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은 감기와 고통의 차원이 달랐다. 일단 장염이 동반됐다. 열이 주기적으로 계속 오르는데 37도 정도부터 시작하더니 스멀스멀 39도까지 올라갔다. 속은 미식거리고 배는 부글거리고 콧물은 줄줄 흐르고 머리는 흔들리고 목은 따끔거리고 총체적 난국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자고 싶은데 도저히 잠도 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해도 빠지지 않던 체중이 하루에 1킬로씩 빠졌다.

 

이 정도 되면 만사가 귀찮고 주변 사람들을 마구 얄미워할 이유가 생긴다. 그 어떤 불행의 무게도 내가 지금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 바이러스보다는 가볍게 보였다. 독감에 걸려 있는 '나'는 건강할 때의 너그러운 나를 아련하게 추억한다. 모든 미덕이 실종되고 시앗을 본 본처처럼 아들을 빼앗긴 며느리처럼 손톱을 세우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없고 '상황'이 있는 것이라는 얘기는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관용과 배려의 미덕을 가지기란 행복한 사람이 절망하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얘기다.

 

독감이 낫고 체중은 우습게도 바로 원상복귀되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만난 책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정말 뒤늦게 만난 책. 통혁당 사건으로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신영복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글들이다. 자체 검열을 받고 세상에 나온 편지들은 그가 연루되었던 사건에 대한 해명도 무기징역 선고에 대한 분노도 보이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정제된 멀끔한 고백들이다. 너무나 잘 닦인 말들. 나를 그 처지에 넣어 보면 나는 도저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넌 영원히 사회와 격절되어 닫힌 공간에서 있으라!, 고 사람이 사람인 나에게 명령하고 실제 그것을 집행한다면 과연 내일을 믿고 내년을 기약하고 여생을 상상하며 하루 하루 견뎌나갈 수 있을까? 20년 후 세상 밖으로 나온 그지만 그 속에서 그는 그럴 것을 알지도 믿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하루 하루는 진실했고 때로 경건하기까지 했다. 절망을 얘기하지 않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두지도 않고 섣불리 희망에 기대지도 않고 그저 하루 하루를 연자방아를 돌리는 노새처럼 성실하게 지내며 내면에 세상 밖으로 뻗어나갈 나무 한 그루를 키워냈던 그의 나날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진정성 있는 희망이란 이런 곳에서 피어나는 것일게다.

 

동향인 우리 방에는 아침에 방석만한 햇볕 두 개가 들어옵니다.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p.150

 

나는 그러지 못했다. 햇볕의 한 조각은 의당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지개를 만들 만한 상상력의 배포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화창한 5월 한 뼘은 말도 없이 도망가 버리곤 했던 것이다. 신영복은 감옥 안에서 계절의 순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감옥 안에서 무더위, 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될 아들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그 염려를 염려하며 자신도 극한의 더위와 추위 사이 사이 아름다운 절기들을 만끽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호한에서는 동료 죄수들의 체온으로 서로를 덥힐 수 있고 더위가 성한 여름에는 이름모를 동료가 잠도 자지 않고 가운데에서 부치는 부채 바람으로 허락된 시원함으로 너끈히 견디는 그의 모습은 난방과 에어콘 바람으로 계절의 단련을 거치지 않고 1년을 보내어 버리는 우리들의 빈곤함을 부끄럽게 한다. 자연이 주는 시련을 일종의 연대로 이겨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그 시련마저 기계의 힘으로 거부해 버리고 나날이 더 외로워지고 더 말라가는 우리들을 나무라는 듯하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p.155

 

