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안의 세계사 - 세상을 뒤흔든 15가지 약의 결정적 순간
키스 베로니즈 지음, 김숲 옮김, 정재훈 감수 / 동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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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약국으로 가 처방전을 내고 앉아있으면 눈으로 약국 구경을 하게 된다.

처방된 약을 설명해 주는 약사 두 명, 블라인드로 가려진 뒤쪽에서 처방된 약을 조제하는 약사 서너 명.

저마다 처방받은 약이 제각각이니 가려진 블라인드 너머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약이 즐비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약들이 결국은 누군가에 의해 개발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과 실패가 있었을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어떤 성공과 실패를 다뤘는지, 개발된 약들이 오늘날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지금 떠나보자!


저자, 키스 베로니즈는 미국 앨라배마대학교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원 재학 중에 미국화학학회의 최우수 화학 대학원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커 미디어(Gawker Media)의 과학 웹진 아이오나인(io9)에서 우리가 몰랐던 흥미로운 과학사와 SF 비평을 연재하며 대중과 소통해오고 있다.

금속, 무기, 자원을 둘러싼 국제 관계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으며, 페니실린, 아스피린, 보톡스, 미녹시딜 등 놀라운 약의 발견 과정과 숨은 역사를 정리한 《약국 안의 세계사》를 출간해 “세계사를 뒤흔든 약의 역사를 담은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외에 지은 책으로 《교양으로 읽는 희토류 이야기》 등이 있다.




Ⅰ 인류를 구한 곰팡이


페니실린은 최초의 항생제로 세균에 의한 감염을 치료하는 약물이다. 연쇄구균, 임균, 수막염균 등에 작용하여 편도염, 수막염, 임질, 중이염 등을 치료한다.


20세기 기적이라 불리우는 페니실린!

박테리아 감염으로 고통받을 때 우리 곁을 지켜주는 절친이라 할 수 있겠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해도 과언이 아닌 페니실린!

2차 세계대전 중 박테리아 감염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연구진의 리더인 알렉산더 플레밍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농부의 집안에 태어나 정규교육 과정을 마친 후 해운회사 사무소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플레밍의 삼촌이 세상을 뜨면서 자신의 재산을 플레밍에게 상속하게 되는데, 상속된 재산 덕에 플레밍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된다.

그 기회 덕에 플레밍은 런던대학교의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 졸업하는 시기에 플레밍은 사격술에 빠져 있었는데 사격 팀장은 혹여나 플레밍이 본격적으로 의학 연구를 하게 되면 사격을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인트메리 의과대학 연구원이었던 알모스 라이트 경을 소개해주게 된다.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되면 사격팀에도 계속 나와 우승에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사격팀장의 예측은 옳았다.

플레밍과 라이트 경은 커리어 대부분을 함께 연구하며 쌓았는데 1914년 성과를 인정받아 플레밍이 교수로 임명된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 플레밍은 왕립육군의료단에 징용되는데, 전쟁 속에서 군인들이 적이 아닌 감염된 상처와 싸우는 모습을 두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은 플라빈을 소독제로 사용했었다.

플라빈은 식물 조직에 분포하는 황색소로 염료 및 방부제, 구충제로 쓰였는데 플레밍은 플라빈 후유증을 목격했던 것이었다.

당시 플라빈은 완벽한 소독제였는데 플레밍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플라빈이 백혈구와 격렬히 반응한다는 것을 결과로 보여주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백혈구는 신체 면역 체계에 있어서 중요한 세포인데 플라빈은 박테리아 성장을 멈추게 하는 동시에 백혈구도 죽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플레밍은 세인트메리 의과대학으로 돌아와 감염성 박테리아에 대해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후 플레밍은 <조직과 분비물에서 발견한 놀라운 용균성 요소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출판했는데 이 논문을 통해 라이소자임을 발견하였고 이는 "페니실린의 발견"으로 이어지게 된다.

플레밍이 포도상구균의 세균주를 여러 한천배지에 배양하고 공기가 잘 통하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후 휴가를 떠났었다.

그렇게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배지에 이상한 곰팡이가 핀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곰팡이 근처에는 화농균이 없는데 곰팡이에서 멀리 떨어진 배지 가장자리를 따라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플레밍은 곧장 화농균을 죽인 곰팡이의 정체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1929년 <페니실리움 배양배지의 살균행동과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균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서 오늘날 약학계에 큰 획을 그은 페니실린의 발견을 기록하게 된다.

플레밍은 페니실리움 곰팡이가 분비하는 물질 농도를 낮추는 실험을 꼼꼼히 진행해 증명하였고 곰팡이가 분비하는 물질을 800배로 농도를 낮춰도 여전히 향균성을 띤다는 사실을 밝히고 이 물질의 이름을 페니실린이라 명명하게 된다.

1945년, 플레밍은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서 페니실린 이름에 대해 간결히 설명하게 된다.

대개 이름 혹은 자신을 의미하는 이름을 붙이곤 하지만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만들어진 곳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내 유일한 장점은 관찰을 간과하지 않고 미생물학자로서 주제를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화농균이 자리 잡기 전에 열어진 창문을 통해 실험실까지 오지 않았느냐고도 말한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지만 플레밍의 실험실에 페니실리움 포자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을 수 있다.

바로 아래층에서 알레르기와 곰팡이 사이의 상관관계를 해독하려 했던 투슈 박사의 실험실에서 말이다.

물론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의 1929년 논문은 호평받지 못했다.

또한 페니실린 분리 기술이 없어 연구를 더이상 진행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플레밍은 곰팡이 샘플을 끊임없이 나눠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플레밍이 물론 페니실린을 분리하진 못했지만 1930년 플레밍의 제자인 세실 조지 페인이 플레밍에게서 받은 곰팡이 배지를 사용해 처음으로 페니실린을 치료제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Ⅱ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약


아스피린은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의 일종이다. 통증과 열을 완화해주는 진통제, 해열제로 쓰고, 항혈전 효과도 가지고 있다.


아세틸살리실산이 바로 아스피린이다.

20세기 초, 프란츠 카프카는 존재의 고통을 완화해주는 물건 중 하나로 아스피린을 꼽았다.

