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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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데에 다시 들어가려면 대들보와 금속틀들을 잔뜩 쌓아놓은 공터를 지나가야 한다. 기중기의 강철 케이블이 길을 가로막는다. 알렉스가 뛰어넘으려고 그것을 잡는다. 'Donnerwetter(제기랄)', 그는 자기 손에 검은 기름이 묻은 것을 본다. 그 사이 내가 그에게 다가갔다. 알렉스는 증오의 말도 조소도 하지 않은 채 내 어깨에 손바닥과 손등을 문질러 깨끗이 닦는다. 만일 누군가 알렉스에게 내가 오늘날 바로 그 행동을 토대로 그를, 판비츠를,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도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크고 작은 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그 가엽고 잔인한 알렉스는 굉장히 놀랄 것이다. (pp165)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은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 애정, 우정과 같이 듣기만 해도 푸근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적대, 증오, 혐오, 경멸 등과 같이 내가 제발 그 대상이지는 말기를 이라고 속으로 바라게 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알렉스가 주인공인 프리모 레비를 대하는 건,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그 수많은 종류의 방법들 중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 아니 생명을 지닌 것과 생명을 지니지 않은 것 사이에서나 일어날 법한 상황이다. 나는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이 책은 널리 알려진 대로(나는 많은 사람들처럼 서경식 선생의 글을 통해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되었다) 그 지옥같다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이자 화학자이며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생존 수기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지낸 14개월동안 그가 실제로 본 것, 느낀 것,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담담한 필치로 써내려간 그런 글이다.

이런 류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 때의 경험을 얘기할 때 이렇게 냉정을 유지하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인 것처럼, 어떠한 적의나 어떠한 분노도 찾아볼 수 없이, 관찰하는 듯이 이야기한다는 것. 일상 생활에서 당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소홀한 처사에도 쉽게 화내고 잊지 못해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비는 했다. 그래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21세기의 문턱에 있는 현재에도 그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현상적으로가 아니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상존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책은 신랄한 경고이다.

예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 본 적이 있다(물론 레비는 전시실이 잘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지 않았고 제3수용소인 모노비츠에 있었지만). 그 때, 그 음침하고 썰렁한 전시실에서 보았던 것들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영화로 드라마로 책으로 듣고 읽어왔던 진실들이 내 앞에 마치 과거인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인 머리카락과, 누군가의 발에 곱게 신겨져 있었을 신발 무더기와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책을 보는 데 썼을 안경 더미 속에 잔인하게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시절 그 곳에 있었던 파시즘의 망령이 아직도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혐오감이 일었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냥 수용소 생활을 그린 수기라는 호칭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그 무엇이다. 끔찍하고 참혹하고 도저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바닥의 바닥인 생활 속에서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았고, 인간에 대한 애정도 함께 포기하지 않았으며,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고자 했던 한 사람을 통해,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pp285, 독자에게 답한다 중)."라고 했던 레비의 말대로, 우리의 심정 저 끝에 또아리를 틀고 있고, 또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파시즘을 영원히 경고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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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고무줄 2008-11-13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소중한 책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