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개정증보판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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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조선과 관련된 역사책을 여럿 읽다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죽음, 그의 죽음 이후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나아가 순조 때 혜경궁이 『한중록』을 집필하는 과정까지 세세하게 구성되어 있어 꽤 흥미로웠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오래 전 출간되었지만 이번에 새롭게 개정되어 오류를 바로잡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내용을 보강했다고 한다.


저자, 정병설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완월회맹연』과 같은 한글고전소설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시대의 인간과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 음담에 나타난 저층 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예옥, 2010),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2012),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민음사, 2014) 외에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한국고전문학수업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혜빈궁일기』(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Ⅰ 사도세자의 어른들


1694년에 태어난 영조는 여든세 살까지 살며 역대 임금 중 재위 기간이 53년으로 가장 길다.

삼십 년 이상 지켜본 혜경궁은 영조의 성격을 상찰민속이라 표현하며 세세히 신경쓰는 것은 거의 병적이라고 했다.

(상찰민속이란, 꼼꼼히 살피면서 동시에 재빠르다라는 뜻이다.)

죽음과 관련된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했다는 영조는 사람을 죽이거나 불길한 말을 들으면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었다고 한다.

심지어 영조는 좋은 일 혹은 좋지 않은 일을 할 때에 드나드는 문이 달랐다.

그래서 혜경궁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만나러 경화문으로 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 이미 알아차렸다고 한다.

생사, 내외, 호오, 애증을 엄격하게 가르고 철저히 행했다는 것으로 보아 영조는 편집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짐짓 추측해볼 수 있다.


그 누구도 권위에 도전할 수 없고 뜻 또한 거를 수 없는 자리, 바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리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유일하게 거스를 수 있는 또하나의 절대권력이 있었으니 바로 부모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는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부모의 말과 뜻을 거스를 순 없다.

대개 왕이 서거한 후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살아 있는 임금의 부모는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임금이 너무 어릴 경우에는 대비가 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대신 통치하기도 했는데, 수렴청정은 세조비 정희왕후부터 익종비 신정왕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아무런 권력 기반도 없었지만 불안한 왕자 시절을 보냈던 영조를 왕세제로 만들고 대권을 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영조의 어머니 인원왕후다.

인원왕후는 영조의 생모는 아니지만 엄연히 영조의 어머니였다.

숙종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다. 인경왕후,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다.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죽고 10월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되자 중궁전이 공석이 되었는데, 이를 비울 수 없어 숙종은 결혼을 서둘렀고 이듬해 10월 인원왕후가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숙종은 마흔두 살이었고 인원왕후는 열여섯 살이었다.

인원왕후는 후사를 얻지 못했지만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에게 왕권을 넘기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병약했던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후계를 정하자는 상소를 받게 되는데 이때 인원왕후가 영조를 후계로 정하자고 지지하였고 영조는 왕세제가 될 수 있었다.

왕세제로서 대리청정을 할 때도 영조는 인원왕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박상검 사건으로 인해 영조도 위험해지고 경종 또한 자신의 수하를 쳐내기 어려워했지만 단호하게 그들의 처벌을 결행한 사람이 바로 인원왕후였다.

임금이 원치 않거나 하지 못하는 일까지 하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대비밖에 없었으니, 당시 인원왕후가 영조를 위해 나섰던 것이었다.

이렇듯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권력의 전수자이자 생명의 은인인 셈이었다.

인원왕후는 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사도세자 또한 할머니를 믿고 따랐다고 하는데 당시 인원왕후가 더 오래 살았다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영조에게 첫날밤 소박을 맞았다고 알려진 정성왕후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왕비가 되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해 죽는 날까지 고독했다고 전해진다.

정성왕후의 병세가 심각해졌을 때도 영조는 찾아오지 않았는데 곧 죽을 것 같게 되자 그제야 병소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성왕후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 커녕 아들 사도세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만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왕비가 운명하게 되었고 장례 절차를 진행시켜야 하는데 영조는 죽은 아내를 곁에 두고 내인들에게 아내를 만났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의 부음이 들려오자 아내의 죽음에 형식적인 슬픔을 표하고 부마의 집에 거동하려 했다고 한다.

승지, 대사간 등이 말리자 영조는 그들을 해임하고 밤에 화완옹주 집에 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무려 33년이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왕비의 처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단 한 건도 볼 수 없다.

참으로 고독하고 고독했던 정성왕후였다.


1764년 7월 26일, 선희궁 영빈 이씨가 사망하게 된다.

그 날은 아들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인은 화병이 아니었다.

그해 2월 선희궁은 영조가 정조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으라는 전교를 내리자 식음을 전폐했었다.

아들이 죽고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선희궁에게 손자 정조라도 보전하여 왕으로 세우기를 바랐지만 손자가 더이상 자기 아들의 아들이 아니게 된 것이었다.

이렇듯 당시 자살을 숨기고 병사로 덮었던 행태로 미뤄보아 선희궁은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선희궁은 아들을 죽인 어머니라는 낙인을 가지고 있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아침, 선희궁은 영조에게 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했다.

사도세자가 병이 심해 상황 파악은 물론 주위 사람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니 아들의 대처분을 권한 것이었다.

세자를 죽이려 하는 영조를 보며 신하들은 말렸지만, 선희궁의 말을 들은 영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선희궁이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 것만은 사실이다.

선희궁의 남은 희망은 오로지 정조였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정조의 아버지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로 두라는 명령을 받고 삶을 정리했을지 모른다.

훗날 영조와 함께 선희궁의 묘소로 간 세손 정조는 할머니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할머니께서 소자를 돌봐주신 은혜는 어머니와 다름없으셨고, 세상을 가르치심은 엄한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하늘처럼 크신 덕은 망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762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소자가 할머니를 우러러 기댐은 전보다 배나 더했고, 할머니께서 소자를 가련히 여기심도 전날보다 더 심했습니다. 춥지나 않은지, 시장하지나 않은지, 아침저녁으로 한마음으로 살뜰히 돌보셨습니다. 이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 있음도, 어느 것이 우리 할머니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조, 「영빈이씨제문」)




Ⅱ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는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다.

영조는 마흔둘의 나이였고 이복형인 효장세자도 죽은 지 이미 칠 년이나 지났으니깐.

그렇게 모두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태어난 사도세자였지만 영조가 그에게 실망하기 시작한 것은 열 살 전후부터였다.

열 살부터 죽기 직전까지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골칫거리 아들이었고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무섭고 두려워 피하고 싶은 아버지였다.

