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럭 등에 다이옥신 함량이 많아 그 기준을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임신한 여성은 연어나 참치 등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먹지말기를 권하고 있다. 하루에 얼마나, 또는 어떤 생선을 먹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정보가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그 생선은 도대체 어디에서 다이옥신을 몸 속에 저장하게 됐을까.

문제의 근원은 여기이지 않을까. 인간이 만들어낸 오염물질 다이옥신이 바다로 흘러들어 물고기들이 원치도 않는 다이옥신을 섭취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이옥신을 줄이는 방법을 모색하기 보다는 건강한 생선먹기에 여념이 없다.

어찌 생선뿐이겠는가.

채소에 남아 있는 잔류 농약량에 대한 보도를 매년 접한다. 될 수 있으면 농약이 많은 채소를 피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농약은 누가 뿌려댔는가.

건강한 먹거리를 먹고 싶다면 건강한 환경을 먼저 만들자. 농약 등을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누구나 싸게 먹을 수 있다는 상식은 잘못된 신화일 뿐이다. 죽어가는 땅을 위해 더 많은 비료와 농약이 뿌려지고, 그 과정에서 배부르는 것은 비료공장과 화학공장일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된 수많은 보조금은 우리의 세금이다. 그러니 싸게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또한 농약을 하지 않으면 생산량이 준다는 것 또한 거짓이다. 초기 몇 년 수확이 줄지만 곧 농약을 했을 때보다 유기농을 통한 재배가 수확을 많이 가져온다는 보고도 많다.

좋은 먹거리 자체에만 신경쓰지 말고, 먹거리를 만드는 환경에 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 할 때다. 이 환경은 건강과 관련된 천문학적인 병원비용도 줄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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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6-1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업에게 소비자가 환경인증을 해주는 제도를 어서 도입해야 합니다.
환경실천을 잘 하는 기업에겐 세금감면이나 대출 등의 혜택을 주고
그 반대의 기업에겐 삼진아웃제를 적용해서 사회 기여도를 이끌어내는거죠.
실제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지역기업체를 유도합니다.

하루살이 2007-06-1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로푸드 운동, 산지 중심 유통 확립 등 환경으로부터의 접근이 아니라 유통으로부터 접근이 환경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방법도 있겠죠. 암튼 효율성, 생산성에만 집착하는 버릇부터 고쳐야겠죠. 그래야 그 뒤에 이어지는 자연의 건강성에 눈을 뜰 수 있을테니 말이죠.

icaru 2007-06-2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친척에 친척에 친척이 장어 양식을 하는데~ 어디가서 장어 사먹지 말라고 경고를 하더랍니다. 항생제가 장난이 아니게 투여된다는거죠. 에구 넘넘 모순입니다.
 
가위 들고 달리기
어거스텐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당신이라면 살 수 있겠는가? 13세. 어머니는 정신분열증을 겪는 시인.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족을 살해할 것이라는 과대망상증에 시달린다. 그래서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핀치 박사. 하지만 이 정신과 박사는 오히려 정상이 아닌듯하다. 그리고 또 그 가족은 어떤가. 자유방임 가족이다. 이 가족 밑에서 살아야하는 아이. 30대 사내와 동성애에 빠진 아이. 이건 소설이다. 하지만 실화다.

과연 주인공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상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었을까? 차라리 자살을 꿈꾸는 것이 나을법도 하건만, 그는 그 가족들 사이에서 자기 방식대로 끝까지 버텨냈다. 아니, 살아냈다. 그리고 희망을 찾아냈다. 그것이 절망이 아닌 체념으로 비쳐질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컬트 무비를 보는듯한 소설은 정말 현실인가를 의심하게 하지만, 사람이란 얼마나 끈질긴가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핀치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학교라는 이 똥통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낭비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별다른 계획이나 생각이 없는 아이들을 가둬두는 감방일 뿐이었다. (121쪽)

핀치 가족은, 규칙은 자기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에게 몸소 가르쳐주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며 어떤 어른도 대신 내 인생의 틀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122쪽)

바로 이 깨달음이 주인공을 현실에서 버티고 나아가게 만든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혼돈 속에서 지켜내고 믿을 것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

넌 자유의지를 가진 자유인이다. 핀치 박사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왜 늘 그렇게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을까? (중략) 무엇보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문제였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지 알 수 없으니, 콱 막혔다. (358쪽)

자유의 참뜻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부분이다. 세상을 버텨나가기 위해 스스로 세운 규칙으로, 다시 말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만, 그것이 오히려 삶을 막막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은, 가공식품 패스트푸드와 가끔 생기는 위기나 재미있는 호기심으로 쉼표가 찍히는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다.(379쪽)

그의 인생을 돌이켜보건대 필시 그럴 것이다. 막막함 속에서 암흑 속에서, 그럼에도 그는 어떻게 굳건히 살아갈 수 있었는가.

