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이순신` 전쟁영웅 의 삶


지난 2005년 12월 29일 미 로스엔젤레스 시더스 사이나이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전설적인 한국인 전쟁영웅 김영옥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 김영옥 예비역 대령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내셔널 메모리얼 묘지에 안장됐다.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 프랑스 십자무공훈장에 이은 국가 최고 훈장인 `레종 드뇌르(Legion d`Honneur)` 무공훈장, 미국 특별무공훈장, 한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 등 20여개의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 김영옥.

미군 역사상 육군 전투대대를 지휘한 첫 소수민족 장교이자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긴 주역,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을 두 차례 받은 전설적 일본계 부대(442연대 100대대)를 이끈 장교, 한국전에서는 무패의 신화를 남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을 지냈다.

2차대전 후 전역했다가 한국전 발발 후 입대를 자원한 김 대령은 패전을 거듭하던 1대대의 대대장이 되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갔다. 동부전선에서 38선을 60km나 끌어올려 현재의 휴전선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963년부터 2년 동안 한국에서 미 군사고문단에 근무하면서 국군 최초의 미사일 부대 창설 등 한국군의 현대화를 도왔다.

사지를 넘나드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총알과 수류탄 파편은 그의 몸 11곳에 신경을 잘라놓았고 2차 세계대전 참전 때 잃은 손가락 일부와 한국전쟁 당시 부상으로 받은 40차례의 수술은 영광의 상처였다.

지난 2000년 미 육군으로부터 ‘노근리 사건’에 대한 외부전문가위원회(outside experts committee) 위원으로 위촉됐고 2003년 한국 정부로부터 사회봉사 활동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최대의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의 LA 지부(chapter) 이사를 지내며 재미일본인을 포함한 미국내 소수민족의 권익에 앞장섰던 고 김영옥 대령은 미 최대 한인봉사단체로 성장한 한인정신건강정보센터를 만들었고 한인 2세를 위한 한인청소년회관, 한미연합회, LA 한인건강정보센터의 설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자 전쟁영웅으로서 사회봉사에 앞장섰던 그였지만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예의는 그가 진정한 영웅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준다.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던 재미 저널리스트 한우성(49. `뉴 어메리카 미디어` 한국부장)씨가 97년부터 500회 이상 김영옥 대령을 인터뷰해 써낸 논픽션 <영웅 김영옥>(북스토리. 2005)는 2차대전 당시 영웅 이전의 `인간 김영옥`을 이렇게 묘사한다.

"순간 잠깐 생각에 잠긴 아카호시 일병이 기관단총을 다시 등에 메더니 가슴에 차고 있던 수류탄 두발을 떼어낸 양손에 들고는 영옥을 쳐다봤다. 영옥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카호시 일병은 수류탄의 안전핀을 빼지 않은 채 참호 바닥에 내려 놓고 밖으로 나왔다. 다른 독일군이 참호에 왔을때 미제 수류탄을 보고 초병들이 포로로 잡혀갔음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불가항력인 상황에서 포로가 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적이라도 탈영병으로 취급받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영옥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한 것은 서로 말은 안했지만 영옥도 아카호시 일병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1943년 9월 로마의 외항(外港)인 안지오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북쪽에서 보강 병력이 대거 내려와 안지오를 포위한 독일군과 장기 대치상태에 빠졌던 상황. 스스로 작전을 자원한 김 대령(당시 중위)과 일본인 전우가 생포해 온 독일군 2명의 자백으로 연합군이 승기를 잡게 된 것이었다.

1944년 5월 23일 버팔로 작전으로 연합군은 로마를 지키는 독일군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고 6월 4일 드디어 로마에 입성했다. 로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바로 이틀전이었다.

김 대령은 당시 작전참모로서 연합군의 피사로 무혈입성 전략을 펼쳤는가 하면 탱크가 내려갈 수 없는 산비탈에 탱크를 내리는 전략으로 독일군 탱크부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 기존 유럽식 전쟁방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략으로 연이은 승전을 거듭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군사교본을 다시 쓰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

2001년 재미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는 김 대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60분짜리 단편영화로도 제작했으며 2003년 KBS다큐 `한민족리포트`이어 2005년 `MBC 스페셜` 역시 김 대령의 일대기를 다뤘다.

