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탄생 -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 전하는 ‘안다는 것’의 세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신동숙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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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탄생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

인플루엔셜(주)

2024-08-30

원제 : Knowing What We Know

역사 > 역사학

역사 > 문명 > 문화사





현재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뜻 모르는 단어부터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익명의 스팸번호까지 스마트폰만 있으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정보가 우리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거와 달리 전화번호마저 외울 필요가 없어지니 지식과 정보에 대한 기억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어렵고 복잡한 것을 인공지능이 대신 수행해주다 보니 경험과 배움을 통해 지식을 쌓아온 인간의 뇌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연스레 의문이 생깁니다.


20세기에 벌어졌던 현장의 목격자였으며, 21세기 변화하는 역사의 증인이기도 한 사이먼 윈체스터는 세계 곳곳을 탐험하던 최고의 지성인입니다.

그 또한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이 의문을 토대로 인간의 지식 세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지식의 탄생』은 지식의 정의를 시작으로 지식이 지금까지 어떻게 인류에게 전수되었는지, 그 전달 수단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도 중남부에 위치한 도시 벵갈루루는 밝은 미래를 상징하는 도시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첨단기술과 사치스러운 문화를 누리는 도시였죠. 그런 도시 한 켠에 아주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한지 최저 생활비조차 감당하기 힘들어 빈곤은 물론 오물과 범죄가 만연했습니다.

이렇다보니 그곳에서 사는 수만 명의 어린이들은 교육조차 꿈꿀 수 없었죠.

그런 그곳을 바꾼 한 여성이 있으니, 바로 슈클라 보스입니다.

벵골인인 중년의 그녀는 검은 물이 흐르는 수로 옆에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지요.

교육이 받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 앞으로 오라고. 물론 교육비는 무료라고.

이 순간을 기점으로 슈클라 보스 본인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안겨주게 됩니다.

몇 년 후 결혼한 그녀는 딸을 낳았는데 딸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시켰고 그녀 또한 미국계 호텔 기업의 유능한 임원이 되었습니다.

인도에서 여성이 이런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매운 드문 일이랍니다.

성공의 정점을 찍은 그녀는 딸도 독립시키고 집안도 안정되자 오랜 꿈이었던 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그녀는 이미 그 프로젝트를 실행중이었죠.

앞서 말했던 수로 옆에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둔 것이 바로 학교 프로젝트의 시작입니다.

서서히 성장한 학교 프로젝트는 10년이 지나자 크게 번창했으며 꿈꿀 기회가 없던 빈민가 자녀들에게 꿈을 실현시켜주게 되지요.

200년 전 소설가 로런스 스턴은 지식에 대한 욕구는 재물에 대한 갈망과 마찬가지로 습득할수록 더욱 커진다고 했었습니다.

즉, 학교 프로젝트는 지식이 더 많이 스며들수록 지식에 대한 욕구가 더 강렬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된 것입니다.


행복의 에너지가 가득한 이 학교들에서는 활기가 넘쳤다. 교문에 들어서서 모래가 깔린 운동장을 가로지르기 전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농촌에서 동틀 무렵 외양간에 있던 소 떼를 몰고 들판으로 나가는 "소 떼 흙먼지 시간"으로 불리는 선선한 이른 아침, 아이들의 발걸음으로 길에 흙먼지가 일었다. 친구들과 놀거나 수업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북적북적했다. 아이들은 옅은 파란색과 노란색이 들어간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변화된 삶을 즐기고 있었다.


지식의 소중한 가치를 잘 알아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대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세대와 관계없이 인간은 호기심이라는 유용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300년 전 새뮤얼 존슨이 말했죠. 호기심은 건강한 정신의 확실하고 영구적인 특성 중 하나라고.

호기심은 앎의 요소를 끌어당겨 결국 앎을 얻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진지한 호기심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윈의 설명처럼 더 큰 이익 도모를 위해 선택된 유전자 변이인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이 궁금하신가요?

조금 힌트를 드리자면, 지평선과 수평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지식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방대해지는데 그 확장 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이 오히려 따라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오래전부터 지식은 귀하게 여겨져 왔습니다.

Knowledge lies here.

