와 갈등을 조금도 그려내지 못한 치졸한 작품이다. 주홍글씨란 작품은 적어도 그 목적하는 바와 논리에서 씁쓸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갈등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심리소설이란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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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노인과 바다 청목 스테디북스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혜리 옮김 / 청목(청목사) / 2010년 11월
판매중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해밍웨이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어부로서의 인생이 지고 있는 한 노인을 다루고 있다. 아내도 먼저 죽고, 낚시를 가르쳐주던 소년은 더 이상 노인이 수확이 없자 그 부모의 요구로 다른 배에 승선한다. 그렇게 쓸쓸히 홀로 낚시를 나간 노인은 자기 조각배보다도 더 큰 녹새치가 낚시에 걸리게 된다.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놈은 쉽게 지치지 않고 노인과 실랑이를 벌이며 멀리멀리 바다로 더 나아간다. 그 넓은 바다에서 꼬박 이틀을 노인과 씨름한 녹새치는 결국 잡히게 된다. 그러나 얼마뒤 피냄새를 맡은 상어가 덮치고 노인은 사투를 벌인다. 상어를 이겼지만 녹새치도 어느 정도 뜯겨져 버렸다. 또 상어떼가 나타난다. 노인은 또 싸운다. 그러기를 세 번. 항구에 닿았을 때 녹새치는 뼈가 앙상히 드러나 있다. 노인은 오두막으로 올라와 깊은 잠에 빠진다. 인생이 저물어가는 노인과 녹새치와의 기나긴 사투를 투박하면서도 치열하게 묘사하고 있는 동시에 그 많은 수고를 무색케하는 허무한 귀항은 치열한 인생과 그 뒤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에 대한 사색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헤밍웨이 역시 자살로 그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헤밍웨이의 파란만장한 삶의 자서전 같이 느껴질 법하다. 한편, 수많은 번역본이 있지만 이 번역본은 그리 수월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번역자체가 좀 더 작품의 감수성을 살려주지 못한 채 너무 투박하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 얘기도 나왔는데 이쁜 보라보라 바다 구경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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