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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을 말한다.
글 : 자유기고가 김우진
드라마와 영화를 앞세운 한류가 동아시아를 휩쓸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 될 만큼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출판 시장에서는 여전히 '일류(日流)'가 무시하지 못할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일본 소설은 트렌디한 러브 스토리나 젊은 감각의 신변소설을 내세워 독자들의 손길을 꾸준히 유혹한다. 하지만 장기적인 잠재력을 가진 일본 소설 분야로는 역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미스터리 장르를 관통하는 두 가지 코드는 '환상'과 '현실'이다. 환상이라는 말만 듣고 섣부르게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해리 포터 류의 판타지를 연상해서는 안된다. 이 '환상'이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이고도 낭만적인 추리를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아직도 수많은 일본 작가들이 동경을 담아 재생산해 내고 있는 장르이며, '본격파'라는 이름으로 미스터리의 본류이자 정수로 추앙받고 있는 분파이기도 하다.
'본격'이란 본디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논리와 진실을 밝히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본격 미스터리를 표방한 소설 중에서도 무수한 변종과 시도를 찾아볼 수 있지만, 한결같은 특징은 주인공 탐정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인물로 일본 추리 소설계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름 자체가 애드거 앨런 포에 대한 오마주인 그는 시조, 효시라는 명성과는 안 어울리게도 아웃사이더적인 시선과 기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그가 창조한 일본의 대표적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는 호방하고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지만, 그가 맡은 사건에는 언제나 음습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최근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인 교고쿠 나쓰히코는 일본 미스터리 전통의 계승자라고 할 만하다. <백귀야행>,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등을 차례로 히트시키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이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작가다. 특히 <우부메의 여름>은 냉철한 회의론자 탐정 교고쿠와 요괴와 악령이 출몰하는 기이한 스토리를 결합시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요괴 소설의 일인자에서 환상 미스터리 작가로 자리매김을 했다.
일본 미스터리는 이처럼 기묘한 환상의 세계예 속한 동시에 냉엄하고도 굳건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도 하다. 1950년대 후반 마쓰모토 세이초로 시작되어 모미무라 세이이치가 확고한 위치를 다진 일군의 '사회파' 소설들이 대표적인 예다.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 문제나 시사적인 소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본격 추리'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낭만적이거나 환상적인 작품을 지양하고 냉정한 필치로 개연성 있는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의 새 경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점과 선>, <모래그릇>등 마쓰모토 세이초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작들은 부패, 불륜, 비리와 같은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여과 없이 드러낸 혁신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뒤이어 1970년대를 풍미한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세속적인 욕망에 물든 인간 군상의 명멸을 그리는 데 능해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손꼽혔다. 특유의 노골적인 묘사와 이분법적인 시각, 정형적인 인물들은 이제 통속적인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전형이 되었지만 말이다.
현대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은 현실에 기반한 내용을 다루더라도 더이상 사회파란 이름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신 (SF적 요소를 포함한) 과학과 사회학, 심리학적 요소들을 접목한 '이과적'인 미스터리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앞서의 낭만적 본격 소설들이 '문과적'인 면을 가진 것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특성이다.
이과적이라고 해서 모든 작품이 방대한 설정과 과학적 지식을 담아내는 마이클 클라이튼식 소설인 것은 아니다. 단지 문과적인 과거 소설들에 비하여 소재와 시각의 저변을 넓혀 미스터리의 외양을 확장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예컨대 오늘의 유명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기리노 나쓰오는 '여성',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 기시 유스케는 '공포', 이사카 코다로는 '죽음' 등으로, 각각의 분야를 특화하여 삶 속의 미스터리를 해부해 나가는 전공의에 비유할 수 있겠다. 소설적 재미와 함께 몰랐던 지식을 알아 가는 즐거움까지 만족시켜 주는 이들은 지금도 나날이 새로운 변신을 통해 독자들을 놀라게 할 준비에 힘쓰는 중이다.
환상과 현실. 이것은 일본 추리소설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삶을 떠받치는 두 중심축이기도 하다. 인간은 현실에 발을 디딘 채 머리로는 끝없이 환상을 꿈꾼다. 고개를 숙이고 땅만 바라볼 수도 없고, 하염없이 하늘만 동경할 수도 없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일본 미스터리는 우리가 둘 중 어느 한쪽을 소홀히 할세라, 여기에 다른 한 쪽도 존재한다는 것을 수시로 일깨워준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기이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