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보는 돌담길이다.
성인남자의 눈높이를 살짝 넘기는 돌담의 매력.
까치발을 하면 안이 보인다.
즉 누군가의 삶이 궁금하다면 까치발을 하는 정도의 티를 내고 노력을 하라는 것.
반대로 담을 쌓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가로막지는 않는 속내.
이게 흔히들 말하는 소통을 향하는 최고의 방법이지 않을까.
돌담의 소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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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따님이 서서 오줌을 누어요"
"네? 뭐라고요?"
"아이들이 수근대길래 화장실에 가봤더니 글쎄 서서 오줌을 누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옷에 오줌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너무 잘 눠서 혹시 집에서 가르치신게..."
선생님, 당, 당황하셨어요. 그렇다고 집에서 교육한 걸로 아신다면...
쩝. 아버지 입장에서 조금 황, 황당하다는...
우리 딸내미. 대견(?)스럽다고 해야 하나. 옷에 묻히지 않고 오줌을 잘 쌌으니 ^^;
아마도 아빠와 함께 남자화장실에 가끔 들어가다보니 흉내내고 싶은 것이 아니었나 축측해본다.
그런데 여자는 앉아서, 남자는 서서가 생리구조상의 차이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우리 딸내미의 오줌 싸는 솜씨를 보아서는 ...말이다.
아련히 기억을 떠올려 보니 아프리카 쪽 어딘가에선 여자들도 서서 오줌을 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나였던 것으로)
최근 중국의 한 대학교에선 물을 아끼기 위해 여자 화장실에도 남자 화장실처럼 서서 오줌을 눌 수 있는 변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기본적 생리를 해결하는 문제에서조차 우리는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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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휴가 나오면 군복 입은 사람만 보이고, 아내가 임신하면 임신부만 보이고, 남자가 육아휴직 쓰면 평일에 아이 안고 있는 남자만 보이고......
현재 관심사에 따라 세상이 보이는 부분이 다르다.
그리고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극장 가서 영화 본다는 것은 꿈에도 불가능한 일.
그나마 케이블 TV로 늦게나마 쫓아갔던 영화도 반년 가까이 TV없이 살다보니 닭 쫓던 개보다 못하다. 그러던 차 이번 추석 연휴기간 고향에 있으면서 특선영화를 실컷 봤다. 예전 같으면 극장에서 다 봤을 영화들이었을텐데 이번에 정 반대다. 정말 하나도 본 것이 없다. 횡재한 거지 뭐.

그래서 본 영화들이 '도둑들' '댄싱 퀸' '마이 웨이' '베를린' 이다. 뭐, 영화평을 나불거리기엔 역부족이고... 그냥 기억에 남은 대사, 그것도 정확하지 않지만, 곱씹어 보고 싶다.

"도둑인데, 그럴 수 있지" -도둑들 중
"사람은 배신을 하거든" - 베를린 중

네 영화 모두 믿음과 배신으로 읽혔다. 인간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 그래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하게 됐다는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왜' 배신하는가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 깨진 자의 아픔을 동감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출하고 치유할 수 있을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역시 영화는 영화다. 믿음은 끝내 깨지지 않았고, 그것은 오해였을 뿐이다. 상처는 자연스레 아물고, 치유는 이미 이루어졌다. 오해가 아닌 자들은 영화관 밖에 서 있을 뿐이다. '사람은 배신한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베를린'처럼 독약 주사도 총의 방아쇠도 당기지 못하면서. 그저 서 있을 뿐이다.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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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강아지풀이 뛰어논다. 아이에게 강아지풀을 가르쳐줬더니 볼 때마다 멍멍이풀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개꼬리풀이라고도 불려왔다.
조의 야생종으로 조심히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구황작물로도 쓰였다. 벼과의 식물이다. 이삭이 맺혀 익으면 껍질을 벗기고 죽을 써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구황작물 하면 언뜻 떠오르지 않는 것은 가을은 보릿고개보다 그나마 견딜만해서였지 않았을까 맘대로 생각해본다.
강아지풀 뿌리는 9월에 캐어 말려서 촌충을 없애는 데 쓰기도 한다. 지금이야 구충제가 있으니 이 또한 쓰일 일이 없어졌다. 한방에서는 여름에 전초를 채취하여 말린 것을 약용으로 사용한다. 열독을 풀어주는 작용이 있다. 충혈된 눈을 치료하고 눈을 맑게 해준다. 종기, 옴, 버짐이나 상처가 생겼을 때도 쓴다.
먹을게 흔해지고 약도 넘쳐나는 시대이다 보니 길가에 흔한 것들이 대접을 못받는다. 아니다. 건강염려증 덕분에 쇠비름, 개똥쑥처럼 들판에 지천으로 널린 것들이 씨가 마를 정도로 시달리고 있다. 그런 영광(?)이 아직 강아지풀에겐 돌아가지 않았을 뿐일지도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을이 되니 강아지풀은 제 신명에 뛰어논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라는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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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콩밭에 있다'고 표현들 하죠. 그런데 왜 하필 콩밭일까요.
두가지 설이 있네요.
하나는 소작농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주인의 밭 두둑이나 척박한 자투리땅에 콩을 심은 소작농은 추수할 때가 되면 매일매일이 근심입니다. 새나 짐승들이 콩을 먹지 않을까, 누군가 훔쳐가지 않을까, 주인이 두둑도 내 땽이니 거기서 나온 수확물도 다 내놓으라 하지 않을까 말이죠. 그러니 어디 일에 집중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참, 소작농들이 그많은 곡물 중 콩을 심은 이유는 콩은 양분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만들어 자라기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되요. 콩의 뿌리에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살고 있는데 뿌리혹박테리아는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시켜 암모니아를 만들어 콩의 뿌리에 저장합니다. 그러면 콩은 이 암모니아를 이용해 단백질과 아미노산을 만들게 됩니다. 뿌리혹박테리아와의 공생을 통해 스스로 자랄 수 있는 것이죠.
두번째는 비둘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멧비둘기는 숲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하는데 콩밭은 정말 식은 죽 먹기로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늘을 날면서도 콩밭만 생각하는 거죠. '비둘기는 콩밭에만 마음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변용되어 마음은 콩밭에 라는 표현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멧비둘기가 콩밭에 가려하면 총소리가 들리고 레이저빛이 번쩍거리고, 참 귀찮을듯 합니다. 반대로 농부는 이런 것들을 설치해놓고 한시름 덜었을까요.
어쨋든 지금도 자투리땅이나 두둑엔 콩이 심겨져 있죠. 아무데서나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잘 자라는 콩이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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