물론, 세상이 달랐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을 굴리고, 어쩔 것인가? 어깨를 으쓱한다.(417쪽)

그렇다.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 으쓱한 어깨 사이로 희망이 찾아온다. 붉은 태양과 같은 희망이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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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음모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 감춰진 것들을 들춰내기 위한 가족들간의 심리전과 어둠의 집을 둘러싼 집안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간의 관계가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반전. 그리고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시 찾아오는 반전. 반전의 반전은 기대하지 않은 하지만 그랬어야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소설의 재미가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왠지모를 음습함이다. 그 음습함은 악와 선의 싸움에서 비롯된다.  

악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선 따위, 어차피 악의 윗물 중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약을 돋보이게 하는, 말하자면 손수건 테두리의 자수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는 왜 늘 선이 그렇게 약하고 무르고 덧없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거대한 악의 침대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침대는 늘 새로운 피가 필요하고, 그 피를 타고난 자는 어느 시대에나 반드시 존재한다. 악의 존속은 인간의 필연이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강하게 운명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와타루는 다르다. 와타루는 윗물의 행복한 한 방울. 그는 밝은 빛 속을 걸어갈 수 있다. (157쪽)

소설 전체의 분위기는 바로 이 부분때문에 음습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왜 악의 근원인 주인공들이 선을 지키려 애쓰는지 의문이다. 바로 그 부분에서 소설이 진행되는 힘을 얻는다.

그렇다. 선 따위는 악의 윗물의 한 방울. 악의 매력에 비하면 이른 아침의 덧없는 안개 같은 것. (293쪽)

하지만 그 안개는 또는 한 방울은 절대 악의 물에 섞여들지 않는다. 안타까움은 그곳에서 발생한다. 악마끼리 손을 잡은 그림을 본 기억이 없다. 물론 천사끼리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끼리끼리 통하는 법. 악마도 때론 천사를 자신의 친구로 삼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 마음은 악인가, 선인가.

소설이 생명을 얻는 부분이 바로 이런 갈등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소설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을지라도 이런 고뇌가 소설 읽는 재미를 더했다.

이렇게 자각하지 못하는 악은 무엇인가. 그녀의 바탕에는 내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깊고 넓은 악의 늪이 펼쳐져 있는게 아닐까. 그런 늪은 나 같은 사람도 삼켜버리는 게 아닐까.(300쪽)

이 부분이 소설을 소름끼치도록 만드는 부분이다. 악마는 악을 의식하고 악을 저지르지만, 악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저지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흔히들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그런 도덕적 의식 자체가 사라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악의 무의식이 의식을 뚫고 나왔다가 이내 의식이 자리를 잡으면 사라지는 악. 그러나 영원히 자리 잡고 있는 악의 무의식. 세상이 무서운 것은 바로 이 악의 무의식 때문이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악마보다도 무서운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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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6-2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보관함에 넣습니다. 삼월의 붉은 구렁이 인가 뭔가를 위시하여...
요즘 이 작가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아직 한편도 읽을게 없지만. 몹시도 궁금터라는.. "악"을 잘 묘사하는 사람인가 보군요.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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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은 다다와 교텐이라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고교 동창이라는 사실, 교텐의 잘렸다 다시 붙여진 새끼 손가락과 서로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남겨두곤 역 앞에서 우연히 만나 생활을 같이 하게 되는 두 이혼남이다. 둘의 사랑, 결혼, 이혼 등에 대해서는 마치 수수께기를 풀어가듯 이야기가 펼쳐지니, 굳이 여기에서 밝힐 필요는 없을 것같다.

이책은 이혼과 결별이라는 상처로 인해 가슴 속에 품어둔 허무와 절망이 두 남자의 만남 속에서 희망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담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작가는 마지막 결론에 행복은 재생된다고 다다의 입을 통해 자신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다다는 심부름집을 한다. 교텐은 보조라고 하기에는 오히려 일을 망치는 그래서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꽤 도움이 많이 된다. 그런 잡다한 이야기들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타인의 속마음을 추축해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다다는 타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겪는 번거로움과 낯간지러운 작은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68쪽)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익숙함과 편함. 공동생활의 번거로움. 하지만 그 뒤편엔 분명 작은 기쁨들이 놓여있다. 번거로움과 기쁨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자신에게 크게 다가오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의 선택이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소설 속에선 선택의 자유로움은 없고 운명처럼 함께 살아가게 되지만 말이다.

누군가한테 필요한 존재라는 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의미야(105쪽)

때론 그 희망때문에 절망으로 빠질터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항상 밝은 것 아니던가.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있어. 그걸 잊지마.(162쪽)라고 우리는 혹시 우리 자신을 위로하고 속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속아넘어간들 또 어떠랴.