지식이 여기 있다는, 도서관의 근본적인 신념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최초 진정한 도서관의 본고장으로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인 아슈르바니팔이 만든 도서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역사적 자료의 원천이라 칭송받을 정도로 이 도서관은 단순히 지식을 수집하고 저장하는 장소가 아닌 그 건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사용자 친화적으로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웅장하고 아름다운 아슈르바니팔도서관은 2016년 말에 무참히 파괴되고 맙니다. IS에 의해 말이죠.

왜 도서관을 파괴시킨 것일까요?

이라크 사람들은 아랍 전역에서 생각이 깊고 교양있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어 IS의 지도부가 자신들의 존재에 위협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먼저 파괴한 것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으로 파괴된 곳 중 빠지지 않는 곳이 지식을 모아놓은 '도서관'입니다.

오래전부터 지식은 단순히 보관하는 것이 아닌 안전하고 확실하게 보관해야 했습니다.

즉, 모두가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을 아주 소중하고 꼭 필요한 장소라고 여겼음을 의미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음의 시작이 주는 영향력을 시작으로 최초의 도서관과 도서관의 비극까지 살펴보며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보관되어 후대에 전수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프로파간다와 가짜뉴스가 만들어낸 조작의 연대기를 살펴보며 우리가 지금 안다는 것 즉,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는 현대 사회에 지혜의 회복이라는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지식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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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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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터무니없는 일본 주장과 조직적 은폐·축소를 객관적 자료에 의해 낱낱이 밝히다!


저자, 박경민은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금융기관 지점장과 사외이사, 중견그룹 기획조정실장과 계열사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컨설팅회사 모젤스(주) 대표이다.

바쁜 현역 생활 중에도 역사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건강문제로 수년간 쉬게 되는데 이 때를 계기 삼아 본격적인 역사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학교 역사시간에 앵무새처럼 배운 대로 이미 익숙해져 버린 한일 근대사를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다.




책은 사건 순으로 내용이 진행되는데 근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던 해인 1894년을 살짝 짚어보려고 한다.

1894년하면 자연스레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동학농민운동 기간 중 벌어졌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1894.01.10 - 전봉준의 고부 봉기

1894.05.11 - 동학 농민군 황토재 전투 승리

1894.05.31 - 동학 농민군 전주성 점령

1894.06.01 - 고통의 청군 파병 원세개에게 구두 요청

1894.06.02 - 일본 정부의 의회 해산 및 조선 파병 결정

1894.06.03 - 고종의 청군 파병 공문 발송

1894.06.08 - 청군 아산만 도착 시작

1894.06.03 - 전주화약으로 농민군 해산 & 일본군 인천항 도착 시작

1894.07.23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1894.07.27 - 일본공사관과 대원군 주도로 군국기무처 설치

1894.07.27 - 갑오개혁 개시

1894.08.01 - 청일전쟁 선전포고


1894년에 벌어졌던 사건들의 흐름과 주요 내용들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세세하게 파헤쳐 보니 일본이 경복궁 점령을 발판 삼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었다.


…… 경복궁 점령 사건이 오랜 기간 이렇게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사유를 곰곰 돌이켜 보면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발표하고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이 사건의 성격에 관한 입장, 즉 총격적을 거쳐 조선군을 쫓아내고 경복궁을 점령한 것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한 것과 이를 학계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온 것이 더 큰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 기간에 일본군은 대규모 파병을 행했고 파병 후 장기 주둔하기 위해 어떻게든 명분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책에서도 나와있듯이 그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고집하는 우발적 사건이라는 주장은 역시 억지나 다름없어 보인다.

일부 일본인에 의해 양심적인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까지도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

120년이 지난 지금, 일본 정부는 일본 어린이들에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국정 교과서에 실린 명백한 조작 내용과 오류는 개선되었지만, 검인정 교과서에는 여전히 일본 위주의 자의적 해석이 존재한다.

특히 청일전쟁은 당시 서구열강들로부터 같은 레벨의 열강으로 인정받았다고 기술되고 있다.

국제법을 준수하는 근대국가로서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다보니, 지금까지도 교과서를 통해 역사를 배우는 일본인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이 국제법을 잘 준수한 모범적인 근대국가라 알고 있는 것이다.


청일 간의 직접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무쓰 무네미쓰는 오토리 공사에게 조선에서의 실질적 이권확보를 지시한다.

오토리는 조선에 내정개혁은 권고하면서도 이에 대해 거부할 경우를 대비해 두 가지 안을 본국에 올리며 훈령을 요청하게 되는데, 두 가지 안 모두 성의 출입문과 왕궁의 문을 일본군이 점령해야 한다는 군사적 조치도 포함하고 있었다.


