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매력
(막 1:32-33, 개역)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권세 있는 설교와 더러운 귀신을 내보내는 이적을 통해 일약 예수님은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와 이적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그 후 예수님을 찾는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온 사방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밤마다 예수님의 거처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의도와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과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요? 예수님은 분명 병 고침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중점적으로 행하는 일종의 주술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보다 큰 대의는 ‘가르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르침보다 예수님의 주술적 능력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표적인 ‘주객전도’였습니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의 수업 흥미와 집중력 유발을 위해 마술을 시연하고 있는 모습을 방영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모습에서 선생님이나 아이들 모두 학습목표에 학습에 중점을 두기 보다 마술을 즐기는 것이 더 흥미로운 것일 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마술사가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이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본질의 문제를 왜곡해 환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적이나 병 고침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일들 조차 그의 사역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자 부수적인 부분이기에 실행하셨고, 용납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라는 신념에 더 많이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다 고귀하고 고상한 가치와 의미를 얻지 못한 채 보조적인 가치를 주된 가치로 삼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배우고자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