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7월 20일 23도~31도


체리나무가 심겨진 곳은 요즘 개망초밭이 되었다. 개망초꽃이 활짝 피면서 꽃밭을 만든 셈이다. 그냥 지나가는 객이라면 화려하진 않지만 소소하지만 예쁜 꽃밭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무를 키우는 입장에서 풀꽃이 피어나는 것은 좋은 상황은 아니다. 



개망초꽃은 마치 계란 후라이를 닮았다고 해서 계란꽃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처음 보았을 때 계란후라이가 연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보인다. 아무튼 참 부지런히도 핀다. 개망초꽃이 피었을 때 한 번 풀을 베었는데, 그새 자라서 또 꽃을 피운 것이다. 



개망초 주위로는 키가 훨씬 큰 망초가 퍼져 있다. 개망초꽃이 질 무렵 망초꽃은 피어난다. 개망초든 망초든 이 풀 이름에 망자가 들어간 것은 이 풀이 우리 고유종이 아니라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라고 한다. 즉 나라가 망할 때 들여온 풀이라 망초라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확실친 않지만 개망초와 망초 주위로 실망초도 꽃을 피운 듯하다. 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다. 다만 이 꽃이 실망초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꽃구경을 해도 될 터이지만, 마냥 그대로 두다가는 씨를 맺혀 내년엔 더 극성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꽃을 피우고 씨를 맺기 위해 양분을 빨아들일테니, 이 점도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작물이 풀들과 양분 싸움을 벌이는 통에 더 잘 자라는 경우도 있다. 즉 온통 나쁘거나 온통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시기와 정도에 따라서 영향력은 정 반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기와 정도를 저울질 해서 조정하는 것, 그것이 농사의 기술이지 않을까. 망초들을 보며 모두가 흥할 수 있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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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7월 20일 맑음 23도~31도



가시오가피가 병들었다. 보살핌을 받지 못한 탓이다. 농사란 자연처럼 스스로 자라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보고 살펴야 한다. 그런데 요 며칠 관심을 갖지 못했더니, 병이 든 것이다. 한 그루 뿐이어서 조심스러운데, 그만큼 애정을 쏟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삽목을 시도하고 있지만, 쉽지않아 보인다. 



병이 든 탓인지 열매도 다 떨어져 버리고 몇 개만 달랑 남아 있다. 가시오가피 가지나 뿌리 껍질로 달인 물이 손발 저림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요즘 손 저림이 심한데, 이용하면 좋을 듯하다. 하지만 아직 나무가 크지 못하고, 수년 째 제자리 걸음이다. 겨우 허리 높이에서 성장을 멈춘 듯 자라지 않고 있다. 물론 양분을 따로 공급하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나무들에 비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보통 2~3미터, 크게는 4미터 정도까지도 자란다고 하는데, 겨우 1미터 크기에서 성장을 멈추고 있는 것은 정상으로 보기는 힘들다. 뿌리 근처에 큰 구멍이 자꾸 나는 것을 보면 뱀이든, 두더지든, 동물들이 자꾸 뿌리를 건드린 탓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양분 공급과 함께 동물 피해를 줄일 방법을 찾아야 겠다. 삽목도 성공해서 개체수를 늘릴 수 있다면 더 좋을 일이다. 


농사란 자고로 보살핌이다. 보고 살펴야 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보고 살펴야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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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7월 19일 맑음 20도~31도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지난달 매실청을 담글 때 벌레 먹은 것을 따로 추스리지 않고 한꺼번에 담근 통이 있다. 혹시나 괜찮을까 싶었지만, 역시나였다. 원래는 씨살이좀벌은 새끼를 쳐 놓은 씨앗 속에서 겨울을 났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매화나무로 올라가지만, 매실청을 담가놓으니 월동하지 않고 애벌레가 되어서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이 매실청을 버려야 할지, 애벌레만 집어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다행히도 다른 매실청 2통은 애벌레가 보이지 않는다. 씨앗을 빼고 담가 놓기도 했지만, 멀쩡해 보이는 것은 열매 그대로 담가두어서, 혹시 씨살이좀벌이 새끼를 쳐 놓았을 매실도 일부 들어갔을 지 모른다. 애벌레가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애벌레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인지, 애벌레 자체가 없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좀 더 자세히 지켜보아야 하겠다. 


씨살이좀벌 애벌레를 보고 있자니,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적응하려 하는 생명체의 생존본능에 감탄하게 된다. 원래의 루틴 대로라면 여전히 씨앗 속에 있어야 할 터이지만, 씨앗을 벗어나 밖으로 나온 것은 환경의 변화가 생명을 위협해서일 것이다. 인류도 기후위기라는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의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거나, 현재 겪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인류는 이 변화 속에서 어떻게 적응할까. 변화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애를 쓸 것인지, 이 변화 마저도 과학기술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안도할련지.... 인류가 매실청에 담긴 씨살이좀벌 애벌레 처지가 되지는 않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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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7월 19일 맑음 20도~31도



콜라겐이 많아서일까. 금화규꽃을 건조기 없이 자연상태로 말리는 것은 정말 힘들다. 날씨가 습한 탓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금화규꽃에 곰팡이가 피어서 버려야 했다. 그나마 종이로 덮어두었던 꽃송이는 곰팡이가 피지 않았다. 따로 차를 끓여먹기 보다는 밥을 할 때 함께 넣어서 금화규꽃밥을 지었다. 