(사진 = 1. 한국계 미국인 전쟁영웅 김영옥 전 미군대령이 지난해 2월 5일 LA주재 프랑스 총영사로부터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인 ‘레종도뇌르’ 를 받은 뒤 수훈 소감을 밝히고 있다. 출처 국정브리핑 자료 2. 고 김영옥 예비역 대령이 한국전쟁 참전(1951~1952년)당시 돌보던 고아원 아이들)

[북데일리 원희준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굳은 손가락’으로 써내려간 기적의 책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난 꿈을 버릴 수 없어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이원규씨가 매일경제신문에 했던 말이다. 마흔살이 되던 1999년. 수년 내에 온몸이 마비되어 사망한다는 ‘루게릭병’ 선고를 받은 후 지금까지 그는 한시도 희망을 놓아본 적이 없다.

<굳은 손가락으로 쓰다>(동아일보사. 2005)를 읽으며 독자가 느끼는 것은 인간의 강한 의지다. 단 한 장, 아니 한 줄의 문장도 쉽게 넘어 갈 수 없는 이유는 혼자 힘으로는 의자에 앉거나 설 수도 없는 그가 매일 8시간씩 1년간 목숨을 다해 써내려간 글이기 때문이다.

2004년 9월 이후 혼자 힘으로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게 된 그는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어 직장에 나간 아내가 퇴근할 때까지 꼼짝 없이 종일을 누워 지낸다. 안면근육도 많이 빠져나가 아랫입술과 턱주변이 일그러졌고 웃음과 울음을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멈출 수 없게 되었다.

목근육의 약화로 머리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가 앞쪽이나 뒤쪽으로 꺾여 스스로 고개를 들 수도 없다. 혼자 힘으로는 단 한권의 책도 가져다 볼 수 없고 책장을 넘길 수 도 없는 그가, 어떻게 책을 집필 할 수 있었을까. 몸이 건강한 사람도 쉬운 일이 아닌데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 하나에 의지해 매일 8시간씩 글을 썼다는 굳은 의지앞에서는 ‘기적’도 남루하게 느껴질 정도다.

글과 책에 대한 열정의 모체는 ‘문학’이었다.

“작은 누나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새침데기 문학 소녀였다. 나는 누나가 노트에 끄적여 놓은 시나 일기를 몰래 자주 훔쳐보았는데, 그중에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 내린다’ 라는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Apolinaire)의 시도 있었다. 내가 만약 문학적 감수성이 있다면 그 출발은 바로 작은 누나 일 것이다.”(본문 중)

동성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병을 얻어 교사직을 그만뒀지만 발병1년 전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에 합격해 수학했고 2004년 드디어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정도로 문학을 향한 열정은 남달랐다.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했던 그에게 누나는 많은 영향을 미쳤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책이 주는 감동은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때문이기도 하다. 결혼 후 10년이 지난 1999년 가을. 감기한번 걸리지 않았던 그가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듣고 부부는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잡고 다시는 울지 말자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약속을 한번도 어겨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안보는 데서 가끔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언제나 환한 미소로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애쓰지만 가끔 퉁퉁 부어 있는 두 눈을 볼 수 있다. 그때마다 나는 치유의 각오를 더욱 새롭게 다진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내가 병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아내의 환한 미소를 언제까지나 지켜줘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본문 중)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아내. 이원규씨는 ‘문제없는 부부는 없다’는 말로 자신의 병을 ‘일축’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만 가지고는 성공적인 결혼생활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배려하는 측은지심과 인내심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2인 삼각경기를 예로 드는 비유는 탁월하다. 2인 삼각경기는 경기도중 한사람이 예기치 않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두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주변의 격려와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승과는 거리가 멀게 된 경기를 마치기 위해서는 묶여 있는 끈을 풀지 않고 끝까지 헤쳐 나가겠다는 두 사람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두터운 부부애를 증명한다.

이원규씨는 혀가 굳어 말을 하지 못하지만 음성변환장치가 개발된다면 스티븐호킹박사처럼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어떤 순간에서도 그는 결코 삶을 비관하지 않는다. 평소 좌우명처럼 여기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떠올리며 오늘도 변함없는 희망아래 소중한 삶을 불태운다.

“인간은 융통성 있는 동물이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적응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을 거부한 호랑이는 어떻게 됐을까
[오마이뉴스 정아은 기자] 옛날 옛날 호랑이와 곰이 살았다. 그들의 소원은 단 하나, 인간이 되는 것. 호랑이와 곰은 천지신령께 열심히 빌었다. 제발 인간이 되게 해주세요. 천지신령은 답을 내렸다.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100일을 버틴다면 사람이 되게 해주마. 곰은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이 시험을 이겨내어 인간이 되어 단군을 낳았고 후세에 두고두고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참을성 없고 경솔한 호랑이는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뛰쳐 나가고 말았고 이후 다시는 사람들의 뇌리에 떠오르지 못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그렇게 잊혀졌던 호랑이다.

