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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ㅣ 청목 스테디북스 44
나사니엘 호손 지음, 김종건 옮김 / 청목(청목사) / 2001년 1월
절판
나다나엘 도호손의 대표작.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식민지. 지금의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 중심의 어느 청교도 마을에서 벌어진 한 유부녀의 부정을 놓고 사건은 시작된다. 아름다운 유부녀 헤스터 프린은 남편보다 먼저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고, 남편은 1년 이나 뒤에 온다. 그 사이 헤스터는 다른 남자와 부정을 맺고 아이를 출산한다. 그리고 그 마을을 담당하는 유능하고 경건한 딤즈데일 목사는 헤스터를 최대한 보호해주려고 한다. 그러나 헤스터의 남편 칠링워드는 헤스터와의 협상을 통해 자기 존재를 숨긴 채 이 마을에 의사행세를 하며 자리를 잡고, 도대체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른 그 남자가 누구인지 집요하게 추적하기 시작한다. 헤스터는 간음한 여인이라는 표식으로 가슴에 곱게 수놓은 주홍글씨 A를 늘 달고 다니며 사람들의 정죄를 받는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 부정을 저지른 남자는 어딘가에서 숨어 자신의 죄값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 칠링워드는 복수심에 불탄다. 그리고 그 상대남자를 알아내게 되고 철저히 복수를 일삼는다. 드러내지 않고, 교묘히 그 자의 곁에서 그 양심과 도덕성과 정신을 후벼파면서 죄책감에 시다려 죽어가도록 한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그 남자가 헤스터와 그들의 딸 펄을 끌어안고 마을의 처형대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죽는다. 작가가 말하는 의도는 이것이다. '죄는 반드시 밝혀지고 자백되어져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영화 '폰부스'의 원작가 래린 코헨이 의도하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나 래리 코헨은 폰부스에서 '죄를 깨닫고, 정직하게 자백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라면 나다나엘 도호손은 구원의 가치까지는 다가서지 않는다. 오히려 딤즈데일 목사의 이중인격을 비웃는다. 소설에서 딤즈데일은 시종일관'경건하고 유능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그러나 이면에는 정욕을 참지 못하고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르며, 그 죄를 용감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의지박약한 한 명의 위선자'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설이 청교도적 가치관의 세대에서 자라난 작가가 청교도적 가치를 보여준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다나엘 도호손은 청교도의 그러한 엄격한 경건주의를 일종의 위선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실패한 경건한 목사 딤즈데일로 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죄를 자백해야 된다'는 그의 논리는 청교도적인 경건주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조차 근본적으로는 죄의 욕망을 가진 것에 불과하며, 그럼에도 경건한 척하는 위선을 자백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 것 같다. 그러므로 나다나엘 도호손은 청교도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기 보다 청교도적 문화에서 자라면서 그 청교도적 가치에 대해 위선적이라고 결론내린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헤스터와 부정을 저지른 상대방을 굳이 목사로 설정했겠는가. 물론,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죄의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성경도 인정하는 법이다. 그러나 오히려 래리 코헨과 같이 '자백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결말이다. 그러나 도호손은 그것은 외면했다. 그는 단지 경건하고 유능한 목사이나 타락한 본성의 인간으로 그를 그려내고 전혀 죄의 죄책감에서부터 해방되지 못한 채 죽음까지 이르는 나약한 인간으로만 그려낸다. 위선을 폭로하고 싶은 그 갈망만으로 소설을 그려낸다는 점이 안타까운 것이다.
한편, 이 소설은 영화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비추이다. 원작을 파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원작에서 부정을 저지른 상대방이 드러나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독자들의 궁금증과 치밀한 내면세계의 묘사. 죄로 인해 갈등하는 딤즈데일의 심리와 갈등을 조금도 그려내지 못한 치졸한 작품이다. 주홍글씨란 작품은 적어도 그 목적하는 바와 논리에서 씁쓸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갈등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심리소설이란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