그 기간이 이십 년이나 되니 세자의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는 말도 이해가 갈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열다섯 살에 대리청정을 한 다음부터 병이 생겨 그 총기를 잃었다고 한다.

예컨대 병이 발작이라도 하면 내인과 환관을 죽였고 발작이 그치면 후회를 했다고 전해진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세자를 동궁의 지위에서 내려 평범한 서인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전교에 "비록 미쳤다고는 하지만, 어찌 처분을 하지 않으리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세자의 비행을 일러바치며 미쳐서 한 행동이니 너그러이 처분해줄 것을 영조에게 당부하지 않았는가.

이후 사도세자가 죽고 난 뒤 장례에서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쳤다고 못박아 말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수시로 깜짝깜짝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하지만 이를 심각한 정신병으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유무죄 여부를 떠나 어느 쪽을 택해도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에게 죄가 있었다면 정조는 물론 손자인 순조도 결코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조가 측근의 꾐에 넘어가 아들을 죽인 것이라면 왕의 판단이 결국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니 즉, 혜경궁의 말처럼 어떤 쪽을 선택하든 결국 문제는 발생한다.


아홉 살 때부터 어지럼증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혜경궁과 결혼한 이듬해부터 행동이 예사스럽지 않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 신경증 초기이자 ADHD를 앓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또한 두 달 가까이 눈이 충혈되는 안질은 어린아이에게서 거의 볼 수 없는 병인지라 안경 착용을 고려했을 정도라고 한다.

세자의 병증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1752년 가을, 정조가 태어나고 궁궐에 홍역이 돌았다.

화협옹주가 홍역으로 죽고 사도세자 또한 병을 이겨내었지만 정성왕후의 환갑을 이틀 앞두고 영조가 전위하겠다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 혼란 속에 사도세자는 「옥추경」을 읽으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벼락신을 부리기 위해 「옥추경」을 공부했지만 오히려 귀신이 보인다면서 겁을 먹었다고 한다.

홍역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세자가 귀신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Ⅲ 사도세자의 죽음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고변한다.

곧 대권을 이어받을 세자가 반역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리고 누가 감히 세자의 반역을 고발한다는 것일까?

윤급의 겸종인 나경언은 노비는 아니지만 대갓집의 일을 돌봐주는 집사였다.

나경언은 머리를 써 궁궐의 내관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의 고변서를 형조에게 바쳤다.

형조는 이내 영의정에게 알렸고 영의정은 곧장 영조에게 고했던 것이었다.

워낙 엄중한 문제인만큼 영조는 나경언을 직접 심문했는데, 이때 영조를 대면한 나경언은 또 다른 고변서를 꺼내놓았다.

즉, 형조에게 갖다 바친 고변서는 가짜였다.

세자의 죄상을 담은 고변서를 올렸다가 임금과 마주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으니 미끼를 던졌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고변서로 인해 영조는 물론 온 조정이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었고 영조는 세자를 폐위할 결심을 하게 된다.


임금의 행차는 즉각 혜경궁에게 보고되었었다.

혜경궁은 영조가 어느 문을 통해 들어와 어디로 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경화문을 통해 들어와 선원전으로 갔단 소식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징크스를 강하게 믿던 영조는 궂은일을 할 때 경화문을 통해 선원전으로 갔는데, 이는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이 확실해졌다는 전조였다.

사도세자는 곧장 영조에게 가지 않고 아내를 불러 이별을 고하고 세손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사실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는 것은 온전치 못한 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혜경궁은 아들의 것은 작으니 세자 본인의 것을 쓰라고 답했다.

서로의 말에 대한 오해만 남긴 채 결국 사도세자는 정조의 것을 쓰진 않았다.

휘령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세자는 관과 용포를 벗고 사죄하는 뜻에서 돌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하였지만 영조는 자결하라며 단호하게 요구했다.

세자의 죽음을 막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손 정조도 살려달라 간청했으나 안겨 나갈 수밖에 없었고 뒤이어 신하들이 들어와 간청해도 영조는 단호하게 쫓아냈다.

결국 세자는 뒤주에 들어가게 되고 자정이 넘어서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는 전교를 반포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사인에 대해 세자가 미쳐서 그리되었다는 것과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작은 임금인 세자를 일반 죄수처럼 처형할 수 없기에 영조는 자결하라고 명한다.

세자가 칼을 받아들고 목숨을 끊으려 할 때도, 옷을 찢어 목을 매려 할 때도,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할 때도 신하들이 모두 손으로 막았다.

명목상으로 국정을 대리하는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세자를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세자의 죽음을 목숨 걸고 막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도운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의 처벌을 받을 순 있어도 유교 이념에 따라 용서받겠지만 거꾸로 충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에 세자에 대한 충성심이 있건 없건 모든 신하들이 그의 자결을 막으려 노력했다.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누군가의 지시로 뒤주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순순히 들어갔고 밤이 깊어지자 뚱뚱한 체구에 더위도 많이 타 저도 모르게 뒤주판을 차고 뛰어나왔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세자가 깨고 나오지 못하도록 두꺼운 널판을 덧대어 큰못을 치고 동아줄로 뒤주를 꽁꽁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뒤주는 세자의 관이 되어버렸다.

누가 뒤주를 들이게 했는지 알 순 없지만 세자를 죽이고자 한 사람은 뒤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아닌 영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야금을 연주하다 알게 된 곡이 있는데 바로 「꽃이 피고 지듯이」다.

유명했지만 보지 않았던 영화 「사도」의 OST인데 문득 사도세자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의혹이 있다?

▶뒤주에 갇히는 벌을 거스르지 못하고 순순히 들어가던 사도세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였지만 이를 애통해하던 영조?

국사책에서 처음 마주했던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갇히게 해 죽게 했을까하는 의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다.

아들의 죽음을 슬피 여겨 내린 시호, 사도는 당시 내게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와 정조는 업적까지 꿰뚫고 있지만 사도세자에 대해 너무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내막에 대해 파헤져보고자 『권력과 인간』을 펼치게 되었다.


신하 앞에서도 대놓고 꾸짖으며 아들 사도세자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아버지 영조 그리고 아버지 영조의 꾸짖음 아래 도망치지도 못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아들 사도세자.

모두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싫어해 열 살도 되기 전에 영조를 실망시켰고 학자라기보다 예술가에 가까웠던 그였기에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애초에 맞질 않았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조선이 아닌 현대에서 부자관계였다면 극한의 결말로 내몰리진 않았겠지.

