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숲, 숲으로 가자 - 어머니 약손처럼 찌든 삶과 아픈 몸을 어루만진다
윤동혁 지음 / 거름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책은 숲이 얼마나 인간에게 유용한가를 경험적, 과학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꽃과 나무로 대변되는 식물들이 생존을 위해 내뿜는 화학성분, 즉 동물과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화학성분이 인간의 건강에 유용한 피톤치드가 된다는 사실에서부터, 실제적으로 숲을 통해 어떤 치료가 가능했는가를 일본과 한국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토피와 관련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의 지대한 관심사이기에 솔깃한 부분이기도 하다.

아토피를 고치면 노벨의학상은 떼논당상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저자가 말하는 숲이 의학상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강력추천하고 싶어졌다. 물론 모든 환자들이 숲으로 향해들어가 치유될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가능성을 충분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토피 치료에 대한 공부는 크게 물, 먹거리, 공기로 나눌 수 있겠다. 좋은 물과 먹거리에 대한 관심으로 육류를 멀리해야 한다거나, 밀가루 음식, 달걀 등을 멀리해야 한다는 등 금기식품에 대한 정보는 물밀듯 쏟아진다. 하지만 정작 금기식품을 먹지않고 권장식품만을 먹더라도 차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런 음식조절만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은 가능하지만, 완치와는 제법 거리가 있다. 물론 건강한 물도 마찬가지다.

원칙은 간단하다. 면역체계의 과다한 작용이든(이것이 알러지이다) 환경의 오염이든 면역체계의 이상 때문에 아토피를 비롯한 천식, 비염등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면역체계를 바로잡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물이나 먹거리를 바꾸는 것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의 기능에 과다한 작용을 억제, 즉 면역체계가 피곤하지 않도록 하는데 그 취지가 있다. 면역체계가 오버하지 않도록 애시당초 면역체계를 최소한으로 기능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따라서 소식도 가장 좋은 방법중의 하나가 된다. 물론 그렇기때문에 방부제나 인공식품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정크푸드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면역체계 자체를 건강하게 바꾸자는 시도도 있다. 그것은 바로 자세 바로잡기나 꾸준한 운동이 이에 속한다. 운동이나 바른 자세를 통해 면역의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병을 갖지 않는 보통사람들처럼 과장된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면역의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숲으로 들어가자는 이 책은 아토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숲이 주는 건강함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로써 아토피가 등장한다. 숲은 위 두가지 방법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숲으로 들어가면 면역의 힘이 강해진다. 피톤치드가 바로 몸을 해치는 여러가지 곰팡이나 병균을 죽이는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숲을 걷는다는 것은 바로 면역의 힘을 키우는 것이 된다. 또한 숲 속에선 오염된 공기와 멀어지기 때문에 면역의 과도한 작동을 막을 수 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무한히 많은 인공적인 화학물과 접하고 있다. 그곳으로부터의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그 공간을 자연친화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만드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인 것이다.

어쨋든, 숲은 건강의 보증수표다. 또한 생명을 키우는 성장제다. 맨발로 숲 속을 걷는 행위 자체로 우리는 건강뿐만 아니라 행복감도 얻을 수 있다. 책은 그것의 과학적 근거와 경험적 사례로 강요하지 않고 긍정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당장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가까운 공원을 찾아 나무를 쓰다듬으며 흙을 밟고 싶도록 만든다.

숲이 없다면 숲을 만들자. 사무실에 집안에 화분을 들이자. 공기가 사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 스포츠클라이밍 기초교육을 받았다. 월수금 일주일에 3일 2시간씩 한달간 진행된 교육은 결석이 4번 이상 되면 수료증을 받을 수 없다. 정확하게 3번 결석하고 수강을 끝낸 덕분에 다행히도 수료증을 받았다. 교육은 상당히 힘들어 다음날이면 으례 몸이 찌뿌등했다. 2시간 내내 암벽을 오른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15분 정도, 잘 하면 2번 15미터의 벽을 오르는 정도인데도 말이다.

옆길로 새고 말았는데 하고 싶은 말은 클라이밍이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것의 공포감에 대해서다. 벌써 3년 가까이 되는 교통사고의 기억은 죽음이라기 보다는 그저 잠깐의 망각 정도로 기억된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돌이켜보면 죽음의 그림자보다는 해프닝의 햇살만 보인다는 것이다.

클라이밍을 할 때는 자일을 허리에 걸고 오른다. 안정장비를 다 갖추고서 오른다는 말이다. 마지막주 월요일 수업때는 추락실습도 있는데 12미터 쯤에서 8미터가량을 떨어져 혼쭐났다. 하지만 죽음의 냄새보다는 그저 아찔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해 겁을 내지 않는 강심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나 매듭을 잘못 매서, 또는 확보자가 하강기를 실수로 다루어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항상 갖고 벽을 오른다. 떨어지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난 적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벽을 대할때면 이런 생각은 사라지고, 한번에 끝까지 올라서겠다는 의지만 불타오른다. 물론 팔에 힘이 떨어져 추락할때는 긴장하지만 말이다.

