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역사산책 : 한국사편 골목길 역사산책
최석호 지음 / 가디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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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나를 찾아 역사를 걷는다.

한반도를 걷는다.

한국인의 혼을 걷는다.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님, K-POP, BTS 그리고 오징어 게임 - 전세계인들은 대한민국을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전세계인들에게 문화적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각인시켰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를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미국에서 잠깐 아카데미에 다닐 때 선생님께 일대일 수업을 받을 때였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대해 들어봤어요. 다만 김치 정도밖에 모른다는 게 참 아쉬워요.'

'대한민국에도 유명한 명소가 있나요?'


만약 이런 질문을 실제로 받는다면 어디를 소개시켜 줄 것인가?

물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현대적인 명소도 좋지만, 역사를 흠뻑 느낄 수 있는 명소 몇 군데는 제대로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저자, 최석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레저관광사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영국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에서 유산관광을 전공하고 문화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과 서울신학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관광세계화·문명화과정·엔터테인먼트산업 등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UN 여가 관련 자문을 맡고 있는 World Leisure Organization의 학술지『World Leisure Journal』국제편집자문위원, 중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World Hotel Association 부회장, 한국문화사회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장을 역임했다.




Ⅰ 남촌 대한민국길 산책


계획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한 걸음씩 발로 밟아서 다진 동네다. 그래서 한양은 남촌 사람 동네고 조선은 남촌이다. 외세가 쳐들어와서 나라를 빼앗는다면 되찾을 때까지 다툴 것이다. 남촌 사람들은 독립 전쟁 선봉에 선다. 되찾은 나라를 독재로 얼룩지게 한다면 민주주의를 회복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 남촌길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길이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제국주의 도시체제로 변화하게 된다.

일제는 구리를 황금으로 바꾸고 동을 정으로 바꿔 중심으로 삼아 수도를 뜻하는 글자 경과 마찬가지로 중심에서 여섯 방향으로 길을 낸다.

남산 예장자락에 통감부를 짓고 남산 회현 자락에 조선신궁을 짓는다.

'신성하게 높이 솟은 울' 서울은 빼앗기고 이내 경성이 되어, 남촌은 식민통치의 수도가 되고 만다.

이후 광복을 되찾고도 1년이 지난 뒤에야 경성은 다시 서울이 된다.

덧붙이자면, 당시 서울시를 우남시로 하자는 사람들의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우남시? 뜬금없이 왜 우남시가 나온 것일까? 바로 우남은 이승만의 호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서울역에는 역사가 두 개나 있다.

서울종합민자역사는 KTX개통과 함께 만들어졌고 구 서울역사는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1925년에 지어졌다.

이때, 일제는 일본 시모노세키와 조선 부산을 부관페리로 연결하고 부산에서 만주까지 철도를 부설한다.


서울역의 생김새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일본 중앙역인 동경역으로, 경성역은 조선과 만주의 중앙역이다.

동경역사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사를 본떠 만들었는데 서울역사는 동경역사를 본뜨게 되었다.

르네상스풍 절충주의 양식으로 근대와 전통이 섞어져 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철골과 벽돌 쌓은 것은 근대적이고 돔과 첨탑은 고전적이다.

즉, 서구적 기준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서울역 앞에서 버스를 타거나 서울역에서 열차를 탔기에 딱히 둘러볼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었다.

서울역에는 동상 하나가 있다고 한다.

바로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다.

가난한 농가에서 네 남매 중 남매로 태어나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애국운동에 관여하면서 신변에 문제가 생기자 송원 중심가 남문거리에서 잡화상을 운영했다고 한다.

다른 상인들에게 돈을 꿔 주기도 하고 예컨대 이동휘 선생이 함경도를 순회할 때면 그의 집에서 종종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다고 전해진다.

북간도 근방으로 이주하여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이후 북만주로 이주하여 동포마을인 신흥동을 개척하여 러시아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 단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광동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을 맡아 조선인 자제를 교육하는데 전념했다고 한다.

이후 일제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는데 일제는 오히려 강우규 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뒤 불어 닥칠 후폭풍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판사마저 처음에는 피고라고 부르다 선생님 또는 영감님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니깐.

이후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짤막한 시를 남기고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한다.




Ⅱ 운주사 고려길 산책


운주사 하늘에 별은 빛나고 그 아래 땅은 아름답다. 누구든 운주사에 들어가면 고려 신선이 된다. 고려 하늘을 날아 빛나는 별과 아름다운 땅을 내려다보며 노닌다. 서울에 북악 스카이웨이(하늘길)가 있다. 화순에는 고려 스카이웨이가 있다.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려길을 걷는다.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을 달리면 운주사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운주사는 아마 생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불교와 아무 관련 없는 이름이다.