전세계적으로 흔하게 쓰이는 아스피린은! 수십 년이 지나 버드나무 껍질을 재발견하며 심장마비 심지어 암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많은 이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버드나무 껍질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축 늘어지는 가지와 좁은 피침형 이파리가 달린 거대한 나무가 바로 버드나무다.

버드나무의 겁질에는 세상을 바꾼 화합물이 숨어 있다.

수메르 사람들은 고통과 염증을 완화하기 위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통증을 완화하고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고대 중국인들은 류머티즘 통증을 완화하고 갑상선종을 치유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인류는 수십 년 넘게 버드나무 껍질을 사용해왔으며 심지어 로마 군은 출정하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버드나무 껍질을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버드나무에 치유 능력이 있는 이유는 바로 나무껍질에 고농도의 살리실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자연환경에서는 버드나무에만 살리실산이 들어 있지 않다. 메도우스위트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북미조팝나무 등 다양한 관목에도 낮은 농도로 들어 있는데 식물의 방어 메커니즘의 일부로 작동한다.

역사 기록을 살펴봐도 독특한 곳에서 살리실산을 얻은 경우도 확인할 수 있다.

살리실산은 버드나무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식물에도 있다.

왜일까? 살리실산은 바로 식물의 호르몬이기 때문이다.

식물은 병원균과 싸울 때 살리실산 유도체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보호한다.

만약 나무에 바이러스가 주입되면 살리실산이 살리실산메틸로 전환되는데 이후 살리실산메틸이 공기중으로 퍼져 주변 나무에 방어 모드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전달하게 된다. 그러면 전달받은 나무는 보호 메커니즘과 질병 저항성을 기록한 유전자를 가동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좀 더 건너뛰어 아스피린의 탄생을 살펴보자.

1863년 8월, 염색약 판매원이었던 프리드리히 바이어와 염료를 만들었던 요한 프리드리히 베스코트는 다국적 거대 제약회사인 바이엘을 설립하게 된다.

합성염료 만드는 특화된 염료회사로 화학 무역에서나 중요하지 공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바이어는 제약시장으로 눈을 돌려 발명한 약을 구매해 판매비용을 부담한 뒤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어는 자신들의 실험실에서 약물을 디자인했고 다른 연구자의 가치 있는 노력을 매수했다.

임질 치료제로 쓰이는 프로타골 개발자인 아르투르 아이헨그륀도 이에 속했는데, 아이휀그륀이 들어오면서 바이엘은 복통을 일으키지 않는 살리실산 유도체를 찾는 데 힘썼다.

아이휀그린과 함께 연구했던 펠릭스 호프만이 아세틸살리실산을 성공적으로 재발견했고 1897년 8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화합물을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호프만은 자신의 아버지 병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살리실산 유도체를 찾는 데 관심이 많았다고 덧붙였는데 이후 헤로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디아세틸모르핀도 합성하게 된다.

당시 바이엘 약리부 책임자는 심장에 해로울 수 있다는 이유로 아세틸살리실산을 임상 실험에서 제외시켰는데 의사 펠릭스 굿맨과 아이헨그륀은 아세틸살리실산이 빠르게 통증과 열을 없애주면서도 심장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이엘의 선임연구원인 칼 뒤스베르그는 아이헨그륀의 결과 입증을 위해 더 많은 실험을 요구했고 공식적으로 놀라운 약물을 손에 쥐게 된다.

아세틸살리실산은 살리실산과 구분하기 위해 탄생한 것인데, '아스피린'이란 약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붙은 이름이다.

아세틸을 뜻하는 a, 라틴어로 조탑나무를 뜻하는 spir, 큰 의미는 없지만 당시 약물 지을 때 통용되었던 끝에 붙인 단어 in까지 조합해 이름을 짓게 된다.

아이휀그륀이 아스피린이란 이름을 선택하는 데 최종결정권이 있다는 증거는 1899년 1월 메모에 남아 있다.

[유스피린보다 아스피린이 더 낫다. -호프만, 뒤스베르그, 드레저]




3년 이상 전세계를 덮쳤던 코로나 19 팬데믹.

당시 코로나 백신으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었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전세계적으로 신약 개발에 열을 올리다보니 자연스레 백신이 어떻게 개발된 것인지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오래 기간 임상을 거친 것도 아니고 백신이 빨리 개발되다 보니 안전성에도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특정 소재를 다룬 역사 시리즈애 푹 빠져 한 권 한권씩 도장깨기 중인데, 마침 소재가 '약'이라 바로 읽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약의 가짓수만 해도 엄청나다.

그 약이 개발되기까지 수많은 노력과 실패가 있었으니 그 노고는 차마 헤아릴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약부터 어디선가 들어봤던 약까지!

대표적인 약 15가지를 추려 탄생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던 『약국 안의 세계사』, 흥미진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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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혁신 - 혁신을 원한다면 반역자가 되라
이주희 지음 / EBS BOOKS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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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편리성과 실용성을 위해 기계화되어가는 세상을 보고 있으면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틀린 말도 아니다.

무한경쟁시대에서 로봇에 밀려나는 것도 결국은 후퇴이다.

뒤처진 자는 역사에서 기억해주지 않는 것처럼 역사의 다음 장은 처절한 혁신을 이룬 자들의 몫이다.

『강제혁신』은 다큐멘터리 <강제혁신>을 연출한 EBS 이주희 PD가 쓴 책으로 전작인 『강자의 조건』에 이어 또 한 번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저자, 이주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에 EBS PD로 입사했다. 인간의 삶으로서의 역사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역사전문 PD로서 다양한 역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다.

제작한 작품으로 『역사극장』(2003), 『정치교실』(2004) 등이 있으며, 어린이 역사 드라마 『점프』 (2005-2006)로 서울 드라마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EBS 다큐프라임 『절망을 이기는 철학 - 제자백가』, 『무원록 - 조선의 법과 정의』, 『킹메이커 - 대통령 선거전의 비밀』, 『강대국의 비밀』 등을 제작했으며, 집필한 책으로 『강대국의 비밀』을 도서화한 『강자의 조건』(2014)이 있다.