 
▲ 제1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박진규 <수상한 식모들>
ⓒ2006 문학동네
순종과 인내의 미덕을 갖추지 못한 호랑이는 비록 사람이 되어 건국 설화의 중요한 인물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후 사람에게 은근히 스며들어 호랑아낙으로 이어졌다. 이 호랑아낙들은 호랑이의 기를 받아 역사적 순간마다 물밑에서 중요한 작업을 해내며 근근히 맥을 이어갔다.

...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날, 호랑아낙 여럿이 모두 한양으로 몰려와 궁궐 앞에서 통곡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군졸들이 창을 디밀어 호랑아낙들을 몰아내고 궁녀들이 그 자리에 소금을 한 바가지 뿌렸다.

비단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냄새만 기막히게 맡는 건 아니었다. 한일 합방이 이뤄지기 며칠 전부터 정신이 반쯤 나간 호랑아낙 몇몇은 가슴을 그러쥐고 경복궁 구위를 기어다니며 통곡하였다...


호랑아낙, 그리고 그 계보를 잇는 '수상한 식모들'은 역사의 저변에서 남몰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명성왕후 시해사건 때는 물론이고 연산군 때,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때, 광주민주화 운동 때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배후엔 항상 그들이 있었다.

무당이나 점쟁이 비슷한 존재, 현대에 들어서는 남의 집 가사일을 해주는 사소한 존재로만 여겨졌던 그들이 사실상 조직을 만들어 음모를 꾸미고 '복수'를 시행해 왔던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신선하지 않은가.

그러나 줄거리만 들었을 때 상당히 신선하고 놀라운 소설 <수상한 식모들>(박진규, 제1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의 문을 젖히고 본격적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놀라움과 기대는 의구심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의구심은 결국 지루함과 실망으로 이어진다.

건국설화 속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았지만 이후 누구에게도 회자되지 않고 사라져 버린 호랑이와 부르주아 가정에서 대부분의 가사일을 하며 가족 구성원 모두와 밀접한 연관을 맺지만 존재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식모'라는 존재를 연결지어 소설의 소재로 삼은 건 탁월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엉성한 구성과 매끄럽지 못한 이야기 전개로 시종일관 이어져 독자들은 책을 덮으면서도 도대체 작가가 얘기하려 했던 바가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뚱뚱한 몸집을 가진 경호는 어느 날 집에서 '수상한 식모들'의 역사가 담긴 메모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추적해 가던 도중 친엄마도 이 식모군단과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어느 날 경호는 그의 여자친구인 선재의 도움으로 마지막 '수상한 식모'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가 어린 시절 자신의 귀에 쥐를 집어넣었던 바로 그 식모라는 것을 알고 경악하지만 결국엔 그녀에게 설득당해 '수상한 식모들'의 역사 서술자로서 대필을 수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상한 식모들의 기나긴 역사와 그들의 숨겨진 비밀들을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이다.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이 기발한 소재의 소설에서는 비만, 역사, 가진 자와 빈자, 혁명, 소외계급에 대한 다양한 암시와 묘사가 나온다. 가족관계와 성에 대한 고찰도 상당 부분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종류의 소재는 그저 소재로 머물 뿐이다. 이 소재가 소설화되려면 일단 등장인물의 성격으로 용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소재가 소재 자체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내면에 반영되어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매끄러운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어느 한 인물도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해 있고, 호랑이와 식모라는 참신한 아이디어는 이 모호하고 인위성이 훤히 보이는 등장인물들 사이로 그저 가능성을 품은 채 둥둥 떠다닐 뿐이다.

거창하게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도(명성황후 시해사건,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 등) 소재 자체만 화려할 뿐, 이야기 밖에서 겉도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그런 역사적 사건들과 호랑아낙, 수상한 식모들이 어떻게 개연성 있는 인과관계를 맺었다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이런 커다란 역사적 사건들이 매끄럽지 못한 이야기를 더욱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문학동네는 이 소설에 왜 소설상을 주었을까.