혼자 있고 싶어. 누가 있으면 외로우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몹시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228쪽) 결국 또다시 절망으로 빠지는 다다. 딱 우울증 증상이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주변의 관심이라고 항상 말하지 않던가. 그래서 교텐은 그에게 말썽꾸러기인듯 하면서도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된다.

불행하지만 만족할 순 있지. 후회하면서 행복할 순 없어. 어디서 멈출지는 스스로 결정할 일 아냐(290쪽)

악의가 없었다고 해서 죄가 아닌 건 아냐(328쪽)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이다. 그래서 세상은 서로 품어줘야만 되는 곳인지도 모른다. 다다와 교텐이 그러는 것처럼.

소설 속 장면들을 몇개 빼내다보니 왠지 우울한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명랑유쾌한 소설임을 밝힌다. 그러니까 순전히 우울한 부분만, 또는 심각한 부분만 간추렸다고 볼 수 있으려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실은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때로는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이 악의로 변하기도 하고, 무심한 것이 도움을 주기도 하는 곳이 세상이다. 철저히 혼자이고자 해도 혼자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래서 만남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는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의 상황에 자주 처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다. 자신이 처한 환경의 조건을 완전히 바꿀 수 없는한. 우리가 그 조건을 바꾼다는 것은 만남의 폭을 넓힘으로써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만. 허무한 두 남자가 어떻게 행복을 찾아가는지 소설을 통해 슬그머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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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밑의 경제학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지음, 유주현 옮김 / 이콘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1000원만 들이면 캔이나 페트병에 든 녹차를 즐길 수 있다. 어디를 가도 똑같은 맛을 느낀다. 하지만 녹차잎을 얼마동안 우려내는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거나, 발효나 덖는 방식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는 다양한 녹차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후자의 풍요로움을 느끼자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세계 경제의 흐름을 끌고 온다. 음식이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경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선 고대엔 아시아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세계 경제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유럽과 북미로 권력이 이동하고, 다시 아시아로 그 중심이 옮겨지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 그것이 음식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힌다. 즉 현재 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음식이란 맥도널드와 콜라로 대변되듯 경제의 주도권을 쥔 쪽의 음식이 세계에서도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 바라보면 현재 스시를 비롯해 일본 음식이 세계에서 점차 뻗쳐나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가 일본인임을 생각한다면 약간 수상스럽기는 해도 꼭 틀린 말은 아닌듯 싶다.

저자는 음식을 크게 산업적(자원) 측면 문화적 측면으로 나눈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효율, 생산성, 단일성을 최우선시 하는 영미적 조류와 비효율적이긴 해도 긴 안목으로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소중히 하는 아시아적 조류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효율보다는 비효율을 통해 얻어지는 풍요로움을 위해 패스트푸드적 세계화에 반대하고 문화적인 음식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한다. 실제로 효율을 주장하는 음식으로 인해 광우병은 물론 당뇨와 비만 등 건강의 문제와 환경 훼손과 오염의 문제 등이 야기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진짜 원재료의 다양한 맛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그 이유이다.

그럼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까.

음식문화라는 것은 부가 집중되는 곳에서 발전한다. 유럽의 식문화 특히 프랑스의 식문화가 발전한 것은 절대왕정의 성립으로 부의 집중이 일어난 15세기 이후다. 프랑스의 경우 자체의 음식문화에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공주들이 프랑스 왕과 결혼하면서 그들의 음식문화를 가져옴으로써 보다 다양한 음식문화가 성립된다. 이런 절대왕정 속에서 왕족과 귀족이 독점하던 그림, 음악, 음식 등이 시민혁명을 거쳐 궁정 밖으로 나온다. 이때부터 레스토랑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반면 중국의 경우엔 한나라 때부터 음식점이 발달했다. 음식점이 있다는 것은 서민의 음식이 풍부했다는 것을 말한다. 중국 식문화의 특징은 의식동원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도교의 관점으로 식이라는 것이 동시에 약이기도 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엔 중국에서 수입된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와는 다소 거리가 멀어진다.

이렇듯 중세 유럽시절까지 가난했던 이곳이 부유한 아시아를 침략하는데 성공한 이유는 무얼까. 직접적으로는 무력이라 할 수 있다. 이 무력을 뒷받침으로 해서 무역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세 유럽제국의 흥망을 결정한 것은 무역의 이익을 누가 획득하는가에 있었다. 영국은 1600년에, 영국에서 독립한 네덜란드는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아시아 무역과 식민지 경영에 나선다. 그 기본은 플랜테이션에 있는데, 이를 통해 식량 생산과 식량 무역을 독점해 간다.