그가 갇힌 곳은 내가 자유로운 이곳보다 더 열려 있었다. 내가 온전하게 잡고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일상들보다 그의 일상은 더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나는 점점 더 객관의 지평을 잃어가는데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그의 자리에서는 객관의 지평이 한없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더 깊숙이 발목을 박았고 자신의 옆에 있는 그들을 더 간절하게 원하고 더 가까이 안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가 봉재공장에서 미싱 땜방 일을 할 때에도 그는 자신의 추락한 위상과 처지를 떠올리는 대신 땀을 흘리며 손으로 붙잡고 하는 노동이 주는 기쁨에 겨워했다. 이것이 객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방끈이 긴 인텔리로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혀 밖에서라면 접할 기회도 별로 없었을 밑바닥의 인생들과 부대끼며 견뎌야 하는 삶의 가운데에서 그가 발을 헛디딘 곳에서 그는 더 큰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만나지 말자며 묵은 사람이 떠나고 나면 자기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체험을 등에 지고 새 사람이 문 열고 들어옵니다.-p.164

 

떠나고 들어오는 수인들에 대한 그의 묘사가 눈물 한 방울을 부른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욕설이 태반이 사람들이 지고 들어오는 삶에 대한 그의 존중과 이해가 뭉클하다. 누구나 저마다의 역사를 등에 지고 저마다의 삶과 희망과 꿈을 오롯이 몸에 채우고 타인을 대면한다. 사회에서는 그들 속에 있는 그 귀중한 추억과 지향을 무시한 채 그들이 세속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들을 성취했는 지를 놓고 그들을 평가하고 재단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만남이 이 곳에서는 절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작 독감 하나로 내가 불행해질 이유를 수십 가지 만들어 내고 내가 사람을 미워할 이유를 꼽아 보던 어제가 몸서리나게 부끄러워졌다. 신영복도 나라는 생각은 '나'와 '처지'가 부딪쳤을 때 공중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 했지만 처지만으로 내 삶을 규정하고 나의 감정을 합리화해버리는 습관은 고질적인 비겁증이다. 모든 사회와의 연대가 깨어지고 모든 자유를 속박당하고 모든 미래의 약속과 꿈을 저당잡혀 버려야 하는 수형 생활 속에서 하루 하루를 성장해 나가며 수감 생활이 주는 함정도 단속했던 그의 삶을 대하는 그 경건한 자세에서 인간이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추한 인간을 얘기하고 비감한 인생론을 설파하기 쉬운 자리에서 인간의 연대를 믿고 대중의 선량함을 확신하는 그의 모습은 삶의 의미의 현현이었다.

 

나는 아직은 달팽이의 보수와 칩거를 선택하는 나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P.180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그의 바람은 나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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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코, 독감에 걸렸다 오셨군요.
요새 감기는 참 힘들덥디다. 저도 거의 한달간 끊이지 않는 기침과, 감기 첫주는 빠질 듯한 어깨 담과 썩어 문드러진 듯한 목의 느낌과 아픔, 누런 콧물과 위가 나올듯한 기침... 아 생각만 해도 힘이 들어옵니다.
체중은 보란듯이 늘고 있구요. 그래도 나으셨으니 다행입니다!

blanca 2012-04-16 09:0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랑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걸렸어요. 감기는 삼사 일 바짝 앓으면 낫는데 독감은 정말 차원이 다른 고통이--;; 소이진님도 힘드셨겠어요. 고마워요. 오늘 보니 또 다시 독감이 유행한대요. 게다가 또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서 일교차가 크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프레이야 2012-04-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좋은 글이 요즘 더디 보여 들렸어요.
열흘이네요. 아직 몸이 편치 않으신가요? 제 서재 댓글 반가웠어요.^^
신영복님의 마지막 저 문장, 날선 청년의 정신이네요.
저 책을 다시 꺼내봐야겠어요.

blanca 2012-04-27 09:3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감기 낫고 나서 밀린 일들을 하려니 이래 저래 정신이 없네요. 게다가 날씨도 너무 좋아서^^ 퍼지려는 차도 고치고 그러고 있어요. 운동도 하고요. 세상에서 젤 무서운 게 독감이에요--;;이제 정말 완연한 봄이지요? 파란 귀한 하늘을 보면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이 봄을 많이 보고 살고 싶다, 이런 생각 해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