혁신은 기득권을 공격한다


1516년 알레포 인근에 오스만제국과 맘루크 술탄국의 군대가 집결해 있었다.

양쪽 모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만큼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가려질 수 있는 결정적인 전투가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거대제국끼리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결과는? 맘루크 술탄국의 패배였다.

직접 참전한 술탄 알 가우리가 전사할 정도였으니 전멸과 다름없었다.

한 번의 전투에 패한다고 해서 이어진 전쟁에서도 패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북방 유목제국들과의 전쟁에서 대부분 패했어도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아 결국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맘루크 술탄국도 이와 같이 전세를 역전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복수전에서도 더 쉽게 무너지고 만다.

결국 200년 넘게 이집트와 시리아를 군림한 맘루크 술탄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앞선 전투에 오스만제국과 맘루크 술탄국 모두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는데도 대결은 왜 싱겁게 끝난 것일까?

바로 오스만제국은 화약혁명이라는 혁신을 받아들였고 맘루크 술탄국은 화약혁명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맘루크는 화약 무기라는 혁신을 거부하고 오스만은 혁신을 받아들인 것일까?


인류 역사상 강력한 군사집단을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모든 군대에는 약점과 강점이 있기에 무적의 군대를 고르는 것은 사실 불가하다.

그런데 이 상성을 뛰어넘는 군대가 있으니, 바로 13세기 몽골군이다.

13세기 몽골군은 동시대를 기준으로 기동성도 뒤어나고 야전에서 패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공성전도 잘하고 보급에도 강한 부대였다.

즉, 약점을 거의 찾을 수 없는 군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몽골군에게도 전략적 목적을 포기할 정도의 패배를 당한 전투가 하나 있었으니, 1260년에 벌어진 아인잘루트 전투이다.

1253년, 칭키즈칸 사후 가장 유능한 군주로 불렸던 몽케칸은 쿠릴타이에서 두 개의 전선에 병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전선은 남송이었다. 남송이 정복될 경우 대칸의 직할지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몽케칸은 동생인 쿠빌라이를 남송 전쟁의 책임자로 임명하게 된다.

남송과 함께 뛰어난 경제력과 문화를 가진 서남아시아, 이곳이 바로 두 번째 전선이었다.

몽골제국으로서도 반드시 정복해야 할 지역이었기에 또 다른 동생인 훌라구를 서방 원정대 책임자로 임명했다.

몽골에서 출발한 훌라구의 1차 목표는 전설적인 암살자 집단인 아사신파였다.

전설적인 암살자들과 정복자들의 대결은 마치 엄청난 전투가 될 것만 같았지만 몽골군의 손쉬운 승리로 결과는 매우 싱거웠다.

수백 년간 어둠 속에서 활동한 암살자 집단이 쉽게 무너진 이유는 암살자 집단이라는 아사신파의 특성이 몽골군에 대해서는 오히려 약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살특공대라 불릴 정도로 암살 방식이 매우 단순하고 잔인하다.

은밀하게 잠입하여 공격했던 수법이 주였기에 암살자 집단이 정규군을 군사적 대결로 이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했다.

그렇게 음지에서 활동했던 아사신파는 토벌당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몽골군은 반란을 일으킨 다마스쿠스를 진압하던 중이었다.

그 덕분에 바이바르스를 선봉으로 한 맘루크군은 갈릴리 지역에서 확실하게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이 때, 며칠의 여유가 전투에서 결정적인 차리르 만들게 된다.

맘루크군의 진출 소식을 들은 키트부카는 소수의 고위 군관만 남겨두고 십자국 기사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병력과 함게 갈릴리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피정복민들이 또 다른 반란을 일으킬까 싶어 서둘러 도착했고 갈릴리 인근의 아인잘루트에서 맘루크군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맘루크 군의 작전이었다.

좁은 협곡이 특징인 이 지역은 맘루크 군처럼 육박전이 주특기인 중기병들은 행동에 제약이 없지만 기동성에 의존해야 하는 경기병들은 행동에 제약이 있어 불리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 맘루크 군들은 완승을 거두게 된다.

사령관인 키트부카는 생포되어 처형당하고 몽골군 대부분이 살아남지 못했다.

노예 출신의 병사들이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들을 몰아내고 이슬람 세계를 구원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맘루크 군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스스로를 엘리트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기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도 않았다.

맘루크들과 달리 보병이었기에 이해관계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맘루크가 노예였던 것처럼 오스만제국의 예니체리 또한 노예였다.

공통점이 많은 두 제국이지만 화약혁명을 대하는 자세가 결국 승패의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맘루크들은 화약 무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기병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예니체리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혁신은 전혀 예상 밖의 영역에서, 기득권에 연연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비웃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는 한다.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상상력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다. 정말 무서운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내는 패러다임의 변화다. 아예 전쟁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기존의 전쟁 방식 안에서만 전쟁을 바라보는 맘루크 같은 기득권 세력은 신기술의 진정한 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도태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낡은 방식의 성공에 집착하는 기득권자들에게 혁신은 아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상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혁신으로 도태당할 자들을 권력의 자리에 둔 채 혁신은 불가능하다.

혁신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권력투쟁에서 혁신을 추구하던 세력이 패배함으로써, 혁신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혁신을 위해 천재가 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단지 실행하는 부분이 문제이기에 이때 권력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권력에 집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 바로 추진력으로서의 권력이 필요하다.

진정한 혁신은 기득권을 공격할 수밖에 없기에, 권력에 대한 정치적 행위가 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반역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천재가 될 필요는 없지만 용감한 전사는 되어야 한다.


장마로 인해 둑이 무너져 14명의 사망자를 낸 오송 지하차도 침수 참사, 실종자 수색 중 순직한 고 채수근 상병.

초등학교 6학년생이 담임 선생님을 폭행한 사건부터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이 목숨을 끊은 사건.

그리고 어제 일어난 신림역 칼부림 사건까지.

근래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다 보니 마음까지 어지럽다.

동생이 신림역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그 골목을 지나치던 중 피해자를 봤다고 한다.

웅덩이가 있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려 피해자는 구급차에 곧장 실려갔다고 하는데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다고 한다.

