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유혹과 은혜_2009.12.

(부제: 회개의 중요성)

 

지난 토요일 청년회 교제시간 모 교회 전도사님께서 참석하셔서 삼손을 통해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죄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에 2가지의 질문을 했다. 첫 번째는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데 원인이 있다.’라는 것이다. 이때 나는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두 번째는 ‘연말이니 내년에 죄를 버리겠다하지 말고 지금 죄를 버리라’라고 했다. 이때 나는 ‘죄를 어떻게 버립니까?’라고 맘속으로 질문했다.

일련에 말씀들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청년들이 잘 받아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받아쓰는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의미를 알지 못하고 아무리 적어봐야 여전히 죄를 짓고, 죄를 버리지 못한다.

일단, 여기서 깊이 다룰 문제는 아니지만 첫 번째 질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습관적인 죄의 원인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는 의미의 참 뜻을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 말씀인가를 느껴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긴다는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저기 40kg짜리 쌀가마니가 있는데 옆에 꼬마를 두고 저건 아주 무거운 거란다 아무리 얘기해봐야 지식적으로 저것이 무거운 것이란 생각은 하겠지만 정말 얼마나 무거운지는 알 수 없다. 크레인에 쌀가마니를 달아놓고 천천히 하강시키면서 그 밑에서 꼬마로 하여금 떠받쳐보는 훈련을 시켜보면 그 아이는 금새 무겁다는 것과 가볍다는 것을 구별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지 체휼해보지도 않은 채 아무리 받아 적어 봐야 그것이 죄를 끊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평소 말씀을 읽으면서 그냥 읽고 넘어가고 덮으면 읽었던 말씀도 잘 기억이 안 나는 판에 무슨 하나님 말씀의 무게를 알겠는가.

두 번째 질문 이것이 오늘의 주제이다. 죄를 버리라고 하는데 그걸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 죄를 버려야 하는 것이란 것을 알고, 버리고 싶지만 대부분 죄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떻게 하면 죄를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미 죄를 이기는 힘이 성령의 능력이란 것을 이해했고, 그것을 설교하기도 했다. 그 설교를 회상하면 이와 같다. 첫째, 상자 속에 스프링이 달린 인형이 있는데 이 인형은 죄성이다. 이 죄성은 인형처럼 상자 속에서 끝없이 튀어나오려는 운동력을 갖고 있다. 이 인형상자 옆에는 근육질의 성인 남자가 서 있고, 반대편에는 기저귀를 찬 아기가 있다. 누구 이 인형을 짖눌러 상자 속에 담아둘 수 있을까? 답은 당연하다. 바로 이 남자와 아이가 성령님을 상징한다. 성령이 충만하고 강건할 때 죄성은 제압당한다. 그러나 성령님이 소멸하여 힘이 없을 때 죄성을 이기지 못한다. 이런 비유를 말씀 한 구절에서 명확히 보여줄 수 있다. 에베소서 3장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시며’ 이것이다.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의 힘이 내 속사람, 내 심령을 강건케 할 때 죄는 극복하게 된다.

또 다른 비유로 이 말씀을 이해하자면 빈 깡통 하나가 있다. 이 깡통이 제 아무리 ‘나는 다시는 깡통소리를 안 낼꺼야!’라고 결심해봤자 허사이다. 수없이 맹세하고 의지를 다져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러나 물을 채우는 순간 깡통소리는 줄어들기 시작한다. 물이 꽉차면 거의 깡통소리는 안 나게 된다. 이를 성령충만과 죄성에 비유할 수 있다. 성령이 충만히 내 안에 채워질수록 죄성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성령충만이 소멸할수록 죄성은 깡통소리를 내며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죄를 이기는 힘이 성령의 충만으로부터 말미암은 내 심령의 강건함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방법은 알지만 치명적인 하나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성령충만은 어떻게 받는 것인가(이는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_성령을 구하는 기도와 성령의 조명으로 비롯된 말씀의 집중과 이해)와 성령충만이란 것이 1회적인 사건인지 반복적인 사건인지 생각해보자. 답은 뻔하다. 성령충만을 내가 받았다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무엇인지는 여실히 드러난다. 성령충만이 죄를 이길 수 있지만 성령충만이 불변하는 1회적 사건이 아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항구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란 사실이다. 우리가 자신의 신앙생활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펼쳐놓고 보았을 때 성령충만했고 죄를 쉽게 이겼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다시 성령은 소멸하고 죄의 유혹에 빠질 때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부터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완전히 이긴 것 같이 살아갈 때도 있지만 우리는 다시금 언제든지 원치 않던 치명적인 죄를 또 범할 수도 있다란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주어진 결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가 왜 중요한지 우리는 이해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 그토록 치명적인 죄를 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합한 자로 평가받을 수 있었는지도 이해하게 된다.