사도세자를 둘러쌌던 어른들부터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죽음까지 지켜보고 나니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간혹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문 하나가 있으니 뒤주에 갇히게 가는 것은 일종의 벌이지 죽음으로 내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영조가 아들을 죽일 뜻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보니 모두가 이에 대한 의문을 믿고 싶어한다.

사도세자는 모후인 정성왕후의 영혼이 깃든 휘령전에서 뒤주에 갇혔었는데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명을 보면 뒤주는 강서원에 있었다고 표시되어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든 다음 영조가 이를 승문원으로 옮기게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영조는 차마 어머니의 영령이 있는 곳에서 아들을 죽게 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경희궁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뒤주를 감시했으며 19일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른 시점에 환궁을 했다.

이때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20일에 죽었다고 추측했는데 영조는 뒤주를 21일에야 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일 뜻이 없었다는 영조의 말에는 공감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단편적이기에 한 사건에 대해 전후사정을 알기 어렵다.

또한 역사 왜곡은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는데 달라진 것은 전혀 없으니 간혹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유사 역사가 아닌 진짜 역사, 즉, 진정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 학생들을 위해, 우리 역사를 위해 대중 역사서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며 이는 전문가들이 역사 대중화의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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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 역사를 뒤흔든 지리의 힘, 기후를 뒤바꾼 인류의 미래
이동민 지음 / 갈매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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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초기 인류는 어떻게 지구 곳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던 문명 발달 양상은 왜 그렇게 다르게 나타난 것일까?

세계에서 주목받은 찬란한 문화와 문명들은 어떻게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것일까?

이러한 모든 궁금증을 기후 변화의 관점에 의하여 살펴볼 수 있는 책이 있으니, 바로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이다.


저자, 이동민은 지리학의 시각으로 전쟁사와 지구사에 대한 글을 쓰는 지리학자이다.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문인협회 정회원이다.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리교육 전공으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년 가톨릭관동대학교에서 우수연구교원 표창을 받았으며, SSCI 등재 국제저명학술지 Journal of Geography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유방과 항우의 전쟁을 지리·지정학적으로 바라본 역사서 《초한전쟁》, 수필집 《서해에서》를 썼다.




Ⅰ 인류, 그 시작의 발걸음


기후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중생대의 지구는 기온이 높아 공룡이 번식할 수 있었지만 화산 분출, 운석 충돌에 따른 여러 이유로 인해 기후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멸종했다고 전해진다.

신생대에도 마찬가지로 기후변화때문에 여러 동식물들이 탄생과 멸종을 거듭했었다.

160만에서 1만 2000여 년 전의 시기를 플라이스토세라 부르는데, 이 시기에 빙하기로 이어져 빙하기가 절정이던 시기는 1만 8000여 년 전으로 보고 있다.

플라이스토세에는 매머드, 검치호와 같은 추위에 강한 동식물이 번성했었다.

특이한 점은 수만 년 혹은 십수만 년 주기로 간빙기가 왔다가 다시 빙하기로 이어지는 패턴을 보였다고 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1만 2000여 년 전에 간빙기가 시작되었으며 가까운 미래에 다시 빙하기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20만여 년 전, 아프리카 남부에서 인류가 등장했다.

피부도 얇고 근력도 약했으며 털있는 동물과는 달리 맨몸이다 보니 한랭한 기후를 견뎌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빙하기를 견디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직립보행 이후 팔, 다리를 자유로워지자 도구와 불을 사용했으니, 선사시대부터 이미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아프리카를 벗어났을 무렵에는 지구 자전축이 바뀌던 시기였다.

사하라 사막에는 습기 가득한 계절풍이 불었고 기온도 계속해서 낮아졌다.

이로 인해 사막에 비가 자주 내리게 되어 강물이 흐르고 모래언덕이 초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인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북쪽으로 이주했지만 7만여 년 전에 일어난 기후변화로 인해 잠시 멈추게 된다.

빙하기로 인해 사하라 지역이 또다시 사막이 되면서 사하라 북쪽으로 이주한 인류는 발목이 붙잡혔던 것이었다.

그래도 빙하기 덕분에 당시 해수면 또한 90미터로 낮아지면서 유라시아 대륙은 물론 영국, 일본, 필리핀 그리고 호주, 아메리카 대륙이 이어져 인류가 넓게 이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Ⅱ 기후변화의 역사에서 기후위기의 시대로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거대한 변화를 안겨 주었다.

증기기관 덕분에 공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며 생산성은 한층 증가하였다.

덕분에 마차와는 차원이 다른 증기선, 열차 등의 교통수단을 얻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증기기관이 점차 발전하게 되자 열차는 더 적은 연료로 더 빠르게,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며 새로운 교통수단까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이다.

산업화는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안겨주긴 했으나 인위적인 기후변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필수 불가결하게 쓰이며 증기기관의 후손들을 이끌게 하는 것, 바로 화석연료이다.

석탄과 석유는 산업혁명 전에도 사용되었지만 무기 만드는 재료로나 사용했을 정도였는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인해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화석연료는 그야말로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화석연료 사용이 급증하다보니 자연스레 온실가스 배출량 또한 급증하게 되었고 온실가스 대기 중 농도가 높아지면서 지구의 기온이 급변하게 된 것이다.

(지난 번에 올렸던 『인류의 여정』과도 내용이 겹치는데) 산업혁명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게 되니 더 많은 주거지와 시설들이 필요해졌고 이 때문에 삼림과 습지가 파괴되었는데 유럽을 시작으로 아시아, 아프리카로까지 산업화가 확산되면서 온실가스 배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급증했던 것이었다.


산업화로 인해 인류는 자연에 의한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기만 하던 존재에서,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기후를 바꾸는 주체로 변모한 셈이다.




새로운 관점을 통해 역사를 둘러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요즘이다.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는 물론 동물, 식물에 이어 기후의 관점에서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색다르니 지루할 틈이 없다.


1만 2000여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수천 년에 걸쳐 지구는 온난한 기후로 바뀌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유라시아와 이어졌던 호주와 아메리카는 분리되었고 영국, 일본 등은 섬이 되었다.

멸종된 동/식물들에 반해 인류라는 존재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역시 기후이다.

혹시 알고 있는가?

도구와 불을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19만 년 동안 식량을 생산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타이밍 좋게도 빙하기가 끝남과 동시에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자연스레 생태환경 또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덕분에 다양한 식물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주식으로 삼는 재료들을 자연스레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단백질과 지방을 얻었던 동물들이 사라져 위기도 있었다.