...수상한 식모들은 대부분이 완전범죄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보복의 모습이 도드라지게 드러나지 않으니 꼬리를 잡기 힘들다. 그들이 좌지우지하는 건 개인의 목숨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 가정의 분위기를 손에 움켜쥐었다. 식사 때 올리는 음식의 맛, 주인집 식구들과의 애매한 친분관계, 실내에 감도는 맡을 듯 맡아지지 않는 수상한 공기의 촉감.

수상한 식모의 계략하에 이 가정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하지만 최악의 순간이 닥쳐오기 전까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식모를 내쫓는 사람은 없다. 소파의 장식보를 바꾸고 모피를 한 벌 사고 도배를 하고 애완동물을 바꾸지만, 그들은 문제가 식모에 있었음을 알지 못한다. 심장에 벌집처럼 구멍이 빵빵 뚫린 것 같은 알코올릭 상태에 이르러서야 현실을 바라보는 판단력이 생긴다. 집주인은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사물이 두 겹으로 겹쳐 보일 때에야 비로소 수상한 식모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인가. 또한 얼마나 예리한 통찰력인가. 식모가 하는 일은 단순한 일 같고 식모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한 가정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동네가 상을 준 것은 이 작가의 이러한 통찰력, 그리고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호랑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잡아낼 줄 아는 상상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의 통찰력과 상상력을 보고 그 가능성에 상을 준 것이리라.

그러나 문학상이 과연 가능성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가능성은 지녔지만 매끄러운 이야기를 이루지 못한 작품들은 사실 도처에 널려 있지 않은가. 작품의 심사위원들은 하나같이 이 작품의 참신함과 기발함을 장점으로 꼽았으면서도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 수상자는 먼저 작품을 읽었던 이들의 염려가 한낱 기우였음을 앞으로의 행보에서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 신경숙

... 부디 더 밀도 있는 작품으로 이 우려가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길. - 류보선


찬사 일색인 심사평 말미에 붙인 짧은 우려의 문장은 '주례사 비평'이라는 비난을 의식한 심사위원들의 최소한의 자기방어막이란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많은 이들이 오늘도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표제를 보고 책을 고를 것이다. 사람들의 뇌리에 '문학상'이란 아직도 절대적인 가치에 준하는 무엇으로 각인되어 있다. 내용이 가볍다거나 기존의 문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작품의 완성도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가벼워도 얼마든지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고, 기존의 문법과 달라도 충분히 존재미학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다.

가벼운 것과 산만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참신한 소재를 가졌다고 해서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 부족이 가려지는 것도 아니다. 문학이 사라져간다거나 종이로 된 문자의 소멸을 이야기하기 앞서 문학계 스스로 문학상 선정에 엄정하고 성의있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문학상'의 공정성과 권위에 대해 씁쓸하게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딱지 연구 권위자의 `코파기 예찬론`


오스트리아 폐전문의 프리드리히 비스친거 박사는 2004년 코를 후비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건강하고 행복하며 신체적인 균형을 이룬다고 발표한 바 있다. "손가락은 손수건으로는 닦을 수 없는 곳까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코 속이 청결하게 유지되며 코에서 파낸 것을 먹으면 몸의 면역체계가 강화 된다" "현대의학계는 면역력 강화를 위해 매우 복잡한 수단을 동원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코를 후벼 그것을 먹는 행위는 자연적으로 면역체계를 강화시켜 준다"며 코 후비기의 장점을 역설했다.

청결하지 못한 행위로 간주되어 온 코 후비기 예찬론자가 또 있다. 바로 <코파기의 즐거움>(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2005)의 저자 롤랜드 플리켓 (Roland Flicket)이다. 일명 ‘코딱지 연구’ 권위자로 불리는 그는 성 코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코파기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코 풀기에 대한 고찰을 담은 논문 ‘후루룩, 카악, 퇘’를 1989년에 발표했고 현재 모교의 코 고고학과 명예 교수이자 옥스퍼드 코파막파 대학 특별 연구원으로 초빙된 저자의 코딱지 연구의 집결책 <코파기의 즐거움>은 패러디 농담과, 행위자체만으로도 웃음을 주는 연구과정을 담았다.

이집트, 영국, 르네상스, 소련, 미국 등지를 거쳐 역사적 배경과 일화를 통해 코파기 역사를 살펴보고 코파기의 실제 기술, 예술작품과 시, 노래에 나타난 다양한 코파기 형태를 분석했다.

"모나리자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뭉크의 `절규`속 사람이 그렇게 절규하는 이유는 모두 코파기 때문이다"(본문 중)

뭉크의 ‘절규’가 코파기 때문이라니! 코파기 예찬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 책에 따르면 코파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취미이자 오락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음지의 습관으로 홀대받아왔다. 그러나 자신의 콧구멍을 단 한 번도 후벼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돌아본다면 코파기를 부정하는 행위는 위선이며 가식이다.

