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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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에 대한 평가는 참 상반되는 것 같다. 도대체 뭘 쓰려고 하는 지 모르겠고 비약과 은유가 너무 심하다라고 평하는 사람부터 정말 몽환적이고 상상력 풍부한 문체를 구사하는 보기드문 작가라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까지. 나는 그 스펙트럼에서 후자에 조금 더 가까이 가있는 편이다.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뉴욕 3부작'이었는데, 알 듯 모를 듯한, 어느 면에서는 기괴하기까지 한 설정 속에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 책, '달의 궁전'은 그런 맥락에서 고른 책이다. 사실 내용도 잘 모르고 무작정 집은 책이라서 한참을 버려둔 채 구석에 나몰라라 두었다가 어느날 문득, 생각이 나서 보게 되었지만. 그리고는 참 재미있게, 정말 쉴새없이 빠져서 읽었다.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유머가 있고 그 와중에도 인간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인연과 운명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랐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클라리넷 연주자인 외삼촌과 살아온 마르코 S. 포그는 외삼촌마저 돌아가신 후 컬럼비아 대학을 억지로 졸업하고 자발적인 파산자가 되어 거의 밑바닥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된다. 안 먹고 안 입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 공원에서 부랑자 비슷한 생활을 하던 중 키티 우라는 중국계 아가씨를 만나 다시금 일상생활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어느 100세 가까운 노인인 에핑의 비서 역할 속에서 그는 에핑의 지나온 방랑과 기만과 고통의 인생을 글로 적는 일을 하게 된다. 노인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솔로몬 바버-누구나 한번쯤 돌아볼 정도의 거구에 대머리인 역사학 교수-를 만나게 되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면서 그들 사이의 인연의 끈이 이어지게 됨을 느낀다.

포그를 따라다니는 화두,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라는 문구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인간이 정복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환상의 대상이며 땅에 발을 디디지 않은 사람들의 로망인 달을 지향하던 포그가 마지막에는 '언덕 위에 떠오른 달이 어둠 속에 자리를 잡을 때가지 눈한번 떼지 않고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왜곡된 운명과 삶에 대한 알 수 없는 좌절, 그래서 현재에 천착해 사는 것에 대해 태생적인 거부감까지 가지고 있던 젊은 영혼이 이제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자신의 많은 방황들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장면은 거의 감동에 가까왔다.

아울러, 에핑과 솔로몬 바버와 포그의 유전적인 운명성을 띈 배회와 모험과 삶에 대한 회의들은 인연의 끈처럼 서로를 엮어서 결국 포그에 이르러 완전성을 띄게 되는 구성 또한 좋았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에핑의 서사시에 가까운 인생은 포그의 짧은 방황의 인생에 집약되고 솔로몬 바버의 사랑, 큰 몸집 속에 가려진 작은 모습들은 그와 닮은 포그의 푸른 눈에서 표현된다. 그런 인연과 우연에 가까운 운명들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구성하면서 삶과 운명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전적으로 작가인 폴 오스터의 재능이다.

3대에 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폴 오스터는, 그 긴 여정들이 사람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여행이며 따라서 내면에의 성찰은, 누구에게나 몽롱하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인생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들이 점차 윤곽을 띄고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도록 한다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폴 오스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책만큼은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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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vil Wears Prada (Paperback, Reprint)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 Anchor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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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사실 소설은 읽을 생각조차 없었고 영화를 억지로 보러가면서도 분명 패션쇼 정도의 이야기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심드렁 그 자체로 들어가 엉덩이 앞으로 쭈욱 뺀 채 머리를 뒤로 젖힌, 매우 불경스러운 자세로 몇 시간 때우고 나가려 했었다. 그랬던 내가 영화가 차츰 진행되면서 이봐라~ 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세를 고쳐잡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감동'이라는 것까지 받고 나왔더랬다. 당연 이 영화에서의 압권은 '메릴 스트립'이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Andrea의 상사인 Miranda Pristley역으로 나온 그녀는 정말 나이를 먹어도 멋질 수 있구나 라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말 까칠하고 성질 더럽고 자기밖에 모르지만, 자신만의 세계에서 철학이 있고 월등한 실력이 있고 정치력까지 겸비한 상사역을 멋지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특히 그녀가 냉담한 표정으로 "That's all."을 말할 때는 아..저렇게 간단한 대사를 어떻게 저렇게 소화할 수 있지 라고 감탄감탄했더랬다(지금 내가 쓰는 게 책리뷰냐 영화리뷰냐..ㅜㅜ).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보자마자 영문판으로 이 책을 구매했다. 도대체 책은 어떨지 너무 궁금했고 그걸 원서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람들이 영화보다 못하다고 말은 했지만 도대체 소설이 영화보다 못한 경우를 난 잘 보지 못했기에 무시하고 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그랬고 최근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나 '검은집'도 그랬고...당연 책을 제대로 소화해서 더 잘 만든 영화란 거의 못 봤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상.

