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째날 

어느 정도 운전에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자신감이 붙은 것은 아니다. 조심조심 운전하고 있자니 옆에서 한마디 날라온다.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세요" 

차선을 꼬박꼬박 지키려 하고, 앞뒤 거리 유지하려 하는 모습이 영 마땅치 않은 모양이다. 실제로도 차선 자체보다는 옆차들과의 거리가 더 중요할 것이다. 

"긁혀도 좋다고 생각하고 운전하세요. 그래야 운전을 배웁니다." 

맞다. 실패를 두려워하며 안전만을 생각하다가는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를 놓치기 쉽상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던가. 또한 1000번의 실패 끝에 한번의 성공이 아니라, 1000번의 도전 또는 1000번의 행위 이후 또다른 도전 또다른 행위가 성공일 뿐이다. 

모험은 실패를 거름삼아 커가고 행복은 그 거름을 바탕으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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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첫날 배운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좌우를 둘러보라는 것. 멀리 보고 흐름을 읽으라는 것을 명심하다 보니 다른 함정에 빠졌다. 차선을 바꾸기 위해 사이드 미러를 쳐다보다 앞을 보는 것을 간혹 잊어버린 것이다. 옆 차선으로 안전하게 가기 위해 쳐다본다는 것이 오히려 지금 가고 있는 차선의 앞 차와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되 그것은 참고사항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항상 시선은 앞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가고자 하는 길을 잊어버리고 눈앞의 목적만을 향해 달리다간 꽈당 충돌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브레이크는 제동 즉 멈춘다는  뜻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연수강사는 브레이크는 정지가 아니라 속도조절임을 강조했다. 액셀도 마찬가지다. 액셀도 속도조절이고 브레이크도 속도조절인 것이다. 다만 더 빠르게이냐 느리게이냐의 차이일뿐. 운전은 속도조절의 능력을 갖추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렸다고 말한다. 절망에 빠져 한치 앞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상황. 좌절하고 움츠려들며 한없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멈춰 선 것이 아니다. 다만 속도를 늦췄을 뿐이다. 인생의 흐름에 과속을 막아준 일이기도 하다. 잠시 천천히 간다 해도 다시 액셀을 밟으면 된다. 늦게 도착한다 해도 좌절하지 않고 끝내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브레이크도 액셀도 모두 속도조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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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전. 운전학원에서 하루 20분씩 속성으로 딱 나흘. 그리고 응시한 면허시험에 덜컥 합격해버렸다. 그 이후로 핸들 잡은 적이 한번도 없으니 이건 면허를 따나 마나한 일. 다른 사람이 운전한 차만 타고 다니다 보니 너무 편했다. 가끔, 정말 가끔 운전할 줄 알았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 귀찮고 성가신 마음에 운전석에 앉진 않았다. 그러나, 이젠 더이상 미룰 수 없게 됐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일뿐더러 행동의 아버지였던 셈이다. 

아무튼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우습지 않은가. 운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쥐어준 면허증이 실제론 아무 것도 보장해 주지 못하니 말이다)하고 나서 도로연수를 신청했다. 시간당 2만원씩 10시간 20만원의 수강료. 아깝다면 아깝겠지만 차가 없는 상황에서 배우려면 별 수 없다. 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더군다나 아는 사람들은 옆에서 운전을 가르쳐주는 걸 꺼려한다. 자신의 숨겨진 성격이 확 드러날까봐. 

첫날. 액셀과 브레이크, 깜박이와 미등, 전조등 정도의 기본적인 기계 작동만 알아둔 채 바로 운전에 들어갔다. 14년 장롱인데 괜찮나요? 그냥 가세요. 제가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겁내지 말고.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액셀을 밟았다. 좌우 폭이 전혀 가늠되지 않을뿐더러 사이드 미러는 커녕 계기판 조차 흘끗 마음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 정말 말 그대로 앞만 보고 달린다. 좌우를 둘러볼 여유가 없다.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걸어가는 길에 자신이 없고, 자꾸만 주저주저 하다보면 자신의 바로 앞만 쳐다보며 가는 삶을 살아갈련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보고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이를 토대로 한 자신감을 필요로 할 것이다.  

