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반성_2012.09.11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0.)

 

(딤후 3:2, 개역)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말세의 인간군상에 대한 한 표현이다. 그것은 이미 바울의 시대부터 그러했다. 그들조차 말세를 살아가는 세대였기에. 그렇다면 구별된 그리스도인은 과연 세상 사람보다 거룩해진걸까?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출석하고, 술과 담배를 피하고, 단란주점을 피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죄짓는 장소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거룩하게 된 걸까? 그것이 거룩의 충분조건일까? 그러면 평생을 골방에서 구도자로 산다면 그는 그리스도인보다 더 거룩하겠다.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다는, 자기 능력 밖의 미제의 문제로 인해 불량한 양심으로 살아가면서도 천국에 간다고 기뻐한다.

그토록 고난을 받고, 자기를 부인하고, 구도의 삶을 살았던 부처도 지옥에 갔는데 말이다.

 

왜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그리스도인에게 오면, 그토록 부당한 은혜로 되곤 하는지.

가식, 교만미움시기, 질투, 허영, 자기애. 그 모든 구부러진 양심의 잡음.

천국의 소망으로 만족하는 동시에, 자기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의 이기심.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천국의 문을 기뻐하면서 주를 찬양한다.

보다 선량한 사람도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모든 영광과 특권을 다 누리며, 배부르고 만족하다.

위해 피 흘려주신 어눌한 예수님 덕분에. 그 귀한 피가 그토록 부족한 피처럼 여겨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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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젼드는 없다._2012.09.0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9.)

 

(대하 24:25, 개역) 『요아스가 크게 상하매 적군이 버리고 간 후에 그 신복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 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성경 속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반면, 육체로 시작했다가 성령으로 마친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바울일 것이다. 한편, 요아스왕은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마지막은 육체로 마친 왕이었다. 그의 시작과 끝이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그의 영성의 그래프를 보자면, 마치 사울왕의 축소판 같이 생각되어질 정도다.

 

여호야다는 제사장이었다. 그는 아달랴의 우상숭배와 폭정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왕자들에게서 요아스 왕자를 살려낸다.(물론, 그의 아내가 살렸음.) 요아스왕자는 너무 어렸기에 여호야다는 당분간 왕자를 잘 숨겨두고 기회를 엿보았다. 수년간 아달랴의 우상숭배와 폭정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요아스 왕자가 7세가 될 때, 여호야다는 반역을 시도하고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수년간 이어진 아달랴의 폭정은 막을 내리고, 바알의 전당도 무너지고. 바알의 제사장들도 죽임을 당한다.

 

요아스 왕자는 7세의 나이에 왕으로 등극한다. 특히, 제사장 여호야다의 충성스러운 신앙의 교육과 조언을 바탕으로 요아스 왕자는 선정을 펼친다. 우상숭배로 무너지고, 빼앗긴 성전을 중건하기 위해 재촉하기도 한다. 소위 헌금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성전재건을 위한 돈을 담는 궤를 만들어 많은 백성들이 성전을 중수하기 위한 헌금에 동참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성전은 이전의 모습대로 견고케 세워진다.

 

훗날 여호야다 제사장이 13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백성들은 그를 다윗 성 열왕의 묘실에 장사지냈다. 놀라운 일이다. 왕들의 묘실에 제사장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만크 여호야다 제사장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었다. 요아스 왕자를 보호하고, 아달랴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신앙 위에 세워진 국가를 재건하면서 요아스 왕이 신앙중심과 선정을 베풀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멘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들이 들어가는 묘실에 여호야다 제사장도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여호야다의 죽음 이후 스승을 잃은 요아스는 신앙의 내리막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걸출한 신앙의 멘토였던 여호야다가 죽자. 기회를 엿보던 무리들이 요아스 왕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아스 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상숭배자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요아스를 회유하지만 듣지 않았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와서 경고하였음에도 오히려 요하스는 은혜를 잊고, 스가랴를 처형해버린다.

 

그러므로 일 년 후 아람의 적은 군대가 침공하여 남유다의 큰 군대를 정벌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고, 부상을 입은 요아스왕은 결국 신복들의 배신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요아스 왕을 다윗 성의 묘실에 들이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마라톤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죽는 그 날까지가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서 계수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운동선수들은 그의 선수생활 몇 년을. 위대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하게 되면 평생을 ‘Legend’로 불리며,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어떤 큰 업적을 남기고, 수년 동안 훌륭한 성과를 남겼다 한들 그가 레젼드가 되는 건 아니다. 신앙은 죽는 그 날까지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죽어서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 봐야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평생을 위대한 설교자로 살았던 조지 휫필드도 그의 생전에는 수없는 반대세력의 모함과 방해에 괴롭힘을 당했으며, 교리적인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웨슬리의 비난도 받아야만 했다. 그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 수 없는 부흥사였다. 그 역시 말했다. ‘내가 누구였는지는 심판날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것은 살아 있는 동안 다 평가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그 날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앙은 마라톤이다.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뜨거울 수도 있지만, 나중은 진정으로 차가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토록 차가웠지만 이제는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야다와 요아스의 두 모습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제사장이엇던 여호야다는 그의 생애의 시종을 충성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다. 그러므로 그는 왕들만이 죽어서 들어갔던 다윗성의 묘실에 선례가 없는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안치되었다. 그는 마라톤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유능한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잘 땄던 요아스는 결국 멘토를 잃어버리고, 신앙의 깊은 것을 자신의 것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신앙의 대열에서 이탈해버리고 말았다. 처음 성전을 중수하기 위한 열심을 보였던 그의 뜨거움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배반하고 죽였다. 은혜도 양심도 져버린 악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죽음 이후 다윗성의 왕의 묘실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친다는 것이 신앙의 세계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이 그러했고. 신앙의 세계에 속했던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 중에도 그러했다. 그러한 실패가 없더라면 매 세대마다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교제에 모여 큰 무리를 이루고, 더 큰 일을 이뤘을 것이다.

