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일로 만드는 법칙

저자 이헌주

갈매나무

2024-08-20

자기계발 > 성공 > 성공학

자기계발 > 힐링 > 마음 다스리기



한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그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존 심리학 연구에서는 성공을 이루는 가장 큰 변인 중 하나로 ‘성실성’을 꼽았습니다. 성실하면 어떤 일을 효과적이고도 빠르게 해낼 수 있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매체에 나와 잠자는 시간까지 줄이면서 노력했다고 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태도이지만 성실성이 자기 능력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기계야말로 성실성의 끝판왕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성이란 세계에서 제일가는 재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고유성의 총합입니다. 이 고유성이라는 특수성이 당신을 당신답게 하는 것이지요. 마치 지문처럼요.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지문을 찍어내도 여전히 당신 손에 지문이 남아 있듯이, 고유성도 당신 안에 있습니다.



존재란 개별성을 뜻합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당신의 개별성과 특수성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손을 얹고 나에게 묻는 연습을 해봅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하고 말입니다.



인생의 키, 즉 삶의 주도권을 쥔 당신에게 이제 가장 필요한 단 하나의 도구는 나침반입니다. 이 나침반을 가리켜 우리는 '삶의 방향성'이라고 했습니다.

…… 나침반은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축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축은 '잘하는 것'입니다.


……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자 삶을 헤쳐나갈 때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강력한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엔 그냥 타고난 소수의 천재가 있습니다. 계발하지 않아도, 혹은 조금만 다듬으면 퀀텀 점프할 만큼 잘하죠. 그 사람은 자신이 뭘 잘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고 다른 사람도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잘하는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런 재능을 타고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엔 눈부신 재능으로 해결되는 것도 있지만 갈고닦아야 빛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것에 끌리게 마련이며, 그에 따라 무엇인가 행동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 경우도 상당합니다. 여러 활동을 경험하다 보면 나도 몰랐던 관심이 생기는 분야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심장이 뛰기도 하지만, 심장이 뛰는 것을 찾으면 그것을 사랑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삶은 좀 더 풍성해집니다.



가치는 현실적 능력이나 눈에 보이는 직업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지점 덕분에 무수한 상징과 은유, 가능성을 품고 있기도 하죠. 그리고 그 풍성한 의미 속에서 그 사람의 성향, 성격, 강점, 자원, 본질을 찾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살다 보면 어떤 기회를 만나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기회는 사라지고 맙니다. 심지어 기회가 와도 기회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미 응축된 힘을 가진 상태에서 기회가 온다면 어떨까요? ‘티핑 포인트’가 시작되듯이 갑작스럽게 여러분의 역량이 발현될 기회가 생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풍성하게 경험하고,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인 환경을 찾아가고, 나와 흥미가 같은 사람을 자주 만나다 보면, 나에게 맞는 ‘우연한 기회’를 만날 확률이 늘어납니다. 기회란 대부분 주위 사람들로부터 찾아올 때가 많으니까요.



당신이 무엇을 꿈꾸는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당신의 미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수많은 ‘계획된 우연’을 활용해 내면에 숨겨진 빛깔을 얼마나 풍요롭게 드러낼 수 있을지는 오로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작은 행동과 선택이 모여 당신을 거대한 대양으로 향하게 하는 파도를 만듭니다. 그 장엄한 물결 속에서 분명 당신은 커다란 상수리나무 숲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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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다

저자 이명현

21세기북스

2024-08-01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인간은 자연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밑천으로 삼고 살고 있다. 인간은 외톨이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더불어 삶은 더불어 있음의 한 양태요, 모듬살이가 더불어 삶의 구체적 방식이다.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 맺음은 이러한 더불어 있음의 양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외톨이로서 자연과 만나기보다는 우리로서 만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우리로서 자연과 관계 맺음의 역사와 인간들 사이의 관계 맺음의 역사로 엮어진 천이다.



