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이라는 뮤지션은 강해 보인다. 에너지도 넘치고 삶의 대부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끌고 수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무기력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고 여기는 요즈음 <힐링캠프>에서 그의 극도로 엄격하고 절제된 일과를 보니 눈이 번쩍 뜨였다. 기상 시간, 조식 시간, 스트레칭, 발성 연습 등의 자기 자신만의 일정이 조금 엽기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로 강박적인 부분이 있었다. 사랑하는 음악을 팬들 앞에서 오래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관리란다. 이른 나이에 성공적인 입지를 구축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으니 더더욱 그의 앞에서 그의 삶은 통제 가능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주무를 수 있는 유연하고 호의적인 것으로 주어진 것 같았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자선을 행하고도 남는 그 1%의 결핍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찾아 헤매는 대목이 공교롭게도 읽고 있던 책과 겹쳤다.
이 책은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다. 대형 서점에서 이제 막 집으로 가려던 참에 들춰 보고 돌아섰다 다시 돌아가 손에 쥐었다. 육아서라면 꼬맹이가 자고 먹고 하던 시절 줄까지 그어가며 정독했던 기억에 물렸던 와중이었다. 육아서를 읽는 순간 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이 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실 '나'의 개인적인 자존감을 높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가능하다. 세상에 하나의 인간, 하나의 삶을 온전히 선물하는 일이 양육이라고 포장한다면. 하지만 양육은 온전하게 자신과 삶을 주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어른도 불가하지만) 작고 무기력한 생명을 보살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고 자는 게 힘들어 두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버둥거리며 들썩거리는 아이를 잠까지 인내하고 안내해야 하고 밤에 열이라도 나면 밤을 꼬박 새우며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고 해열제를 먹이다 여차하면 병원까지 업고 뛸 수 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힘듦에는 달콤한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아이를 세심히 보살피고 최선을 다해도 어느 날 아이는 갑자기 중병에 걸려 나의 마음을 타들어가게 할 수도 있고 사춘기의 아이가 '엄마가 대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집을 나갈 수도 있다. 부모가 되는 일은 인간이 삶을 통제할 수 있고 무언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찬란한 기만이었는 지를 뼈아프게 깨달아 가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가 격하고 방어적인 사람이 되는 이유는, 엄마로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없고 살아가면서 언제든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아찔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p.73
네 아이의 엄마이자 소아과 의사인 저자 메그 미커는 이제 동양에서 보는 기준으로라면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육아서를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나이에 접어들어 삶 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얘기해 주고 싶었던 것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놀라웠다. 육아서 안에서 삶에 대한 통찰과 위안을 얻는 일은 드물고도 기쁜 일이다. 내가 요새 자꾸 느끼게 되는 나의 무기력함이 비단 나의 '엄마'라는 위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자 좀 덜 의기소침해졌다. 항상 궁금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특히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삶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통제감을 느끼는지. 박진영은 세속적인 기준에서라면 성공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로 그러한 일들을 이루었다. 무언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젖혀 둘 수 있을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삶에 있어서 철학적이고도 근원적인 고민을 화두로 던지고 싶어한다. 진행진들은 난감해한다. 예능 방송이 무거워지는 건 부담스럽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는 일인가 보다. 괘념치 않고 혼자 도취되어 자못 철학 강연처럼 분위기를 쇄신해 보려는 그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뒤돌아 보면 나의 계획대로 된 일들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일이 풀리고 나의 좌표가 바뀐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예증이기도 하고 박진영 말마따나 그러니 편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특히 자식과 관련된 일에서는 더더욱. 아이는 나의 못다한 꿈의 대리만족을 위해 내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상처를 기우기 위하여 동원되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는 아이의 꿈을 침범할 수도 침범해서도 안 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나는 무기력하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최선을 다해서 살게 된다는 것. 작은 것들을 통제하고 나를 관리하는 것은 큰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고 희망이다. 이 책의 저자 메그 미커는 희망을 품는 일이 통제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역설 같기도 한 그녀의 얘기가 와 닿았다. 무언가를 다 나의 통제 권한 속에 몰아 넣기 시작하면 나는 모든 것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고등학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나도 그 아이도 어떤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스무 살을 기다리던 열일곱은 이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린다. 말하고 들어주며 잠시 친구 하나면 나의 삶의 모든 것들을 다 쥐락펴락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시간들의 느낌이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세상이 주먹 안에 들어오는 작은 공만했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고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삶과 시간들이 어찌 그때보다 더 폄하되고 있는지 슬프기도 하고 그것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무기력하게 느끼지도 않고 희망과 꿈을 포기하지도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내가 어쩔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기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아, 살면 살수록 인생은 알 수도 없고 어렵기만 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