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부재

앞서 우리는 발람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십일조에 순종하고자 함에 있어서도 여전히 ‘욕심’이란 것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할 수 있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이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실제적으로 십일조가 잘 되지 않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약 1:22-25, 개역)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증거되는 믿음의 실체를 잘 다뤄주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지나치게 행위의 의를 묘사하는 것처럼 오인될 수 있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바는 믿음의 의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행위의 의를 전혀 무시하려고 했던 자유주의자들에게 주는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야고보서는 로마서3장 31절 말씀의 구체적인 해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롬 3:3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야고보는 모세의 율법이 아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를 율법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곧, 그리스도의 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도를 실제로 행하는 자가 되는 것에 주력하고 단순히 듣고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의 독특한 증명은 ‘만약 누군가가 도를 들은 후 실행하지 않게 되면 그는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증명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도를 듣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실행하는데는 항상 어리숙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부분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어째서 도를 듣고도 행치 않으면 자기기만에 빠진 것일까요? 무엇보다 여기서 말하는 ‘도’란 것 자체가 행함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법과 사랑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행함과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에게 있어 ‘믿음’이란 것은 반드시 ‘믿음의 행위’를 가져오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도’를 계속 들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야기시킬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자란 것입니다.
지난 번에 얘기했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씨앗으로 묘사됩니다. 생명이 있는 씨는 반드시 심기워져 싹이 되고 이삭이 되고 곡식을 맺는데 까지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씨는 변화를 야기시키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과 동일하게 ‘도’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과 기준에 변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행위에 있어서도 변화를 야기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듣고도 행하지 않고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은 속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 들었든지, 야고보의 말처럼 듣고 잊어버렸든지, 아니면 제대로 들었지만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든지, 양심이 파선했든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전혀 개선하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행함에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잘못된 자아에 속았기 때문에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동안 십일조에 있어 계속된 묵상을 나눴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십일조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정의를 재정립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내 의무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종의 행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기만’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릇된 것을 보았지만 돌아서서는 애써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치관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종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릇된 마음이 듣기는 들어도 행하지는 않는 상태로 만들어버렸고, 이 상태 그대로를 방치해버렸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야고보가 이런 사람은 결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본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자칫 이 말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란 의미로 와전되지 않길 바랍니다. 다만, 그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완전한 법과 사랑의 깊이를 충분히 숙고하고, 깊이 있게 바라보지 않았던 사람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를 지나칠 정도로 얕게 체험한 사람일 뿐이란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체험하는 것에 있어 표면에서만 맴돌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깊은 것을 신중히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겉돌면서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딴전을 피우며 그 모양이 어떠함을 잊어버리는 경박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듣고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깊이 바라보고, 묵상하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찾게 됩니다. 그 사람은 듣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신중하게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깊은 것을 바라보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눈은 떠졌고, 세밀하게 관찰하였으며 이로써 그 생각과 가치관이 차츰 실제적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변화된 가치관을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하는 믿음은 잠깐의 흉내 또는 얕은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행하는 척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약 2:22, 개역)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다음으로 야고보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한다.’ ‘행함을 통해 믿음은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제 이 의미도 생각해봅시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이 구절은 믿음의 행위는 행위만으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은 행함으로 믿음의 완전함이 증명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종합해 볼 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위 안에 믿음이 공존하고 믿음의 행위가 숨은 믿음의 완전함을 증거한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십일조가 되지 않는 분명한 한 가지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의 법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사람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인식, 그리스도를 양심으로 느끼는 그 정도는 매우 빈약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열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서 십일조의 부재는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초에 그들은 그것을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깊이 있게 ‘자유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체험해보지 못했고, 그들의 가치관과 물질에 대한 기준이 변화되지 못한 탓입니다. 또한, 더불어 십일조의 순종이 안 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역시 이 정의 역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의미는 아닙니다. 그는 믿음의 성장이 이뤄지지 않은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린 그 의미도 재차 살펴보았습니다. 십일조에 있어 순종하는 행위가 나타나지 않음은 그의 믿음이 그 행위 안에 공존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의 완전함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행하지 않습니다. 그의 믿음의 온전치 못한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만, 대체로 이러한 경향은 초신자들에게 쉽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종종 이 원리는 구신자들에게도 곧잘 적용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입니다. 구신자들의 경우 그들이 신앙의 반열 안에 들어온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믿음은 초신자의 수준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이 아직 어리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상은 그 보다 더 치명적입니다. 그것은 ‘소아 증후군’이란 희귀병에 걸린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 해외토픽에 이런 사례가 소개됩니다. 나이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이르렀지만 발육상태는 여전히 초딩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런 경우를 ‘아직 어린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병입니다. 그리고 그건 정상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불행한 자들이며 정상적인 인간집단으로부터는 소외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기에 이러한 문제를 곧잘 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영이십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때가 지나도 믿음이 자리지 않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그건 치명적인 불구입니다. 그런 불구자가 그리스도인이란 범주 안에서는 세상의 불구자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불구자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육신적인 불구가 있었다면 할 수 있는대로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적인 불구이기 때문에 소외되고 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도 소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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