'군대로 경성의 각대문을 경비하고 왕궁의 문을 지킨다.'

'군사력으로 문 안팎의 공간을 제압하여 지배력을 확보한다.'


왕궁을 제압하지 않고 어떻게 왕궁 문을 지킨다는 것인가?

즉, 한성과 경복궁을 무력 즉, 군사력으로 점령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내용이 길어져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협상의 과정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지만)

계속되는 회담 속에서 원하는 답변을 듣지 못한 그들의 마지막 결정은 결국 경복궁 점령이었다.

경복궁 점령은 엄연히 군과 정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계획적인 군사행동이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이를 끝까지 부인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공식입장은 이렇다.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하다가 왕궁에 들어가 국왕을 보호까지 하게 되었으며,

소규모 충돌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 바로 청일전쟁을 일으켜 명분을 쌓은 게 훤히 보이는데 그들 눈에만 안 보인다는 것이 참으로 희한하다.

이렇듯 책에서는 정확한 객관적 자료를 통해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 주장했던 주장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보여준다.


지리적 거리로는 가깝지만 역사적 거리로는 너무나 먼 일본.

근래 국방부가 장병 정신교육 자료에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기술한 데에 큰 논란이 있었는데, 공영방송인 KBS가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 안에 독도가 들어간 그래픽 지도를 사용한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었다.

이러한 논란이 불거질수록 드는 생각은 단 하나다.

역사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가지고 정확하게 알고 파악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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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1 -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 국토박물관 순례 1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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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부족한 한국사 공부를 하기엔 역시 '책'만한 것이 없고 역사하면 역시 유홍준 교수님의 책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나오는 족족 다 봤을 정도로 역사책 중 애정하고 있는 시리즈이다.

『국토박물관 순례』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출간 이후, 답사기에서 미처 담지 못했던 역사를 차근차근 풀어나간다고 하니 벌써부터 두근두근거린다.


저자, 유홍준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인협의회 공동대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1985년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십여 차례 갖고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았다.

영남대학교 교수 및 박물관장, 명지대학교 교수 및 문화예술 대학원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제주 추사관 명예관장도 맡고 있다.




역사의 처음을 살펴볼 때, 떠오르는 한 곳이 있으니, 바로 연천 전곡리다.

외가집에 가는 길에 항상 지나치다 보니 일 년에 한두번은 꼭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알고 있는가?

1933년 함경북도에서 구석기시대의 동물 뼈와 흑요석 석기가 발견되었으나 우리나라가 역사적 발견의 우세를 거머쥐게 하기 싫어 일제가 덮어버렸다고 한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고고학 발굴에 나서 1963년 옹기군 굴포리에서 구석기 유적지를 발견하였고 1966년 평양의 검은모루동굴에서는 5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물 화석을 발견해 주목을 받았다.

남한에서는 1964년 공주 금강변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지가 발굴되었고 1973년에는 제천 점말동굴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82년 청원 두루봉동굴에서 구석기 유물과 5세가량의 어린아이 인골을 발견했는데 학계에서 의견 일치를 보진 못했지만 발굴자는 약 4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8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변에서 한 미군 병사가 주먹도끼를 발견한 후 여기서만 30년 동안 발굴 작업이 이어졌는데 구석기 유물이 무려 약 8천 점이나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가 된 연천 전곡리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지는 약 150 곳으로 대부분 강변과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서울 암사동 유적지,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강원도 양양 오산리, 부산 영도 동삼동 그리고 섬으로는 통영 욕지도, 제주도 고산리가 대표적이다.

제주 고산리, 웅기 굴포리는 가장 오래되었고 양양 오산리는 잘 보존된 유적지인데, 부산 영도 동삼동은 도시화 과정에서 많이 파괴되고 길모퉁이에서 초라하게 명색을 유지하고 있지만 당시 신석기인들의 생활상을 가장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물론 고래를 잡아먹은 자취까지 있으며 흑요석 도구를 사용하고 조개껍데기로 팔찌를 만들어 치장한 모습을 추정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패총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범방동 패총, 동삼동 패총, 영선동 패총, 조도 패총, 청학동 패총, 안남동 패총, 다대포 패총, 가덕도 패총, 북적 패총, 율리 패총……

(패총이란,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나 생활쓰레기들이 쌓인 것으로, 조개더미 또는 조개무지라고도 부른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언양현은 조선시대 경상도의 당당한 고을로 1895년 언양군이 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울산군에 통합되었다.