운주사 앞 주차장에 내려 경내로 들어서면 일주문이 사람을 맞이한다. 희한한 것은 불이문도, 사천왕문도 없다고 한다.

본래 사찰이라면 일주문 뒤에 불이문이나 사천왕문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애초에 운주사는 불교 사원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다. 중앙정권과 지방토호 간에 정치적 이해를 공유하면서 빚어낸 도관(도교사원) 중 하나이다.


"운주사 : 천불산에 있다. 사찰의 오른쪽 왼쪽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천 개가 있다. 또한 석실에 석불 두 개가 서로 등지고 앉았다." _《신증동국여지승람》


"운주사 : 천불산 서쪽에 있는데 사찰이 오래전에 폐해졌다. 그 왼쪽 오른쪽 산기슭에 석불과 석탑이 크고 작은 것이 심히 많아 이를 천불천탑이라 부르며, 또한 한 석실이 있는데 그 안에 두 개의 석불이 벽을 격하여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백성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시대 때 조영한 것이라 한다. 혹은 고려 승려 혜명이 따르는 이들 수천 명으로 하여금 만들었다고 한다." _《동국여지지》




Ⅲ 강릉 조선길 산책


…… 변치 않는 것도 많다. 오죽헌·율곡기념관·선교장·경포대……. 신사임당 그림 그리던 곳이다. 율곡 선생 나신 곳이다. 허초희 시를 짓던 곳이다. 허균 젊은 시절 기억이 서린 곳이다. 효령대군 후손들이 정착한 곳이다. 강릉에서 변치 않는 것은 한결같이 역사와 관련된 것들이다. 모두 조선 시대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강릉에서 걷는 길은 조선길이다.


강릉은 본래 예국 땅으로 고구려는 하서량 또는 하슬라주라고 불렀다.

신라 지증왕때, 하슬라주 군주가 된 내물왕 4대손 이사부가 꾀를 내어 우산국을 합쳤다.

우산국 사람들은 쉽게 항복받기 어려울 정도로 사나워 계략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나무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었었다고 전해진다.


강릉에서 사는 사람들은 좀상날 달과 좀생이별 사이 거리를 보고 한 해 농사를 점쳤다고 한다.

좀생이별이 달을 바짝 따라가면 흉년이 들고 떨어져서 따라가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달은 밥통이고 좀생이는 밥을 얻어먹으려고 따라다니는 아이들을 뜻한다.)

"강릉 사람이 이처럼 별자리에 밝았던 것은 하늘 자손이기 때문이리라."


'강릉'하면 역시 '오죽헌'이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이 오죽헌에서 용꿈을 태몽으로 꿨었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했던 율곡은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하고선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이후 21살 되던 해에 율곡은 한성시에 급제하고 다음해에 정3품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인 곡산 노씨와 결혼하게 된다.

그 이후 장인을 찾았다가 예안 도산서원에 들려 퇴계를 만나게 된다.

퇴계는 율곡의 사람됨과 똑똑함에 만힝 놀랐다고 한다.

"노력하고 공부하여 날로 새로워지자"라고 당부할 정도였으니깐.

율곡은 을사삭훈을 통해 왜곡된 정치를 바로잡고 개혁을 통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동서분당을 조제보합함으로써 그 폐해를 막고 변방을 튼튼하게 지켜 오랑캐가 넘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서울시에서 친일매국 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안중구 의사 동상을 철거했었다.

이어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설치된 도산 안창호 선생 동상, 국회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그리고 정읍시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등 김경승이 만든 동상 철거 및 교체가 줄을 잇고 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강릉시에서는 친일매국노가 그린 영정을 교체했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율곡 선생께서 살아계신다면 친일매국 화가에게 당신을 그리라고 하지 않았을 테니깐.




Ⅳ 경주 신라길 산책


알타이 적석목곽분으로 웅대한 역사를 말한다. 한혈마를 타고 드넓은 스텝루트를 달린다.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한다.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두루 잇는다. 당나라에 신라마을을 경영한다. 페르시아 사람이 춤을 춘다. 박트리아 황금비도가 빛을 발한다. 로마와 시리아 유리로 아름답게 장식한다. 경주가 아니라 신라 왕경이다. 가장 약한 나라가 아니라 삼한일통 대업을 달성한 동아시아 최강국이다. 신라는 왕도에서 세계를 경영한다. 신라에서 우리는 세계를 걷는다. 세계로 가는 신라길!


태종무열왕인 김춘추는 곧장 왕위에 오를 생각은 없었다. 인맥을 두텁게 하여 신뢰를 쌓고 적국인 고구려로 가 친구를 사귀었다.

