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나의 아이를 업고 에스컬레이터에  서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이 밀려왔다. 고마움, 미안함, 회한.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언어를 초월해 있다. 언어는 기만과 착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듣고 있다고 여기게 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세상에 내어 놓는 순간 부모와 아이는 오해와 상처 주고 받기를 시작한다. 그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조금씩 좁아지다 만나려는 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또 어긋나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삶은 온전히 내 입으로 이야기될 수 없고 오류없이 내 머리로 이해될 수 없으며 완벽하게 내 가슴으로 공감될 수 없다. 평범한 우리들은 부모의 입에서 얘기되는 당신들의 이야기로 재창작된 삶을 한 덩어리로 그저 오해하고 곡해해서 당신들을 일부나마 나누어 가진다.

 

 

 

 

 

 

 

 

딸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의 지난 삶을 복기하는 과정은 더없이 건조하고 담담하다. 문화의 차이일까? 아니면 저자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삶과 아버지를 언어로 구조화하기 위한 의식적인 거리 두기일까? 아버지의 세계와 딸이 이룩해 놓은 세계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노동자 아버지가 낳은 작가 딸은 아버지의 삶을 시처럼 추억할 수 없다. 서사화할 수도 없다. 그것은 파편화되고 객관화되기 위하여 대기 중이다. 자식이 객관하려는 부모의 삶은 역설적으로 더 처절하고 처연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업을 아니 에르노는 해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도저히 공감할 수 없기도 하고 전부 다 이해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내 손을 잡아 놀이 장터로 데려가고 , 놀이 기구들은 날 오싹하게 만들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기 않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는 덫을 떨치듯이 빠져나온다.
-p.47

 

 

여기에서 그녀는 아버지와 공유했던 아름다운 추억에 잠기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자리에서 딸은 걸어 나온다. 자식을 먹이고 가족을 혹독한 풍파에서 사수하려 버둥거렸던 분투 속에서도 그녀는 슬몃 다리를 뺀다. 반은 상인이고 반은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딸의 가방끈이 길어지고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남자와 만나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반은 두렵게 반은 경의에 차서 지켜 본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거나 아버지의 뻣뻣하게 굳어 가는 몸을 부여잡고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모습도 아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부럽기도 했고 그럴 수 없어서 안도도 됐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p.126,127

 

여기에서 그녀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의 관계에 발을 담근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던 아버지. 아버지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함으로써 아버지의 삶의 이유와 의미를 만들어 준 딸. 당신들은 말한다. 네가 잘 살아야 네가 행복해야 그게 효도다. 나는 되뇌인다. 내가 성공하고 내가 잘 살면 그거면 된다. 이 말에는 무수한 함정이 있다. 관계로 맺어야 하는 소통이 나의 삶으로 대치되어 버린다. 쉽기도 하고 낭패이기도 하다. 사실은 이런 말들의 눈속임일 지도 모른다. 나한테 와라. 내 손을 잡아 주어라. 나를 안아줘라. 내가 너를 낳고 키웠으니 그 정도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엄마 아빠가 제일 좋아. 하늘 만큼 땅 만큼. 노인이 되어도 작별을 하는 순간이 와도 그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순하고 유치한 말이 때로는 가장 진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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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 멋진 글에 첫 추천은 접니다 ^___^

blanca 2012-05-06 23:3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사진 보고 또 깜짝 놀랐잖아요. 사진이 바뀔 때마다 이진님인가 하고 유심히 보고 그런갑다, 착각하고 그러는 단순한 저입니다.

하늘바람 2012-05-0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하고 갑니다

blanca 2012-05-06 23:33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추천은 언제나 힘이 나지요. 감사합니다.

cyrus 2012-05-0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읽어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어요. ^^
이틀 뒤면 어버이날이기도 하고요

blanca 2012-05-06 23:34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오늘 그래서 저도 효도하고 왔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나 아쉽고 후회되는 얘기들이 쌓이는 것 같아요.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요.

다락방 2012-05-0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블랑카님이 인용해주신 이 문장 때문에, 저는 이 책을 사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요.

blanca 2012-05-07 22:54   좋아요 0 | URL
이 책에는 거의 감정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그런데 글의 갈피짬마다 왜이리 가슴이 스산해지고 슬퍼지는지요. 그냥 아버지 얘기를 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요. 예전 대학 동기들과 모인 자리에서 누가 한 명 그냥 아버지,라고 했는데 다 눈이 벌게졌던 기억이 나요. 다락방님은 어떻게 읽으실 지 궁금합니다.

마녀고양이 2012-05-0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찌 부모님을 알 수 있겠어요.....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요즘 깨달은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제 마음 속의 부모님과 화해하는거라는 겁니다. ^^

진짜 부모님과 제 내면의 부모님은 동일하지만, 다른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전,
둘 다 사랑합니다. 지금 화해 중이거든요,, 큭큭.

blanca 2012-05-08 21:48   좋아요 0 | URL
그죠, 마고님. 부모님 인생을 머리로 판단하고 옳다, 그르다, 그랬어야 한다는 등의 치기를 부렸던 지난 날들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냥 저를 이 세상에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려 합니다.

후애(厚愛) 2012-05-08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이요~!! ㅎㅎ

blanca 2012-05-08 21:48   좋아요 0 | URL
후애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