그런데. 정말 영화보다 못했다. 실망이었다. "Something that a million other people would die for"인 Runway라는 패션 잡지사에 들어간 신입사원 Andrea Sachs가 지독한 상사 때문에 고생한다는 얘기 정도라니. 무엇보다 첫째는 Miranda Pristley가 실망이었다. 이 책에서는 거의 절반은 넘어가야 등장하기 시작하는 데다가(그 동안엔 출장이다) 그 이후에도 너무나 간헐적으로 나오고 영화와는 너무나 다르게 거의 성격 파탄자 수준이다. 둘째는 Andrea가 실망이었다. 영화에서는 뭔가 좀 인간적이고 일에 치이면서도 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소설에서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고 친한 친구 뒤치닥꺼리하느라 정신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세째는 결말이 실망이었다.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는 그냥 그러다가 끝났다. 고생만 하다가 Andrea는 Miranda에게 멋지게(그게 멋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방 먹이고 회사를 나와 Miranda를 미워하는 또 한사람과 멋지게 일하게 되었다. 뭐 그 정도?

그렇게 책을 억지로(정말 중반부터는 큰 기대없이 억지로 읽게 되었다) 읽고 나니 영화 시나리오를 너무나 잘 만들었다는 결론만 내리게 된다. 이 책이 왜 그렇게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는 지가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별 세개를 준 것은, 비교적 쉬운 영어를 썼다는 것에 하나 주고(우하하), 고달픈 이야기를 그렇게 자세히 여러가지 케이스를 들어 장황하게 썼다는 것에 하나 주고(쩝), 그래도 영화 만들기 위한 스토리보드 역할은 했으니까 하는 심정으로 하나 주었다. 영화는 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소설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영화에서는 괜챦은 상사의 전형을 확인했었는데(물론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좀 사양하고 싶지만 그 전문성과 프라이드, 노력은 놀랍지 않은가! 정치력까지!) 책에서는 왠 사이코아줌마상사를 연상시켜서 마음에 안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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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2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 대문사진!
저도 메릴 스트립이 좋았어요. ^^
책에선 영화 속 이미지와는 다른가 보군요...

비연 2007-06-29 10:54   좋아요 0 | URL
앗! 정말...같네요...ㅋㅋ
영화에서의 메릴 스트립은 정말 멋졌죠..
책에서는 제가 봐선, 완전 사이코로 나온다니까요...ㅜㅜ

moonnight 2007-06-2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영화만 봤는데, 아무래도 책은 패스해야 할 것 같네요. ;;
저도 메릴 스트립이 참 멋졌답니다. ^^

비연 2007-06-29 16:58   좋아요 0 | URL
책은 패스하셔도 될 듯...^^;;; 아쉽지만서두요..

ryck 2007-07-04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냉담한 표정으로 말한 대사는 That's it. 이 아니라.. That's all. 이었다네.. -_-

비연 2007-07-04 20:09   좋아요 0 | URL
고쳤다네...;;;
(아니, all을 왜 it으로 적어 놓은 거지? ㅜㅜ)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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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데에 다시 들어가려면 대들보와 금속틀들을 잔뜩 쌓아놓은 공터를 지나가야 한다. 기중기의 강철 케이블이 길을 가로막는다. 알렉스가 뛰어넘으려고 그것을 잡는다. 'Donnerwetter(제기랄)', 그는 자기 손에 검은 기름이 묻은 것을 본다. 그 사이 내가 그에게 다가갔다. 알렉스는 증오의 말도 조소도 하지 않은 채 내 어깨에 손바닥과 손등을 문질러 깨끗이 닦는다. 만일 누군가 알렉스에게 내가 오늘날 바로 그 행동을 토대로 그를, 판비츠를,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도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크고 작은 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그 가엽고 잔인한 알렉스는 굉장히 놀랄 것이다. (pp165)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은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 애정, 우정과 같이 듣기만 해도 푸근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적대, 증오, 혐오, 경멸 등과 같이 내가 제발 그 대상이지는 말기를 이라고 속으로 바라게 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알렉스가 주인공인 프리모 레비를 대하는 건,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그 수많은 종류의 방법들 중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 아니 생명을 지닌 것과 생명을 지니지 않은 것 사이에서나 일어날 법한 상황이다. 나는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이 책은 널리 알려진 대로(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서경식 선생의 글을 통해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되었다) 그 지옥같다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자 화학자이며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생존 수기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지낸 14개월동안 그가 실제로 본 것, 느낀 것,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담담한 필치로 써내려간 그런 글이다.