즉, 기후로 인해 울고 웃었던 인류였다.


오래 전, 온난한 기후 덕에 인구가 증가하였고 더 넓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으니 기후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렇기에 기후 위기를 단순하게 넘겨서는 안 된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라고는 하지만 처음에 언급했듯이 일부 학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다시 빙하기가 올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위적인 기후변화를 일으켰지만 이를 되돌릴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선진국 전체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중국인데 전체 20%를 차지하고 있다니 이는 정말 높은 수치이다.

지구 온난화의 주원인이 되고 있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부터 지켜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전세계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노력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이번 황사가 정말 심하다고 하던데, 마스크 잘 쓰고 다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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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미국 미술사 다시 읽기 - ‘타자’로의 초대
김진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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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20세기는 미국 미술의 세기였다.

그만큼 미국 미술의 영향력과 위상이 매우 드높았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국제 미술계를 이끌어 나갔었다.

궁금하다. 20세기 후반의 미국 미술은 과연 어땠을지 말이다.

드높았던 위상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때 그 시기로 여행을 떠나보자!


저자, 김진아는 현재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교수로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이론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미국 현대 미술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뉴욕주립대 강사, 홀린스 대학 초빙조교수를 지냈다.

전공 영역은 현대 미술사와 문화이론이며, 문화적 정체성과 타자에 주목한 연구, 공공미술, 전시회와 담론, 상호매체적인 예술 양상 등을 탐구해 왔다. 그중에서도 본 저서는 저자가 가장 오랫동안 주목했던 타자 관련 연구들을 집대성하면서도, 일부의 미술 현상을 새롭게 조사하고 채우면서 완성한 결과이다.




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미술과 타자


책에 들어가기에 앞서, '타자'에 대해 잠시 설명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는 기존 미술계의 권력에서 밖으로 밀려난 자들 혹은 억압된 자들을 뜻하며, 대표적으로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흑인, 여성, 라티노, 성소수자 등 소수자 집단들을 의미할 수 있다.


미국과 미국 미술의 대전환점을 맞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이다.

전쟁이 일어나던 중, 미국은 어느새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으며 종전 후 냉전 체제가 성립되자 민주주의 진영 국가들의 리더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미술계는 여전히 유럽 미술을 따라가는 추세였다.

많은 미국 작가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교육받고 활동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다보니 세계 미술을 주도한 것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 미술계였다.

그렇게 종전이 되고 2년 후, 미국이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 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추상 작업들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초현실주의나 유럽에서 일어난 추상 형식을 더 벗어난 급진적인 추상 미술이 소개되었기 때문이었다.


1947년 잭슨 폴록은 이제는 전설이 된 드리핑 기법을 선보이며, 처음으로 순수 추상 작품을 내어놓았다. 윌렘 드 쿠닝도 야성적이고 파괴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작업으로 돌풍을 일으켰으며, 곧 바넷 뉴먼, 아쉴리 고르키,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등도 함께 부상했다.


여전히 구성적 요소가 보였던 유럽의 모던 아트와는 달리 미국 화가들은 자유분방하고 야성적이어서, 이는 사회적인 메타포로 연결되어 계층적 사유의 타파라 주장되기도 하였다.

즉, 미국의 평등과 민주주의의 완벽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유럽 추상회화가 저택의 거실에 걸리기 맞는 이젤화라 불릴 수 있는 규모였다면 잭슨 폴록의 전성기 그림은 2m에서 6m에 이르렀었다.

거대하고 거친 화면에서 화려하게 펼쳐진 색면들은 꼭 광활한 미국 땅처럼 느껴졌으며 뉴욕 출신은 드물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뉴욕에 모여 활동하고 있었기에 이들을 '뉴욕화파'라고 불렀다.

문화적 배경과 개성은 달라도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시기에 서로 의기투합하며 작업 방향을 함께 모색하였다.

또한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휘트니 등 미국의 젊은 근·현대미술관들이 새로운 미술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기 시작했다.


미국인이 된다는 것은 한국처럼 혈연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닌, 동화의 과정을 통해 정신적으로 미국인으로 거듭남을 의미했다.

20세기 말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는 미국을 하나로 묶는 역동적이고 자랑스러운 힘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 프로테스탄트 윤리였다.

즉, 이민자들은 이 세 가지를 습득하고 지킴으로써 진정한 미국인이 되기를 요청받는다.

모든 문화가 섞이는 형상과 포괄적인 문화 수용성을 떠올리게 되는 용광로 개념은 실제 20세기 말 부상하는 다문화주의나 상호문화주의 등과는 대조적인 함의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민자들의 다양한 문화는 앵글로색슨족의 언어와 종교인 영어와 기독교 아래에 위치하는 주변 문화 또는 하위문화로만 기능할 뿐 결코 주류 문화는 될 수는 없다는 암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열린 문화적 성격이라 강조되었던 '수많음으로 하나 됨'이라는 용광로 메타포는 비유럽권 문화를 식민화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미국주의'를 함축하는 것이다.



Ⅱ 여성 미술가들의 등장


민권운동 시기, 흑인과 치카노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은 주류 미술계의 배척에 대해 적극 항의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고유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공동체 벽화나 해당 공동체만의 분리주의적 실천을 전개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에 운동으로서의 미술 실천이 사그라져 정치적인 예술 활동은 이어졌어도 그 전과는 달리 훨씬 산발적이고 덜 일관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제 2세대 페미니스트 미술 담론은 1세대 페미니즘 미술을 본질주의라 매도하였고 흑인과 치카노 미술가들 사이에도 공동체적 관심을 꼭 반영하던 경향은 약화되었다.

60년대 후반 탈미니멀리즘 경향과 다채로운 형식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확대되면서 70년대는 특정 매체나 장르로 당대의 미술을 지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를 다원주의(pluralism) 시대라고 부른다.

80년대 미술에서는 유독 사진 작업이 크게 부상하고 텍스트가 삽입되거나 텍스트가 중요한 매체로 등장한다.

기존에 있던 이미지나 작품을 이용하는 방식인 전용 또는 차용, 패스티쉬, 복제 등도 크게 유행한다.

이러한 작업을 전개하는 작가 중 여성 작가들이 선구적으로 주목받는 사례가 많았고 특히 「옥토버」지로 대표되는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의 지지가 있었다.

1980년대, 주요 전시회에 포함된 동시대 여성 미술가들의 비율 자체는 남성에 비해 매우 낮았으나 그 이전보다는 높아지긴 했다.

