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막 1:16-20, 개역)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효율성과 자신에 대한 증인 및 그의 부활 승천 후에도 복음사역의 지속성을 위해 특별히 제자들을 선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성육신 하심으로 해서 그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으로써의 사역이었으며 그럼으로 그의 사역에는 여러 가지 제한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에 순응하는 일련의 방편이자 방법론으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증인이자 증거자로 삼아 복음의 사역에 역사성과 지속성을 부여코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며, 전혀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제자들의 행보는 ‘광신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의 누이, 나의 동생이 직장에서 뛰쳐나가 메시야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다면 어떻겠습니까?

시몬과 안드레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일상적이었고,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들은 배 위로 올라가 해변의 연안 가까운 곳에 배를 띄워놓고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의 모습. 그것이 그들 생계의 가장 적합하고 안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께서 이제 더 이상 물고기를 낚지 말고, 사람을 낚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부들에게 이제 더 이상 바다에 그물을 던지지 말란 말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거의 미친 소리였습니다. 은행에 가서 창구직원에게 이렇게 물어본다고 생각해봅시다. ‘이제 더 이상 은행에서 돈이나 세지 말고 나와 함께 추종자를 모읍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해서 전혀 용납될 수 없는 요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초월성과 불가역성을.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물을 버렸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렸습니다. 생계의 수단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계수단과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질 것을 예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어부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며 그 수단과 방법은 전적으로 신적 권능으로 낚아야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뀌어진 생계수단과 방법에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반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낡은 그물은 바다에 던져 놓은 채 다시 거두지 않고 버려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물고기는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수단과 방법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위로부터 오는 신적 능력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적 매력과 방법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방편과 수단을 활용하실 때는 유용하지만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개입되지 않을 때는 인간적인 방편과 수단은 무용할 뿐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 능력과 수단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들 역시 어부였습니다. 그들 역시 어부란 생계에 적합한 방식의 활동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낚기 위해 낡고 닭아 구멍이 생긴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를 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를 버렸습니다. 생계수단을 버림과 동시에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교훈을 발견케 됩니다. 그물을 던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물을 기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다양한 방법들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제한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 가운데 실천 되야 하는 것이면서 또한, 하나님께서 통제하셔야 될 문제입니다.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며, 다양한 마귀적 상황들이 발생하여 우리가 던진 그물에 여전히 빈틈이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끌어올리다 놓쳐버리고 맙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특별히 그물을 던지기에 앞서 성실히 꼼꼼히 그물을 정비했음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복음 전도에 앞서 성실하고 꼼꼼히 기도와 준비, 상황에 대한 다양한 방비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물 구석구석에 작용해줄 것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결코 죽는 날 까지 아버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아버지를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적인 혈육을 관계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앞에 두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족애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성하는 일에 참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 아비나 어미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늘 현재 부모님이 이 자리에 있을 지라도 예수님이 부르실 때는 그 자리를 떠나 그리스도의 일에 참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배은망덕한 것이 아닙니다. 병든 노부모가 병상에 누워있어 날마다 간호하는 아들이 있다할지라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는 일터로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냅니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와 부모님을 봉양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예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부모님을 봉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있을 때 우리는 부리심을 따라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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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포

(막 1:14-15, 개역)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이 잡히면서 상황은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요한은 예비자였습니다. 이제 그의 사역이 일단락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되 곧 요한이 잡힌 후였다고 진술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사역이 일단락되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행보를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는 요한의 사역이 마무리됨으로써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며, 둘은 모든 것에 때와 시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나서야 할 시기가 오기까지 선포하는 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사역할 때와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위대한 선포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그것만이 예수님 선포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가리키는 의미라고 앞서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거하시는 것이 그의 임무였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예수님은 시기적인 완성, 시기의 적절성을 강조했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찼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때가 찬 것입니다. 한편, 이 외침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창세 때 모형으로 제시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이제 때가 차서 실제 사건으로 이뤄질 시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천국의 문을 활짝 여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로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원의 날, 복음의 날, 천국의 날이 가까이 왔으며 때가 찼으니 반드시 복음을 믿을 것을 외쳤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복음을 믿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의 전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란 사실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 속에 복음의 문을 통과하는 진정한 관례를 일깨워줍니다. 복음은 그냥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복음은 회개를 통해 믿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일깨워줍니다. 또, 죄에 대한 자각은 깊은 죄의식과 죄책감을 이끌어냅니다. 그제서야 죄인은 자신의 죄와 영원한 운명의 끔찍함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며, 복음을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 없는 복음은 없으며, 회개 없는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복음을 통과하려는 모든 죄인에게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언급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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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나아감

