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폴리 보고싶어"
"몇 개 볼건데?"
"네 개"
...
"아빠, 과자 먹어도 돼?"...
"몇 개 먹을건데?"
"네 개"
...
난 참 못된 아빠다. 우리 딸내미가 가장 크게 여기는 숫자가 넷이라는 걸 알아챈 이후 항상 물어본다.
"몇 개 할건데?"
딸내미가 숫자를 넷까지만 셀 줄 안다면, 오산이다.
분명 열까지 꼬박꼬박 셀 줄 안다.
하지만 제일 큰 숫자는 넷이다. ^^
어렸을 적 어떤 경험이 딸내미에게 넷이 가장 큰 숫자이도록 만든 것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혹시 지금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 크기가 나만의 넷이라는 숫자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딸아이의 넷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곰곰히 생각해본다.
혹시 여러분도 넷에 갇혀 지내는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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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것좀 봐"
딸내미가 손가락으로 자기 발가락을 가리킨다.
딸내미 얼굴을 쳐다보니
"아니, 여기를 보라고"라며 자기 손가락을 흔든다.
오호. 가히 충격적이다. 무엇이 충격적이냐고?...
불과 몇개월전만해도
"딸, 저기 봐봐, 소들이 사는 집이야"하고 손가락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쳐다보던 아이였다.
머리속에 가상의 선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상징을 이해한다는 것.
부쩍부쩍 성장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놈의 세상은 아직도 영아기에 머물러 있다.
절차의 민주화를 가리키며 손가락질하는데
자꾸만 손가락만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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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현님의 사진.

 

'드디어' 딸내미 어린이집 재롱잔치가 끝났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딸아이의 행동을 지켜본다는 흥분이 생각보다 크다.
아마도 이런 맛에 재롱잔치라는 것을 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재롱잔치를 안했으면 좋겠다. ...
'딸아이가 무대 체질이 아니라서'라고가 아니라,(ㅋ 딸바보 아빠로서 말하지만, 단언컨대 우리 딸아이가 제일 예쁘고 거기에다 귀엽기까지 하다 ㅍㅎㅎㅎ)
재롱잔치란 순전히 어른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 딸내미, 재롱잔치 이틀전
"아빠, 오늘 율동연습 안해?"
아니, 이건 또 무슨 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묻는
"아빠, 오늘 어린이집 가는 날이야?"라고 묻는 톤과 '똑같다'니...
재롱잔치 준비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이만저만 받는게 아닌가보다.
정해진 행동을 따라야 하고, 그걸 따르지 않으면 야단을 맞고...
살아가며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시기가 분명 올테지만,
네살짜리 아이에겐 좀 이르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진 욕망에 충실하면 좋겠다. 그걸 지켜주지 못하는 아빠라는게 부끄럽다.
다시 한번 공동육아나 어린이집 협동조합을 꿈꾸어본다.
도저히 엄두가 나진 않지만, 꿈이라도 꾸어본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하는 일. 나에겐 진짜 체질개선이 필요하다.
"여기 여기 모여라"라고 노래 부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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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빠, 따가워. 이게 뭐야?"
"아빠 수염이잖아. 남자 어른들은 수염이 있단다."
"찌르는건 위험하잖아. 이거 없애줘."
???
2. "아빠, 나도 이거 갖고싶어."...
"이건 성대라고 하는거야. 남자 어른들이 주로 갖고 있지."
"아빠, 나도 갖고 싶단 말이야. 나도 줘~"
???

남자가 어른이 되면 참 별의별게 다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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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수년 전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전집>을 샀다. 어떤 계기로 김수영 전집을 사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시가 읽히지 않아 그냥 산문만을 읽었다. 자주 접하지 않은 한자가 많아 산문을 읽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아마 그즈음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라는 책을 접하고 시 읽기에 대한 자신감이 팽창해진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풀>이라는 시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려나. 

아무튼 함락하지 못한 성은 두고두고 미련으로 남는다. 언젠가는 꼭 그 성 안으로 들어가보겠다는 소망을 쉬이 놓아버릴 수는 없다. 그러던 차 그 성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주어졌다. 바로 강신주 철학자가 쓴 <김수영을 위하여>다. 어떤 시선으로 시를 대할 것인가는 독자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쨋든 요즘 대세인 인문학적 시선으로 김수영의 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도 재미있을 성 싶다.

강신주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김수영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김수영에 대한 한없는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김수영의 외로움, 고독의 깊이를 자신은 체험해 보았다는 동지애적 성격도 강하다. 그의 개인사가 김수영과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으며, 그래서 이제 김수영을 정리하고 자신도 김수영으로부터 독립함을 선언한다. 시가, 인문학이, 아니 인간이란 바로 단독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누군가를 흉내내거나 이념, 종교, 권력, 자본의 휘하에 휘둘려서는 아니되서다.

강신주가 바라보는 김수영은 이런 단독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저항한다. 즉 자유를 얻기 위한 고된 싸움을 계속하고 고독 속에서 고군분투 한 것이다. 인간이란 단독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밝히는 것이 바로 시라는 것이다. 혼자 도는 팽이처럼 그 누구,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돌아야 하는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난 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독성이 타인을 배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이듯이 다른 이의 단독성도 똑같이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단독적 개인의 완성이 전제되었을 때만이 코뮌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단독성이 확보되었을 때만이 보편성도 획득 가능한 것이다.  

이책은 그러하기에 현재의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단독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막강한 자본의 힘과 아직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과, 온 세상 가득한 종교와 안하무인격 권력 앞에서 그 어느 하나에도 기대지 않고 숨지 않고 내가 나임을 표명할 수 있는지, 또는 나를 잃지 않으려 저항하고 있는지, 아니 나라고 하는 흔적이나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김수영을 위한 것이자, 자유를 위한 것이자, 단독적 개인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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