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둘 있다. 한 소년은 범죄의 피해자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이고 다른 한 소년은 범죄의 가해자를 둔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둘은 살아남았다. 가족이 산산조각으로 바스라지고 살아남은 자는 생존 자체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는다. 설명해 봐! 네가 살아남은 이유를. 네가 보아버린 것들을.

 

의도한 것도 아닌데 내처 읽어버린 이야기 속 두 주인공 소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응시하다 손을 잡는다. 기막힌 우연이다. 작가들은 서로의 소년들을 알고 있었을까. 언젠가 독자들이 그 두 소년을 함께 만나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을 예감했을까, 싶었다.

 

 

 

 

 

 

 

 

 

 

 

 

 

 

 

 

 

사실과 진실....

 

" 잘 들어. 인간이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야. 절대로 그러지 못해. 물론 사실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관련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해. 사실에는 정면도 뒷면도 없어. 모두 자신이 보는 쪽이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어차피 인간은 보고 싶은 것밖에 보지 않고, 믿고 싶은 것밖에 믿지 않아."
-<모방범>2권 p.493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7년의 밤> p.25

 

 

<모방범>은 학창 시절 아이들의 선망을 샀던 소년 둘이 자라서 연쇄 살인범이 되는 이야기다. <7년의 밤>은 소녀를 살해하여 시신까지 유기하고 댐의 수문을 열어 마을 전체를 물 속에 잠기게 한 전직 야구 선수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미야베 미유키와 정유정은 천인공노할 범죄 사실의 이면의 진실을 하나 하나 채집하여 내어 놓는다. 어머니 앞에서 처음 걸음마를 내딛던 날 한없는 찬사와 경탄을 받았을 평범한 그들이 어떻게 생명들을 꺼지게 하고 그 생명들을 둘러 싼 삶들을 패대기치는지 그 과정을 복기한 것은 이해와 공감을 바라는 시선이 아니라 정유정 작가의 말처럼 사실과 진실 사이에 가로 놓인 '그러나'를 수긍하는 과정이다. 구역질나지만, 두렵지만 삶의 전장은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함께 꾸미던 꽃밭이 아닌 것을. 때로 직시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이 갑자기 폭주해서 밀려오는 경험이었다.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그 미약한 가능성도 삶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보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들을 거대한 서사의 장으로 불러 낸 작가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외모도 출중했던 소년들은 그 언저리에 있었던 소년들 만큼이나 때로 의외의 진로를 택한다. 늦은 비행에 어떤 논리적 필연적 연유를 갖다 대고 찾아 낼 수 있을 만큼 삶은 도식적이지 않다. 왜곡된 자아상은 엉뚱한 출구로 자존감을 회복하려 한다. 미야베 미유키가 찾으려 했던 '그러나'는 이 소년들의 것이 아니었다. 이 소년들 앞에서 무너질 것 같으면서 끝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한 발 한 발 내딛는 피해자들의 '그러나'에 대한 이야기다. 잔혹한 소년들이 끝내 파멸시키지 못한 '그러나'를 건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에너지이자 우리가 오늘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다.

 

<7년의 밤>에서는 평범한 가장의 우연한 실수로 시작된 파멸기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사회 앞에서, 힘의 헤게모니 앞에서 무력하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범죄로 내몰린다.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시작된 그의 범죄는 마침내 자신의 가정마저 해체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수몰되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소년은 흉악범의 자식이 되어 피해자의 아버지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살게 된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소년이 아버지의 사실과 진실 사이에 놓인 '그러나'를 찾아 나가는 여정이다. 이해와 수긍과 용서는 엄연한 간극이 있다. 그 간극에 애써 작가는 참견하지 않는다. 그 편안함 속에는 어떤 서늘한 아름다움이 있다. 정유정 작가의 매력인 것 같다.

 

 

가족이란...