인간의 삶은 함의 다발로 엮어져 간다. 함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힘에 끌려 나타나는 과정이다. 욕망, 욕구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러한 힘이다. 삶은, 그러므로, 욕구에 의해 추진되는 함의 집합이요, 그 연속 과정이다. 함은 일정한 방향이 요구된다. 덮어놓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알찬 함이 될 수 없다. 아무렇게나 덮어놓고 하면, 소갈머리 없는 함밖에 되지 않는다.



철학이 하나의 학문이며, 학문은 이론의 작업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이런 상식에 따르면, 철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무엇이 어떠함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거나, 바람직한 가치가 무엇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철학은 개념의 지도 그리기일 뿐 아니라, 됨을 위한 탈바꿈의 몸짓이라 하였다. 됨을 겨냥하는 말짓과 몸짓은 물론 위의 기능을 지닌 언어와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언어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에 있다.



그러기에 보통 사람들의 삶의 세계와 개별 학문은 철학적 사고의 원자재 공급지이다. 이 공급 현장으로부터 원자재 공급을 받지 않고는 현실에 응답하는 살아 있는 철학은 태어날 수 없다. 그러기에 새로운 철학 문화의 창조를 위해 노력하는 철학도들은 모름지기 책 속의 언어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현실의 삶의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일어나는 보통 사람의 애환의 현장 속에 뛰어들어 가서 문제를 발견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



오늘의 이러한 '철학의 종언'에 대한 위기의식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 '철학의 종언'의 인식을, 맨 처음으로 명료하게 표현한 사람은 로티가 아니라, 20세기 철학의 슈퍼스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철학의 종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그의 전기와 후기에 일관되어 있다. 전기와 후기에 있어서 '철학의 종언'에 관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종언'을 말하는 방법에 있다. 물론 여기서 종언을 고하게 되는 철학이란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철학이다.



지나간 서양의 철학사는 절대라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미로 행각의 기나긴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모든 조건이 없는, 무제약적인 관점을 서양의 학자들은 '절대'라고 표현했다. 그뿐만 아니라 절대는 변화가 없는, 영구불변한 것, 그리고 최후의 것을 함축했다. 최후의 영구불변한 어떤 것이기에 그것은 모든 것을 그 안에 포함하는 궁극적인 것이기도 하다. 지나간 서양의 철학사는 이러한 관점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표현이며,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본 인간과 세계의 모습에 대한 언어들의 집합이라 볼 수 있다. ……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서는 절대에의 탐구가 절대자의 탐구와 동일시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신에 대한 탐구로 간주되었다.



무제약적인 관점을 획득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절대의 탐구는 근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철학은 바로 그러한 무제약적인 관점을 획득하려는 노력과 그러한 무제약적인 관점에서 본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론들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그것을 '아르케'에 대한 탐구라 표현했다. 그것은 최초의 것, 궁극의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함의 출발점을 뜻한다.

이러한 최초의 자리, 궁극의 자리, 절대의 자리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탐구하는 지적 노력과 그 결과물에 대하여 붙여진 명칭이 바로 절대 진리였다. 철학은 다름 아닌 이러한 절대 진리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구의 전통적 철학관이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신나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의 음지일 뿐이다. 근대의 낡은 문법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파멸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해체 공사가 갓 끝난 집터에는 황폐한 잔해가 널려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잔해가 제거되고 나면, 새로운 보금자리가 들어설 새 땅이 우리의 시야를 가득 채우게 된다. 그리고 새 땅 위에 세울 새로운 집의 설계도가 마련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의 요구에 알맞은 새 건물이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할 것이다.



종래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지적 활동은 그 시대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온 지적 활동이었다. 우리가 지난 철학의 역사에 존재했던 사상을 탐구하는 것은 인류의 삶을 지탱해왔던 모습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아는 데 있다.