이후 울산읍이 방어진, 대현면, 하상면 등과 합쳐 울산시로 독립하고 나머지 지역은 울주군이 되는 바람에 울주군 언양면이 되었다.

언양과 두동면의 살골짝을 내려가는 대곡천변에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지가 다 남아있다.

대곡천 아래쪽부터 신석기시대의 반구대암각화, 청동기시대의 천전리각석, 초기철기시대의 대곡리 유적지로 이어진다.

단순히 생활 유물이 아니라 신석기 시대의 사실적인 암각화, 청동기시대의 추상무늬 그림, 초기철기시대의 오리형토기와 같은 유적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역사책 전집이 있는데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를 다룬 1권부터 7권을 가장 좋아했었다.

신화적인 요소도 책에 반영되어 있다보니 어린 시절부터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느꼈던 감정은 신비로움, 웅장함 그 자체였다.

『국토박물관 순례』를 읽고 나니 그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 때 읽었던 책과는 달리 매우 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이기에 위대해보였다.


역사책을 따로 읽지 않는다면 대부분 학교에서 배웠던 한국사가 끝일 것이다.

사방이 강대국인데다 영토는 작아도 뚝심 하나만큼은 알아주던 대한민국!

역사는 그 나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표이자 미래의 지침서가 되어주는 과거이다.

과거에 했던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고 본받아야 할 점을 되새겨야만 미래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역사의 배움을 놓쳐서는 안 된다.


훗날 유홍준 교수님의 책들은 몇 백년이 흘러도 한국 문화를 증언해 줄만한 위대한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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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안의 세계사 - 세상을 뒤흔든 15가지 약의 결정적 순간
키스 베로니즈 지음, 김숲 옮김, 정재훈 감수 / 동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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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약국으로 가 처방전을 내고 앉아있으면 눈으로 약국 구경을 하게 된다.

처방된 약을 설명해 주는 약사 두 명, 블라인드로 가려진 뒤쪽에서 처방된 약을 조제하는 약사 서너 명.

저마다 처방받은 약이 제각각이니 가려진 블라인드 너머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약이 즐비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약들이 결국은 누군가에 의해 개발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과 실패가 있었을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어떤 성공과 실패를 다뤘는지, 개발된 약들이 오늘날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지금 떠나보자!


저자, 키스 베로니즈는 미국 앨라배마대학교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원 재학 중에 미국화학학회의 최우수 화학 대학원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커 미디어(Gawker Media)의 과학 웹진 아이오나인(io9)에서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과학사와 SF 비평을 연재하며 대중과 소통해오고 있다.

금속, 무기, 자원을 둘러싼 국제 관계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으며, 페니실린, 아스피린, 보톡스, 미녹시딜 등 놀라운 약의 발견 과정과 숨은 역사를 정리한 《약국 안의 세계사》를 출간해 “세계사를 뒤흔든 약의 역사를 담은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외에 지은 책으로 《교양으로 읽는 희토류 이야기》 등이 있다.




Ⅰ 인류를 구한 곰팡이


페니실린은 최초의 항생제로 세균에 의한 감염을 치료하는 약물이다. 연쇄구균, 임균, 수막염균 등에 작용하여 편도염, 수막염, 임질, 중이염 등을 치료한다.


20세기 기적이라 불리우는 페니실린!

박테리아 감염으로 고통받을 때 우리 곁을 지켜주는 절친이라 할 수 있겠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해도 과언이 아닌 페니실린!

2차 세계대전 중 박테리아 감염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진의 리더인 알렉산더 플레밍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농부의 집안에 태어나 정규교육 과정을 마친 후 해운회사 사무소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플레밍의 삼촌이 세상을 뜨면서 자신의 재산을 플레밍에게 상속하게 되는데, 상속된 재산 덕에 플레밍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그 기회 덕에 플레밍은 런던대학교의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 졸업하는 시기에 플레밍은 사격술에 빠져 있었는데 사격 팀장은 혹여나 플레밍이 본격적으로 의학 연구를 하게 되면 사격을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인트메리 의과대학 연구원이었던 알모스 라이트 경을 소개해주게 된다.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되면 사격팀에도 계속 나와 우승에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사격팀장의 예측은 옳았다.