이런 류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 때의 경험을 얘기할 때 이렇게 냉정을 유지하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인 것처럼, 어떠한 적의나 어떠한 분노도 찾아볼 수 없이, 관찰하는 듯이 이야기한다는 것. 일상 생활에서 당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소홀한 처사에도 쉽게 화내고 잊지 못해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비는 했다. 그래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21세기의 문턱에 있는 현재에도 그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현상적으로가 아니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상존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책은 신랄한 경고이다.

예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 본 적이 있다(물론 레비는 전시실이 잘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지 않았고 제3수용소인 모노비츠에 있었지만). 그 때, 그 음침하고 썰렁한 전시실에서 보았던 것들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영화로 드라마로 책으로 듣고 읽어왔던 진실들이 내 앞에 마치 과거인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인 머리카락과, 누군가의 발에 곱게 신겨져 있었을 신발 무더기와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책을 보는 데 썼을 안경 더미 속에 잔인하게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시절 그 곳에 있었던 파시즘의 망령이 아직도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혐오감이 일었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냥 수용소 생활을 그린 수기라는 호칭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그 무엇이다. 끔찍하고 참혹하고 도저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바닥의 바닥인 생활 속에서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았고, 인간에 대한 애정도 함께 포기하지 않았으며,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고자 했던 한 사람을 통해,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pp285, 독자에게 답한다 중)."라고 했던 레비의 말대로, 우리의 심정 저 끝에 또아리를 틀고 있고, 또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파시즘을 영원히 경고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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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고무줄 2008-11-1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소중한 책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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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엄한 생각을 하면 안되는 거겠지만, 가끔은 일찍 죽어야 할 사람은 끈질기게 살고 좀 살아줬으면 하는 사람은 속절없이 너무 빨리 떠나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염라대왕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니 누구에게 면죄부를 주며 누구를 정죄할 것인가 만은 그냥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발상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나 오주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그랬고 김광석이 저 세상으로 갔을 때도 그랬다. 신문 지상에서 괄호 안에 든 나이를 보며 아깝다, 아깝다 속으로 쓰라렸던 기분이 아직까지도 느껴질 정도이니.

이 책의 저자인 정운영 교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에 서두에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게다. 돌아가셨을 때가 아마 우리나라 나이로 예순 셋. 예전엔 환갑이 넘은 노인으로 볼 수 있겠지만, 요즘처럼 평균 수명이 늘어난 시대에는 옛날 마흔 정도로밖엔 여겨지지 않는 연세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 작년 가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또 한 사람이 사라졌구나 여겼었던 게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일년이 훌쩍 넘어가버렸다. 세월은 이렇게 덧없다.

이 책은 신문에 연재되던 칼럼과 서평을 한데 엮어낸 것으로, 찔끔찔끔 일주일에 한 번씩 읽던 그의 글을 한 몫에 모아 볼 수 있는 행운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책을 좋아해서 장서만 2만권이 넘고 '귀인을 대하듯 책을 다루셨던' 그 분의 글은 항상 우리를 시퍼렇게 날서게 해주었었다. 누구나 중도를 걷고 싶어하나 어느 한 쪽에 기울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없이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 원칙을 잊지 않게 하는 글들은 앉은 자리에서 두번 세번 읽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글이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것은 비단 날카롭기만 해서는 아니다. 김남주 시인이 남긴 칼과 피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욕심의 한 줌을 전하기도 하고(pp40, 그가 남긴 칼과 피의 사랑), 장영희 교수의 책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내 이 아줌씨, 이럴 줄 알았다니까."를 말하기도 하고(pp52, 10월의 크리스마스), 가난 한 아이들의 눈물을 기적으로 닦아주자 호소하기도 하는(pp103, 우리 모두 '도시락'을 풀자)  글들 속에서 저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이 느껴져서 좋다. 그는 올림픽 마라톤에서 넘어져서 3등을 한 반데를레이 리마를 기억하면서 많이 아팠던 사우를 위해 있었던 위로연을 기억에 담아두는(pp305, 정치 올인에서 경제올인으로) 그런 분이셨다.

