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엘리자베스 뉴턴은 스탠퍼드 대학에서 간단한 놀이에 관한 실험을 벌였다. 두 무리의 사람들에게 각각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을 주었다.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25개의 노래가 적힌 목록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노래의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듣는 사람은 두드리는 사림이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노래의 제목을 맞혀야 했다. 120개의 노래 중 듣는 사람들은 겨우 2.5퍼센트. 즉 단 세개의 노래밖에 맞히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실험 결과가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듣는 사람이 노래의 제목을 예측하기 전에 두드리는 사람에게 상대방이 정답을 맞힐 확률을 짐작해보라고 했더니 50퍼센트라고 대답했다.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확률은 마흔 번 가운데 한 번에 불과했음에도 가능성을 반반으로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드리는 테이블을 두드릴 때 머릿속에서 노랫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귀에 들리는 것은 조금 이상한 모스부호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딱딱 소리뿐이다. 두드리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멜로디를 알아맞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일반 정보(노래의 제목)를 알게 되면 두드리는 사람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테이블을 두드릴 때 그들은 맞은편에 앉은 듣는 사람이 음악이 아닌 단순하고 단절된 몇개의 타격음밖에 듣지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저주다. 일단 무언가를 알고 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듣는 사람의 심정을 두번 다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의 저주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아예 일찌감치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메시지를 받아들여 변형하는 것이다.

<스틱> 칩 히스, 댄 히스 지음, 웅진 윙스, 2007.6 -중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지식의 저주에 휩싸여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 상대방의 몰이해만을 서로 이야기하는 세상. 자신에게 눈을 돌려 혹시 자신이 지식의 저주에 씌어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상대방을 무식하다고 깔보고 또는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것이 꼭 지식의 저주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식의 저주로부터 탈출하듯 상대방과 접점을 찾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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