십자군은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지배하기 위해 시작한 원정이었지만, 실제로는 문화 수준이 낮았던 나라들이 무력을 통해 이슬람제국을 공격하여 재화와 미술품을 수탈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 국내의 전쟁을 아시아로 가져간 것이 십자군이며, 이것이 후일의 식민지주의인 것이다. 후기 십자군 원정의 배후에는 이슬람에 지배당하고 있던 여러 도시국가들의 무역의 통로를 회복하고자 했던 움직임이 있었다.

미국 독립의 계기도 홍차다. 보스턴 차 사건이란 홍차에 매겨진 고액의 관세 때문이다. 미국의 대공황도 마찬가지다. 1차 세계대전후 농산물 수출이 활발해지면서 농산물 가격이 올라가 버블 상태가 된다. 1930년대가 되면서 유럽의 농산물 생산량이 안정을 되찾고 신대륙은 재고량이 늘어 가격이 폭락된다. 이로 중남미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대공황이 일어난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다.

신대륙발견, 플랜테이션 등에 의한 상품의 대량 생산과 그 교역의 지배는 근대 유럽의 기초가 된 것은 물론 아시아를 식민지화하여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기초가 된다. 그 후의 발전 방향은 프랑스의 문화형과 영미형의 자원형이다.

미국은 제조업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구조의 과감한 전환을 꾀한다. 그들은 패권국으로서 자본주의의 시스템과 규칙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경하여 제조업에서는 열세가 되어도 금융의 힘으로 이익을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한 시스템적인 수법이 식의 분야에서 패스트푸드로 나타난다. 햄버거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와 대중 지향의 인공음료인 코카콜라 등을 만들어내고 슈퍼마켓, 편의점이라는 대량판매의 소매 시스템을 구축하고 쇠고기와 브로일러 등을 얻기 위해 가축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만든 것도 미국이다. 가히 식의 공업화라 할 수 있다. 자동차 메이커가 부품회사를 지배하듯 상업자본이 농업과 농민을 지배하는 것이다.

1970년대 프랑스 요리는 누벨퀴진이라는 운동을 통해 크게 변화한다. 페르낭 푸앵, 폴 보퀴즈 등으로 대표되는 궁정요리의 전통을 계승하여 버터와 크림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손이 많이 가는 소스를 사용한 중후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누벨퀴진의 영향으로 음식을 소량씩 작은 접시에 아름답게 장식하며 재료의 맛을 살리려는 스타일로 변해가고 있다.

이외에 아시아와 서양의 식문화의 차이점 분석도 재미있다.

중국 한국 일본은 곡물을 발효시킨 곡장이 일반적인데 비해 동남아는 생선을 발효시킨 어장이 일반적이다. 특산 향신료나 고추, 어장과 같은 조미료를 사용하여 독자적 식문화를 전개시켜나간 곳이 베트남, 태국, 미얀마다.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쌀문화이긴 하지만 식사에 코코넛이 반드시 들어간다. 양념의 중심은 고추와 코코넛, 그리고 설탕으로 약간 달며 간장을 별로 쓰지 않는다.

서양의 식문화가 서양요리의 모습을 띤 것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부터다. 4대 향신료라 불리는 인도의 후추, 동남아의 계피, 정향, 육두구, 이것들은 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건너가 매우 고가에 거래됐다. 향신료가 귀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고기의 방부제로서의 효과 때문이다. 또 흑사병 등 역병에 대한 약이라는 믿음에서 귀하게 여겨졌다는 설도 있다. 이탈리아 식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교역에 의한 부의 집중과 동양으로부터의 영향 이외에도 상업국가적인 면이 강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부유한 시민계급의 발달로 풍부한 요리문화가 발달한 것이다.

서구에서는 오랫동안 신선한 고기와 생선을 좀처럼 먹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향신료를 필요로 했다. 아시아로의 침략은 이 향신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농업의 생산성이 오르지 않으면 공업화를 위한 노동력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농업의 생산성이 오르지 않는 나라는 근대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시아가 쉽게 유럽에 침락당한 것은 식이 풍부했다는 것이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엔 오히려 식의 생산력을 키워놓았기 때문에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공업화를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항할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정리가 제대로 되진 않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 많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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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6-1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국부론 이야기군요.
현대의 식량전쟁도 거의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고 봅니다.
약육강식의 대표가 바로 밥상 쟁탈전인데, 모든 인류의 전쟁이 먹는문제로 귀결되지요.
유럽의 척박한 토지와 기후 조건하에서는 식민지 개척이 당연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책과 더불어 환경적 관점의 식민지 건설이나, 전쟁 관련서적을 읽어두면
좋은 한 세트가 될 듯^^

하루살이 2007-06-12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도 도움이 되겠죠? 음식의 관점이라는 전제하에서 바라본 이야기지만 꽤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슬로푸드와 같은 것도 단순히 음식 문화운동뿐만이 아니라 경제와도 큰 관련성을 띠겠죠. 우리도 이런 총체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근본적 운동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장식 된장이 아니라 시골 된장 살리기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