 

두 이야기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딸을, 손녀를, 부모를 흉악범죄로 잃고도 살아나가야 하는 가족. 피해자임에도 정작 가해자가 되어 버린 오빠를, 아들을, 아버지를 포기할 수 없는 가족. 제대로 된 사랑과 교감을 받지 못한 채 엇나가 버린 아들들이 흉악범죄자가 되어 버린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가족. 다른 가족을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가정만은 지키려고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은 정작 그 지키려 했던 것들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그것이 가능하기는 했던가,에 대한 아픈 회의와 흔들림으로 다가온다. 가족은 마치 '나'를 길게 늘여 촉수만 붙인 것 같다. 우리는 때로 '나'와 '가족'의 경계를 잊는다. 그것은 비극이기도 하고 우리가 가족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족이 한 순간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 이후.

 

<모방범>의 가족을 잃은 소년은 손녀을 연쇄 살인범의 손에 잃은 할아버지와 손을 잡는다. <7년의 밤>의 사형수 아버지를 둔 소년은 보이는 '사실'이 아니라  이면의 '진실'을 찾아 헤맸던 아저씨와 끌어안는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결속 안에 있다 그것이 끊어지고 걸어 나온 그들은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어깨에 기댄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가족은 또다른 '나'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소통과 유대의 환각일지도 모른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그 환각에서 깨어난 지점에 타인이 걸어들어올 여지를 남겨둔 것은 인간 사이에는 포기할 수 없는 소통과 지지와 신뢰, 애정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극단의 몰이해를 묘사하고도 끝내 이것들을 포기하지 않은 그녀들 본인들의 희망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P.S.

왜 인간에 대하여 선보다는 악에 대한 이야기가 더 설득력을 갖는 것일까? 더 할 얘기가 많은 것일까? 더 많은 이끌림을 갖는 것일까?  그것은 성악설도 원죄설로도 온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손치더라도 무력한 우리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하게 무참하게 느껴지는 삶의 우연성들이 빚어내는 갖가지 조합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 때문일까. 이해하지 못할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고 미리 맷집을 키우는 일일까. 이러한 책들은 항상 말줄임표로 끝나고 만다. 우리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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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3-29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부터 미미여사 작품이 대단한 인기더군요.도서관에서도 늘 대출 중이고...요즘은 남자는 히가시노 게이고, 여자는 미야베 미유키가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일 겁니다.우리나라는 워낙 추리작가의 지위가 낮으니 원...

blanca 2012-03-30 21:20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뒷북을 친 것 같아요^^;;아, 히가시노 게이고는 접해보지 못했어요. 미야베 미유키의 책은 <화차>를 보고 반해서 또 다시 시도해 본 건데 저는 겁이 많아서 그런지 자꾸 이런 장르물을 읽으면 무서워서--;; 그만 읽으려고 합니다. 추리작가가 선정적이고 원색적인 자극물이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심연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경우 같은 경우는 단순히 장르물로 한정될 수준이 아니더라고요. 우리나라도 그런 작가도 나오고 인식도 많이 달라지기를 바라 봅니다.

cyrus 2012-03-29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어느 책에서 봤는데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대요.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기억도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하대요. 서로 다른 소설을 읽다가 우연히 서로 유사하다거나
이어지게 되는 관점을 발견하게 되면 기분이 무척 새롭죠 ^^

blanca 2012-03-30 21:2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7년의 밤>은 찬사를 많이 들어서 내용 자체를 아예 모르고 읽기 시작했는데 스릴러물 같은 분위기도 있어서 사실 많이 놀랐어요. 연달아 읽어서 그런지 공통점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2012-03-31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극단적인 비극을 그려내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사실은 희망에 관심있는, 희망을 찾는 사람들 같아요. 화차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여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2-04-01 21:42   좋아요 0 | URL
섬님, 맞아요. 힘들다, 슬프다,고 호소하는 와중에는 그래도 살만한거야,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을 찾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예리하십니다.^^

마태우스 2012-03-31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범 읽은지가 5년이 넘으니,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하나도 안나네요. ㅠㅠ 역시 책도 젊을 때 읽어야 한다니깐요. 글구 7년의 밤,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볼게요.