바버라 크루거, 신디 셔먼, 셰리 레빈, 제니 홀저, 메리 켈리 등 여성 작가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제니 홀저는 1980년대 초 휘트니 비엔날레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개인전, 1989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90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관을 대표하는 최초의 여성 작가로 참여했고, 최고상인 황금사자상까지 거머쥐면서 역사적인 쾌거를 올렸다.


바바라 크루거는 1970년대 전후 여성 미술운동의 여파 속에서 구슬, 리본, 실 등을 이용해 만든 벽 설치 작업과 회화 작업을 했고, 197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초대되기도 하는 등 일찍 데뷔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방황하다가 1970년대 말 큰 흑백 사진에 간결하고 대담한 텍스트 구문을 결합한 작품으로 돌아와 새 출발을 알렸다.


1980년대 말, 혁신적인 여성 미술가들은 주요 전시회에서 남성 작가들 사이에 한두 명식 끼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동시대 미술을 선도하는 미술관 전시에 참여하는 위치로까지 오르게 된다.

초기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제도권 미술계와 상업화 현상을 비난하며 분리주의적인 전시에 임했다면, 신예 작가들은 주류 미술관에 입성했고 심지어 유명 상업 화랑에도 발을 들여놓는다.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사는 물론 미술도 알아갈 수 있는 책이니 읽고 나면 나 자신이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1장은 1947년부터 1960년대 중반 시기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주요 미술 기관들이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추상표현주의 사조와 그 담론에서 어떻게 미국 문화가 정의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2장, 3장, 4장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시기, 활발히 전개되었던 흑인 미술운동, 치카노 미술운동, 페미니즘 미술운동에 주목한다.

5장은 1980년대 부상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새로운 타자로서의 여성 미술가들에 초점을 맞춘다.

6장은 1980년대 후반 『환상의 미술: 라틴아메리카, 1920-1987』전, 라티노 미술을 다뤘던 최초 대규모 전시인 『미국의 히스패닉 미술』전, 이에 대한 대항적 전시로서 개최된 『치카노 미술: 저항과 확언, 1965-1985』전에 나타난 쟁점을 논한다.

7장은 1990년대 전후로 에이즈에 관한 사회적 편견과 정부의 소극적 대처에 항의하며 성 소수자뿐들 아니라 여러 미술인이 함께 펼쳐 나갔던 미술 운동 양상을 고찰한다.

8장은 1989년 이후 시기로 다문화주의 논쟁이 사회 전반과 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9장은 1990년대로 아시아계 미국인 미술가들의 출현 등에 관해 서술되어 있다.


이렇듯 세계를 제패한 1950년대 전후의 추상표현주의가 어떻게 타자 미술가들을 그늘에 머무르게 했는가를 시작으로 이들이 장차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질문과 도전장을 던져 나갔는지, 그리고 이들이 주류 미술계에서 어떻게 부상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각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서술되어 있어 보다 깊이있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역사는 물론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까지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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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역사산책 : 한국사편 골목길 역사산책
최석호 지음 / 가디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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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나를 찾아 역사를 걷는다.

한반도를 걷는다.

한국인의 혼을 걷는다.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님, K-POP, BTS 그리고 오징어 게임 - 전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전세계인들에게 문화적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각인시켰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를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미국에서 잠깐 아카데미에 다닐 때 선생님께 일대일 수업을 받을 때였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대해 들어봤어요. 다만 김치 정도밖에 모른다는 게 참 아쉬워요.'

'대한민국에도 유명한 명소가 있나요?'


만약 이런 질문을 실제로 받는다면 어디를 소개시켜 줄 것인가?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현대적인 명소도 좋지만, 역사를 흠뻑 느낄 수 있는 명소 몇 군데는 제대로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저자, 최석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레저관광사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에서 유산관광을 전공하고 문화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과 서울신학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관광세계화·문명화과정·엔터테인먼트산업 등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UN 여가 관련 자문을 맡고 있는 World Leisure Organization의 학술지『World Leisure Journal』국제편집자문위원, 중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World Hotel Association 부회장, 한국문화사회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장을 역임했다.




Ⅰ 남촌 대한민국길 산책


계획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한 걸음씩 발로 밟아서 다진 동네다. 그래서 한양은 남촌 사람 동네고 조선은 남촌이다. 외세가 쳐들어와서 나라를 빼앗는다면 되찾을 때까지 다툴 것이다. 남촌 사람들은 독립 전쟁 선봉에 선다. 되찾은 나라를 독재로 얼룩지게 한다면 민주주의를 회복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 남촌길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길이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제국주의 도시체제로 변화하게 된다.

일제는 구리를 황금으로 바꾸고 동을 정으로 바꿔 중심으로 삼아 수도를 뜻하는 글자 경과 마찬가지로 중심에서 여섯 방향으로 길을 낸다.

남산 예장자락에 통감부를 짓고 남산 회현 자락에 조선신궁을 짓는다.

'신성하게 높이 솟은 울' 서울은 빼앗기고 이내 경성이 되어, 남촌은 식민통치의 수도가 되고 만다.

이후 광복을 되찾고도 1년이 지난 뒤에야 경성은 다시 서울이 된다.

덧붙이자면, 당시 서울시를 우남시로 하자는 사람들의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우남시? 뜬금없이 왜 우남시가 나온 것일까? 바로 우남은 이승만의 호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서울역에는 역사가 두 개나 있다.

서울종합민자역사는 KTX개통과 함께 만들어졌고 구 서울역사는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1925년에 지어졌다.

이때, 일제는 일본 시모노세키와 조선 부산을 부관페리로 연결하고 부산에서 만주까지 철도를 부설한다.


서울역의 생김새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일본 중앙역인 동경역으로, 경성역은 조선과 만주의 중앙역이다.

동경역사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사를 본떠 만들었는데 서울역사는 동경역사를 본뜨게 되었다.

르네상스풍 절충주의 양식으로 근대와 전통이 섞어져 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철골과 벽돌 쌓은 것은 근대적이고 돔과 첨탑은 고전적이다.

즉, 서구적 기준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서울역 앞에서 버스를 타거나 서울역에서 열차를 탔기에 딱히 둘러볼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었다.

서울역에는 동상 하나가 있다고 한다.

바로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다.

가난한 농가에서 네 남매 중 남매로 태어나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애국운동에 관여하면서 신변에 문제가 생기자 송원 중심가 남문거리에서 잡화상을 운영했다고 한다.

