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케이블 TV로 재패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에 푹 빠져 있다. 만화책으로 읽으려다 좀체로 읽지 못하더니만 인연이 닿았는지 애니메이션으로 접하게 됐다.
<바람의 검심>은 일본의 근대기, 메이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칼잡이들의 이야기다. 시시오와 켄신이라는 두 칼잡이로 대변되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구 열강의 제국적 낌새를 알아채린 시시오는 오직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다는 신념으로 일본을 정복하려 한다. 그리고 제국과 맞서기 위해 석유와 같은 자원에 눈을 뜨기도 한다. 다만 오직 약육강식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단 한치의 자비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시오를 막으려는 반대편에는 켄신이 있다. 한때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다시 그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돌아다니던 전설의 칼잡이. 그리고 다시 스승으로부터 깨달은 것은 생명의 소중함.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그리고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강한 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거나 언제든지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도구적 인생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약한자들에게 거름이 되어주고픈 켄신. 그들의 삶도 소중한 것임을, 그리고 그 약한 힘들이 모여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바로 그 큰 힘이란 강하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서로 사랑하고 삶에 대한 격려를 일으켜 준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서구 열강의 침입과 맞물려 벌어지는 두 사무라이의 대결이 지금 이토록 강렬하게 나의 마음 속에 남는 것은 오로지 최근의 FTA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영화배우 이준기에게 "자신이 없냐"라고 물었던 그 순간에 갑자기 시시오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경쟁에서 이겨라. 세상 앞에 당당히 맞서라. 실력을 키워라. 그렇다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보다 강한 자의 칼날 앞에 놓인 이들에게 그와 맞서서 싸울 실력을 키울 시간도 없이, 또 시간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도록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시대. 정말로 대부분의 약자인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당한 강요인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시대에 강자는 웃을 것이다. 아니,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강자가 누릴 이권에 웃음을 흘릴 것이다. 강한 후에 약자를 돌보면 될 것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시 그 변명이 사실일지도. 강하게 살아남아 약자를 돌보아준다는 희망. 그런데 오직 약육강식으로 자라난, 또는 무장한 그들이 살아남아서 그 원칙을 저버리고 자비(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약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원할 뿐이다)를 베풀기만을 바라는 약자의 삶이란 또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시시오의 야망이 불타는 시대, 켄신의 자비의 칼날이 세상 곳곳에 번뜩이기만을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