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 이순신을 성웅으로 키운 초계 변씨의 삼천지교 윤동한의 역사경영에세이 3
윤동한 지음 / 가디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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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어머니가 있었기에 이순신이 있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모친 변씨는 이순신의 기둥이었고, 하늘이었다.


이순신과 관련된 위인전 한 권쯤은 누구나 읽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생활을 마치고 이순신과 관련된 책을 읽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책은 이순신의 모친이었던 초계 변씨의 인물을 담은 이야기이며,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의 세계에 빠져들게 할 것이라 생각해본다.


저자, 윤동한은 한국콜마(주) 회장이다. 대웅제약 부사장을 지내고, 1990년에 한국콜마를 설립하여 화장품과 제약업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2014년 다산경영상(창업경영인 부문)과 국민훈장 동백장, 2018년 한국능률협회가 제정한 ‘한국의 경영자상’, 2019년 언스트앤영(EY) 최우수 기업가상을 수상하였다.

역사와 인문학을 접목한 창업 경험과 경영을 바탕으로 『인문학이 경영 안으로 들어왔다』(2016)를 출간했다. 2018년에는 목화씨를 들여온 고려인 문익점을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인으로 해석하여 이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낸 『기업가 문익점』을 출간했고, 이어서 2019년에는 역사경영에세이 두 번째 시리즈로 이순신의 곁을 지키며 임진왜란 극복을 위해 80세에도 현역으로 참전한 영웅 정걸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80세 현역 정걸 장군』을 펴냈다.




Ⅰ 이순신 그리고 그의 모친 초계 변씨


초계 변씨는 우리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서울 건천동에서 낳았다.

지금의 충무로 근처로, 이순신이 서울 태생임을 알 수 있다.

1545년 음력 3월 8일, 양력으로 치면 4월 28일이다.


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을 낳았다.

서울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그야말로 사내 대장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주변 인물들의 기록물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모습은 꽤 다양하게 평했지만 언제나 골목대장이었고 공부보단 전쟁놀이를 더 좋아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순신의 모친인 변씨도 자제력있고 온순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 순신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학문하는 자세도 좋고 집중력이 뛰어나니 과거까지 갈 수 있게 준비해야겠어. 그런데 이 아이는 얼마나 활동적인지, 아무리 봐도 외조부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무과 급제도 좋겠지. 잘 지켜봐야겠어."


모친 변씨는 둘째 요신에게 승보시를 보게끔 하려고 동학에 보내고 순신을 서당에 보냈었다.

맏아들 희신은 무슨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동학을 다녔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본가를 지키고 부모를 훌륭히 봉양했던 것이 바로 맏아들 희신이었다.

모친 변씨는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잃은 아픔이 있어 남은 아들은 물론 손자까지 잃지 않기 위해 애썼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발령났을 때도 모든 식솔을 이끌고 정읍으로 이주했을 정도였으니깐.

이렇듯 이순신이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은 모두 어머니에게서 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Ⅱ 모친 변씨, 이순신의 기둥으로 스승이 되다


아버지 이정은 직함은 있었으나 벼슬에 나가지는 못했었다. 2대째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니 가문이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모친 변씨가 고단했던 서울살이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 아닐지 추측하고 있다.

지금도 모든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는 것은 수도권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이 아닌 수도권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아들들을 출세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조건에 부합한 지역이 서울이었지만 이전에 집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기에 몰락한 가문이라는 평판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모친 변씨가 서울을 떠나 아산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산 시곡이 변씨 가문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읽은 위인전을 되짚어보면, 처음부터 이순신은 무인의 핏줄이 흐르고 있음을 외가쪽에서 알아봐주었다고 한다.)

모친 변씨는 순신이 급제하고선 변방을 돌아다닐 때 꿋꿋하게 가문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덧붙여, 철저한 재무관리를 통해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고도 전해진다.

이순신의 꼼꼼하고 청렴한 그리고 독립적인 재무 능력 또한 모친 변씨에게 물려받았을 것이다.

이후, 둘째인 요신이 병사하고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었다. 그리곤 첫째 희신마저 사망하게 되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마저 불에 탔다고 한다.

아득한 슬픔과 어려움이 연달아 닥치는데도 그녀는 좌절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으니 현실을 순응하며 좌절하거나 부정하지도 않고 오롯이 다시 일어설 생각만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독립심과 대쪽같은 성격을 그대로 받았기에, 이순신은 청렴한 공직자가 될 수 있었다.



Ⅲ 모친 변씨, 결국 이순신을 만나지 못하다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의금부에 하옥되었을 당시, 모친 변씨 또한 그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들의 마지막 희망이자 기둥이었음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변명하지 않는 아들이다.