몇일 전 꿈을 꿨다. 소총을 든 사내들이 나를 트럭 뒤칸에 실으려한다.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트럭에 오른다. 가슴이 두근두근. 어느덧 널따란 평원에서 차는 멈추고 다들 트럭에서 내린다. 그런데 갑자기 나 혼자 줄에서 이탈해 다른 쪽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찾아오는 죽음의 그림자. 총을 든 사내들이 거총을 한 것도 아닌데 끌려가는 내내 죽음에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죽는건가 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자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꿈 속인데도 말이다. 너무 무서웠다. 살고싶었다. 이토록 내가 강렬하게 삶을 원했었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래 이렇게 살아있구나. 난 이토록 살고싶었구나.

최근 읽었던 일본 소설 <종말의 바보>가 생각났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악착같이 살아라. 삶은 이렇게도 고귀한 것이었음을 꿈을 통해 느낀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생각해보다 사는게 사는 것 답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이불을 걷어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6-10-03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고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살이님, 정말 악몽이었지만 깨달음을 얻었네요 ^^ 스포츠클라이밍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하루살이 2006-10-0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영화 <우행시> 꼭 보고싶었는데...
클라이밍은 기초 교육만 받았어요. 제가 써 놓은 글 읽어보니 굉장히 어려운 것처럼 느껴지네요. 그런데 실제론 만만하답니다. 몸매 바르게 잡아주는데 최고일듯하니 혹 시간이 나신다면 도전해보세요. 안전장비만 유의한다면 정말 괜찮은 운동같아요.^^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강명관 지음 / 길(도서출판)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역사는 되풀이된다'라고 했을 때의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소위 말하는 역사적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뜻하는 것일까? 역사를 들추어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역사가 갖는 의미는 현재를 읽는 밑거름이요,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지혜의 보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론 역사는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책 <옛글에 빗대어...>는 공자왈 맹자왈로 치부되는 옛 글이 어떻게 현재의 삶 속에서 의미를 갖고서 되살아나는지를 보여준다. 저자가 말하듯 인간의 생각이란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 사상 등이 주입한 것들로 이루어졌다는 가정으로 본다면 몇백년 전의 일이 지금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일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를 버릴 수도 없고, 극단적인 부정도 옳지 않고, 극단적인 찬미도 옳지 않다면 과거의 문화와 옛글을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야 할 것인가. 단 하나, 오직 인간 해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는 저자의 글로 인해 선명하게 밝혀진다. 그냥 벽장 속에, 또는 창고 속에 묵묵한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책들을 털어내고 현실 속에 그 활자를 드리워내는 것이 결코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책 속에서는 성매매 금지법, 양극화 현상, 이라크 파병문제,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 등 굵직굵직한 문제에서부터 개고기 요리법, 치통, 마당이 있는 집, 쿨하게 헤어지는 법 등 개인적 호오까지를 공자, 맹자에서부터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 옛 선인들의 글을 통해 들여다본다. 그 글을 읽고있다보면 사람 사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제도가 변하고, 철학이 바뀌고, 삶의 양식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사람 사는 일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최근의 가짜 명품시계 사건이나, 횡령건 등등 그 밑바탕에는 인간의 이기적 마음이나, 명예나 권력에의 집착과 같은 심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아니, 심리적인 요소라기 보다는 자본주의적 철학으로 대변되는듯 싶다. 더 잘먹고 잘살겠다는 생각이 무에 그리 나쁘겠는가마는 타인의 사정에 눈한번 주지않고, 또는 남의 피와 살을 파먹고서라도 잘 살겠다고 하니 문제이지 않겠는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질끈 눈을 감고 살면 되지않나 싶지만, 나라는 존재가 세상과 떨어져 단독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상, 세상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왕 관심을 가질바에야 좀 더 아름다운 삶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바로 옛 글 속에 고스란히 놓여져 있다. 고리타분할 것 같은 그 글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돋보기가 반짝반짝 닦여질 터이니, 때론 옛글로 나의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성 싶다. 자신의 전공분야를 통해 옛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고 보관함으로 들어가는 이유일 터이다. 옛 글에서 지혜를 배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 케이블 TV로 재패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에 푹 빠져 있다. 만화책으로 읽으려다 좀체로 읽지 못하더니만 인연이 닿았는지 애니메이션으로 접하게 됐다.