한국인이 지난 역사에서 논의하던 윤리적 질서는 그때의 모듬살이 틀 안에서 유효한 개념 틀이었다. 어제 불가능했던 것이 오늘의 새로운 상황에서는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 가능성, 불가능성의 개념은 그 개념이 어떤 상황에서 논의되느냐에 따라 그 생명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기에 상황의 틀을 떠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헛바퀴 도는 말장난일 뿐이다. 어떤 개념 이 헛바퀴 도는 언어인지 아닌지 구별하려면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틀이 무엇인가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삶의 방식은 바로 이런 상황의 틀과 다름없다.



‘외길의 시대’는 지났다.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외길밖에 모르는 사람은 신문명의 시민 자격이 없다. 외길밖에 모르는 자는 절대의 신봉자가 되거나, 아니면 허무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신문명의 성숙한 시민에게는 절대도 허무도 모두 미성숙의 징표로 인식될 뿐이다. 길이 하나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 지평의 한계를 모르는 자의 극단적 발언일 뿐이다. 절대는 신의 자리는 될 수 있어도 인간의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리를 올바로 인식하는 자는 사실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에 관하여 자기의 자리에서 본 모습과 이웃의 자리에서 본 모습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동등한 타당성을 부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원화는 바로 이런 의식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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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저자 아서 코난 도일

센텐스

2024-08-26

소설 > 영국문학 > 영미소설

추리 / 미스터리 소설 > 영미 추리 / 미스터리 소설





1873년 12월, 영국 선박 '데이 그라티아'가 브리간틴(범선의 한 종류) '마리 셀레스트'호를 끌고 기지로 향했다. 이 선박은 위도 38° 40', 경도 17° 15'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이 버려진 선박의 상태와 외관에는 여러 가지 특이사항이 있었는데, 이는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그것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1874년 1월 4일 자 기사에 실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사를 참고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이에 관한 주요 내용을 몇 가지 발췌해 아래에 붙여두도록 하겠다.


"우리는 버려진 마리 셀레스트호를 직접 살펴봤고 데이 그라티아선의 승무원들에게 사건에 대한 실마리가 될 만한 모든 것을 질문하여 심층적으로 조사했다. 그들은 그 배가 발견되기 전에 이미 며칠 또는 아마도 몇 주 동안 버려져 있었을 거라는 의견을 냈다. 선실에서 발견된 공식 일지에는 선박이 10월 16일에 보스턴에서 리스본으로 출발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존 상태가 엉망일뿐더러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거의 없다. 악천후에 대한 언급도 없으며, 실제로 선박의 페인트와 장비 상태를봤을 때 배의 버려진 모습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


그 배는 완전히 깨끗했다. 전쟁이나 폭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선원의 실종을 설명할 요소도 없었다. 선박에는 여성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몇 가지 증거가 있었다. 선실에는 재봉틀이 있었고 여성용 의류가 몇 벌 있었다. 이것들은 아마도 선장의 아내의 것으로 추정되며, 일지에 그의 아내가 남편과 동행했다고 언급도 되어 있다. 선박에 남아 있는 여러 평화로운 흔적들로 보았을 때 날씨도 온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트는 손상 없이 선박에 잘 걸려 있었으며, 양질의 석유와 미국 시계가 있는 화물들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일부 목재 사이에서는 신기한 구식 검이 발견되었는데, 이 무기는 최근 닦다가 발생한 것처럼 한 줄의 긴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고 한다. 이 무기는 경찰에 넘겨졌으며 분석가인 몬라한 박사에게 제출되었다. 그의 조사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데이 그라티아 선장인 덜턴 대위는 능숙하고 지혜로운 선장으로서, 마리 셀레스트가 발견된 장소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표류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을 하나로 묶을 가설을 제시할 증거가 없어 보인다. 단서나 증거의 결여로 인해, 마리 셀레스트의 선원들의 운명은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을 것이 우려된다. 범죄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된다고 해도 범인들을 잡을 희망은 별로 없다."