(막 1:12, 개역)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우리는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 직면하는 고난과 괴로움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 구절은 문맥적으로 볼 때 알맞지 않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절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자 나의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해 놓고 그 다음 주어진 대가는 바로 광야로 내몰려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이 고난은 환경적인 동기나 우연히 찾아온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다루시는 하나의 독특한 방법을 엿보게 됩니다. 비록,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는 애송이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아들이 행해야 할 일들을 위해 그를 연단하고 훈련시키고 사역에 알맞게 예비시키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아담은 실패한 시험을 예수님은 통과해야 했습니다. 사역을 이루기 위한 분명한 자격을 얻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훈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고생을 많이 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섭리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굶주림과 헐벗음, 배부름과 풍요까지 모든 것을 경험해가는 가운데 그 모든 외적 환경으로부터 더 이상 유념치 않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랑 받는 바울이 받은 대우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바울은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미움을 산 것과 다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로 나아감의 정의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광야로 나아가게 됩니다. 구원을 받을 때 성령께서 임재하십니다. 회심한 사람은 기뻐 환희합니다. 그러나 그 환희가 마냥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광야로 내몰리기 시작합니다.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예기치 않은 상처와 다툼, 반대와 갈등이 밀려옵니다. 종종 ‘아니, 구원을 받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텐데… 전에는 이런 일은 없었다구!’라고 불평과 불신의 비명을 지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내몰리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론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한 가지를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다루길 전혀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할수록 그로 하여금 저 광야에서도 꽃을 피우고 향기를 토하는 강인한 일꾼, 생산력과 가치를 두루 갖춘 알곡으로 만드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시련의 날들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성경 그 어디에도 다윗을 향해 하나님의 싫어 버림을 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호칭은 ‘내 마음에 합한 자’이었습니다. 기억합시다.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사랑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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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서 나는 소리

(막 1:11,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임재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로써 분명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의를 이루는 것’이 분명했음이 증거된 것입니다. 한편, 하늘의 소리는 그 자체로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인증하는 분명한 근거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비적 세례와 선포를 하였고, 하나님은 친히 소리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이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 신인(神人)으로써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두 가지 소리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으로 나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할 사명을 지닌 세례 요한. 그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인간이었고, 그는 인간이 머무르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외침은 예비적 소리였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하늘로서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물질세계에 머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리는 하늘로서 나는 소리였지 지상 위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소리는 예비적 외침이 아닌 확정적 외침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인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친히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전혀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이 없는 명확하고 자신 있는 선포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아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사랑하심을 입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을 향해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포하기를 어려워하고, 꺼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망과 말씀에 순종해 친히 인간의 모양으로 나아가 대속적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그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기뻤을까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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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받으신 예수님

(막 1:9,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던 어느 날 친히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친히 세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일까요?
히브리서 7장7절에서는 예수님께 복 빌어줌을 받은 아브라함을 묘사하길 이와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한자성어에도 ‘장유유서’라고 해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 질서가 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특히,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했습니다. 몸을 구부려 예수님의 샌들도 풀어줄 자존감조차 없을 정도라고 이미 선포하였는데, 어찌 감히 예수님께 세례까지 베풀 수 있겠습니까? 덧붙여, 요한의 세례는 죄인들을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도 가당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친히 자원하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요구하셨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베풀 자격이 있는 예수님께서 어째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인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마치, 7성급 스윗트 룸에 숙박할 자격이 있는 대기업 총수가 축축한 뒷골목의 여인숙으로 향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음에는 그 나름의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분을 갖고 계셨지만 그가 인간의 모습이 되심은 그 자체로 그가 이미 낮은 자리에 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세례 요한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미 인간의 위치까지 낮아지셨고, 그는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함께 짊어져야 했습니다. 전혀 죄가 없었지만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도 그들의 죄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자신의 세례도 맡기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또한, 세례는 죽음과 부활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우리 죄로 인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표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 이는 대속적 사역에 대한 암시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과 함께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머리 위에 임재하심을 보았고, 하늘로부터 들리는 신적 음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세례식이 예수님의 메시야적 행보의 시작을 알리는 기점이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로써 선포되는 신적 인증이 뒤따랐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증명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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