이어 ‘마그나카르타, 귀족들의 콧구멍을 사수하다’ 편에서는 영국 윌리엄 국왕에서부터 시작된 코 파기 탄압을 담는다. 강박적으로 코를 후볐던 존 왕은 귀족들의 코 파기 원리를 수호하는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를 승인했다. 이는 코파기에 대한 일차적 해방이었다. 그러나 일부 평민들은 장미전쟁이 일어난 후에야 귀족들과 동등한 코 파기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인권 신장의 역사를 코 파기 행위와 연관지어 해석한 저자의 재치는 ‘코파기 실제편’으로 이어진다. 꺼내기, 뭉치기, 튕기기 3단계 기본기술과 콧물과 코딱지의 형성과정, 코파기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코피의 출혈과 콧병의 원인이 되는 코파기를 ‘저지’ 당해온 일반인들에게 실전코파기 과정은 유머러스하기 짝이 없다.

역사와 철학, 예술을 넘나드는 독특한 패러디가 주는 재미와 당돌함이 돋보인다. 믿거나 말거나, 따라하거나 말거나, 웃고 즐기는 가운데 이 흥미로운 연구와 자료 읽기는 끝난다. 신체일부분의 행위, 지저분함과 금지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코파기를 소재로 한 책의 부제는 ‘손가락 하나로 만나는 해방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슬비 2006-01-13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봤던 카툰인데 다시 보니 재미있네요.
독특한 소재의 책들도 참많습니다.
 






[BS 뒷담화]⑨<마법천자문> (주)북이십일 김진철 상무

아이들에게 <마법천자문> 시리즈의 신간을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에 가까웠다. 각종 온라인 사이트에 “마법천자문 10권 언제 나오나요”라는 질문이 쏟아졌고 급기야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라 모두를 놀라게 했다.

파주출판단지에 위치한 (주)북이십일의 교육사업본부인 ‘아울북’은 <마법천자문>10권을 2년간 만들어 내면서 400만부라는 놀라운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던 날 시내 대형서점 아동서적코너에 들러서야 마법천자문의 열기가 과장이 아님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샘플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진열돼 있던 마법천자문은 모조리 아이들의 손에 들려있었다. 어른도 읽기 어려운 한자의 세계에 아이들을 초대한 <마법천자문>. 출판 기획을 맡은 김진철 상무(49)와 함께 신비한 <마법천자문>의 세계를 풀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기자) 출판일을 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김상무) (웃음)그 질문을 받으니까 얼마 전 ‘내가 20살이라면’이라는 잡지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네요.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나이 50이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듭니다. 결혼도 늦게 해 지금 첫애가 11살, 둘째애가 9살, 셋째가 6살입니다. 마법천자문은 3년 전에 기획됐는데 마침 우리 아이들 나이 또래가 주 고객층이라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죠. 바로 눈앞에서 아이들의 세계를 볼 수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우리 막내는 5살 후반부터는 마법천자문을 혼자 떼고 있습니다.

출판일은 82년부터 3년, 94년부터 3년, 2002년말부터 올해까지 대략 10년 정도. 중간 중간에는 다른 일도 했습니다. 학생운동으로 옥살이도 해봤고 오퍼, 개인사업, 인터넷 쇼핑몰, 수출, 잡지 일까지 다양하게 경험해봤습니다. 그래도 결국 내가 돌아올 곳은 콘텐츠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자) 다양한 분야의 경험이 출판기획자의 자리에 서게 한거네요.

김상무) 저는 제 일이 출판기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컨텐츠 크리에이터’라고 하던데 아직 그 수준까지 부족하다면 ‘컨텐츠 기획’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싶습니다. 특히 마법천자문을 예로 든다면 만화책을 기획했다기보다는 또다른 종류의 새로운 놀이학습 패턴을 만들었다고 봐주었으면 합니다.

기자) 아울북은 어떤 브랜드입니까.

김상무) 2003년 말 마법천자문을 출간하면서 아울북이 출발했습니다. (주)북이십일의 에듀테인먼트 교육사업부로 지혜를 의미하는 올빼미라는 존재를 이용해 아울북이라는 이름을 지었죠.