플레밍과 라이트 경은 커리어 대부분을 함께 연구하며 쌓았는데 1914년 성과를 인정받아 플레밍이 교수로 임명된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 플레밍은 왕립육군의료단에 징용되는데, 전쟁 속에서 군인들이 적이 아닌 감염된 상처와 싸우는 모습을 두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은 플라빈을 소독제로 사용했었다.

플라빈은 식물 조직에 분포하는 황색소로 염료 및 방부제, 구충제로 쓰였는데 플레밍은 플라빈 후유증을 목격했던 것이었다.

당시 플라빈은 완벽한 소독제였는데 플레밍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플라빈이 백혈구와 격렬히 반응한다는 것을 결과로 보여주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백혈구는 신체 면역 체계에 있어서 중요한 세포인데 플라빈은 박테리아 성장을 멈추게 하는 동시에 백혈구도 죽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플레밍은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으로 돌아와 감염성 박테리아에 대해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후 플레밍은 <조직과 분비물에서 발견한 놀라운 용균성 요소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출판했는데 이 논문을 통해 라이소자임을 발견하였고 이는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이어지게 된다.

플레밍이 포도상구균의 세균주를 여러 한천배지에 배양하고 공기가 잘 통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후 휴가를 떠났었다.

그렇게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배지에 이상한 곰팡이가 핀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곰팡이 근처에는 화농균이 없는데 곰팡이에서 멀리 떨어진 배지 가장자리를 따라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플레밍은 곧장 화농균을 죽인 곰팡이의 정체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1929년 <페니실리움 배양배지의 살균행동과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균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서 오늘날 약학계에 큰 획을 그은 페니실린의 발견을 기록하게 된다.

플레밍은 페니실리움 곰팡이가 분비하는 물질 농도를 낮추는 실험을 꼼꼼히 진행해 증명하였고 곰팡이가 분비하는 물질을 800배로 농도를 낮춰도 여전히 향균성을 띤다는 사실을 밝히고 이 물질의 이름을 페니실린이라 명명하게 된다.

1945년, 플레밍은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서 페니실린 이름에 대해 간결히 설명하게 된다.

대개 이름 혹은 자신을 의미하는 이름을 붙이곤 하지만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만들어진 곳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내 유일한 장점은 관찰을 간과하지 않고 미생물학자로서 주제를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화농균이 자리 잡기 전에 열어진 창문을 통해 실험실까지 오지 않았느냐고도 말한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지만 플레밍의 실험실에 페니실리움 포자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을 수 있다.

바로 아래층에서 알레르기와 곰팡이 사이의 상관관계를 해독하려 했던 투슈 박사의 실험실에서 말이다.

물론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의 1929년 논문은 호평받지 못했다.

또한 페니실린 분리 기술이 없어 연구를 더이상 진행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플레밍은 곰팡이 샘플을 끊임없이 나눠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플레밍이 물론 페니실린을 분리하진 못했지만 1930년 플레밍의 제자인 세실 조지 페인이 플레밍에게서 받은 곰팡이 배지를 사용해 처음으로 페니실린을 치료제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Ⅱ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약


아스피린은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의 일종이다. 통증과 열을 완화해주는 진통제, 해열제로 쓰고, 항혈전 효과도 가지고 있다.


아세틸살리실산이 바로 아스피린이다.

20세기 초, 프란츠 카프카는 존재의 고통을 완화해주는 물건 중 하나로 아스피린을 꼽았다.

전세계적으로 흔하게 쓰이는 아스피린은! 수십 년이 지나 버드나무 껍질을 재발견하며 심장마비 심지어 암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많은 이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버드나무 껍질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축 늘어지는 가지와 좁은 피침형 이파리가 달린 거대한 나무가 바로 버드나무다.

버드나무의 겁질에는 세상을 바꾼 화합물이 숨어 있다.

수메르 사람들은 고통과 염증을 완화하기 위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통증을 완화하고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고대 중국인들은 류머티즘 통증을 완화하고 갑상선종을 치유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류는 수십 년 넘게 버드나무 껍질을 사용해왔으며 심지어 로마 군은 출정하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버드나무 껍질을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버드나무에 치유 능력이 있는 이유는 바로 나무껍질에 고농도의 살리실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자연환경에서는 버드나무에만 살리실산이 들어 있지 않다. 메도우스위트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북미조팝나무 등 다양한 관목에도 낮은 농도로 들어 있는데 식물의 방어 메커니즘의 일부로 작동한다.