의금부에서 고문을 당해 죽으면 죽었지, 절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아들이다.

노환으로 병중에 있던 그녀는 아들의 대쪽같은 성격을 알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향한다. 그녀의 나이, 여든셋이었다.

"내가 죽고 아들이 살아야 한다면 마땅히 죽겠다."

모친 변씨는 막내인 우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뱃길에 오르게 된다.

사실 모두가 말렸었다.

음력 2, 3월에는 배를 띄우지 않는다. 바람이 제멋대로 불 뿐더러 물길도 거세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신을 향해 험난한 길을 나섰지만 법성포 앞바다를 지나면서 게바위까지 왔으나 도착 직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순신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4월 11일 맑다.

새벽꿈이 매우 어지러워 다 말할 수가 없다. 덕을 불러서 대략 말하고 또 아들 울에게 이야기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4월 12일 맑다.

사내종 태문이 안홍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니께서는 숨이 곧 끊어질 듯합니다. 초9일에 위·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홍량에 도착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법성리)에 이르러 배를 대어 잘 적에 닻이 끌려 떠내려가서 배에 머물며 엿새나 새로 떨어져 있었으나 탈 없이 만났고 무사합니다"라고 했다. 아들 울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4월 13일 맑다.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 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흥찰방 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내면서 "아직 배 오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의 집에 왔다"고 한다. 흥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게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대강 적다.


4월 19일 맑다.

일찍 나와 길을 떠났다.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뢰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금곡(여ㅕㄴ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 선전의 집 앞에 이르니 강정·강영수 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그 길로 보산원(연기군 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었다 갔다. 임천군수 한술은 중시 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길을 지나가다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들 회·면·울, 조카 해·분·완과 주부 변존서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인남도 와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위인전 세트를 선물로 받았었다.

중간 중간 그림은 첨부되긴 했지만 거의 글로만 이루어진 책이기에 굉장히 지루할 법도 하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성장과정을 시작으로 업적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것을 읽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 한 켠에는 풍만함이 가득했었다.

그 때를 시작으로 역사책에 푹 빠졌었던 것 같다.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며 전권을 열 번도 넘게 재독했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쯤 사촌동생에게 물려주기 위해 여의도에서 만나 건네줬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한다;

벚꽃구경을 더 한다는 말에 우리집은 먼저 출발했었고 사촌동생네는 조금 더 있다 간다고 했었는데, 트렁크를 정리하다가 깜빡 잊고 길에다 놓고 왔다는 것이었다.

다시 가보니 이미 사라진 후였다고 한다.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다시 그 전집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출판사나 위인전 시리즈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결국 찾는데 실패했고 지금도 그 위인전이 가끔씩 생각난다.

위인전 전집 중 나에게도 베스트 5가 있었다.

「세종대왕」, 「장영실」, 「유관순」, 「이순신」, 「신사임당」이 그 주인공이다.

실제로 이 다섯 인물의 책은 열 번이 아닌 수십 번은 읽고 또 읽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쓰라고 하면 무조건 다섯 분의 이름을 남겼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위인전이었기에 많은 정보가 담겨있지는 않았으나 이순신에 대한 인물의 성장과정이나 업적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사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세세하게 다루지를 않으니 「징비록」 등 여러 책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순신 어머니'에 초점을 맞춘 책이 눈에 띄게 되어 얼른 하나의 책장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한석봉도 어머니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듯이, 이순신 또한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 많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모친 변씨가 얼마나 자식에게 큰 사랑과 가르침을 주었는지 눈에 선했다.

프로그래밍의 힘이라는 한 영상이 있었다. 부자가 부자일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부자들의 자식은 그 어떤 실패를 해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한 자의 자식은 실패를 맛보면 금방 좌절하게 된다고 한다.

무슨 차이일까? 무의식적으로 입력된 프로그래밍의 차이였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과 행동이 자식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 힘들었지만 참 보람차다! 내일을 위해 또 힘내야지!'

'오늘 하루 참 힘들다. 온몸이 쑤신다. 돈은 도대체 언제 모을 수 있는 거냐.'

의식적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은 의식하고 있기에 내뱉기 전에 머릿속에서 수정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은 그간의 행실이 쌓고 쌓여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과 행동마저 훌륭했던 인물, 이순신의 모친인 변씨가 딱이지 않는가!


어머니가 있었기에 이순신이 있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모친 변씨는 이순신의 기둥이었고, 하늘이었다.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문득 읽다가도 어떻게 이런 세세한 자료를 구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책을 읽기 전, 저자와 목차를 읽는 습관이 있는데 저자의 이력이 참 독특했었다.

후일담에 따르면 턱없이 부족한 자료로 인해 집필을 멈추기도 했었다는데 참 대단하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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