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리뷰도 잘 안 쓰는데, 읽은책 페이퍼라도 남기려고 노력중이었으나, 잠시 한눈을 파는사이 여러권 놓쳤어요. 그동안 저를 즐겁게 해준 책들이랍니다. 짧은 코멘 남기고 기억에 남았던 글 몇개 찾아 올리는것으로 마무리합니다. 다시 한번 글을 논리정연하게 잘쓰시는 분들이 존경스러워요.
해박한 지식. 수려한 글솜씨.
좋았던 글들을 적으려고 한다면 적어야할 글들이 너무 많았던 책.
그녀의 다른 책들도 찾아봐야겠네요.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에 있던 씨메르 스파 엽서의 모습이 원서 표지와 왠지 비슷한것 같아요.^^
숙면을 유도하는 기계장치 가운데에는 가벼운 빗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있다. 부드럽고 낮고 몽롱한 소리에 대부분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평화로운 비는 없다. 빗방울은 떨어지면서 급격하게 모양을 바꾸고 먼지나 다른 빗방울과 충돌하고 1초에 300번꼴로 진동하며 온갖 형태로 변한다. 아래쪽이 평평한 모양, 늘려놓은 것 같은 모양, 달걀 모양, 통통한 모양, 날씬한 모양, 납작한 모양, 알약모양, 길쭉한 모양. 속살거리는 부드러운 비조차도 사실은 마구 요동치며 변화하는 중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조용하게 있을때에는 안온하고 고즈넉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빗방울 모양처럼 나노초 단위로 변화하는 작은 움직임, 상호작용, 관계의 도가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온전한 존재라는 금세라도 무너질 환상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새벽의 인문학 중'
동이 터올 때 별이 가득한 하늘 아래 앉아 우리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가 있음을 느껴야 하지만,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우리 이름을 새겨야 하기도 한다. 해독할 수 없는 글자일지라도! 자기 자신과 자기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일기를 쓰는 행위는 그런 충동의 한 형태이자 일종의 벌집 만들기이다.
'새벽의 인문학 중'
티베트 사원에서는 새벽에 '죽음의 명상' 수련을 한다. 잠에서 깨자마자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명상을 하거나 잡일을 하는 대신 눈을 감은 채로 잠자리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밤 죽을 것이다. 남은 하루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명상을 평소에는 여유롭게 살다가 가끔 한 번씩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몇달, 몇 해 동안 꾸준히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날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꼭 끌어앚을까? 우리 어머니 사진을 볼까? 거리를 걸어가며 살아서 움직이는 감동을 느낄까? 해뜰녘부터 해질녘까지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경탄할까? 시를 쓸까? 사랑하는 사람, 지구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할까? 그러다 보면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가장 중요한 것에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깨어 있는 동안 이 활력소를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새벽의 인문학 중'
죽음을 생각하는것이 암울하고 나쁘다는 생각을 버려야해요. '죽음의 명상'을 함으로써 가장 중요한것을 바라볼수 있는 사고를 가질수 있으니깐요.
전선에 앉아있는 찌르레기 떼들을 보며 이런 음표를 생각해내는 발상이 참 좋아요. ^^
글과 그림들이 참 이쁜 책이었습니다.
이 책 역시 포스트 잇을 수두룩하게 붙였지만, 그래도 그중 몇개 추려서 올려봅니다.
무언가는 거둬들이지 않은 채 늘 남겨두기를!
많은 것들이 우리의 정해진 계획 바깥에 남아 있기를,
사과이건 무엇이건 잊혀진 채로 버려두어,
그 향내 맡는 일이 죄가 되지 않도록.
로버트 프로스트 '안 거둬들인' 중에서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것
자크 프레베르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중에서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 보았다.
고은 '순간의 꽃'중에서
하이드님의 말로가 생각나서 찍었어요. 물론 말로가 백배, 천배 더 이쁘지만..^^
'로드'에 반해서 코맥 매카시 은근 기대하게 되는 작가가 되었어요
극형식이라 당황스러웠는데, 읽다보니 은근히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드라마는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건 어떤 고통일까? 만일 사람들이 슬픔 때문에 자살을 하는 거라면,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해가 지기 전에 죄다 땅속에 묻는 것만 종일 해야 할거야. 그래서 나는 똑같은 질문으로 계속 돌아가게 되는 거야. 만일 선생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게 선생이 이미 잃어버린 것 때문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건 선생이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 때문 일수도 있으니까.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것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선셋 리미티드' 중에서
나는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기를 바라요. 영원히. 그리고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바라요. 댁이 죽은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없는 건 존재가 없으면 공동체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동체가 없다.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정적. 암흑. 고독. 평화. 그 모든 것이 심장박동이 한 번만 뛰고 나면 찾아온다니.
'선셋 리미티드' 중에서
차별받은 식탁이기에 그들만의 음식이 되면서 '소울푸드'라 불리게 되었네요.
재미있게 읽어서 좀 더 다양한 나라의 차별 받은 음식들이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들의 식탁에는 피와 땀과 억울한 눈물이 배어 있다. 그런 음식의 맛은 단수한게 '맛있다'라는 한마디로 끌어낼 수 있는 간단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들의 땅을 여행하고 이들의 식탁에 앉는 일은 미각을 초월한 영혼을 느끼는 작업이었다.
'차별받는 식탁' 중에서
소울푸드는 그야말로 일반적인 미각으로는 알 수 없는 어머니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의 맛은 '궁극의 미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논리나 미각을 초원해 오직 '나'만이 맛을 아는 요리이니 말이다.
'차별받는 식탁' 중에서
타인에게는 별 느낌이 없는 맛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맛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 요리는 바로 아부라카스 야채조림이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연결되고, 그리고 다시 피차별민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차별받는 식탁' 중에서
이 책을 읽으니 곱창구이가 엄청 땡겼어요. 지난번에 먹으러 갔을때 진짜 맛있었는데, 노릇하게 구은 사진은 먹느라 못 찍은것 같아요. ㅋㅋ 모듬구이도 맛있고, 곱창전골도 맛있고..
소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닌데, 곱창에는 소주예요. ㅋㅋ
한비야님의 새책이 나오니 그냥 지나칠수가 없었어요.
6년만에 새로 낸 책이라니 그만큼 시간이 흘렀나... 싶어요.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변함없이 열정을 보여주시는 모습에 다시 한번 감동합니다.
나는 비록 한비야님처럼 뜨겁게 살지 못해도, 한비야님의 글을 통해 위안을 받습니다.
남에게 행복해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 스스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일생을 기다렸다가 단 한 번 느끼는 커다란 행복감이 아니라 매일매일 소소하게 느끼는 작은 기쁨과 만족감이 진정한 행복이란 걸 깨닫기만 하면 말이다.
'1그램의 용기' 중에서
세상에 '언젠가'라는 시간은 없다. 결심을 하고 언제부터라고 딱 못을 받은 후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떼기 전에는.
'1그램의 용기' 중에서
가다가 중지해도 간 만큼 이익이다.
'1그램의 용기' 중에서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말기!
'1그램의 용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