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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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런 무엄한 생각을 하면 안되는 거겠지만, 가끔은 일찍 죽어야 할 사람은 끈질기게 살고 좀 살아줬으면 하는 사람은 속절없이 너무 빨리 떠나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염라대왕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니 누구에게 면죄부를 주며 누구를 정죄할 것인가 만은 그냥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발상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나 오주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그랬고 김광석이 저 세상으로 갔을 때도 그랬다. 신문 지상에서 괄호 안에 든 나이를 보며 아깝다, 아깝다 속으로 쓰라렸던 기분이 아직까지도 느껴질 정도이니.

이 책의 저자인 정운영 교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에 서두에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게다. 돌아가셨을 때가 아마 우리나라 나이로 예순 셋. 예전엔 환갑이 넘은 노인으로 볼 수 있겠지만, 요즘처럼 평균 수명이 늘어난 시대에는 옛날 마흔 정도로밖엔 여겨지지 않는 연세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 작년 가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또 한 사람이 사라졌구나 여겼었던 게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일년이 훌쩍 넘어가버렸다. 세월은 이렇게 덧없다.

이 책은 신문에 연재되던 칼럼과 서평을 한데 엮어낸 것으로, 찔끔찔끔 일주일에 한 번씩 읽던 그의 글을 한 몫에 모아 볼 수 있는 행운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책을 좋아해서 장서만 2만권이 넘고 '귀인을 대하듯 책을 다루셨던' 그 분의 글은 항상 우리를 시퍼렇게 날서게 해주었었다. 누구나 중도를 걷고 싶어하나 어느 한 쪽에 기울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없이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 원칙을 잊지 않게 하는 글들은 앉은 자리에서 두번 세번 읽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글이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것은 비단 날카롭기만 해서는 아니다. 김남주 시인이 남긴 칼과 피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욕심의 한 줌을 전하기도 하고(pp40, 그가 남긴 칼과 피의 사랑), 장영희 교수의 책을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내 이 아줌씨, 이럴 줄 알았다니까."를 말하기도 하고(pp52, 10월의 크리스마스), 가난 한 아이들의 눈물을 기적으로 닦아주자 호소하기도 하는(pp103, 우리 모두 '도시락'을 풀자)  글들 속에서 저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들이 느껴져서 좋다. 그는 올림픽 마라톤에서 넘어져서 3등을 한 반데를레이 리마를 기억하면서 많이 아팠던 사우를 위해 있었던 위로연을 기억에 담아두는(pp305, 정치 올인에서 경제올인으로) 그런 분이셨다.

뿐만 아니라, 보수와 개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누가누가 나쁜가를 드러내고자 경쟁하듯이 서로 욕하고 시비하는 정치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냉정한 자세로 무엇이 근원이며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시원한 글들이 또한 좋다. 미군의 용산기지 이전이나, 이라크전 참전이나,  현 정권의 개혁 내용 등등의 지금 현재의 사회상들에 대해 명쾌하게 진단하고 발전적인 제언을 하는 글들을 읽고 있으면 이거야! 하며 무릎을 치게 하니 그것도 좋다.

살아계셨다면,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을 뭐라고 하셨을까. 아이들은 매일 학원으로 내몰린 채 논술 전쟁에 온 열정을 불사르고,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바람에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기회를 놓칠세라 돈을 뭉터기로 빌려가며 집을 사고 있고, 간첩사건이며 헌재소장 임명건이며 FTA며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야 찾기 어려운 작금에 대해 뭐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마지막 칼럼에 쓰셨던  "여기 눈을 감은 채 더 높은 보수를 받고, 여기 눈을 감은 채 더 헐거운 정직성의 기준을 요구하는 데서 나는 286이니 386이니 하는 인위적 패거리가 만들어내는 실패의 교훈을 느낀다...(중략)...그럴수록 이 시대에 더욱 절박한 제목이 정치적 정직성이라고 믿는다" (pp238, 영웅본색) 라는 말들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책을 읽는 내내 너무나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운영 교수만이 쓸 수 있는 글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지만. 아마도, 이 칼럼집을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것은 그래서 '그리움'이었던 것 같다. 통찰력과 지성으로 우리를 일깨우던 목소리에 대한 깊은 그리움. 도대체 왜 그리 허무하게도 빨리 신께 가버리셨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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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02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롭되 따뜻한 글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정치적 정직성, 잘 읽었습니다.

비연 2006-12-0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안 읽어보셨으면..꼭 권해드려요^^

마늘빵 2006-12-0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정말 보고 싶군요.

마태우스 2006-12-03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운영님 책은 죄다 샀지요. 읽고나면 아주 대단한 교양을 얻은 느낌을 주는 책들이죠. 피사, 레테.... 이번 책은 사놓고 아직 못읽었어요. 저 역시 그분의 글이 벌써부터 그립네요.

비연 2006-12-0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꼭 추천드려요^^

마태우스님) 저도 정운영님 책을 하나씩 사보고 싶어지더군요~ 이 책도 꼭 보시구요^^ 마태우스님이 읽으셨다면 더 좋은 리뷰를 써주셨을텐데요..

Kel님) 네~ 꼭 보시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