또 하나. 앞만 보고 가더라도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 저멀리 신호등이나 교통상황 등 흐름을 먼저 읽고서 운전을 해야 방어 운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장 눈앞의 상황만을 대처하다가는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 꼼짝못하게 될 수도 있다. 흐름을 읽는 눈.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흐름을 읽지 못하면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앞서가지 못하더라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세상의 흐믈을 읽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운전, 참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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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 새로 생겨나고 있는 모니터에는 지하철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가 표시된다. 보통 한 역마다 2분쯤 걸리니, 두 정거장 전부터 보여주는 모니터에 전철이 표시되면 대략 4분 이내에 도착한다는 걸 알게 된다.   

지역 도시에서는 시내버스가 몇분 후에 도착하는지를 표시해 주기도 한다. 몇분 후 몇번 노선 버스가 어디 정류장에 도착하는지를 알려주는 서비스를 모바일을 통해서도 받아볼 수 있다.  

이렇듯 기다림도 계산이 되는 시대다. 막연한 기다림은 사라졌다. 초조해할 이유도 사라진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하는 마음이 사라지니 기다림도 편안해진다.  

사람과의 만남은 또 어떤가. 휴대폰 덕분에 약속한 상대가 어디만큼 왔는지를 시시각각 체크할 수 있게됐다. 반면 약속은 쉽게 깨지기도 한다. 연락이 어려운 시절, 한번 정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무게감을 지녔지만, 어느 순간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고 쉽게 깨지게 됐다. 또는 기다림이 헛되게 무산되기도 한다. 그러나 안절부절하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괴로워할 필요는 사라졌다. 

예측가능한 기다림이란 편안함을 준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이 철저한 계산 속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간혹 그 계산이 틀어지면 혼란에 빠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래서 그리워지는 기다림이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대상을 기다리는 것이 꼭 초조와 불안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봄이 되면 꽃이 피길 기다리고, 겨울이 되면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렇다. 물론 이런 기다림도 예보라는 형식을 통해 미리 예상할 수 있지만, 그 예보가 100% 맞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흥분을 가져온다. 동네 어귀에 피어난 샛노란 개나리나, 새벽 귀가길에 우연히 머리 위로 떨어지는 첫눈은 행복감을 자아낸다. 약속을 정해 애인을 만나는 기쁨보다도 깜짝 출연으로 얼굴을 대하는 기쁨이 훨씬 크듯이 말이다. 

편안함 보다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예측하지 못한 기다림의 대상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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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9-03-13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찾아 나서는 것도 기다림이 아닐까 싶네요. 나의 기다림이 아니라 꽃을 피우고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기다림. 이렇게 따뜻해진 날씨에 아직 매화가 안 핀걸 보니 그래도 역시 지조가 있네요. ^^; 기다림의 크기만큼 기쁨의 크기도 커지길 바랍니다.

하루살이 2009-03-15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 남산에도 얼른 개나리가 폈으면 좋겠어요. ^^
 

'참 못생겼다' 

속으로 생각했다. '웬만하면 봐주겠는데...' 

지하철 안으로 갓난아기를 안은 새색시가 들어온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다. 잠자는 갓난아기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이었던 셈이다. '정말 못났다' 납작한 코며 툭 튀어나온 입술. 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어라, 그런데 이 새색시 좀 보게. 내 마음을 읽었나? 손으로 자꾸 콧대를 세워준다. 아마 그러면 콧대가 실제로 선다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도가 지나쳤다. 자고 있던 아이가 그만 깨고 말았다. 울음을 터뜨리면서. 당황한 새색시. 얼른 코에서 손을 때고 얼르느라 정신 없다.  

풋,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 머리를 맞은듯한 충격.  

생김새란 생겨난 모양새다. 생겨난 모양새를 고치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 세상이다. 그러니 돈 들여 고치기 보다 어렸을 적부터 그 생김새를 바꾸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선뜻 이해가 간다. 잘난 자식을 만드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면 그 잘난 이라는 말엔 잘 생긴이란 모습도 포함되어져야만 한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참 잘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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