번화가다 보니 그 길만 웅성웅성하고 거짓말처럼 옆옆 골목이나 가게들은 모르는 눈치였다고 하는데 무차별 칼부림이란 소식에 얼마나 소름이 끼치던지.

전과 3범에 소년원 송치만 무려 14건이고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서 일면식 없는 행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두른 것인데 이제는 지나가는 길도 조심해야 하는 세상인가 싶었다.

사실 범죄자에 관대하다는 말까지 나오는 대한민국 아니겠는가. 도처에 전과 10범 이상인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다닌다고 하는데, 이들이 교화되기는커녕 더 큰 범죄를 낳게 하는 법의 구조가 참 야속하다.

명백한 인재임이 틀림없는 오송 지하차도 침수 참사와 고 채수근 상병 사건.

당시 참사 사고가 나기 전에 인부 몇 명이 삽 하나씩 들고 임시 제방 보강 공사를 했었다는데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지하차도 침수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망자들이 나와 안타까웠는데 예천의 하천에서 구명조끼 없이 맨몸으로 실종자 수색을 하던 해병대원들 중 한 대원이 실종되어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은 참, 뭐라 말할 길이 없었다.

두 사건 모두 확실하게 막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지 못했다.


앞서 열거했던 사건들 모두 막을 수 있는 정답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이 그렇게 바뀌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혁신'이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틀은 이미 짓밟혀진 지 오래이다.

살기 힘든 대한민국, '살기 좋은'은 바라지도 않으니 '그래도 살 만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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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7-23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쟁할 사람들이 많은데 이젠 로봇과도 경쟁을 해야 하니 할 말을 잃습니다.
각종 사고, 사상자들. 요즘 뉴스를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와요.
가장 이상적인 국가는 바라지도 않아요. 님의 말씀대로, 살 만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개정증보판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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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조선과 관련된 역사책을 여럿 읽다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죽음, 그의 죽음 이후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나아가 순조 때 혜경궁이 『한중록』을 집필하는 과정까지 세세하게 구성되어 있어 꽤 흥미로웠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오래 전 출간되었지만 이번에 새롭게 개정되어 오류를 바로잡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내용을 보강했다고 한다.


저자, 정병설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완월회맹연』과 같은 한글고전소설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시대의 인간과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 음담에 나타난 저층 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예옥, 2010),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2012),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민음사, 2014) 외에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한국고전문학수업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혜빈궁일기』(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Ⅰ 사도세자의 어른들


1694년에 태어난 영조는 여든세 살까지 살며 역대 임금 중 재위 기간이 53년으로 가장 길다.

삼십 년 이상 지켜본 혜경궁은 영조의 성격을 상찰민속이라 표현하며 세세히 신경쓰는 것은 거의 병적이라고 했다.

(상찰민속이란, 꼼꼼히 살피면서 동시에 재빠르다라는 뜻이다.)

죽음과 관련된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했다는 영조는 사람을 죽이거나 불길한 말을 들으면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었다고 한다.

심지어 영조는 좋은 일 혹은 좋지 않은 일을 할 때에 드나드는 문이 달랐다.

그래서 혜경궁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만나러 경화문으로 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 이미 알아차렸다고 한다.

생사, 내외, 호오, 애증을 엄격하게 가르고 철저히 행했다는 것으로 보아 영조는 편집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짐짓 추측해볼 수 있다.


그 누구도 권위에 도전할 수 없고 뜻 또한 거를 수 없는 자리, 바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리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유일하게 거스를 수 있는 또하나의 절대권력이 있었으니 바로 부모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는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부모의 말과 뜻을 거스를 순 없다.

대개 왕이 서거한 후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살아 있는 임금의 부모는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임금이 너무 어릴 경우에는 대비가 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대신 통치하기도 했는데, 수렴청정은 세조비 정희왕후부터 익종비 신정왕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아무런 권력 기반도 없었지만 불안한 왕자 시절을 보냈던 영조를 왕세제로 만들고 대권을 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영조의 어머니 인원왕후다.

인원왕후는 영조의 생모는 아니지만 엄연히 영조의 어머니였다.

숙종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다. 인경왕후,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다.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죽고 10월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되자 중궁전이 공석이 되었는데, 이를 비울 수 없어 숙종은 결혼을 서둘렀고 이듬해 10월 인원왕후가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숙종은 마흔두 살이었고 인원왕후는 열여섯 살이었다.

인원왕후는 후사를 얻지 못했지만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에게 왕권을 넘기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병약했던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후계를 정하자는 상소를 받게 되는데 이때 인원왕후가 영조를 후계로 정하자고 지지하였고 영조는 왕세제가 될 수 있었다.

왕세제로서 대리청정을 할 때도 영조는 인원왕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박상검 사건으로 인해 영조도 위험해지고 경종 또한 자신의 수하를 쳐내기 어려워했지만 단호하게 그들의 처벌을 결행한 사람이 바로 인원왕후였다.

임금이 원치 않거나 하지 못하는 일까지 하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대비밖에 없었으니, 당시 인원왕후가 영조를 위해 나섰던 것이었다.

이렇듯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권력의 전수자이자 생명의 은인인 셈이었다.

인원왕후는 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사도세자 또한 할머니를 믿고 따랐다고 하는데 당시 인원왕후가 더 오래 살았다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영조에게 첫날밤 소박을 맞았다고 알려진 정성왕후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왕비가 되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해 죽는 날까지 고독했다고 전해진다.

정성왕후의 병세가 심각해졌을 때도 영조는 찾아오지 않았는데 곧 죽을 것 같게 되자 그제야 병소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성왕후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 커녕 아들 사도세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만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왕비가 운명하게 되었고 장례 절차를 진행시켜야 하는데 영조는 죽은 아내를 곁에 두고 내인들에게 아내를 만났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의 부음이 들려오자 아내의 죽음에 형식적인 슬픔을 표하고 부마의 집에 거동하려 했다고 한다.

승지, 대사간 등이 말리자 영조는 그들을 해임하고 밤에 화완옹주 집에 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무려 33년이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왕비의 처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단 한 건도 볼 수 없다.

참으로 고독하고 고독했던 정성왕후였다.


1764년 7월 26일, 선희궁 영빈 이씨가 사망하게 된다.