다른 상인들에게 돈을 꿔 주기도 하고 예컨대 이동휘 선생이 함경도를 순회할 때면 그의 집에서 종종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다고 전해진다.

북간도 근방으로 이주하여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이후 북만주로 이주하여 동포마을인 신흥동을 개척하여 러시아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 단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광동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을 맡아 조선인 자제를 교육하는데 전념했다고 한다.

이후 일제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는데 일제는 오히려 강우규 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뒤 불어 닥칠 후폭풍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판사마저 처음에는 피고라고 부르다 선생님 또는 영감님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니깐.

이후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짤막한 시를 남기고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한다.




Ⅱ 운주사 고려길 산책


운주사 하늘에 별은 빛나고 그 아래 땅은 아름답다. 누구든 운주사에 들어가면 고려 신선이 된다. 고려 하늘을 날아 빛나는 별과 아름다운 땅을 내려다보며 노닌다. 서울에 북악 스카이웨이(하늘길)가 있다. 화순에는 고려 스카이웨이가 있다.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려길을 걷는다.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리면 운주사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운주사는 아마 생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불교와 아무 관련 없는 이름이다.

운주사 앞 주차장에 내려 경내로 들어서면 일주문이 사람을 맞이한다. 희한한 것은 불이문도, 사천왕문도 없다고 한다.

본래 사찰이라면 일주문 뒤에 불이문이나 사천왕문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애초에 운주사는 불교 사원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다. 중앙정권과 지방토호 간에 정치적 이해를 공유하면서 빚어낸 도관(도교사원) 중 하나이다.


"운주사 : 천불산에 있다. 사찰의 오른쪽 왼쪽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천 개가 있다. 또한 석실에 석불 두 개가 서로 등지고 앉았다." _《신증동국여지승람》


"운주사 : 천불산 서쪽에 있는데 사찰이 오래전에 폐해졌다. 그 왼쪽 오른쪽 산기슭에 석불과 석탑이 크고 작은 것이 심히 많아 이를 천불천탑이라 부르며, 또한 한 석실이 있는데 그 안에 두 개의 석불이 벽을 격하여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백성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시대 때 조영한 것이라 한다. 혹은 고려 승려 혜명이 따르는 이들 수천 명으로 하여금 만들었다고 한다." _《동국여지지》




Ⅲ 강릉 조선길 산책


…… 변치 않는 것도 많다. 오죽헌·율곡기념관·선교장·경포대……. 신사임당 그림 그리던 곳이다. 율곡 선생 나신 곳이다. 허초희 시를 짓던 곳이다. 허균 젊은 시절 기억이 서린 곳이다. 효령대군 후손들이 정착한 곳이다. 강릉에서 변치 않는 것은 한결같이 역사와 관련된 것들이다. 모두 조선 시대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강릉에서 걷는 길은 조선길이다.


강릉은 본래 예국 땅으로 고구려는 하서량 또는 하슬라주라고 불렀다.

신라 지증왕때, 하슬라주 군주가 된 내물왕 4대손 이사부가 꾀를 내어 우산국을 합쳤다.

우산국 사람들은 쉽게 항복받기 어려울 정도로 사나워 계략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나무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었었다고 전해진다.


강릉에서 사는 사람들은 좀상날 달과 좀생이별 사이 거리를 보고 한 해 농사를 점쳤다고 한다.

좀생이별이 달을 바짝 따라가면 흉년이 들고 떨어져서 따라가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달은 밥통이고 좀생이는 밥을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아이들을 뜻한다.)

"강릉 사람이 이처럼 별자리에 밝았던 것은 하늘 자손이기 때문이리라."


'강릉'하면 역시 '오죽헌'이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이 오죽헌에서 용꿈을 태몽으로 꿨었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했던 율곡은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하고선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이후 21살 되던 해에 율곡은 한성시에 급제하고 다음해에 정3품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인 곡산 노씨와 결혼하게 된다.

그 이후 장인을 찾았다가 예안 도산서원에 들려 퇴계를 만나게 된다.

퇴계는 율곡의 사람됨과 똑똑함에 만힝 놀랐다고 한다.

"노력하고 공부하여 날로 새로워지자"라고 당부할 정도였으니깐.

율곡은 을사삭훈을 통해 왜곡된 정치를 바로잡고 개혁을 통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동서분당을 조제보합함으로써 그 폐해를 막고 변방을 튼튼하게 지켜 오랑캐가 넘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서울시에서 친일매국 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안중구 의사 동상을 철거했었다.

이어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설치된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국회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그리고 정읍시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등 김경승이 만든 동상 철거 및 교체가 줄을 잇고 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강릉시에서는 친일매국노가 그린 영정을 교체했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율곡 선생께서 살아계신다면 친일매국 화가에게 당신을 그리라고 하지 않았을 테니깐.




Ⅳ 경주 신라길 산책


알타이 적석목곽분으로 웅대한 역사를 말한다. 한혈마를 타고 드넓은 스텝루트를 달린다.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한다.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두루 잇는다. 당나라에 신라마을을 경영한다. 페르시아 사람이 춤을 춘다. 박트리아 황금비도가 빛을 발한다. 로마와 시리아 유리로 아름답게 장식한다. 경주가 아니라 신라 왕경이다. 가장 약한 나라가 아니라 삼한일통 대업을 달성한 동아시아 최강국이다. 신라는 왕도에서 세계를 경영한다. 신라에서 우리는 세계를 걷는다. 세계로 가는 신라길!


태종무열왕인 김춘추는 곧장 왕위에 오를 생각은 없었다. 인맥을 두텁게 하여 신뢰를 쌓고 적국인 고구려로 가 친구를 사귀었다.

이후 선덕왕과 진덕왕을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후에야 왕위에 올랐으니 그 기간이 무려 43년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도 문화도 군사력도 오래 갈고 닦은 것만 같았다.

로마 유리와 페르시아 유리를 응용하여 신라 유리를 만들었으니 신라황금과 합금강철은 신라가 어떤 나라인지 신라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중국에서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을 살게 해주기도 했다.

서역 사람이 원성왕 괘릉을 지켰고 아랍 사람이 왕 앞에서 나와 노래하고 춤추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세계 문화인들이 함께 했던 것이다.

신라는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또 다른 내일을 준비했었다.

온 세상을 한 곳에 모아 놓았으니 경주는 세계 문화도시이며, 세계 문화도시 중에서도 최고여서 황금도시라 할 수 있겠다.

즉, 경주는 세계 문화인이 만든 황금도시이다.