 

참 두려운 일인 것 같다.  신앙의 연수가 10년이 되었든, 20년이 되었든. 그 이상이든을 막론하고.  오랜 시간을 믿음 안에 있던 그리스도인도 교회를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누가 자신은 30년 동안 신앙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앞으로도 결코 떨어질 일이 없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늘 위기와 악의 위험이 도사리는 광야의 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인가 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데. 왜 그렇게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인지. 나 역시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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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다_2012.09.0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8.)

 

(대하 16:7, 개역)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남유다의 세 번째 왕, 아사는 유능하고 정직한 왕이었다. 그는 이방의 신당을 제거하고, 하나님께로 백성들을 인도하며 율법을 준행했다. 그는 성읍들을 건축하였고, 나라는 평안했다.

 

한번은 구스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곤란 중에 처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하게 된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를 도우소서

그것이 아사왕의 기도였다. 아사왕은 다른 어떤 것도 의지만한 것이 있노라고 구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약자들은 강자를 피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려고 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곤충이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강자 앞에서 비굴해진다. 자기 능력밖에 있는 다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강자의 위협에서 타격을 받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럴 때 아사왕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까?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편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피난처라고 익히 배워왔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의지하기의 진리를 통달하고 있다. 그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교훈도 없다.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하나님 의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공공장소든 어떤 건물이든 소화기와 소화전이 비치되어 있다. 불이 났을 때 그것을 활용해 초기진압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얼마든지 필요할 때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방화가 일어나거나, 화재가 일어나는 매일의 수많은 장소에서 소화기는 제 기능대로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알지만 정작 사용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는 가장 익숙한 교훈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처럼 어색하고, 허전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가령, 우리가 어떤 목적과 필요를 달성하기 위해 준비한다고 할 때, 우리는 관계되는 형제, 자매나 세상 사람의 지위와 능력, 인맥을 이용해서라도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것은 세상에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수단과 방법이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에게도 그것은 일반적인 방법이다.

 

아사왕은 전쟁에 직면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동맹국 정도의 군대협조를 요청해야 했다. 냉정히 말해 그건 상식이다. 객관적인 전력상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면, 항복을 하든지. 그래서 속국이되어 조공을 바치든지. 아니면 동맹을 결성해 군대의 도움을 받든지 둘 중 하나다. 싸워봐야 거의 질 것이 뻔한 전쟁을 누가 하려고 할까? 그러나 아사왕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도울 분은 주님밖에 없다라고 호소하면서 하나님께서 책임져야만 할 것을 종용했다. ,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던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참 의미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 것이. 아사왕도 나중에는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움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정상적인 관계의 형성이 돈독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여지는 실존에 의지하는 근본적인 속성,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의지하느냔 말이다.

 

말년에 발에 중병이 들었을 때도 아사왕은 기어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처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불신앙적인 삶으로 그의 인생 종지부를 찍었다.

 

늘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 앞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는 어떨까. 우리가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탄원하고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형성할 수 있는 수많은 인맥과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기 위해 뛰쳐나간다. 사람들을 만나고, 기회들을 엿본다. 더러는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물론,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항상 신앙이라는 것에는 뭔가 묘한 불찰이 있는 것 같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닌데 너무나도 자주 틀리게 적용해버리고 마는 우리의 불찰들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의 도움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전적으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한 가지의 정직한 동기.

 

하나님께 더 많이 탄원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현실의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해주신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동원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예기치 않은 때와 방법들을 통해 주어질 때가 많다. 그러나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액션해야 된다는 이유로 내가 뭔가를 기획하고 만들어 내려고 하면서, 그때부터는 불찰이 야기되는 법이다.

 

먼저 할 일은 내 의지를 놓는 일이다. 하나님께 강한 자와 약한 나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부디 해줄 것을 그저 요청하고, 기다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바로 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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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시려온다_2012.08.2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7.)

 

(대상 17:1, 개역)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악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다윗. 그래서 인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윗이 왕이 되었다. 그 많은 환란과 시련의 골짜기는 지나가고, 이제는 달빛의 청명함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바람의 소리, 갈대의 부대끼는 속삭임.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별들의 유혹.