그 날은 아들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인은 화병이 아니었다.

그해 2월 선희궁은 영조가 정조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으라는 전교를 내리자 식음을 전폐했었다.

아들이 죽고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선희궁에게 손자 정조라도 보전하여 왕으로 세우기를 바랐지만 손자가 더이상 자기 아들의 아들이 아니게 된 것이었다.

이렇듯 당시 자살을 숨기고 병사로 덮었던 행태로 미뤄보아 선희궁은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선희궁은 아들을 죽인 어머니라는 낙인을 가지고 있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아침, 선희궁은 영조에게 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했다.

사도세자가 병이 심해 상황 파악은 물론 주위 사람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니 아들의 대처분을 권한 것이었다.

세자를 죽이려 하는 영조를 보며 신하들은 말렸지만, 선희궁의 말을 들은 영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선희궁이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 것만은 사실이다.

선희궁의 남은 희망은 오로지 정조였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정조의 아버지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로 두라는 명령을 받고 삶을 정리했을지 모른다.

훗날 영조와 함께 선희궁의 묘소로 간 세손 정조는 할머니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할머니께서 소자를 돌봐주신 은혜는 어머니와 다름없으셨고, 세상을 가르치심은 엄한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하늘처럼 크신 덕은 망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762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소자가 할머니를 우러러 기댐은 전보다 배나 더했고, 할머니께서 소자를 가련히 여기심도 전날보다 더 심했습니다. 춥지나 않은지, 시장하지나 않은지, 아침저녁으로 한마음으로 살뜰히 돌보셨습니다. 이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 있음도, 어느 것이 우리 할머니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조, 「영빈이씨제문」)




Ⅱ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는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다.

영조는 마흔둘의 나이였고 이복형인 효장세자도 죽은 지 이미 칠 년이나 지났으니깐.

그렇게 모두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태어난 사도세자였지만 영조가 그에게 실망하기 시작한 것은 열 살 전후부터였다.

열 살부터 죽기 직전까지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골칫거리 아들이었고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무섭고 두려워 피하고 싶은 아버지였다.

그 기간이 이십 년이나 되니 세자의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는 말도 이해가 갈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열다섯 살에 대리청정을 한 다음부터 병이 생겨 그 총기를 잃었다고 한다.

예컨대 병이 발작이라도 하면 내인과 환관을 죽였고 발작이 그치면 후회를 했다고 전해진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세자를 동궁의 지위에서 내려 평범한 서인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전교에 "비록 미쳤다고는 하지만, 어찌 처분을 하지 않으리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세자의 비행을 일러바치며 미쳐서 한 행동이니 너그러이 처분해줄 것을 영조에게 당부하지 않았는가.

이후 사도세자가 죽고 난 뒤 장례에서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쳤다고 못박아 말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수시로 깜짝깜짝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하지만 이를 심각한 정신병으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유무죄 여부를 떠나 어느 쪽을 택해도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에게 죄가 있었다면 정조는 물론 손자인 순조도 결코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조가 측근의 꾐에 넘어가 아들을 죽인 것이라면 왕의 판단이 결국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니 즉, 혜경궁의 말처럼 어떤 쪽을 선택하든 결국 문제는 발생한다.


아홉 살 때부터 어지럼증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혜경궁과 결혼한 이듬해부터 행동이 예사스럽지 않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 신경증 초기이자 ADHD를 앓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또한 두 달 가까이 눈이 충혈되는 안질은 어린아이에게서 거의 볼 수 없는 병인지라 안경 착용을 고려했을 정도라고 한다.

세자의 병증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1752년 가을, 정조가 태어나고 궁궐에 홍역이 돌았다.

화협옹주가 홍역으로 죽고 사도세자 또한 병을 이겨내었지만 정성왕후의 환갑을 이틀 앞두고 영조가 전위하겠다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 혼란 속에 사도세자는 「옥추경」을 읽으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벼락신을 부리기 위해 「옥추경」을 공부했지만 오히려 귀신이 보인다면서 겁을 먹었다고 한다.

홍역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세자가 귀신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Ⅲ 사도세자의 죽음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고변한다.

곧 대권을 이어받을 세자가 반역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리고 누가 감히 세자의 반역을 고발한다는 것일까?

윤급의 겸종인 나경언은 노비는 아니지만 대갓집의 일을 돌봐주는 집사였다.

나경언은 머리를 써 궁궐의 내관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의 고변서를 형조에게 바쳤다.

형조는 이내 영의정에게 알렸고 영의정은 곧장 영조에게 고했던 것이었다.

워낙 엄중한 문제인만큼 영조는 나경언을 직접 심문했는데, 이때 영조를 대면한 나경언은 또 다른 고변서를 꺼내놓았다.

즉, 형조에게 갖다 바친 고변서는 가짜였다.

세자의 죄상을 담은 고변서를 올렸다가 임금과 마주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으니 미끼를 던졌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고변서로 인해 영조는 물론 온 조정이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었고 영조는 세자를 폐위할 결심을 하게 된다.


임금의 행차는 즉각 혜경궁에게 보고되었었다.

혜경궁은 영조가 어느 문을 통해 들어와 어디로 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경화문을 통해 들어와 선원전으로 갔단 소식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징크스를 강하게 믿던 영조는 궂은일을 할 때 경화문을 통해 선원전으로 갔는데, 이는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이 확실해졌다는 전조였다.

사도세자는 곧장 영조에게 가지 않고 아내를 불러 이별을 고하고 세손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사실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는 것은 온전치 못한 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혜경궁은 아들의 것은 작으니 세자 본인의 것을 쓰라고 답했다.

서로의 말에 대한 오해만 남긴 채 결국 사도세자는 정조의 것을 쓰진 않았다.

휘령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세자는 관과 용포를 벗고 사죄하는 뜻에서 돌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하였지만 영조는 자결하라며 단호하게 요구했다.

세자의 죽음을 막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손 정조도 살려달라 간청했으나 안겨 나갈 수밖에 없었고 뒤이어 신하들이 들어와 간청해도 영조는 단호하게 쫓아냈다.