대릉원은 신라 최대 무덤군으로 천마도를 발굴한 제155호 천마총과 남분 및 북분으로 쌍북을 이룬 제98호분 황남대총은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1973년 4월부터 12월까지 진행했던 발굴조사가 온 나라를 발칵 뒤집는다.

일제가 천마총 꼭대기에 대공초소를 설치했었는데 1971년까지 그대로 있었기에 이를 제거하고 나니 자갈층이 드러나게 된다.

신라 고분은 고구려나 백제 고분보다 도굴이 덜 됐었다.

그렇게 파고 보니 자갈층 밑으로 굳게 다진 점토층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무덤방이 나타나게 된다.

유리구슬, 큰고리귀걸이, 작은고리귀걸이, 나비모양금관꾸미개 등을 발굴하게 되면서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게 된다.

우리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국보급 부장품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고 그렇게 끝인가 싶었는데, 끝이 아니었다.

세상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부장품 상자 안에서 나오게 된다.

아열대 고동 껍질로 만든 말띠 꾸미개, 대나무로 장식한 금동판 말다래, 코발트색 유리잔 및 녹색 유리잔, 청동 다리미 등과 함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도 말다래와 새그림판을 발굴한 것이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한 것이 바로 '천마도'이다.

사실 금동판 말다래를 보존 처리하기 위해 뿌린 약품 때문에 하마터면 천마도를 못 볼 뻔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천마도 말다래가 두 장이어서 아래쪽에 있는 말다래 천마도를 무사히 수습했던 것이다.

제128분에서 금관이 나왔으므로 금관총, 제129호분에서 봉황으로 장식한 금관이 나왔으므로 서봉총이라 하였고 천마도가 나왔으니 제155호분은 천마총이다.

천마총에서 발굴한 천마도의 시원형은 고구려 덕흥리 벽화고분 북쪽 천장 천마도이다.

천마총 천마도는 갈기와 꼬리털이 수평을 이루며 날리고 있기 때문에 무용총 천마도와 가장 비슷하다고 전해진다.




마치 내가 걷고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이렇게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책이 있었던가.


산책과 드라이브를 좋아해 장소 하나 딱 정해놓고 그 근방을 천천히 걸으며 눈에 담곤 한다.

코로나 터지기 전 그 해 여름날, 엄마와 함께 강릉에 갔다왔었다.

가족들과 함께 지난 해에 강릉에 다녀온 기억이 선해 엄마와 함께 시간을 맞춰 단둘이 KTX를 타고 조금 먼 산책에 나섰었다.

바다 한 번 보다가 신선한 해산물로 요기하고, 바다 한 번 보다가 커피 한 잔씩 시켜놓고……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고 또 걸었다.

하루를 꼬박 선선한 바람, 따스한 햇살 그리고 바다 내음과 함께 보냈었다.


미국에서 잠깐 아카데미에 다닐 때 선생님께 일대일 수업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말하셨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대해 들어봤어요. 다만 김치 정도밖에 모른다는 게 참 아쉬워요.'

'대한민국에도 유명한 명소가 있나요?'


만약 이런 질문을 실제로 받는다면 어디를 소개시켜 줄 것인가?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현대적인 명소도 물론 좋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를 흠뻑 느낄 수 있는 명소도 절대 빠뜨려선 안 된다.


그 때, 나는 여러 장소 중 가장 처음 입을 열었던 장소가 바로 '고궁'이었다.

국어, 영어, 한국사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기에, 고궁 곳곳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하며 사진도 보여줬었는데 다채로운 색감은 물론 미국에선 볼 수 없는 문화재에 선생님이 감탄하셨던 기억이 선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버릴 것 없는 내용이라 꼭 읽어봤으면 한다.

요새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고궁 나들이는 물론 강릉과 경주에도 한 번 다녀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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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 이순신을 성웅으로 키운 초계 변씨의 삼천지교 윤동한의 역사경영에세이 3
윤동한 지음 / 가디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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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어머니가 있었기에 이순신이 있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모친 변씨는 이순신의 기둥이었고, 하늘이었다.


이순신과 관련된 위인전 한 권쯤은 누구나 읽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생활을 마치고 이순신과 관련된 책을 읽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책은 이순신의 모친이었던 초계 변씨의 인물을 담은 이야기이며,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의 세계에 빠져들게 할 것이라 생각해본다.


저자, 윤동한은 한국콜마(주) 회장이다. 대웅제약 부사장을 지내고, 1990년에 한국콜마를 설립하여 화장품과 제약업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2014년 다산경영상(창업경영인 부문)과 국민훈장 동백장, 2018년 한국능률협회가 제정한 ‘한국의 경영자상’, 2019년 언스트앤영(EY) 최우수 기업가상을 수상하였다.

역사와 인문학을 접목한 창업 경험과 경영을 바탕으로 『인문학이 경영 안으로 들어왔다』(2016)를 출간했다. 2018년에는 목화씨를 들여온 고려인 문익점을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인으로 해석하여 이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낸 『기업가 문익점』을 출간했고, 이어서 2019년에는 역사경영에세이 두 번째 시리즈로 이순신의 곁을 지키며 임진왜란 극복을 위해 80세에도 현역으로 참전한 영웅 정걸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80세 현역 정걸 장군』을 펴냈다.




Ⅰ 이순신 그리고 그의 모친 초계 변씨


초계 변씨는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서울 건천동에서 낳았다.

지금의 충무로 근처로, 이순신이 서울 태생임을 알 수 있다.

1545년 음력 3월 8일, 양력으로 치면 4월 28일이다.


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을 낳았다.

서울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그야말로 사내 대장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주변 인물들의 기록물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모습은 꽤 다양하게 평했지만 언제나 골목대장이었고 공부보단 전쟁놀이를 더 좋아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순신의 모친인 변씨도 자제력있고 온순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 순신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학문하는 자세도 좋고 집중력이 뛰어나니 과거까지 갈 수 있게 준비해야겠어. 그런데 이 아이는 얼마나 활동적인지, 아무리 봐도 외조부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무과 급제도 좋겠지. 잘 지켜봐야겠어."


모친 변씨는 둘째 요신에게 승보시를 보게끔 하려고 동학에 보내고 순신을 서당에 보냈었다.

맏아들 희신은 무슨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동학을 다녔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본가를 지키고 부모를 훌륭히 봉양했던 것이 바로 맏아들 희신이었다.