<바람의 검심>은 일본의 근대기, 메이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칼잡이들의 이야기다. 시시오와 켄신이라는 두 칼잡이로 대변되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구 열강의 제국적 낌새를 알아채린 시시오는 오직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신념으로 일본을 정복하려 한다. 그리고 제국과 맞서기 위해 석유와 같은 자원에 눈을 뜨기도 한다. 다만 오직 약육강식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단 한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시오를 막으려는 반대편에는 켄신이 있다. 한때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다시 그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돌아다니던 전설의 칼잡이. 그리고 다시 스승으로부터 깨달은 것은 생명의 소중함.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그리고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강한 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거나 언제든지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도구적 인생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약한자들에게 거름이 되어주고픈 켄신. 그들의 삶도 소중한 것임을, 그리고 그 약한 힘들이 모여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바로 그 큰 힘이란 강하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서로 사랑하고 삶에 대한 격려를 일으켜 준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서구 열강의 침입과 맞물려 벌어지는 두 사무라이의 대결이 지금 이토록 강렬하게 나의 마음 속에 남는 것은 오로지 최근의 FTA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영화배우 이준기에게 "자신이 없냐"라고 물었던 그 순간에 갑자기 시시오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경쟁에서 이겨라. 세상 앞에 당당히 맞서라. 실력을 키워라. 그렇다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보다 강한 자의 칼날 앞에 놓인 이들에게 그와 맞서서 싸울 실력을 키울 시간도 없이, 또 시간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도록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시대. 정말로 대부분의 약자인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당한 강요인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시대에 강자는 웃을 것이다. 아니,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강자가 누릴 이권에 웃음을 흘릴 것이다. 강한 후에 약자를 돌보면 될 것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시 그 변명이 사실일지도. 강하게 살아남아 약자를 돌보아준다는 희망. 그런데 오직 약육강식으로 자라난, 또는 무장한 그들이 살아남아서 그 원칙을 저버리고 자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약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원할 뿐이다)를 베풀기만을 바라는 약자의 삶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시시오의 야망이 불타는 시대, 켄신의 자비의 칼날이 세상 곳곳에 번뜩이기만을 바랄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개인적이라는 것은 이기적이라거나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으로 인해 소동이 일어날 것이며 그 소동으로부터 개인은 결코 자유로울수 없다는 점에서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무슨 일을 할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지의 표현으로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인지는 도대체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결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나간 사람들에 의해 해꼬지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며, 누군가의 손에 잡혀 집밖으로 휩쓸려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종말의 바보>라는 이 소설은 내일이 아니라 8년 후에 지구가 소행성에 부딪혀 종말을 맞게 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한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5년간 살인, 강도, 방화, 자살 등등 혼돈기를 맞이하다가 지금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해가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노아의 방주를 찾아 어디선가 분명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지푸라기라도 잡을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망루를 지어 해일이 어떻게 도시를 삼키는지를 구경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으며, 가족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복수를 꿈꾸는 사람도 있으며, 그저 묵묵히 자신이 해 오던 일을 꿋꿋하게 계속 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종말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하고 나중에 알게 되면서 당황해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칩거에 들어갔다 세상으로 나온 소녀, 자살을 꿈꾸는 자 등 다양한 인생군상이 시선을 끈다.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이야, "어떻게든 살아" "처절하게 치열하게 살아"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다. 아니, 맨 처음 스피노자의 구절처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갖는 힘은 단순히 그런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그 메시지에 수긍하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개인적으로 8가지 이야기 중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은 '강철의 킥복서'다.

"나에바, 내일 죽을 거라는 말을 들으면 어쩔 거야?" 배우가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했다. "다르지 않겠죠." 나에바 씨의 대답은 냉담했다. "다르지 않다니, 어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로킥과 레프트 훅밖에 없으니까요" 배우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고 한다. "그건 연습 얘기잖아. 아니, 내일 죽는데 그런 걸 한다고?"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뀝니까?" 글자들이라서 상상할수밖에 없지만 나에바 씨의 말투는 정중했을 게 틀림없다. "지금 당신 삶의 방식은 얼마나 살 생각으로 선택한 방식입니까?"(210쪽)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211쪽)

내가 언제 죽을 지를 안다면 삶의 방식이 바뀔까? 흔히들 말하는 예상 수명이라는 것이 있다. 그 예상 수명에 맞추어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죽음은 일상 속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죽음은 나의 삶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아니 죽음 그 자체를 생각조차 않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암과 같은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자살하면 안 되는 이유 따위, 내가 알게 뭐냐, 멍청아! 아무튼, 절대,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이 녀석아, 쭈뼛쭈뼛 인생의 산을 올라와서는, 힘들고 무섭고 피곤하니 처음 왔던 길로 슬슬 돌아가볼까, 할 수는 없는거야" "난, 오를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니까요" "대체 뭐냐, 넌? 난, 지금 올라가서 어떻게 하자, 따위를 말하는게 아냐. 오를 수 있을 때까지 오르라고 명령하는 거야. 그리고 말이다, 아나 다 올라가면 말이다, 정상에서의 경치는 틀림없이 각별할 거야"(316쪽)

경치가 각별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시지푸스가 끊임없이 산을 오르고 또 오르듯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경치를 구경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아버리면 시지푸스는 바위에 깔려 죽을 것이다.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살아가는 건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소설 속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를 후회없이 살아가는 것, 아니 후회없이라는 말을 지워도 괜찮다.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일지도 모른다. <종말의 바보>는 살아간다는 것의 위대함을 말해주는듯 하다. 이 소설은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한다. 강철의 킥복서가 오늘도 무수한 발차기 연습을 하듯이. 소설의 끝장을 덮으면 아릿한 심정과 함께 삶에 대한 애착이 무한정 솟아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6-09-24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운 잔잔한 작품이었습니다.

하루살이 2006-09-2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