하튼의 시체를 바라보는 동안 우리 항해의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단서가 내게 번쩍이듯이 다가왔다. 많은 것이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나는 진실에 어느 정도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자리에서 성냥을 긁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링이 등불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등불을 배 옆에 잠시 내려두었다. 나는 그 순간 해안가의 모래 언덕 사이로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 빛은 너무 빠르게 사라져서 고링의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결코 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시 등불을 들었다 내렸고, 모래언덕에서는 한 번 더 불꽃으로 대답했다. 밤은 평온했고, 선박은 고요해서 아무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다. 티브스의 사망 이후에 배를 지휘하던 하이슨은 잠을 청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고, 당직을 맡은 두 남자는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나는 내 살을 파고드는 밧줄과 살해당한 하튼을 발밑에 두고는 무력하고 말문이 막힌 채 비극의 다음 장면을 기다렸다.


나는 모호한 진술은 하지 않는다. 당신의 아프리카 지도를 펼쳐보라. 거기서 카페 블랑코 위쪽에, 대륙의 서쪽 끝점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향하는 땅 위로 나아가면, 거기에 세프티미우스 고링이 여전히 그의 어두운 신하들 위에 군림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누군가 이미 복수를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길고 푸른 능선이 뜨겁고 노란 모래 위로 포효하는 그곳, 마리 셀레스트호에서 목숨을 잃은 하튼과 하이슨, 그 외에 다른 불운한 동료들이 누워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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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8-09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이라 그런지 미스터리 소설집이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코난 도일 단편선이면 홈즈가 나오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하나의책장님, 더운 날씨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하나의책장 2024-08-29 01:28   좋아요 1 | URL
네, 이건 선상에서 다룬 미스터리한 사건이라 홈즈와는 별개예요◕‿◕
추리물 좋아하신다면 마음에 드실 거예요.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몰입도가 높아 너무 재미있게 읽었거든요ㅎㅎ
올 여름은 에어컨 없으면 잠들기 힘들 정도로 푹푹 찌네요ㅠ
이제 더위가 조금 가시겠죠? 😳
 




나만 모른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걸

저자 슈테파니 슈탈

갈매나무

2021-09-30

원제 : Leben kann auch einfach sein

자기계발 > 인간관계 > 교양심리학

인문학 > 심리학/정신분석학 > 심리치료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의 답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약점을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한다. 반대로 자신에 대한 불안, 즉 '자기불안(anxiety about self)'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첫째, 자신의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둘째, 그 약점을 너무 중대하게 취급하며, 셋째,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약점을 자꾸 끄집어낸다. 자기불안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없거나 잘못된 것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자신의 지금 모습과 되고 싶은 모습 사이에 있는 간극만 끊임없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현실 자아와 이상 자아 간의 격차’라고 부른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 바깥 세계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자신이 영향력을 별로 행사할 수 없을 거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이것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내적 통제 신념이 낮다'고 말한다.



자기불안이 있는 사람은 자기인식이 번번이 왜곡된다. 정말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깊은 불안과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적어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성향 때문에 스스로를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대개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곱씹고 남들이 보인 반응이 어땠는지 골똘히 떠올리면서 시간을 보낸다. 남들의 요청을 일일이 들어주려고 애를 쓰며, 사정이 허락하는 한 '완벽하게'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에는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정작 본인의 욕구에는 소홀하다. 사람이 언제까지나 자기 욕구와 바람, 갈망을 마냥 밀어낼 수는 없다. 자기불안에 시달리든 자기확신이 있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를 채우고 싶은 게 당연하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추가 되는 것이 인정 욕구다. 그것도 남들이 해주는 인정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싶은 마음이 제일 앞선다. 세상 그 누구도 형편없는 인간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기불안이 있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이들은 남들과 본인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그래도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입증하려 애쓴다.



스스로 변화하기로 결심했다면, 인내심을 갖고 자신을 이해하며 공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자존감은 모든 심리의 진원지다.