역사 기록을 살펴봐도 독특한 곳에서 살리실산을 얻은 경우도 확인할 수 있다.

살리실산은 버드나무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식물에도 있다.

왜일까? 살리실산은 바로 식물의 호르몬이기 때문이다.

식물은 병원균과 싸울 때 살리실산 유도체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보호한다.

만약 나무에 바이러스가 주입되면 살리실산이 살리실산메틸로 전환되는데 이후 살리실산메틸이 공기중으로 퍼져 주변 나무에 방어 모드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전달하게 된다. 그러면 전달받은 나무는 보호 메커니즘과 질병 저항성을 기록한 유전자를 가동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좀 더 건너뛰어 아스피린의 탄생을 살펴보자.

1863년 8월, 염색약 판매원이었던 프리드리히 바이어와 염료를 만들었던 요한 프리드리히 베스코트는 다국적 거대 제약회사인 바이엘을 설립하게 된다.

합성염료 만드는 특화된 염료회사로 화학 무역에서나 중요하지 공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바이어는 제약시장으로 눈을 돌려 발명한 약을 구매해 판매비용을 부담한 뒤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어는 자신들의 실험실에서 약물을 디자인했고 다른 연구자의 가치 있는 노력을 매수했다.

임질 치료제로 쓰이는 프로타골 개발자인 아르투르 아이헨그륀도 이에 속했는데, 아이휀그륀이 들어오면서 바이엘은 복통을 일으키지 않는 살리실산 유도체를 찾는 데 힘썼다.

아이휀그린과 함께 연구했던 펠릭스 호프만이 아세틸살리실산을 성공적으로 재발견했고 1897년 8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화합물을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호프만은 자신의 아버지 병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살리실산 유도체를 찾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덧붙였는데 이후 헤로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디아세틸모르핀도 합성하게 된다.

당시 바이엘 약리부 책임자는 심장에 해로울 수 있다는 이유로 아세틸살리실산을 임상 실험에서 제외시켰는데 의사 펠릭스 굿맨과 아이헨그륀은 아세틸살리실산이 빠르게 통증과 열을 없애주면서도 심장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이엘의 선임연구원인 칼 뒤스베르그는 아이헨그륀의 결과 입증을 위해 더 많은 실험을 요구했고 공식적으로 놀라운 약물을 손에 쥐게 된다.

아세틸살리실산은 살리실산과 구분하기 위해 탄생한 것인데, '아스피린'이란 약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붙은 이름이다.

아세틸을 뜻하는 a, 라틴어로 조탑나무를 뜻하는 spir, 큰 의미는 없지만 당시 약물 지을 때 통용되었던 끝에 붙인 단어 in까지 조합해 이름을 짓게 된다.

아이휀그륀이 아스피린이란 이름을 선택하는 데 최종결정권이 있다는 증거는 1899년 1월 메모에 남아 있다.

[유스피린보다 아스피린이 더 낫다. -호프만, 뒤스베르그, 드레저]




3년 이상 전세계를 덮쳤던 코로나 19 팬데믹.

당시 코로나 백신으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었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전세계적으로 신약 개발에 열을 올리다보니 자연스레 백신이 어떻게 개발된 것인지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오래 기간 임상을 거친 것도 아니고 백신이 빨리 개발되다 보니 안전성에도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특정 소재를 다룬 역사 시리즈애 푹 빠져 한 권 한권씩 도장깨기 중인데, 마침 소재가 '약'이라 바로 읽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약의 가짓수만 해도 엄청나다.

그 약이 개발되기까지 수많은 노력과 실패가 있었으니 그 노고는 차마 헤아릴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약부터 어디선가 들어봤던 약까지!

대표적인 약 15가지를 추려 탄생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던 『약국 안의 세계사』, 흥미진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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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혁신 - 혁신을 원한다면 반역자가 되라
이주희 지음 / EBS 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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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편리성과 실용성을 위해 기계화되어가는 세상을 보고 있으면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틀린 말도 아니다.

무한경쟁시대에서 로봇에 밀려나는 것도 결국은 후퇴이다.

뒤처진 자는 역사에서 기억해주지 않는 것처럼 역사의 다음 장은 처절한 혁신을 이룬 자들의 몫이다.