결국 세자는 뒤주에 들어가게 되고 자정이 넘어서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는 전교를 반포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사인에 대해 세자가 미쳐서 그리되었다는 것과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작은 임금인 세자를 일반 죄수처럼 처형할 수 없기에 영조는 자결하라고 명한다.

세자가 칼을 받아들고 목숨을 끊으려 할 때도, 옷을 찢어 목을 매려 할 때도,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할 때도 신하들이 모두 손으로 막았다.

명목상으로 국정을 대리하는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세자를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세자의 죽음을 목숨 걸고 막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도운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의 처벌을 받을 순 있어도 유교 이념에 따라 용서받겠지만 거꾸로 충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에 세자에 대한 충성심이 있건 없건 모든 신하들이 그의 자결을 막으려 노력했다.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누군가의 지시로 뒤주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순순히 들어갔고 밤이 깊어지자 뚱뚱한 체구에 더위도 많이 타 저도 모르게 뒤주판을 차고 뛰어나왔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세자가 깨고 나오지 못하도록 두꺼운 널판을 덧대어 큰못을 치고 동아줄로 뒤주를 꽁꽁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뒤주는 세자의 관이 되어버렸다.

누가 뒤주를 들이게 했는지 알 순 없지만 세자를 죽이고자 한 사람은 뒤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아닌 영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야금을 연주하다 알게 된 곡이 있는데 바로 「꽃이 피고 지듯이」다.

유명했지만 보지 않았던 영화 「사도」의 OST인데 문득 사도세자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의혹이 있다?

▶뒤주에 갇히는 벌을 거스르지 못하고 순순히 들어가던 사도세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였지만 이를 애통해하던 영조?

국사책에서 처음 마주했던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갇히게 해 죽게 했을까하는 의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다.

아들의 죽음을 슬피 여겨 내린 시호, 사도는 당시 내게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와 정조는 업적까지 꿰뚫고 있지만 사도세자에 대해 너무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내막에 대해 파헤져보고자 『권력과 인간』을 펼치게 되었다.


신하 앞에서도 대놓고 꾸짖으며 아들 사도세자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아버지 영조 그리고 아버지 영조의 꾸짖음 아래 도망치지도 못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아들 사도세자.

모두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싫어해 열 살도 되기 전에 영조를 실망시켰고 학자라기보다 예술가에 가까웠던 그였기에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애초에 맞질 않았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조선이 아닌 현대에서 부자관계였다면 극한의 결말로 내몰리진 않았겠지.

사도세자를 둘러쌌던 어른들부터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죽음까지 지켜보고 나니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간혹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문 하나가 있으니 뒤주에 갇히게 가는 것은 일종의 벌이지 죽음으로 내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영조가 아들을 죽일 뜻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보니 모두가 이에 대한 의문을 믿고 싶어한다.

사도세자는 모후인 정성왕후의 영혼이 깃든 휘령전에서 뒤주에 갇혔었는데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명을 보면 뒤주는 강서원에 있었다고 표시되어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든 다음 영조가 이를 승문원으로 옮기게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영조는 차마 어머니의 영령이 있는 곳에서 아들을 죽게 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경희궁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뒤주를 감시했으며 19일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른 시점에 환궁을 했다.

이때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20일에 죽었다고 추측했는데 영조는 뒤주를 21일에야 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일 뜻이 없었다는 영조의 말에는 공감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단편적이기에 한 사건에 대해 전후사정을 알기 어렵다.

또한 역사 왜곡은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는데 달라진 것은 전혀 없으니 간혹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유사 역사가 아닌 진짜 역사, 즉, 진정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 학생들을 위해, 우리 역사를 위해 대중 역사서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며 이는 전문가들이 역사 대중화의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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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 역사를 뒤흔든 지리의 힘, 기후를 뒤바꾼 인류의 미래
이동민 지음 / 갈매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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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초기 인류는 어떻게 지구 곳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던 문명 발달 양상은 왜 그렇게 다르게 나타난 것일까?

세계에서 주목받은 찬란한 문화와 문명들은 어떻게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것일까?

이러한 모든 궁금증을 기후 변화의 관점에 의하여 살펴볼 수 있는 책이 있으니, 바로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이다.


저자, 이동민은 지리학의 시각으로 전쟁사와 지구사에 대한 글을 쓰는 지리학자이다.

가톨릭관동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문인협회 정회원이다.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리교육 전공으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년 가톨릭관동대학교에서 우수연구교원 표창을 받았으며, SSCI 등재 국제저명학술지 Journal of Geography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유방과 항우의 전쟁을 지리·지정학적으로 바라본 역사서 《초한전쟁》, 수필집 《서해에서》를 썼다.




Ⅰ 인류, 그 시작의 발걸음


기후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중생대의 지구는 기온이 높아 공룡이 번식할 수 있었지만 화산 분출, 운석 충돌에 따른 여러 이유로 인해 기후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멸종했다고 전해진다.

신생대에도 마찬가지로 기후변화때문에 여러 동식물들이 탄생과 멸종을 거듭했었다.

160만에서 1만 2000여 년 전의 시기를 플라이스토세라 부르는데, 이 시기에 빙하기로 이어져 빙하기가 절정이던 시기는 1만 8000여 년 전으로 보고 있다.

플라이스토세에는 매머드, 검치호와 같은 추위에 강한 동식물이 번성했었다.

특이한 점은 수만 년 혹은 십수만 년 주기로 간빙기가 왔다가 다시 빙하기로 이어지는 패턴을 보였다고 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1만 2000여 년 전에 간빙기가 시작되었으며 가까운 미래에 다시 빙하기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20만여 년 전, 아프리카 남부에서 인류가 등장했다.

피부도 얇고 근력도 약했으며 털있는 동물과는 달리 맨몸이다 보니 한랭한 기후를 견뎌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빙하기를 견디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직립보행 이후 팔, 다리를 자유로워지자 도구와 불을 사용했으니, 선사시대부터 이미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아프리카를 벗어났을 무렵에는 지구 자전축이 바뀌던 시기였다.

사하라 사막에는 습기 가득한 계절풍이 불었고 기온도 계속해서 낮아졌다.

이로 인해 사막에 비가 자주 내리게 되어 강물이 흐르고 모래언덕이 초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인류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북쪽으로 이주했지만 7만여 년 전에 일어난 기후변화로 인해 잠시 멈추게 된다.

