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그곳에만 계시지 않는다

(막 1:36-39, 개역)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예수님의 병고치는 사역과 은사는 실로 많은 사람에게 이슈였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었고, 실제적인 은혜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더구나 당시의 의술을 고려할 때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있었을까?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미명에 병자들은 이미 병고침을 얻고자 미명에 나아왔다. 급기야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제자들은 습관적으로 예수님의 기도처로 나아갔을 것이다. 추측컨대 미명에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습관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제자들은 공손히 예수님께 많은 병자들이 이 미명에 이미 찾아와 문 앞에 용신해 있음을 알렸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얼른 내려와 그들을 맞이해 주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새벽 예수님은 전혀 의외의 발언을 하셨다. ‘아니다. 오늘부터는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야 한다. 그곳에도 병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며, 나는 그곳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의 일대기에 보면 허준이 마을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갈 길을 미루고, 그 마을에 더 남아 의술을 펼침으로써 인간애를 보여준 사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다. 오히려 예수님은 다른 인간애를 보여주신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오래 더 남아 있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기심일 뿐이었다. 병자들은 사방 어디에든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두에게 필요했으며, 예수님은 모두의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본분과 자신의 사역이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고 특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야 말로 모두를 위한 인간애였으며, 공평한 처사였다.

우리 역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은혜를 줄 수 있고,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만 향하고 머물기 보다 더 넓게, 더 많은 곳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아는 예수

(막 1:34, 개역)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일찍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이 난동을 부린 바 있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자 많은 곳에서 귀신들이 쫓겨났다. 그리고 귀신들은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귀신들의 증거를 받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히려 귀신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증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것과 증거하는 것이 불행할 수 있다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렇게 외쳐야 된다고 배운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러한 외침도 허락 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이다.

만약, 제자들이었다면. 그리스도를 쫓는 자들이며, 섬기는 자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알고, 자신을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은 매우 불쾌해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사실은 무엇이든지 어떤 목적과 동기로 행하느냐의 문제가 모든 행위의 선악의 유무를 결정하는 기본 토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귀신들을 예수님을 혐오하고 증오함으로써 예수님을 알았고, 증거했다. 그들이 아는 예수님은 자신들을 심판하고, 영원히 정죄할 지옥의 심판자였다. 귀신들은 지옥의 심판자로써의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들의 적으로써 예수님을 알았고, 소개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아는 것과 증거를 거부했다.

예수님을 내 구세주로 알고 증거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은혜이며, 특권인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lee 2010-12-24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아는 예수..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평안함을 주신 분
그 어떤 고난을 당해도 그 고통조차 이길 수 있는 소망을 주신 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매력

(막 1:32-33, 개역)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권세 있는 설교와 더러운 귀신을 내보내는 이적을 통해 일약 예수님은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와 이적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그 후 예수님을 찾는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온 사방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밤마다 예수님의 거처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의도와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과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요? 예수님은 분명 병 고침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중점적으로 행하는 일종의 주술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보다 큰 대의는 ‘가르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르침보다 예수님의 주술적 능력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주객전도’였습니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의 수업 흥미와 집중력 유발을 위해 마술을 시연하고 있는 모습을 방영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모습에서 선생님이나 아이들 모두 학습목표에 학습에 중점을 두기 보다 마술을 즐기는 것이 더 흥미로운 것일 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마술사가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이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본질의 문제를 왜곡해 환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적이나 병 고침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일들 조차 그의 사역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부수적인 부분이기에 실행하셨고, 용납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라는 신념에 더 많이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다 고귀하고 고상한 가치와 의미를 얻지 못한 채 보조적인 가치를 주된 가치로 삼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배우고자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lee 2010-12-1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수님의 매력을 오해한 유대인들...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 살아가면서도 그의 매력을 오해할경우가 있는것 같네요.
저 또한 형제 자매님들의 매력을 오해하지말고..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 (권세있는가르침)를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수종할 수 있는가

(막 1:30-31, 개역)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베드로의 장모님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말라리아로 추정되는 이 열병으로 그녀는 예수님이 친히 방문하였음에도 전혀 침상에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건강한 사람이라면 방문한 손님을 환대하며 맞아들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고 침상에 그대로 누워 열병으로 혹사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녀의 침상으로 나아가 그의 손을 잡으며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과 그녀와 접촉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말씀으로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친밀하고 애정 어린 모습으로 그녀의 가냘픈 손을 꼭 쥐고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녀는 일순간 열병이 떠나고 깨끗이 나아버렸습니다. 그 즉시 그녀는 마땅히 해야 할 손님에 대한 예우이자 예수님을 수종하는 일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수종할 수 있습니까? 바로 죄의 병으로부터 치유 받은 영혼들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수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죄의 병으로 말미암아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침상에 누워 있는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수종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병을 고침 받고, 영혼이 건강하게 된 사람이라야 할 것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lee 2010-12-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침상에서 일어나서 수종하는일을 고민하는
저의 모습을 반성해봅니다..이건 예우가 아니겠죠? ^^
어서 일어나서 예우를 갖추어야겠습니다.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막 1:21-24, 개역)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시작되면서 두드러지게 표출된 두 가지의 반응을 살펴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동안, 청중은 죽은 둣이 고요했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눈빛은 반짝였습니다.

말씀이 끝날 무렵이었을까요? 청중들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히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의 감탄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 분의 말씀은 마치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와 울부 짓는 것 같구나!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감동과 중압감이야!’ 즉각적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서기관들에게 배운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감동과 감탄에 빠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권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죽은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적 권위와 권세가 버려진 마른 낙엽처럼 날려갈 뿐이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일각에선 전혀 의외의 반응이 연출되었습니다. 어떤 귀신 들린 사람이 갑자기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주 분노했지만, 겨우 자신을 가다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노려보며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님,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기 위해 이제 오신 것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관통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선포에 경악했습니다. 드디어 창세에 예고된 그 일이 실현되고 있는 찰나였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닫아놓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울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영원한 형벌이 예고되는 심판의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은 그 권세 있는 말씀 앞에 눌림과 동시에 응어리진 공포와 분노를 토해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말 속에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 외침을 다시 들어봅시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것은 분노의 고함입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소매치기범이 헐레벌떡 뛰어 와서는 나를 붙잡습니다. 칼을 들이밀며 인질을 삼아 위기를 모면하려고 발버퉁칩니다. 우리는 소리칩니다. ‘왜 이러세요! 왜 나 한테 이러는 거요!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라고 나한테 이러는 거요!’ 우리는 기겁합니다. 한 시라도 이 사람과 붙어 있고 싶지 않습니다. 상황은 공포스럽고 이 불쾌한 인간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길 소망할 뿐입니다. 바로 귀신에게 있어 에수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절규가 무엇이라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저는 바로 이 외침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자, 생명의 문입니다. 그 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멸망입니다. 예수님과 상관해야 할 것인데 예수님과 상관 되는 것에 기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상관 되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작정을 하고, 쏘아 붙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