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율은 한때 40% 까지 치솟았다. 현재는 대략 35% 정도. 1인 가구의 행복도는 높아지고 있다. 굳이 가족과 함께 살겠다는 사람도 줄고 있다.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엔 이와 같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합계 출산률은 지난해 기준 0.81명이다. 사상 최저다. 가족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가족 구성원 중에 아이가 없다면 한 세대가 지나면 사라지고 말테니까 말이다.  


그러다보니 전통적인 가족 대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는 시대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남녀의 결혼과 출산으로 대를 이어가던 가족은 이제 동성 간의 가족,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집합, 공동체 구성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영화 <브로커>는 '이런 가족도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중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눈물을 펑펑 흘리게 만든 영화였다. 아이들만 남겨진 가족과 병원에서 뒤바뀐 아이를 둔 아버지의 이야기는 잔잔한 이야기 속에서 감정 몰입이 극대화되는 영화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 <브로커>는 감정 몰입이 가져다 주는 재미도, 이야기의 신선함도 없어 보인다. 베이비 박스를 소재로 아이를 둘러싼 여러 형태의 가족이 가능함을 이야기 하는 듯 보이지만,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을 통찰하는 예리한 시선도 느낄 수 없다.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는 엄마들이 간혹 등장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현실 속에서, 아이를 지극히 아낀다는 생물학적 엄마의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스포일러(?) 주의

소영(이지은)은 가족이 있는 남자의 아이를 낳게 되고, 이 남자가 아이를 뺏으려 하자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아이를 살인자의 아이로 키울 수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감옥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런데 입양을 하고 싶지만 정식적인 절차로 입양을 할 수 없는 가족들에게 아이를 파는 브로커들이 아이를 가로챈다. 소영은 뒤늦게 아이를 찾으려 했지만, 아이가 브로커의 손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아이를 잘 키울 부모를 연결시켜줄 지 모른다는 생각에 브로커와 동행을 시작한다. 한편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형사는 범행 현장을 잡기 위해 그들의 뒤를 쫓는다. 또 한 축으로는 살해된 남자의 부인이 아이를 키우겠다며, 폭력배를시켜 아이의 행방을 찾아나선다.       


영화 <브로커>는 이런 과정 속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준다. 돈을 주고 아이를 구하다 보니 아이가 상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살해된 남편의 아내에게 아이는 복수의 수단이다. 반면 정말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부부도 등장한다. 이런 다양한 시선들로 인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생각해보게 된다. 개인적으론 영화 속에서 보육원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질문을 위해서라고 보여진다.  


영화 속에서는 소영이 브로커들(송강호와 강동원)을 조금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후회의 말을 남긴다. 꼭 피를 나눈 혈족이 아니더라도, 가족은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브로커를 좇아 나선 보육원 아이 해진은 브로커들에게 자기를 입양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마치 가족이란 협상, 또는 협의에 의해 마음만 맞는다면 구성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영화 <브로커>에서도 소영의 아이를 키우는 것은 가족이 아니다. 소영이 감옥에 있는 동안 브로커의 뒤를 쫓던 아이가 없던 형사가 아이를 맡고, 가끔 이 아이를 입양하려 했던 부부가 찾아와 같이 놀아주고, 브로커 중 한 명도 아이의 성장에 도움을 준다. 물론 소영이 출소한 후에는 소영의 품에서 자랄 것이다. 여전히 핏줄은 중요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가족의 일이 아닌 듯하다. 사회가 책임을 지고 공동 육아를 해야 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 <브로커>는 어떤 신선함도 없이, 오히려 조금은 신파스러운 감정을 지닌채, 현재와 미래 사이 어딘가의 가족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부모로서의 본능 또는 본성을 넘어 공동육아 및 다양한 육아가 가능한 세상으로 향해 간다면 과연 우리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물어보아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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