기자) 마법천자문의 기획 과정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김상무) 당시 기획팀이 있었습니다. 한자학습만화를 만들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뭐가 이렇게 복잡하지. 단순한 뭐가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마법한자’라는 컨셉을 찾아냈었죠. 그 후로 모두가 흔들림 없는 자신감으로 일을 추진했습니다. 만화는 첫 작품이었는데 성과가 좋았으니 운도 따라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획 실무를 맡은 기획팀이 고생이 많았습니다. 만화가의 수고 역시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많은 고비를 넘겨왔습니다.

기자) 출간시 기대했던 판매부수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김상무) 최소한 5만부를 넘으면 그 다음은 10만부는 되지 않을까라고 추측했습니다. (웃음)사실 우리의 야심은 2~3만부가 아닌 5만부였습니다. 5만부를 넘느냐 못 넘느냐가 베스트셀러 여부를 결정하는데 처음부터 5만부를 기본으로 생각했었죠. 그런데 출간 후 2주간은 하루에 10여부 밖에 나가지 않아 실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때 한자카드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자) 판매부수의 변화조짐은 언제부터였나요

김상무) 직원들이 카드를 들고 초등학교 앞에서 직접 배포했습니다. 샘플북도 함께 배포했구요. 언론사를 통해 특이하고 기발한 컨셉의 학습만화가 있다고 홍보하면서 서서히 판매부수가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0권이 2년에 400만부, 권당 40만부 판매라는 놀라운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기자) 마법천자문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입니까.

김상무) 공부한다는 부담 없이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은 `공부` 하면 지겨움부터 느낍니다. 그러나 마법천자문은 이를 놀이로 풀어 한자에 대한 공포나 불안을 없앴고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한자를 알게 되면 세상을 볼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또한 엄마들의 소위`귀차니즘`을 해소해주는데 적합한 책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주면 스스로 보고 놀면서 한자를 터득하게 됩니다. 다른 공부는 진도관리를 해줘야 하지만 마법천자문은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하게 되어있습니다. 즉, 학습의 패러다임, 문화를 바꾼 것이죠. 이것이 가장 큰 힘이고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특별한 마케팅 기획 노하우가 있다면.

김상무) 직접 배포한 것도 요인 중 하나겠지만 제품의 메커니즘이 아이들의 기호에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카드도 유행하던 시기였고, 따라서 한자카드 자체가 아이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 것이죠. 또한 서울, 경기 등 수도권에 많은 카드를 배포한 것이 초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주요했고,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공노하우는 엄마들의 시간부담을 덜어줌과 동시에 아이들에게 큰 자신감을 줬다는 점일 것입니다.

기자) 출판과정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으실텐데..

김상무) (웃음)만화가하고 참 많이 싸웠습니다. 물론 서로 잘 만들자는 뜻이었는데 기다리는 과정이 힘들었던 거죠. 출간일이 늦어지면 독자들이 지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보통의 학습만화보다 어려운 마법의 아이디어, 마법부리기 좋은 단어들을 찾아내는 작업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마법천자문 초기에는 몇몇 학부모들이 20자밖에 안되는데 너무 비싼 것 아니냐는 항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20자라는 사실에 대해 문제 삼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보통 학습지 비용 33,000원에 아이들은 16자를 배우게 되는데 그와 비교한다면 이견을 내기란 힘들죠. 아이가 하루 이틀이면 20자를 외우게 되는 기적의 학습효과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학습만화와 다르기 때문에 한번 작업한 사람이 계속 해야 하는데 성실하게 끝까지 만들어 준 만화가, 그리고 책을 사랑해 주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 새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기자) 앞으로의 계획은.

김상무)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와 사고능력입니다. 이를 키워 줄 수 있는 작품, 아이들에게 오랜 시간 사랑받고 학습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아울북은 학습도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영역을 통해 증명해 낼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아직은 규모도 작고 시작에 불과하나 계획한 것들을 차근차근 구체적으로 이뤄나갈 생각입니다.

나이 오십이 되서야 무언가 이뤘다고 생각하는 김진철 상무의 겸손함이 있었기에 <마법천자문>은 아이들의 눈높이까지 내려 올 수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줄 마법을 꿈꿨다. 재미있게 놀면서 공부할 수 있는 컨셉을 발굴해낸 아이디어와 기획력은 국내 학습만화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마법천자문>이 아이들에게 준 즐거움과 학습효과를 능가할 아울북의 `또 다른 선전`을 기대해 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슬비 2006-01-13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 5년쯤 생활하다보니 한자도 거이 다 잊어버리더라구요.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