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다_2012.09.0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8.)
(대하 16:7, 개역)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남유다의 세 번째 왕, 아사는 유능하고 정직한 왕이었다. 그는 이방의 신당을 제거하고, 하나님께로 백성들을 인도하며 율법을 준행했다. 그는 성읍들을 건축하였고, 나라는 평안했다.
한번은 구스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곤란 중에 처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게 된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를 도우소서’
그것이 아사왕의 기도였다. 아사왕은 다른 어떤 것도 의지만한 것이 있노라고 구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약자들은 강자를 피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려고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곤충이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강자 앞에서 비굴해진다. 자기 능력밖에 있는 다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강자의 위협에서 타격을 받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럴 때 아사왕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까?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피난처라고 익히 배워왔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의지하기’의 진리를 통달하고 있다. 그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교훈도 없다.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하나님 의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공공장소든 어떤 건물이든 소화기와 소화전이 비치되어 있다. 불이 났을 때 그것을 활용해 초기진압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얼마든지 필요할 때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방화가 일어나거나, 화재가 일어나는 매일의 수많은 장소에서 소화기는 제 기능대로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알지만 정작 사용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는 가장 익숙한 교훈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처럼 어색하고, 허전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가령, 우리가 어떤 목적과 필요를 달성하기 위해 준비한다고 할 때, 우리는 관계되는 형제, 자매나 세상 사람의 지위와 능력, 인맥을 이용해서라도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것은 세상에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수단과 방법이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에게도 그것은 일반적인 방법이다.
아사왕은 전쟁에 직면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동맹국 정도의 군대협조를 요청해야 했다. 냉정히 말해 그건 상식이다. 객관적인 전력상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면, 항복을 하든지. 그래서 속국이되어 조공을 바치든지. 아니면 동맹을 결성해 군대의 도움을 받든지 둘 중 하나다. 싸워봐야 거의 질 것이 뻔한 전쟁을 누가 하려고 할까? 그러나 아사왕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도울 분은 주님밖에 없다라고 호소하면서 하나님께서 책임져야만 할 것을 종용했다. 참,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던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참 의미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 것이. 아사왕도 나중에는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움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정상적인 관계의 형성이 돈독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여지는 실존에 의지하는 근본적인 속성,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의지하느냔 말이다.
말년에 발에 중병이 들었을 때도 아사왕은 기어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처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불신앙적인 삶으로 그의 인생 종지부를 찍었다.
늘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 앞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는 어떨까. 우리가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탄원하고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수많은 인맥과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기 위해 뛰쳐나간다. 사람들을 만나고, 기회들을 엿본다. 더러는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물론,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항상 신앙이라는 것에는 뭔가 묘한 불찰이 있는 것 같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닌데 너무나도 자주 틀리게 적용해버리고 마는 우리의 불찰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의 도움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전적으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한 가지의 정직한 동기.
하나님께 더 많이 탄원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현실의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해주신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동원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예기치 않은 때와 방법들을 통해 주어질 때가 많다. 그러나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액션해야 된다는 이유로 내가 뭔가를 기획하고 만들어 내려고 하면서, 그때부터는 불찰이 야기되는 법이다.
먼저 할 일은 내 의지를 놓는 일이다. 하나님께 강한 자와 약한 나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부디 해줄 것을 그저 요청하고, 기다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바로 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