이후 선덕왕과 진덕왕을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후에야 왕위에 올랐으니 그 기간이 무려 43년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도 문화도 군사력도 오래 갈고 닦은 것만 같았다.

로마 유리와 페르시아 유리를 응용하여 신라 유리를 만들었으니 신라황금과 합금강철은 신라가 어떤 나라인지 신라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중국에서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을 살게 해주기도 했다.

서역 사람이 원성왕 괘릉을 지켰고 아랍 사람이 왕 앞에서 나와 노래하고 춤추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세계 문화인들이 함께 했던 것이다.

신라는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또 다른 내일을 준비했었다.

온 세상을 한 곳에 모아 놓았으니 경주는 세계 문화도시이며, 세계 문화도시 중에서도 최고여서 황금도시라 할 수 있겠다.

즉, 경주는 세계 문화인이 만든 황금도시이다.


대릉원은 신라 최대 무덤군으로 천마도를 발굴한 제155호 천마총과 남분 및 북분으로 쌍북을 이룬 제98호분 황남대총은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1973년 4월부터 12월까지 진행했던 발굴조사가 온 나라를 발칵 뒤집는다.

일제가 천마총 꼭대기에 대공초소를 설치했었는데 1971년까지 그대로 있었기에 이를 제거하고 나니 자갈층이 드러나게 된다.

신라 고분은 고구려나 백제 고분보다 도굴이 덜 됐었다.

그렇게 파고 보니 자갈층 밑으로 굳게 다진 점토층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무덤방이 나타나게 된다.

유리구슬, 큰고리귀걸이, 작은고리귀걸이, 나비모양금관꾸미개 등을 발굴하게 되면서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게 된다.

우리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국보급 부장품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고 그렇게 끝인가 싶었는데, 끝이 아니었다.

세상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부장품 상자 안에서 나오게 된다.

아열대 고동 껍질로 만든 말띠 꾸미개, 대나무로 장식한 금동판 말다래, 코발트색 유리잔 및 녹색 유리잔, 청동 다리미 등과 함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도 말다래와 새그림판을 발굴한 것이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한 것이 바로 '천마도'이다.

사실 금동판 말다래를 보존 처리하기 위해 뿌린 약품 때문에 하마터면 천마도를 못 볼 뻔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천마도 말다래가 두 장이어서 아래쪽에 있는 말다래 천마도를 무사히 수습했던 것이다.

제128분에서 금관이 나왔으므로 금관총, 제129호분에서 봉황으로 장식한 금관이 나왔으므로 서봉총이라 하였고 천마도가 나왔으니 제155호분은 천마총이다.

천마총에서 발굴한 천마도의 시원형은 고구려 덕흥리 벽화고분 북쪽 천장 천마도이다.

천마총 천마도는 갈기와 꼬리털이 수평을 이루며 날리고 있기 때문에 무용총 천마도와 가장 비슷하다고 전해진다.




마치 내가 걷고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이렇게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책이 있었던가.


산책과 드라이브를 좋아해 장소 하나 딱 정해놓고 그 근방을 천천히 걸으며 눈에 담곤 한다.

코로나 터지기 전 그 해 여름날, 엄마와 함께 강릉에 갔다왔었다.

가족들과 함께 지난 해에 강릉에 다녀온 기억이 선해 엄마와 함께 시간을 맞춰 단둘이 KTX를 타고 조금 먼 산책에 나섰었다.

바다 한 번 보다가 신선한 해산물로 요기하고, 바다 한 번 보다가 커피 한 잔씩 시켜놓고……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고 또 걸었다.

하루를 꼬박 선선한 바람, 따스한 햇살 그리고 바다 내음과 함께 보냈었다.


미국에서 잠깐 아카데미에 다닐 때 선생님께 일대일 수업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말하셨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대해 들어봤어요. 다만 김치 정도밖에 모른다는 게 참 아쉬워요.'

'대한민국에도 유명한 명소가 있나요?'


만약 이런 질문을 실제로 받는다면 어디를 소개시켜 줄 것인가?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현대적인 명소도 물론 좋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를 흠뻑 느낄 수 있는 명소도 절대 빠뜨려선 안 된다.


그 때, 나는 여러 장소 중 가장 처음 입을 열었던 장소가 바로 '고궁'이었다.

국어, 영어, 한국사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기에, 고궁 곳곳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하며 사진도 보여줬었는데 다채로운 색감은 물론 미국에선 볼 수 없는 문화재에 선생님이 감탄하셨던 기억이 선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버릴 것 없는 내용이라 꼭 읽어봤으면 한다.

요새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고궁 나들이는 물론 강릉과 경주에도 한 번 다녀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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