뿐만 아니라, 보수와 개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누가누가 나쁜가를 드러내고자 경쟁하듯이 서로 욕하고 시비하는 정치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냉정한 자세로 무엇이 근원이며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시원한 글들이 또한 좋다. 미군의 용산기지 이전이나, 이라크전 참전이나,  현 정권의 개혁 내용 등등의 지금 현재의 사회상들에 대해 명쾌하게 진단하고 발전적인 제언을 하는 글들을 읽고 있으면 이거야! 하며 무릎을 치게 하니 그것도 좋다.

살아계셨다면,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을 뭐라고 하셨을까. 아이들은 매일 학원으로 내몰린 채 논술 전쟁에 온 열정을 불사르고,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바람에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기회를 놓칠세라 돈을 뭉터기로 빌려가며 집을 사고 있고, 간첩사건이며 헌재소장 임명건이며 FTA며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야 찾기 어려운 작금에 대해 뭐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마지막 칼럼에 쓰셨던  "여기 눈을 감은 채 더 높은 보수를 받고, 여기 눈을 감은 채 더 헐거운 정직성의 기준을 요구하는 데서 나는 286이니 386이니 하는 인위적 패거리가 만들어내는 실패의 교훈을 느낀다...(중략)...그럴수록 이 시대에 더욱 절박한 제목이 정치적 정직성이라고 믿는다" (pp238, 영웅본색) 라는 말들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너무나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운영 교수만이 쓸 수 있는 글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지만. 아마도, 이 칼럼집을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것은 그래서 '그리움'이었던 것 같다. 통찰력과 지성으로 우리를 일깨우던 목소리에 대한 깊은 그리움. 도대체 왜 그리 허무하게도 빨리 신께 가버리셨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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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02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롭되 따뜻한 글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정치적 정직성, 잘 읽었습니다.

비연 2006-12-0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안 읽어보셨으면..꼭 권해드려요^^

마늘빵 2006-12-0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정말 보고 싶군요.

마태우스 2006-12-0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운영님 책은 죄다 샀지요. 읽고나면 아주 대단한 교양을 얻은 느낌을 주는 책들이죠. 피사, 레테.... 이번 책은 사놓고 아직 못읽었어요. 저 역시 그분의 글이 벌써부터 그립네요.

비연 2006-12-0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꼭 추천드려요^^

마태우스님) 저도 정운영님 책을 하나씩 사보고 싶어지더군요~ 이 책도 꼭 보시구요^^ 마태우스님이 읽으셨다면 더 좋은 리뷰를 써주셨을텐데요..

Kel님) 네~ 꼭 보시길 추천!
 
모방범 3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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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을 읽고 나니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우리나라에 출판된 것은 이제 '마술은 속삭인다'만 남기고 다 읽은 셈이 되고 말았다. 정말 정신없이 그녀의 글에 빠져들어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평범한 아줌마처럼 생기고 별다른 이력도 없어 보이는 그녀가 어떻게 이런 글들을 쓸 수 있는 지 궁금해하면서, 자꾸만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읽었지만, 그럼에도 이 '모방범'을 손에 들 때는 상당히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세 권이라니. 보기만 해도 헉! 소리가 나서 연말까지 다 읽어낼 수는 있을려나 하는 마음과 그래도 미야베 미유키의 글을 다 읽어버리겠다는 괴상한 집념이 복합되어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일주일 만에 1500 페이지의 방대한 이 책을 다 읽었고, 난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전율을 느낌과 동시에 당분간 미야베 미유키의 글은 읽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지금 내 책장에 남은 한 권의 책이 버젓이 꽂혀 있음을 보면서도 말이다.