빙하기로 인해 사하라 지역이 또다시 사막이 되면서 사하라 북쪽으로 이주한 인류는 발목이 붙잡혔던 것이었다.

그래도 빙하기 덕분에 당시 해수면 또한 90미터로 낮아지면서 유라시아 대륙은 물론 영국, 일본, 필리핀 그리고 호주, 아메리카 대륙이 이어져 인류가 넓게 이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Ⅱ 기후변화의 역사에서 기후위기의 시대로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거대한 변화를 안겨 주었다.

증기기관 덕분에 공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며 생산성은 한층 증가하였다.

덕분에 마차와는 차원이 다른 증기선, 열차 등의 교통수단을 얻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증기기관이 점차 발전하게 되자 열차는 더 적은 연료로 더 빠르게,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며 새로운 교통수단까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법이다.

산업화는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안겨주긴 했으나 인위적인 기후변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필수 불가결하게 쓰이며 증기기관의 후손들을 이끌게 하는 것, 바로 화석연료이다.

석탄과 석유는 산업혁명 전에도 사용되었지만 무기 만드는 재료로나 사용했을 정도였는데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인해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화석연료는 그야말로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화석연료 사용이 급증하다보니 자연스레 온실가스 배출량 또한 급증하게 되었고 온실가스 대기 중 농도가 높아지면서 지구의 기온이 급변하게 된 것이다.

(지난 번에 올렸던 『인류의 여정』과도 내용이 겹치는데) 산업혁명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게 되니 더 많은 주거지와 시설들이 필요해졌고 이 때문에 삼림과 습지가 파괴되었는데 유럽을 시작으로 아시아, 아프리카로까지 산업화가 확산되면서 온실가스 배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급증했던 것이었다.


산업화로 인해 인류는 자연에 의한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기만 하던 존재에서,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기후를 바꾸는 주체로 변모한 셈이다.




새로운 관점을 통해 역사를 둘러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요즘이다.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는 물론 동물, 식물에 이어 기후의 관점에서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색다르니 지루할 틈이 없다.


1만 2000여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수천 년에 걸쳐 지구는 온난한 기후로 바뀌었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유라시아와 이어졌던 호주와 아메리카는 분리되었고 영국, 일본 등은 섬이 되었다.

멸종된 동/식물들에 반해 인류라는 존재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역시 기후이다.

혹시 알고 있는가?

도구와 불을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19만 년 동안 식량을 생산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타이밍 좋게도 빙하기가 끝남과 동시에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자연스레 생태환경 또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덕분에 다양한 식물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주식으로 삼는 재료들을 자연스레 얻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단백질과 지방을 얻었던 동물들이 사라져 위기도 있었다.

즉, 기후로 인해 울고 웃었던 인류였다.


오래 전, 온난한 기후 덕에 인구가 증가하였고 더 넓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으니 기후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렇기에 기후 위기를 단순하게 넘겨서는 안 된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라고는 하지만 처음에 언급했듯이 일부 학자들은 가까운 미래에 다시 빙하기가 올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위적인 기후변화를 일으켰지만 이를 되돌릴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선진국 전체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중국인데 전체 20%를 차지하고 있다니 이는 정말 높은 수치이다.

지구 온난화의 주원인이 되고 있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부터 지켜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전세계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노력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이번 황사가 정말 심하다고 하던데, 마스크 잘 쓰고 다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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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미국 미술사 다시 읽기 - ‘타자’로의 초대
김진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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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20세기는 미국 미술의 세기였다.

그만큼 미국 미술의 영향력과 위상이 매우 드높았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국제 미술계를 이끌어 나갔었다.

궁금하다. 20세기 후반의 미국 미술은 과연 어땠을지 말이다.

드높았던 위상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때 그 시기로 여행을 떠나보자!


저자, 김진아는 현재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교수로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미술이론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미국 현대 미술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뉴욕주립대 강사, 홀린스 대학 초빙조교수를 지냈다.

전공 영역은 현대 미술사와 문화이론이며, 문화적 정체성과 타자에 주목한 연구, 공공미술, 전시회와 담론, 상호매체적인 예술 양상 등을 탐구해 왔다. 그중에서도 본 저서는 저자가 가장 오랫동안 주목했던 타자 관련 연구들을 집대성하면서도, 일부의 미술 현상을 새롭게 조사하고 채우면서 완성한 결과이다.




Ⅰ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미술과 타자


책에 들어가기에 앞서, '타자'에 대해 잠시 설명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는 기존 미술계의 권력에서 밖으로 밀려난 자들 혹은 억압된 자들을 뜻하며, 대표적으로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흑인, 여성, 라티노, 성소수자 등 소수자 집단들을 의미할 수 있다.


미국과 미국 미술의 대전환점을 맞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이다.

전쟁이 일어나던 중, 미국은 어느새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으며 종전 후 냉전 체제가 성립되자 민주주의 진영 국가들의 리더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미술계는 여전히 유럽 미술을 따라가는 추세였다.

많은 미국 작가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교육받고 활동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다보니 세계 미술을 주도한 것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 미술계였다.

그렇게 종전이 되고 2년 후, 미국이 세계 미술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 있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추상 작업들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초현실주의나 유럽에서 일어난 추상 형식을 더 벗어난 급진적인 추상 미술이 소개되었기 때문이었다.


1947년 잭슨 폴록은 이제는 전설이 된 드리핑 기법을 선보이며, 처음으로 순수 추상 작품을 내어놓았다. 윌렘 드 쿠닝도 야성적이고 파괴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작업으로 돌풍을 일으켰으며, 곧 바넷 뉴먼, 아쉴리 고르키,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 등도 함께 부상했다.


여전히 구성적 요소가 보였던 유럽의 모던 아트와는 달리 미국 화가들은 자유분방하고 야성적이어서, 이는 사회적인 메타포로 연결되어 계층적 사유의 타파라 주장되기도 하였다.

즉, 미국의 평등과 민주주의의 완벽한 상징으로 여겨졌다.