모친 변씨는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잃은 아픔이 있어 남은 아들은 물론 손자까지 잃지 않기 위해 애썼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발령났을 때도 모든 식솔을 이끌고 정읍으로 이주했을 정도였으니깐.

이렇듯 이순신이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은 모두 어머니에게서 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Ⅱ 모친 변씨, 이순신의 기둥으로 스승이 되다


아버지 이정은 직함은 있었으나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었다. 2대째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니 가문이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모친 변씨가 고단했던 서울살이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 아닐지 추측하고 있다.

지금도 모든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는 것은 수도권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이 아닌 수도권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아들들을 출세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조건에 부합한 지역이 서울이었지만 이전에 집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에 몰락한 가문이라는 평판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모친 변씨가 서울을 떠나 아산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산 시곡이 변씨 가문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읽은 위인전을 되짚어보면, 처음부터 이순신은 무인의 핏줄이 흐르고 있음을 외가쪽에서 알아봐주었다고 한다.)

모친 변씨는 순신이 급제하고선 변방을 돌아다닐 때 꿋꿋하게 가문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덧붙여, 철저한 재무관리를 통해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고도 전해진다.

이순신의 꼼꼼하고 청렴한 그리고 독립적인 재무 능력 또한 모친 변씨에게 물려받았을 것이다.

이후, 둘째인 요신이 병사하고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었다. 그리곤 첫째 희신마저 사망하게 되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마저 불에 탔다고 한다.

아득한 슬픔과 어려움이 연달아 닥치는데도 그녀는 좌절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으니 현실을 순응하며 좌절하거나 부정하지도 않고 오롯이 다시 일어설 생각만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독립심과 대쪽같은 성격을 그대로 받았기에, 이순신은 청렴한 공직자가 될 수 있었다.



Ⅲ 모친 변씨, 결국 이순신을 만나지 못하다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의금부에 하옥되었을 당시, 모친 변씨 또한 그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들의 마지막 희망이자 기둥이었음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변명하지 않는 아들이다.

의금부에서 고문을 당해 죽으면 죽었지, 절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아들이다.

노환으로 병중에 있던 그녀는 아들의 대쪽같은 성격을 알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향한다. 그녀의 나이, 여든셋이었다.

"내가 죽고 아들이 살아야 한다면 마땅히 죽겠다."

모친 변씨는 막내인 우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뱃길에 오르게 된다.

사실 모두가 말렸었다.

음력 2, 3월에는 배를 띄우지 않는다. 바람이 제멋대로 불 뿐더러 물길도 거세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신을 향해 험난한 길을 나섰지만 법성포 앞바다를 지나면서 게바위까지 왔으나 도착 직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순신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4월 11일 맑다.

새벽꿈이 매우 어지러워 다 말할 수가 없다. 덕을 불러서 대략 말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4월 12일 맑다.

사내종 태문이 안홍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니께서는 숨이 곧 끊어질 듯합니다. 초9일에 위·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홍량에 도착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법성리)에 이르러 배를 대어 잘 적에 닻이 끌려 떠내려가서 배에 머물며 엿새나 새로 떨어져 있었으나 탈 없이 만났고 무사합니다"라고 했다.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4월 13일 맑다.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 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흥찰방 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내면서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흥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게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대강 적다.


4월 19일 맑다.

일찍 나와 길을 떠났다.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뢰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금곡(여ㅕㄴ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 선전의 집 앞에 이르니 강정·강영수 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그 길로 보산원(연기군 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었다 갔다. 임천군수 한술은 중시 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길을 지나가다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들 회·면·울, 조카 해·분·완과 주부 변존서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인남도 와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위인전 세트를 선물로 받았었다.

중간 중간 그림은 첨부되긴 했지만 거의 글로만 이루어진 책이기에 굉장히 지루할 법도 하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성장과정을 시작으로 업적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것을 읽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 한 켠에는 풍만함이 가득했었다.

그 때를 시작으로 역사책에 푹 빠졌었던 것 같다.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며 전권을 열 번도 넘게 재독했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쯤 사촌동생에게 물려주기 위해 여의도에서 만나 건네줬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한다;

벚꽃구경을 더 한다는 말에 우리집은 먼저 출발했었고 사촌동생네는 조금 더 있다 간다고 했었는데, 트렁크를 정리하다가 깜빡 잊고 길에다 놓고 왔다는 것이었다.

다시 가보니 이미 사라진 후였다고 한다.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다시 그 전집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출판사나 위인전 시리즈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결국 찾는데 실패했고 지금도 그 위인전이 가끔씩 생각난다.

위인전 전집 중 나에게도 베스트 5가 있었다.

「세종대왕」, 「장영실」, 「유관순」, 「이순신」, 「신사임당」이 그 주인공이다.

실제로 이 다섯 인물의 책은 열 번이 아닌 수십 번은 읽고 또 읽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쓰라고 하면 무조건 다섯 분의 이름을 남겼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위인전이었기에 많은 정보가 담겨있지는 않았으나 이순신에 대한 인물의 성장과정이나 업적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사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세세하게 다루지를 않으니 「징비록」 등 여러 책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순신 어머니'에 초점을 맞춘 책이 눈에 띄게 되어 얼른 하나의 책장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한석봉도 어머니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듯이, 이순신 또한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많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모친 변씨가 얼마나 자식에게 큰 사랑과 가르침을 주었는지 눈에 선했다.

프로그래밍의 힘이라는 한 영상이 있었다. 부자가 부자일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부자들의 자식은 그 어떤 실패를 해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한 자의 자식은 실패를 맛보면 금방 좌절하게 된다고 한다.

무슨 차이일까? 무의식적으로 입력된 프로그래밍의 차이였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과 행동이 자식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 힘들었지만 참 보람차다! 내일을 위해 또 힘내야지!'

'오늘 하루 참 힘들다. 온몸이 쑤신다. 돈은 도대체 언제 모을 수 있는 거냐.'

의식적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은 의식하고 있기에 내뱉기 전에 머릿속에서 수정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은 그간의 행실이 쌓고 쌓여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과 행동마저 훌륭했던 인물, 이순신의 모친인 변씨가 딱이지 않는가!


어머니가 있었기에 이순신이 있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모친 변씨는 이순신의 기둥이었고, 하늘이었다.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문득 읽다가도 어떻게 이런 세세한 자료를 구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책을 읽기 전, 저자와 목차를 읽는 습관이 있는데 저자의 이력이 참 독특했었다.

후일담에 따르면 턱없이 부족한 자료로 인해 집필을 멈추기도 했었다는데 참 대단하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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