『강제혁신』은 다큐멘터리 <강제혁신>을 연출한 EBS 이주희 PD가 쓴 책으로 전작인 『강자의 조건』에 이어 또 한 번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저자, 이주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에 EBS PD로 입사했다. 인간의 삶으로서의 역사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역사전문 PD로서 다양한 역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다.

제작한 작품으로 『역사극장』(2003), 『정치교실』(2004) 등이 있으며, 어린이 역사 드라마 『점프』 (2005-2006)로 서울 드라마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EBS 다큐프라임 『절망을 이기는 철학 - 제자백가』, 『무원록 - 조선의 법과 정의』, 『킹메이커 - 대통령 선거전의 비밀』, 『강대국의 비밀』 등을 제작했으며, 집필한 책으로 『강대국의 비밀』을 도서화한 『강자의 조건』(2014)이 있다.




혁신은 기득권을 공격한다


1516년 알레포 인근에 오스만제국과 맘루크 술탄국의 군대가 집결해 있었다.

양쪽 모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만큼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가려질 수 있는 결정적인 전투가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거대제국끼리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결과는? 맘루크 술탄국의 패배였다.

직접 참전한 술탄 알 가우리가 전사할 정도였으니 전멸과 다름없었다.

한 번의 전투에 패한다고 해서 이어진 전쟁에서도 패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북방 유목제국들과의 전쟁에서 대부분 패했어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아 결국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맘루크 술탄국도 이와 같이 전세를 역전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복수전에서도 더 쉽게 무너지고 만다.

결국 200년 넘게 이집트와 시리아를 군림한 맘루크 술탄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앞선 전투에 오스만제국과 맘루크 술탄국 모두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는데도 대결은 왜 싱겁게 끝난 것일까?

바로 오스만제국은 화약혁명이라는 혁신을 받아들였고 맘루크 술탄국은 화약혁명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맘루크는 화약 무기라는 혁신을 거부하고 오스만은 혁신을 받아들인 것일까?


인류 역사상 강력한 군사집단을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모든 군대에는 약점과 강점이 있기에 무적의 군대를 고르는 것은 사실 불가하다.

그런데 이 상성을 뛰어넘는 군대가 있으니, 바로 13세기 몽골군이다.

13세기 몽골군은 동시대를 기준으로 기동성도 뒤어나고 야전에서 패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공성전도 잘하고 보급에도 강한 부대였다.

즉, 약점을 거의 찾을 수 없는 군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몽골군에게도 전략적 목적을 포기할 정도의 패배를 당한 전투가 하나 있었으니, 1260년에 벌어진 아인잘루트 전투이다.

1253년, 칭키즈칸 사후 가장 유능한 군주로 불렸던 몽케칸은 쿠릴타이에서 두 개의 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전선은 남송이었다. 남송이 정복될 경우 대칸의 직할지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몽케칸은 동생인 쿠빌라이를 남송 전쟁의 책임자로 임명하게 된다.

남송과 함께 뛰어난 경제력과 문화를 가진 서남아시아, 이곳이 바로 두 번째 전선이었다.

몽골제국으로서도 반드시 정복해야 할 지역이었기에 또 다른 동생인 훌라구를 서방 원정대 책임자로 임명했다.

몽골에서 출발한 훌라구의 1차 목표는 전설적인 암살자 집단인 아사신파였다.

전설적인 암살자들과 정복자들의 대결은 마치 엄청난 전투가 될 것만 같았지만 몽골군의 손쉬운 승리로 결과는 매우 싱거웠다.

수백 년간 어둠 속에서 활동한 암살자 집단이 쉽게 무너진 이유는 암살자 집단이라는 아사신파의 특성이 몽골군에 대해서는 오히려 약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살특공대라 불릴 정도로 암살 방식이 매우 단순하고 잔인하다.

은밀하게 잠입하여 공격했던 수법이 주였기에 암살자 집단이 정규군을 군사적 대결로 이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했다.

그렇게 음지에서 활동했던 아사신파는 토벌당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몽골군은 반란을 일으킨 다마스쿠스를 진압하던 중이었다.

그 덕분에 바이바르스를 선봉으로 한 맘루크군은 갈릴리 지역에서 확실하게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이 때, 며칠의 여유가 전투에서 결정적인 차리르 만들게 된다.