다음으로 은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치명적인 죄의 시험과 유혹에 직면하여 그 죄의 문턱까지 나아갔다 되돌아온 사건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여기서 나는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의 문제, 이성과 감정의 갈등, 죄에서 건져주는 은혜의 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먼저, 죄의 시험은 누구나 받는 것이다. 시험받지 않는 사람은 전적으로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험에 드는 것은 다르다. 누구는 시험을 받지만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을 이겨낸다. 그러나 누구는 시험을 받고 그 시험에 듦으로써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시험에 들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궁극적으로 감정 내지 정서의 결정적인 변화가 있다. 누구든지 죄의 시험을 받으면 이성은 이것은 죄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시험을 물리칠 때는 마음에 그 시험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에 든다는 것은 비록 동일하게 이성이 이것은 죄며 피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감정은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란 것에는 의지란 것이 작용한다. 죄의 시험을 받아 시험에 들게 되면 그때부터는 머리는 계속해서 ‘이건 죄야 해서는 안 돼.’라고 소리치지만 감정과 정서의 작용을 받는 마음의 의지는 이미 ‘그래도 이 죄를 짓고 싶어.’라고 작용하는 것이다. 분명 시험에 들 때는 감정은 마음의 의지로 하여금 죄를 짓고 싶은 욕구로 작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은 분명 자기 의지인 것이다. 이 마음의 의지란 것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는 죄를 거부하는 것으로 작용하지만, 죄의 유혹을 받아 시험에 들 때부터는 죄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한 날은 치명적인 죄의 시험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시험에 들었고, 내 마음의 의지는 죄를 깊이 갈망하고 있었다. 매우 힘든 싸움이었다. 그 상황은 마치 시편(10편 등)에서처럼 은밀한 곳에 숨어서 그물을 치고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서 있는 자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건 마귀였다. 마귀는 그 죄의 유혹으로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그물을 치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내 등 뒤에서 그 죄의 입을 벌리고 나를 당장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당해낼 제간이 전혀 없었다. 마귀의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괜찮아, 이번 한 번 죄 짓고 회개하면 되잖아. 참을 수 없는 갈망을 한 번 해소시키고, 그 다음 진정을 찾고 다시 회복하면 돼. 회개하면 되는 거야.’ 얼마나 치열한 싸움에 서있는지 몰랐다. 나 역시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때 이성을 동원했다. 감정은 이미 죄의 노예가 되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이 죄를 짓고 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셉의 고백... 잠언의 말씀들... 나중은 쑥같이 되리라, 입에 모래가 가득하리라. 그래 안 돼. 이건 환상이야. 이건 착각이야. 아, 하나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솔직히 저는 정말 죄를 짓고 싶습니다. 정말 저는 죄를 갈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며 이 죄를 범하면 그 후에는 쑥같이 쓰고, 모래를 씹은 것처럼 참혹한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죄가 너무나 짓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정말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정녕 죄를 짓지 않게 해주십시오.’

물론, 누구나 시험에 들었을 때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냥 죄를 짓고 만다. 왜일까? 왜냐하면 마음이 죄의 시험에 듦으로써 이미 마음의 의지가 죄를 짓고 싶어 하는 의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힘이 죄를 진정으로 이기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 죄를 이기려면 이때는 진정으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참된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또한, 평소 정말 죄를 안 지으려는 간절한 소망과 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정말 죄를 안 짓게 신기한 방법들로써 죄를 막아주시기도 하신다. 그것이 은혜이다.

 

죄의 유혹이 소멸했을 때 나는 매우 놀라운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나는 전적으로 내가 전혀 극복할 수 없는 시험에서 초월적인 어떤 은혜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금도 내게서 나온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은혜였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이야, 하나님 감사하네. 기쁘네’이런 감정적인 희락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은혜란 것은 하나의 power이다. 이것은 energy이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이란 것이다. 마귀는 내 등 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당장 삼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건져진 것은 은혜이며, 그것은 어떤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클립은 자석 앞을 지나가면 반드시 자석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이 손으로 잡고 자석 앞을 지나가면 강하게 당기는 힘이 있음에도 클립은 자석에 달라붙지 않는다. 클립은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은혜인가. 바로 사람이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힘의 은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나는 이 말씀을 깨달았다. 히브리서 13장 9절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은혜가 마음을 굳게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교훈에 끌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이 은혜는 바로 힘이다. power이다. 이 힘이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문제를 상기시켜보자. 내가 은혜로 격렬한 죄의 시험에서 빠져나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나는 항상 죄의 시험에 들 때 은혜로 이기고 나올 수 있을까? 대답은 뻔하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연약한 것이다. 성령과 은혜가 우리를 보호하고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1회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불완전하고 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가 이렇게 항구적인 보호 아래 항상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아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은 말할 필요가 없지만 혹 다시 치명적인 죄를 범할지라도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붙잡고, 다시 회개하고 치유되고 회복되길 갈망하는 그 마음인 것이다. 바로 살인과 간음을 병행한 다윗이 치유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이유도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다. 회개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것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큰 상급은 항상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며, 변함없이 포기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사는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죄와 싸우되 시시하게 싸우지 말고 피 흘리기 까지 대항하라는 말씀처럼 끝까지 싸울 수 있는 싸움을 다해 끈질기게 싸워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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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2010-10-19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를 쉽게 이기지 못하고 연약한게 바로 나 라는 사람이지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십자가의 능력이 말해준다.
위 글의 내용처럼 치명적인 것은 1회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십자가를 반복해서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게 아닐까..

BH,G 2010-10-19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자주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 시험의 빌미는 아니었나 생각케 되네도. 다시 십자가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