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와 그리스도인의 균형_2013.02.03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8.)

 

( 4:27, 개역)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오늘날은 지식의 풍년시대다. 물론, 앞으로 언제까지 세상이 더 지속될지 모르지만 후대에는 더욱 그러할 것 같다. 이러한 지식이 풍족함은 비단 세상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도 지식이 풍성한 세대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원한다면 희망한다면 지식의 풍족함을 맛보고 경험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저술과 설교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후세대의 수많은 개혁주의 신앙에 그 뿌리를 둔 수많은 기독교 저술가들이 그들의 신앙사상을 글로 남겼다.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더라도 그 이전 세대의 글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한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요한 크리소스톰 등 성경이 기록되어 오늘의 세대에까지 이어진 것처럼 신앙인의 수많은 저작들이 글로써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흘러가면서 성경의 감추어진 많은 비밀들이 더욱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성경을 깊이 있고, 현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고, 많은 만큼 가르치는 것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다. 오히려 스스로 가르치려는 이들도 많다.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독교적 지식을 많다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수는 있지만 불리한 것도 많다. 무엇이든 동전의 양면과 같은 양면성은 있다. 적게 안다는 것은 그만큼 겸손할 수 있고, 가르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교만해지기 쉽고, 가르치고 드러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은 늘 많이 적용하고, 많이 행동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철칙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3:1-2, 개역)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많은 청년들이 지식의 산을 열심히 오른다.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쫓아가며,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되는 것일까? 성경말씀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고, 성경의 난해구절을 해석할 줄 아는 것이 완전해져 가는 지식일까? 성경이 만약 교과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학습지가 아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의해 운동하시는 능력이다. 인간의 영혼과 삶에 깊숙이 개입하신다. 그것은 경험과 체험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생이며,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나 역사이기도 하다. 성경은 마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아우르는 대백과사전 처럼 모든 것을 담아내는 동시에 영혼과 내세, 영원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정의 내리지 못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동시에 보지 못한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 성경이 그저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배워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일까?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해서는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을 필요로 한다. 지식의 영이라 하면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지식의 개념 그대로이다. 성경은 역사적 사회적인 배경을 가진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과 그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이 오셨던 시기가 로마시대 였다라든지. 두 렙돈이나 데나리온이 얼마의 가치인지. 유대와 사마리아가 어디에 위치했으며, 갈릴리가 어디인지 그 지형과 기후는 어땠는지. 그러한 역사적. 사회문화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을 몰라도 성경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겠지만 이해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다. 또한, 신학적인 지식도 필요하다. 삼위일체와 그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성경구절. 구원론, 인간론, 신론, 죄 등등 조직신학을 이해하는 것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이 한 부분이다. 신학을 쉽게 분해하면 교리이다. 교리는 어렵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론적 토대이며, 뼈대이다. 이렇게 신학도 성경을 많이 아는 지식의 한 부분이다. 한편, 성경은 많은 예언적 기록이 있다. 예언에 대한 풀이와 해석에 대한 지식. , 예언적 지식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의미를 이러한 지식의 앎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것도 고작 지식의 한 모퉁이를 곡괭이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식의 영 못지 않게 묵상의 영도 필요하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대한 곱씹음과 사색, 관찰, 검토의 과정을 거치는 일련의 묵상을 통해서 성경의 깊이 있는 진리와 지혜의 샘을 캐낼 수 있다. 그것 역시 성경을 많이 아는 하나의 방법이다. 묵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이다. 지식은 성구사전이나 주석 등을 통해서 배울 수 있지만 묵상은 개인적인 성령님의 조명하심 안에서 얻어지는 진리이다. 다른 의미에서 영성을 필요로 한다. 깨어있는 기도와 깨어있는 삶 속에서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영혼 안에 밝게 비춰진다. 그 빛의 조명을 따라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안에 담겨진 많은 보화 중 어느 일정한 깊이의 어느 한 부분을 자기 믿음의 분량에 맡게 길어 올린다. 그리고 그러한 묵상의 뒷받침에는 또 다른 도구들이 있다. 바로 논리와 감성이다. 묵상은 그냥 영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 안에서 재정립되면서 성경의 일반적인 원칙과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성경적 근거와 타당성을 지니는 진리여야 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감성도 살아있어야 한다. 머리로만 분석하고 비평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감성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느껴보고, 살펴서 가슴에 와닿는 그것. 바로 그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바로 묵상의 영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상의 영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성령님의 감화와 조명이다. 더불어 중요한 한 가지 진리. 바로, 경험이다. 실제로 이 부분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결핍을 안고 있다. 경험이 없는 지식은 말 그대로 교과서에 담겨 있고, 머릿속에만 정립 되어진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우리 삶 속에서 투쟁적으로 나타나는 실상이다. 경험은 참된 지식의 분명한 스승이다. 신앙의 체험과 경험이 없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성경을 많이 알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약점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준비자체가 충분치 못하다. 경험은 성경을 가슴과 눈물로 읽게 한다. 그것을 사실과 진리로 자신의 영혼에 아로새기게 해준다. 그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으로 생기를 불어주는 어떤 힘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을 그저 지식의 영을 좀 아는 정도로, 묵상의 영을 조금 맛보는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은 지식의 영과 묵상의 영, 경험의 영을 두루 아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을 통해 성경을 균형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해 가는 것. 그것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공부해가는 그리스도인의 균형 잡힌 성경지식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균형 잡힌 신앙을 갖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어느 하나만 위대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볼 줄 알고, 많은 것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책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 균형을 잃거나 어떤 사상과 이론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떠내려가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비평하고, 그것을 구별해서 적용하면서 유익한 것과 그릇된 것을 가려서 취할 줄 알아야 한다. 신앙의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지만 모두가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의 임재 체험하기의 잔느 귀용. 이러한 책들이 유익할 수 있지만 또한, 묵상과 기도에 심취한 그들의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드러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책은 한 사람의 사상과 가치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로이드 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을 읽는 동안 그 사람은 책 속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어느 한 사상에 휘둘리고 있다.’ 그렇다. 그러므로 객관적이 균형 잡힌 시각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 비평가들 사이에서 가장 건전한 평가를 받는 것일 거다.

 

단지, 에드워즈 뿐 아니다. 목회.설교.신학을 다 아울렀던 칼빈이나 청교도 여러 저자들이 건전한 비평을 얻는 이유도 다양한 경험을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게 경험한 것이 많이 경험한 것을 이기기는 어렵다. 성경을 단지 주석과 난해구절 해석정도에 대한 지식으로 많이 안다는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성경을 제대로 알고 깊이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폭넓은 가르침이 요구되는지 알 때, 우리는 겸허해 진다. 모래사장의 한 켠에서 조개껍질 한 조각을 줍고 있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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