blanca 2012-04-01 21:43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7년의 밤 재미있게 읽으실 거예요. 사실 읽으면서 서사의 힘, 문장력 등이 이런 작가가 있었구나, 싶어 내심 놀랐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2-04-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다 살지 않아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도, 라고 추측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일이 그 중 하나였어요. 이렇게 밀도가 있는 시간을 켜켜이 쌓아 놓고 있게 되다니, 생각하다가, 새털같다, 라고 느끼는 부분들도 있었겠지요. 아마도, 저 책들이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런 부분들을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 듯 아프게 써내려갔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쁘면서도 좋고 좋으면서도 나쁜 것들이 있다, 고 소설가 양귀자가 모순에서 말한 것 처럼요.
인간에 대해서는 부정이 긍정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아마도 행복할 때엔 일기를 잘 쓰지 않는 것과(그런 경우가 있다면요)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blanca 2012-04-01 21:45   좋아요 0 | URL
쥬드님의 새로운 네임이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 쥬드님이라고 줄창 부르기로 했어요.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도 삶도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더 넘쳤으면 좋겠어요. 저번에 김훈이 인터뷰한 것 보니까 삶에 대한 너무 어두운 시각을 가지고 있어 돌연 겁나기도 하더라고요. 저보다 더 많이 살고 느끼고 체험한 사람이 하는 얘기란 항상 더한 무게를 가지잖아요. 거짓말 같을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체념보다는 긍정,희망을 더 늘려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기가 더 쉬우니까요.

Jeanne_Hebuterne 2012-04-02 12:49   좋아요 0 | URL
히힛 제 닉, 잔 에뷔테른이에요. 저도 저 글씨를 찍질 못해서 구글에서 고스란히 복사해서 붙였습니다만, 무엇으로 불러도 장미이듯이(비유가...죄송해요) 무엇으로 불러도 이 얼굴이 어디 가겠습니까.
김훈의 그 시각, 자신의 서재를 막장이라고 비유할 때 부터 떠올렸습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큼만 강하고, 살아남기 좋을 만큼 어두운 글이었어요. 블랑카 님에게서는 일말의 밝음이 늘 있어요.

순오기 2012-04-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범은 안 읽어서 모르지만, 7년의 밤은 굉장하지요. 정유정 작가를 만나고 싶을 만큼...

blanca 2012-04-04 21:34   좋아요 0 | URL
영화화된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이런 작가가 지금 한국에 있다니, 이런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문장력도 얼마나 좋은지 소설의 부흥도 가능하겠다 싶고요.

후애(厚愛) 2012-04-03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전에 모방범을 선물 받아 놓고 아직도 못 읽었어요.
선물 주신 분께 너무 죄송해서... 읽어야하는데...

독감은 좀 어떠세요? 입 맛이 없더라면 챙겨 드셔야 합니다.

blanca 2012-04-04 21:35   좋아요 0 | URL
오늘부터 자리 털고 일어났는데 또 식은땀이 나더라고요. 예, 억지로라도 몸에 좋은 것 먹으며 회복하려고 합니다. 후애님도 어서 건강해지시기를...

icaru 2012-04-0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지 않으면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들을 거대한 서사의 장으로 불러 낸 작가들이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이 책은 5년을 연재한 것을 엮은 것이라던데, 이런 대작이 나올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졌다는 걸 반증한다 싶어요.. 사실 저도 읽은지 오래되어서 줄거리랄게 세세하게 생각은 안 나는데, 얼마전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보면서 유사한 설정이다 라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물론 모방범 쪽이 악랄하다면 악랄하고, 미디어를 역이용하여 쇼맨쉽을 발휘는 하는 정신착란 모습에 기함을 토했지만요.

추신에 덧붙인 말씀처럼, 왜 사람은 악에 대한 이야기에 더 쉽게 설득당하는지... 에 대한 말에도 블랑카 님다운 통찰이 느껴져요. 맷집을 키운다 라니 ㅎㅎㅎ.. 또 그건 이런 장르의 작품이 건재하고도 승승장구하는 이유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blanca 2012-04-04 21:37   좋아요 0 | URL
icaru님, 제가 겁이 많아서 밤에 이 책을 읽다 보니 자꾸 무서워서 2권, 3권은 안 읽고 처분하려는 생각까지 했잖아요 ㅋㅋ 그러면서 또 읽고 막 괴로워하고. 너무 악랄한 인간상을 보니 세상을 보는 시각 자체도 어두워지고 부작용이 있더라고요. 당분간 밝은 책들 위주로 읽어 보려고 한답니다.^^

2012-05-0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8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