불안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안 그런 척하면서, 스스로와 타인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해하는 것, 잘못된 방식으로 불안에서 탈피하려는 것이 나쁘다. 두려워서 아예 시도조차 안 하는 게 나쁘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실패나 패배 경험을 확대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남들 일이면 그렇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내 일이 되면 혹독하게 비난한다. 당신도 그런 일을 자주 겪는다면, 이제부터 어린 시절과 그간의 경험을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 안에 통합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친한 친구를 이해하듯 그런 자신을 최대한 이해해주고 감싸주길 바란다.



자존감이 낮더라도 직업상 크게 성공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의 성공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어떤 업무를 수행할 때 꼭 필요한 존재라거나 자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그러다 끝내 탈진할 때까지 일한다. 일할 때만이라도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위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중요한 일부로 국한될 때만 그 의미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노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 말고도 자신의 건강과 안녕, 취미나 가족, 그 밖의 욕구를 위한 여가 시간이 동등하게 보장받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어느 선까지 일해야 적당한 것인지 알기 힘들다면 스스로 이런 질문을 떠올려보자. '일하지 않을 때 나는 누구인가?'



자기 안에 보상 체계를 잘 구성해놓은 사람은 어떻게든 방향 전환을 해낸다. 이들은 고통스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격렬한 갈망을 품는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면 자신이 가진 극복 전략과 실력을 일일이 복기해서라도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명심할 것은 당신의 욕구와 바람을 항상 우선순위에 두라는 것이다. 당신은 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한 경험이나 인상적인 체험담이 있다면 그때 느낀 기쁨을 다시 마음속에 떠올리고 그것이 생생히 흘러넘치게 놔두자. 이 감정에 몸과 마음을 내맡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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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서점
이비 우즈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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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서점
저자 이비 우즈
인플루엔셜(주)
2024-07-30
원제 : The Lost Bookshop (2023년)
소설 > 세계의 소설 > 아일랜드소설




✒️
추운 겨울날 비 내리는 더블린 거리는 어린 아이가 어슬렁거릴 만한 곳이 아니지만, 소년은 그 매혹적인 서점의 유리창에서 얼굴을 떼지 못했다. 안에서는 불빛이 반짝이고, 알록달록한 책 표지들이 모험담과 탈출기를 약속하며 소년을 유혹했다. 진열창 안에는 진기한 물건이며 아기자기한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장난감 열기구들은 천장에 닿을 듯하고, 오르골 속 기계 새와 회전목마 들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았다. 서점에 있던 여자가 소년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불렀다.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 지각하는데.˝ 소년은 유리창 너머 여자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아주 상냥한 사람 같았다.
˝그럼 1분만.˝


✒️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책은 그저 종이에 적힌 글이 아니라, 다른 장소, 다른 삶으로 통하는 입구라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책과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세계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는 오롯이 아버지 덕분이었다.
˝고개를 기울이면 말이다.˝ 한번은 아버지가 말했다. ˝옛날 책들이 비밀을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단다.˝
나는 송아지 가죽 표지에 종이가 누렇게 바랜 고서 한 권을 책장에서 찾아냈다. 책을 귀에 바짝 붙인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작가가 내게 말하려 하는 중요한 비밀이 들린다고 상상하면서.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말은.
˝뭐가 들리니?˝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귓속이 소리로 가득 메워지도록 기다렸다.
˝바닷소리가 들려요!˝
마치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댄 것처럼 종잇장들 사이로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한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종이들이 숨을 쉬고 있는 거예요, 아빠?˝
˝그렇단다, 이야기가 숨 쉬고 있는 거지.˝


✒️
˝잔해요! 잔해를 찾고 있는데……˝
˝세상에, 여기서 누가 죽었어요?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섬뜩하더라니. 여기 도착하자마자…….˝
아니요, 아니. 그게 아니에요. 유해가 아니라.˝ 그는 고개를 낮게 숙여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기요, 수상하게 들리겠지만, 맹세코 나쁜 일이 아니에요. 그저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그래요.˝