 

여유롭게, 사색을 즐기며. 묵상을 하며. 그렇게 왕궁을 한가로이 거닐게 된 다윗.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렇게 왕궁을 거닐던 오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 앞에서 마음에 짓눌리는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여호와 내 주의 언약궤는 저 휘장 아래 있구려…’

 

이 짧은 한 마디 속에 응축되어진 다윗의 저려오는 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는가. 왕궁을 거닌다는 것. 여유로움과 사색을 누린다는 것. 그 모든 것은 다윗에게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이자, 행복의 극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럼으로 해서 다윗은 남다른 마음의 통증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행복이 어디서 왔던가. 누구의 은혜인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호화로운 삶의 여유와 낭만을 누리는 그는 불현듯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워졌는지. 자신이 얼마나 복에 겨운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절감했다. 더불어, 자신에게 이 모든 사치스러운 삶의 행복과 영화를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지금은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한없이 밀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심. 다윗은 여전히 변함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숨쉬는 양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휘장 아래 놓인 여호와의 언약궤를 바라볼 때, 마음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결코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와 위엄의 높으심은 실추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장 높고, 영화로우시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의 언약궤는 예나 지금이나 천 조각 아래 모셔져 있었다. 웅장한 신전이 없었다. 인간의 왕들도 왕궁에 거하며, 그 왕권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데. 언약궤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처소에 모셔져 있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영광의 실추가 아니며, 하나님의 권위의 실추가 아닐찌라도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이었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웠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 속에서도 보자면, 내가 누리는 영광스러움에 비해 하나님은 초라한 모양으로 모셔져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우린 그런 사실들을 자각해 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TV앞에 드러누워 오락을 즐기는 여유와 나태함은 누리면서도, 성경을 읽고 삶의 예배를 드리기는 어렵지 않았었던지. 자신의 삶의 질을 위해서는 먹고, 입고, 사고, 누리면서도 주 앞에서면 인색해지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았었던지. 우리의 모습은 백향목 궁에 거하고, 여유와 낭만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희생과 예배와 충성의 모습은 휘장 아래 모셔진 언약궤 같지는 않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양심이 견고했던 그 사실.

 

다윗이 지녔던 것 처럼. 우리 자신들 역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영화로움을 하나님께 받은 은혜인줄 아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의 정직한 양심이 필요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송구스런 마음으로 가슴 저려오는 그런 통증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그건 불행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을 인정해주셨다. 그에게 오히려 반문하셨다. ‘내가 언제 날 위해 백향목 집을 지어달라 한 적이 있었느냐? 오히려 내가 너를 더욱 존귀케 해주리라.’ 결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엉뚱하다고 생각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되레 고 녀석 참 기특하구나. , 양심가야. 제대로 철이 들었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기로 마음 먹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정직한 양심과 겸손함으로 그 은헤에 감사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줄 안다라면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허락해주시는 법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더 크게 감동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감사의 감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깊어지면, 서로에 대한 사랑도 더 커져가는 것처럼. 그렇게 배려는 감동을 낳고, 감동은 사랑을 돈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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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_2012.08.23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6.)

 

(대상 16:3, 개역) 『또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매 명에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병 하나씩 나누어 주었더라』

 

베레스 웃사 사건 후 오벧에돔에 머물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모셔져 왔다. 다윗은 춤을 추며 뛰놀았고, 미갈은 그런 다윗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날은 모두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축제의 날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무리의 사람들에게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 건포도 한 병이 각각 주어졌다. 그 어떤 신분의 차별이나 구별도 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선물이 지급되었다. 요즘에도 어디 행사를 하는 곳에 가면 사은품을 나눠준다. 그처럼 그날의 다윗성에도 사은품이 지급되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분명 그 축제의 자리에 예루살렘의 모든 이들이 모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많은 상당수의 무리가 언약궤의 다윗성 입성을 함께 보며, 큰 기쁨을 누렸겠지만 또, 분명 많은 무리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왕이 잔치에 초대했지만, 자기 상업 때문에 초청을 거절했다는 비유처럼 그 날의 다윗성에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사실 다윗왕이 백성들에게 나눠준 선물이 귀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언약궤가 다윗성 안으로 모셔진다는 의미 있는 행사에 비해 또, 생각해보면 그리 거창한 선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떡 한 덩이, 고기 한 조각, 건포도 한 병. 고작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왕궁에서 지급하는 선물치고는 뭐, 조촐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굳이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아서 그 선물을 받지 못한 들 어느 정도 중산층의 사람들에게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선물의 가치는 작았을지 몰라도, 그 은혜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그 날 다윗성에 모인 그 많은 무리들이 얻은 것은 소정의 사은품이 아니라 만족과 기쁨. 은혜가 더 큰 얻음이었다는 것일 거다. , 고기, 건포도는 그 자리가 아니었어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은혜는 오직 그 자리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질문되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어딜까?’ 바로 그 질문.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다. 그리고 오직 그 모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그것은 오직 그 자리에서만 얻게 되는 것이다. 함께 참예하는 습관은 은혜를 얻는 가장 좋은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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