왜냐고 묻고 싶다면, 일단 읽어보라고 말할 도리밖엔 없다.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추리소설(나는 그녀의 책들을 추리소설 분류에 넣고 싶지 않지만)은 너무나 예리하고 너무나 재미있어서 일본 작가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 속에, 내가 그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자신의 세계로 확 잡아당기는 미야베 미유키의 글은, 한마디로 마약같다. 어떻게 이다지도 인간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지, 어떻게 그 이해하는 부분을 이리 잘 묘사할 수 있는 지, 모든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난 경탄해마지 않았다. 하지만,  '모방범'에 와서는 그 경탄을 넘어서서 완전히 질려버렸기에 더이상은 무서워서 그녀의 작품을 다시 집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고 핀잔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좋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연속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이기도 하고, 그 피해자들이기도 하고, 그 피해자들의 남겨진 유족이기도 하며 근원적으로는 나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끔찍한 연속여성살인사건을 둘러싸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유족의 입장에서, 범죄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형사의 입장에서, 르뽀 작가의 입장에서 유기적으로 구술되는 이야기들이 얼기설기 이어지는 구석도 느껴지지 않을만치 자연스럽게 엮어져서 하나의 세상이 보여지고 거기에 나의, 혹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너무나도 다양한 선과 악들이 실감나게 아니 소름끼치게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라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상황들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불행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는 살인자들의 심리와 갈등이 그들이 한 행동을 이해하게는 못해도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가장 사악한 일면들에 대해 가닥가닥 느끼게 한다. 또한, 아리마 요시오와 같이 사랑하는 손녀를 그들의 손에 잃고 딸까지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도 연륜과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끝내는 살인자들에게 마지막 일격의 말을 남기는 유족의 모습에서 사람 하나 죽는 것이 그냥 한 명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한 명이 스러지면, 그들이 이제까지 지내온 세월과 인연들이 함께 스러지는 것이고 그와 함께 그들과 가까왔던 많은 사람들의 지나온 인생도 함께 소진시키는구나..했다. 그러한 사건들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들, 뒷얘기들, 그리고 그것을 악용하는 언론과 사람들의 모습은 현재의 우리 사회가 내몰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무겁고 쓰라렸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인물들의 생명력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의 심리가 내게로 전이되어 범죄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며 유족인 동시에 황색언론인 나를 발견하게 하는 건, 두말할 것없이 작가의 뛰어난 역량 덕분이기도 하다. 그저 아무 생각말고 지금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세계로 들어가길 권한다. 다 읽은 후 나처럼 너무 소진되어 거리를 두고 싶다고 말하게 될 지언정, 이 책은 꼭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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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아이 2006-11-3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간 꼭 읽고 말겠어요.(두 주먹 불끈 쥐며)

비연 2006-11-3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친아이님) '언젠간'이 아니라 '지금' 이면 좋을텐데요..ㅋㅋ

플레져 2006-11-3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비연님의 강력한 리뷰!
미야베 미유키가 이 글을 읽는다면 참 좋아하겠어요 ^^
한명이 스러지면 그들이 이제까지 지내온 세월과 인연들이 함께 쓰러지는 것...
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추천합니다.

Mephistopheles 2006-12-0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썩...읽어야 겠군요...왜이리 읽어야 할 책들이 밀리는 건지....

비연 2006-12-0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미야베 미유키가 이 글을 읽는다면 전 넘 좋아 쓰러질 거에요..ㅋㅋ
추천 넘 감사하구요~^^

Mephiso님) 네! 꼭 읽으시길 권해요. 정말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나 밀려 있어서 저도 책장을 보며 압박을 느끼고 있지요...^^;;

상복의랑데뷰 2006-12-0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본좌님이시죠. ^^ 전 나츠오여사님을 더 선호합니다만, 아직 3대 걸작을 읽어보지 못했으니...부당한 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연 2006-12-03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 나츠오 여사의 책을 전 하나도 읽어보지 못했네요! ㅜㅜ
님께서 선호하신다니 '아임 소리 마마'부터 시작해볼까 싶어요~

블랙홀 2007-05-0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런 리뷰를 남기시면...지금당장 읽을 수 밖에 없잖아요..좀 참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 가 없네요...좋은리뷰 감사합니다^^

비연 2007-05-0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홀님) ㅋㅋㅋ 그럼 저로선 성공이네요~ 미미여사 전도사죠 제가...^^
좀 두껍고 길긴 해도 읽어보시면 아마 꼭 좋아하게 되실거에요~~

블랙홀 2007-05-0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배달온책을 봤는데...헉..정말 두껍네요..500쪽이 넘는데 세권씩이나..헉소리나네요 ㅎㅎ지금 살인의해석을 읽고있어서 그런지(이책도 만만치 않게 두껍죠-_-;) 이 두꺼움도 웬지 친근하네요..그나마 무겁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비연님이 이렇게 칭찬을 하는 작품이니 저도 재밌게 읽어봐야겠어요^^

비연 2007-07-05 00:08   좋아요 0 | URL
블랙홀님) 아..지금에야 이 댓글을 보았네요..죄송. 아마 지금쯤 잘된 선택이었어..라는 마음으로 미야베 미유키에게 흠뻑 빠져 계시지 않을까 하는..매우 주관적인 상상이..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