금화규꽃밥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고, 그냥 말린 금화규꽃을 밥을 지을 때 넣어서 밥물에 우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금화규꽃밥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금화규꽃을 넣지 않고 똑같은 양으로 밥을 지어 비교해보면 좋을 테지만, 집에서 밥 짓는데 그런 비교까지는....

아무튼 평소와 달리 보이는 것은 일단 밥이 누르스름하면서 질다는 것이다. 평소 밥짓는 물보다 조금 적게 넣고 밥을 하는 것이 좋겠다. 기름기가 흐르는 듯한 밥을 저어 씹어보면 탱글탱글한 맛이 느껴진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겠다. 반면 밥이 빨리 쉴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도 든다. 아무튼 정확한 계량이 된다면 좋겠지만.... 협회나 연구회 같은 데서 한번쯤 비교관찰을 해보면 좋겠다. ^^;


금화규꽃을 말리기가 쉽지 않은데, 꽃을 따서 바로 밥을 짓는데 활용하거나, 차를 우려내거나, 물에 씻어 냉동시키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하루만 지나면 져버리는 꽃인기에 한번 시도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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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율은 한때 40% 까지 치솟았다. 현재는 대략 35% 정도. 1인 가구의 행복도는 높아지고 있다. 굳이 가족과 함께 살겠다는 사람도 줄고 있다.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엔 이와 같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합계 출산률은 지난해 기준 0.81명이다. 사상 최저다. 가족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가족 구성원 중에 아이가 없다면 한 세대가 지나면 사라지고 말테니까 말이다.  


그러다보니 전통적인 가족 대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는 시대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남녀의 결혼과 출산으로 대를 이어가던 가족은 이제 동성 간의 가족,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집합, 공동체 구성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영화 <브로커>는 '이런 가족도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중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눈물을 펑펑 흘리게 만든 영화였다. 아이들만 남겨진 가족과 병원에서 뒤바뀐 아이를 둔 아버지의 이야기는 잔잔한 이야기 속에서 감정 몰입이 극대화되는 영화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 <브로커>는 감정 몰입이 가져다 주는 재미도, 이야기의 신선함도 없어 보인다. 베이비 박스를 소재로 아이를 둘러싼 여러 형태의 가족이 가능함을 이야기 하는 듯 보이지만,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을 통찰하는 예리한 시선도 느낄 수 없다.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는 엄마들이 간혹 등장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현실 속에서, 아이를 지극히 아낀다는 생물학적 엄마의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스포일러(?) 주의

소영(이지은)은 가족이 있는 남자의 아이를 낳게 되고, 이 남자가 아이를 뺏으려 하자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아이를 살인자의 아이로 키울 수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감옥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런데 입양을 하고 싶지만 정식적인 절차로 입양을 할 수 없는 가족들에게 아이를 파는 브로커들이 아이를 가로챈다. 소영은 뒤늦게 아이를 찾으려 했지만, 아이가 브로커의 손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아이를 잘 키울 부모를 연결시켜줄 지 모른다는 생각에 브로커와 동행을 시작한다. 한편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형사는 범행 현장을 잡기 위해 그들의 뒤를 쫓는다. 또 한 축으로는 살해된 남자의 부인이 아이를 키우겠다며, 폭력배를시켜 아이의 행방을 찾아나선다.       


영화 <브로커>는 이런 과정 속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준다. 돈을 주고 아이를 구하다 보니 아이가 상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살해된 남편의 아내에게 아이는 복수의 수단이다. 반면 정말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부부도 등장한다. 이런 다양한 시선들로 인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생각해보게 된다. 개인적으론 영화 속에서 보육원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질문을 위해서라고 보여진다.  


영화 속에서는 소영이 브로커들(송강호와 강동원)을 조금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후회의 말을 남긴다. 꼭 피를 나눈 혈족이 아니더라도, 가족은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브로커를 좇아 나선 보육원 아이 해진은 브로커들에게 자기를 입양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마치 가족이란 협상, 또는 협의에 의해 마음만 맞는다면 구성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영화 <브로커>에서도 소영의 아이를 키우는 것은 가족이 아니다. 소영이 감옥에 있는 동안 브로커의 뒤를 쫓던 아이가 없던 형사가 아이를 맡고, 가끔 이 아이를 입양하려 했던 부부가 찾아와 같이 놀아주고, 브로커 중 한 명도 아이의 성장에 도움을 준다. 물론 소영이 출소한 후에는 소영의 품에서 자랄 것이다. 여전히 핏줄은 중요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가족의 일이 아닌 듯하다. 사회가 책임을 지고 공동 육아를 해야 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 <브로커>는 어떤 신선함도 없이, 오히려 조금은 신파스러운 감정을 지닌채, 현재와 미래 사이 어딘가의 가족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부모로서의 본능 또는 본성을 넘어 공동육아 및 다양한 육아가 가능한 세상으로 향해 간다면 과연 우리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물어보아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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