✒️
던 씨는 10번지와 12번지 사이의 버려진 공터를 가리켰다.
˝아니, 여기…… 없네요! 그러니까, 여기가 맞지만 없네요.˝ 그는 요란스레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았다.
도시계획 담당자인 그는 내가 몇 주 동안 끊임없이 걸어댄 전화에 시달리다 마지못해 현장 방문에 응해주었다.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는 내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보내드린 지도를 보셨겠지만, 바로 여기에 가게가 있었잖아요?˝
˝네, 그 지도는 저도 봤습니다만, 필드 씨, 전화로도 설명드렸다시피 이 부지에 어떤 건물이 공식적으로 등록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 건물 빼고는요.˝ 그는 이웃집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긴 12번지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11번지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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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새로운 글귀가 떠올라 잠에서 깨어났다. 이메일 수신함의 알림처럼, 이야기는 가끔 이렇게 날 찾아와 잠재의식에 속삭이곤 했다. 그 원리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든 그 이야기를 꼭 붙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뿐. 종이에 적어두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다음 날 문신 시술소를 찾아가 등에 잉크로 새겨두자고 마음먹었다. 그 이야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듯했지만, 매번 새로운 문장이 날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내 살갗에 다른 문장들과 나란히 잉크로 새겨두면 곧장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는 셰인도. 그건 소소한 반항이었다. 나만의 무언가를 갖는 것. 이 기묘한 이야기를 용케도 잘 숨겨왔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의미가 뭔지, 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알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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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가 창문을 긁어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났다. 바깥 거리에는 나무 한 그루 없었으므로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잠시 일어나 앉아 있다가 위쪽 가게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벽의 스위치를 탁 쳤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젊은 피츠패트릭 씨가 경고하기를, 이 건물이 ‘변덕’을 부릴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지갑을 둔 식탁에 놓여 있던 양초가 떠올랐다. 조심조심 방을 가로질러 식탁으로 가서 이리저리 더듬다 양초 옆에 있는 작은 성냥갑을 찾았다. 이내 방은 어둠에서 벗어났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피츠패트릭 씨가 페인트로 써놓은 단어들을 읽었다. ‘길 잃은 곳에서 기묘한 것들이 발견된다.’ 이상야릇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잠깐 멈춰 섰다. 소리의 정체를 발견하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강도가 든 거라면? 그때, 바람에 흔들리는 가시덤불처럼,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또 들렸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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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세 작품 모두 한 남성이 쓴 것이라는 억측이 떠돌았다. 물론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고, 샬럿과 앤이 직접 런던까지 가서 확인해주었다. ‘우린 세 자매입니다.‘ 하지만 에밀리는 필명의 익명성을 고수하고 싶었는지 집에 남아 있었다. 다른 두 자매와 달리 에밀리는 런던 문학계의 인정을 바라지 않았고, 코틀리의 탐욕스러운 행동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듯 코틀리 또한 그의 본성에 충실한 거라고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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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다르게 펼쳐질 미래를 마냥 아름다운 모습으로 상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날은 늦게 서점 문을 열었지만, 인생의 첫날을 맞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장밋빛으로 빛났고, 모든 것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이 사람은 옛날에 어떤 아이였을까, 앞으로 어떤 부모가 될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우리 모두 하나의 우주적 가족으로 연결된 것 같았다. 손님이 뜸한 시간에는 내 안에서 조그만 장미꽃 봉오리처럼 자라고 있는 생명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 존재만으로 세상을 더 밝은 곳으로 만들어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생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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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 밤을 병원에서 함께 보냈다. 우리가 만들어낸,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매형과 누나가 만들어낸 작은 기쁨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다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 아이가 우리보다는 나은 삶을 경험하리라 확고히 믿는 듯했다. 아이를 위해 우리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그 여정이 이미 시작되었다. 아마도 이래서 새 생명을 기적이라 부르나 보다. 모든 걸 바꿀 힘을 지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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