유럽 추상회화가 저택의 거실에 걸리기 맞는 이젤화라 불릴 수 있는 규모였다면 잭슨 폴록의 전성기 그림은 2m에서 6m에 이르렀었다.

거대하고 거친 화면에서 화려하게 펼쳐진 색면들은 꼭 광활한 미국 땅처럼 느껴졌으며 뉴욕 출신은 드물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뉴욕에 모여 활동하고 있었기에 이들을 '뉴욕화파'라고 불렀다.

문화적 배경과 개성은 달라도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시기에 서로 의기투합하며 작업 방향을 함께 모색하였다.

또한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 구겐하임, 휘트니 등 미국의 젊은 근·현대미술관들이 새로운 미술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기 시작했다.


미국인이 된다는 것은 한국처럼 혈연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닌, 동화의 과정을 통해 정신적으로 미국인으로 거듭남을 의미했다.

20세기 말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는 미국을 하나로 묶는 역동적이고 자랑스러운 힘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 프로테스탄트 윤리였다.

즉, 이민자들은 이 세 가지를 습득하고 지킴으로써 진정한 미국인이 되기를 요청받는다.

모든 문화가 섞이는 형상과 포괄적인 문화 수용성을 떠올리게 되는 용광로 개념은 실제 20세기 말 부상하는 다문화주의나 상호문화주의 등과는 대조적인 함의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민자들의 다양한 문화는 앵글로색슨족의 언어와 종교인 영어와 기독교 아래에 위치하는 주변 문화 또는 하위문화로만 기능할 뿐 결코 주류 문화는 될 수는 없다는 암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열린 문화적 성격이라 강조되었던 '수많음으로 하나 됨'이라는 용광로 메타포는 비유럽권 문화를 식민화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미국주의'를 함축하는 것이다.



Ⅱ 여성 미술가들의 등장


민권운동 시기, 흑인과 치카노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은 주류 미술계의 배척에 대해 적극 항의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고유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공동체 벽화나 해당 공동체만의 분리주의적 실천을 전개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에 운동으로서의 미술 실천이 사그라져 정치적인 예술 활동은 이어졌어도 그 전과는 달리 훨씬 산발적이고 덜 일관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제 2세대 페미니스트 미술 담론은 1세대 페미니즘 미술을 본질주의라 매도하였고 흑인과 치카노 미술가들 사이에도 공동체적 관심을 꼭 반영하던 경향은 약화되었다.

60년대 후반 탈미니멀리즘 경향과 다채로운 형식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확대되면서 70년대는 특정 매체나 장르로 당대의 미술을 지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를 다원주의(pluralism) 시대라고 부른다.

80년대 미술에서는 유독 사진 작업이 크게 부상하고 텍스트가 삽입되거나 텍스트가 중요한 매체로 등장한다.

기존에 있던 이미지나 작품을 이용하는 방식인 전용 또는 차용, 패스티쉬, 복제 등도 크게 유행한다.

이러한 작업을 전개하는 작가 중 여성 작가들이 선구적으로 주목받는 사례가 많았고 특히 「옥토버」지로 대표되는 비평가와 미술사가들의 지지가 있었다.

1980년대, 주요 전시회에 포함된 동시대 여성 미술가들의 비율 자체는 남성에 비해 매우 낮았으나 그 이전보다는 높아지긴 했다.

바버라 크루거, 신디 셔먼, 셰리 레빈, 제니 홀저, 메리 켈리 등 여성 작가들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제니 홀저는 1980년대 초 휘트니 비엔날레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개인전, 1989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90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미국관을 대표하는 최초의 여성 작가로 참여했고, 최고상인 황금사자상까지 거머쥐면서 역사적인 쾌거를 올렸다.


바바라 크루거는 1970년대 전후 여성 미술운동의 여파 속에서 구슬, 리본, 실 등을 이용해 만든 벽 설치 작업과 회화 작업을 했고, 197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초대되기도 하는 등 일찍 데뷔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방황하다가 1970년대 말 큰 흑백 사진에 간결하고 대담한 텍스트 구문을 결합한 작품으로 돌아와 새 출발을 알렸다.


1980년대 말, 혁신적인 여성 미술가들은 주요 전시회에서 남성 작가들 사이에 한두 명식 끼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동시대 미술을 선도하는 미술관 전시에 참여하는 위치로까지 오르게 된다.

초기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제도권 미술계와 상업화 현상을 비난하며 분리주의적인 전시에 임했다면, 신예 작가들은 주류 미술관에 입성했고 심지어 유명 상업 화랑에도 발을 들여놓는다.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사는 물론 미술도 알아갈 수 있는 책이니 읽고 나면 나 자신이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1장은 1947년부터 1960년대 중반 시기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주요 미술 기관들이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추상표현주의 사조와 그 담론에서 어떻게 미국 문화가 정의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2장, 3장, 4장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시기, 활발히 전개되었던 흑인 미술운동, 치카노 미술운동, 페미니즘 미술운동에 주목한다.

5장은 1980년대 부상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새로운 타자로서의 여성 미술가들에 초점을 맞춘다.

6장은 1980년대 후반 『환상의 미술: 라틴아메리카, 1920-1987』전, 라티노 미술을 다뤘던 최초 대규모 전시인 『미국의 히스패닉 미술』전, 이에 대한 대항적 전시로서 개최된 『치카노 미술: 저항과 확언, 1965-1985』전에 나타난 쟁점을 논한다.

7장은 1990년대 전후로 에이즈에 관한 사회적 편견과 정부의 소극적 대처에 항의하며 성 소수자뿐들 아니라 여러 미술인이 함께 펼쳐 나갔던 미술 운동 양상을 고찰한다.

8장은 1989년 이후 시기로 다문화주의 논쟁이 사회 전반과 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9장은 1990년대로 아시아계 미국인 미술가들의 출현 등에 관해 서술되어 있다.


이렇듯 세계를 제패한 1950년대 전후의 추상표현주의가 어떻게 타자 미술가들을 그늘에 머무르게 했는가를 시작으로 이들이 장차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어떠한 질문과 도전장을 던져 나갔는지, 그리고 이들이 주류 미술계에서 어떻게 부상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각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서술되어 있어 보다 깊이있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역사는 물론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까지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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