맘루크군의 진출 소식을 들은 키트부카는 소수의 고위 군관만 남겨두고 십자국 기사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병력과 함게 갈릴리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피정복민들이 또 다른 반란을 일으킬까 싶어 서둘러 도착했고 갈릴리 인근의 아인잘루트에서 맘루크군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맘루크 군의 작전이었다.

좁은 협곡이 특징인 이 지역은 맘루크 군처럼 육박전이 주특기인 중기병들은 행동에 제약이 없지만 기동성에 의존해야 하는 경기병들은 행동에 제약이 있어 불리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 맘루크 군들은 완승을 거두게 된다.

사령관인 키트부카는 생포되어 처형당하고 몽골군 대부분이 살아남지 못했다.

노예 출신의 병사들이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들을 몰아내고 이슬람 세계를 구원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맘루크 군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스스로를 엘리트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기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도 않았다.

맘루크들과 달리 보병이었기에 이해관계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맘루크가 노예였던 것처럼 오스만제국의 예니체리 또한 노예였다.

공통점이 많은 두 제국이지만 화약혁명을 대하는 자세가 결국 승패의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맘루크들은 화약 무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기병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예니체리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혁신은 전혀 예상 밖의 영역에서, 기득권에 연연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비웃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는 한다.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상상력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다. 정말 무서운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내는 패러다임의 변화다. 아예 전쟁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기존의 전쟁 방식 안에서만 전쟁을 바라보는 맘루크 같은 기득권 세력은 신기술의 진정한 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도태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낡은 방식의 성공에 집착하는 기득권자들에게 혁신은 아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상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혁신으로 도태당할 자들을 권력의 자리에 둔 채 혁신은 불가능하다.

혁신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권력투쟁에서 혁신을 추구하던 세력이 패배함으로써, 혁신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혁신을 위해 천재가 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단지 실행하는 부분이 문제이기에 이때 권력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권력에 집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 바로 추진력으로서의 권력이 필요하다.

진정한 혁신은 기득권을 공격할 수밖에 없기에, 권력에 대한 정치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반역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천재가 될 필요는 없지만 용감한 전사는 되어야 한다.


장마로 인해 둑이 무너져 14명의 사망자를 낸 오송 지하차도 침수 참사, 실종자 수색 중 순직한 고 채수근 상병.

초등학교 6학년생이 담임 선생님을 폭행한 사건부터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이 목숨을 끊은 사건.

그리고 어제 일어난 신림역 칼부림 사건까지.

근래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다 보니 마음까지 어지럽다.

동생이 신림역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그 골목을 지나치던 중 피해자를 봤다고 한다.

웅덩이가 있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려 피해자는 구급차에 곧장 실려갔다고 하는데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다고 한다.

번화가다 보니 그 길만 웅성웅성하고 거짓말처럼 옆옆 골목이나 가게들은 모르는 눈치였다고 하는데 무차별 칼부림이란 소식에 얼마나 소름이 끼치던지.

전과 3범에 소년원 송치만 무려 14건이고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서 일면식 없는 행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두른 것인데 이제는 지나가는 길도 조심해야 하는 세상인가 싶었다.

사실 범죄자에 관대하다는 말까지 나오는 대한민국 아니겠는가. 도처에 전과 10범 이상인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닌다고 하는데, 이들이 교화되기는커녕 더 큰 범죄를 낳게 하는 법의 구조가 참 야속하다.

명백한 인재임이 틀림없는 오송 지하차도 침수 참사와 고 채수근 상병 사건.

당시 참사 사고가 나기 전에 인부 몇 명이 삽 하나씩 들고 임시 제방 보강 공사를 했었다는데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지하차도 침수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망자들이 나와 안타까웠는데 예천의 하천에서 구명조끼 없이 맨몸으로 실종자 수색을 하던 해병대원들 중 한 대원이 실종되어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은 참, 뭐라 말할 길이 없었다.

두 사건 모두 확실하게 막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지 못했다.


앞서 열거했던 사건들 모두 막을 수 있는 정답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이 그렇게 바뀌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혁신'이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틀은 이미 짓밟혀진 지 오래이다.

살기 힘든 대한민국, '살기 좋은'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래도 살 만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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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7-23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쟁할 사람들이 많은데 이젠 로봇과도 경쟁을 해야 하니 할 말을 잃습니다.
각종 사고, 사상자들. 요즘 뉴스를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와요.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바라지도 않아요. 님의 말씀대로, 살 만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