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받지 않는 교회 속에 불완전한 그리스도인_2013.01.2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7.)
(엡 1:22-23, 개역)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는 헬라어 에클레시아. 구별된 무리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라는 간판이 붙어진 건물은 은밀히 교회가 아니라 교회당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킨다. 신약의 세계는 교회시대, 성령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종료된 후, 성령께서 그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으셨고 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기록을 담은 복음서에서는 교회란 표현이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단 두 번 나타난다.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8:17, 개역)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즉,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울 것을 베드로에게 설명하는 장면과 범죄한 형제에 대한 마지막 권면의 권위가 교회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부터 실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오순절 강림하시면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와 역사의 그 종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키는 영혼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감당케 될 것이다. 왜?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분신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존재와 의미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에 대한 중요하고 수많은 진리가 있겠지만 오늘 이 지면에서 생각해보고 싶은 주제는 ‘과연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성경은 판단하는 것을 특별히 경계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기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이 판단한다라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정리해야 할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과연 우리가 판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판단하는 존재이다. 무엇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살아서 지정의(知情意)를 본능과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이상 우리가 판단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행위일 뿐이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판단을 경계하고 정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준과 가치관, 지식의 고저(高低) 정도에 따라 모든 현상과 사물과 사람과 상태들을 판단하고 비평할 수 있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판단치 말라’라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정죄하지 말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이 있지만, 그것을 정죄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삼가란 의미이다. 왜? 하나님께서 만물을 판단하셔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시고, 상 주실 것과 벌 주실 것을 판단하셔서 정의롭게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지식으로 무엇을 판단해 비평하고, 정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다툼과 분열이고 오판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본질을 잘 모르면서 옳은 것도 그른 것으로 판단하고 비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었다고 해 안식일을 범한 자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일 뿐 아니라 안식일에 누구든지 자기 양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겠느냐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되물으셨던 것이다. 이처럼, 선을 행하는 것조차도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으로 정죄하는 것이 율법적 사고였다. 누구나 이러한 고정관념이 있다. 자기 기준에서 옳고 그른 것으로 사람을 비평하는 본성이 있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또, 어떤 일련의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던 적이 있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제물에 피를 섞은 일과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사람이 죽었던 사건을 언급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오판을 정확히 꿰뚫고 권면해주었다. 그들이 너희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너희들 역시 회개치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이다. 즉, 그들은 그 망한 자들이 특별히 더 죄가 많아서 그런 횡사를 당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이는 오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판단치 말 것을 우리에게 종용한다고 할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판단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어떤 누군가가 교회를 판단할 수 있을까? 분명, 그 대답은 ‘NO’이다. 교회를 판단하게 되고,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사람은 교회의 구성원들 즉, 성도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완전에 대해 지적한다. 그러나 분명이 잊지 말고,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며, 교회를 판단하는 근거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며, 교회가 그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현현이다. 교회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다만, 교회 안에 판단할만한 일들이 있는 것은 아직은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이 완전해진 것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영혼과 내세의 문제일 뿐이다. 여전히 연약한 본성과 죄의 유혹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롬8:10) 그러므로 우리가 혹 성도간의 허물이 있을 수는 있고,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판단케 되는 경우가 혹 생길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교회를 판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불완전한 사람에 대한 판단이 교회에 대한 판단으로 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그 초점을 일직선상에 놓는 것은 명백한 패착이다. 불완전한 사람의 부족으로 인해 마치 교회 자체가 잘못되고, 큰일이나 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백한 실언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은 아무 사람에게도 판단 받지 않으신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날에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각 사람 마음의 은밀한 것이 다 드러나고 판단하시게 될 것이다.(고전4:5)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교회와 성도를 판단하기 좋아하는 그리스도인 본인은 완전한 것일까? 우리가 역사와 위인에 대한 조금의 지식만 가지게 되어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없었으며, 완벽한 교회가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그 권위와 권세 있어서 완벽하다.(엡1:22,마16:18) 다만, 구별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써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곧, 불완전한 사람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란 차원에서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 종교암흑의 시기, 카톨릭의 이단적인 교리 아래에서 영혼들이 죽어갈 때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방아쇠를 당긴 존 칼빈. 그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아버지처럼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시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러한 재세례파의 신념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재세례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핍박을 허용했던 것이다. 카톨릭이란 거대 세력으로부터 박해받던 프로테스탄트에서, 프로테스탄트가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모순이 나타났던 사건이었다. 위대한 부흥사 조지 휫필드는 노예제도의 찬성론자였다. 영국대각성운동의 또 다른 중심인물인 존 웨슬리는 구원받은 성도도 또 다시 타락하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전했다. 개혁신앙의 정통진영의 주요 인물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에 있어서 후천년설을 믿었다. 즉, 어느 세대 어느 위대한 인물이 되었든 그 어디에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어 꼬투리 잡힐 그 어떤 허물과 약점이 없이 주님을 섬겨왔던 것이 아니다.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교회로부터 부족함이 있을 수 있고, 우리의 형제 자매로부터 연약함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교회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실로 인정한다 라면, 하나님은 각 세대와 각 족속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모습과 모양으로 그 세대에 충분한 교회를 허락하신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완전하신 나의 하나님을 믿는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복음’이다. 복음 하나면 충분하다. 복음이 아니고서 도대체 뭘 더 바란단 말인가. 충분히 말했다. 칼빈도, 휫필드도, 웨슬리도, 에드워즈도 그 누구도 완벽한 교리, 완벽한 신앙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모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다 그 나름의 부족과 연약함이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복음’이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는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가 교회를 판단할 수 있으며, 누가 교회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부족에 대해서는 혹 흠을 잡을지언정 그것조차 그렇게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다. 동일한 복음을 나누었기 때문에 말이다.
교회를 폄하하고, 교회를 판단하면서 무엇이 옳고 바른지를 말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생각이 다른 또 누군가는 불평할 것이다. 사람은 다 기준이 다르다. 생각하는 범위와 넓이도 다르고,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관도 다 크고 작게 다르다. 그러므로 복음 하나만 생각하면 그 모든 오해와 차이를 뛰어넘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만물보다 가장 높고 존귀한 교회를 그렇게 쉽게 비평하지 않을 수 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직분과 역할, 그 질서에 대해서도 우리는 존중할 수 있다. 불완전한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그 안에 종종 어려움과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교회의 질서와 윤리를 벗어난 불만표출이나 반항과 같은 어떤 것이 되었을 때는 숭고해질 수 없는 법이다.
(엡 4:11-12, 개역)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