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 연대기 - 유인원에서 도시인까지, 몸과 문명의 진화 이야기
대니얼 리버먼 지음, 김명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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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목적은 건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번식에 있다. 적응이란 상황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생존에 불리한 상황일수록 강력한 진화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적응이라고 해서 모든게 이로운 것은 아니다. 진화를 이루는 변이는 상대적 손익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해로운 변이는 쇠퇴하기 마련이라 현상이 유지될 뿐이다. 반면 생존 번식에 유리한 변이는 적응되어져 변화를 일으킨다. 이것이 진화를 발생시킨다.

 

인류의 진화를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기후변화에 있다 하겠다(기후변화를 증폭시키는 현재의 문명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유인원에서 호미닌으로 진화하기까지 점점 추워지는 날씨로 인한 식량의 변화가 우리 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본다. 네 발로 걷는 것보다 직립이 4배 적은 에너지를 소모함으로써 장거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이로써 과일에서 벗어나 덩이줄기, 씨, 줄기 등을 먹고 나아가 먼 거리를 이동해 수렵과 채집이 가능해졌다. 키가 커지고 다리가 길어지고 코가 튀어나오는 등의 현대적인 몸으로 변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게다가 불을 이용해 식량을 가공하게 됨으로써 소화율이 높아져 내장은 작아지고 뇌는 커졌다. 이와 함께 입뼈가 들어가면서 발성이 가능해져 수다를 떠는 재능이 생겼다(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는 이 발성의 능력 덕분에 가상의 것,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공동체의 크기가 커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전엔 접촉을 통해 공동체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50~150명 정도 수준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류는 문화적 진화를 이루게 된다.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몸은 적응들이 복잡하게 종합된 산물이며 이 적응들은 타협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렇게 진화해 온 몸은 현재의 환경 자극이 바뀜으로 인하여 진화적 불일치 질환을 앓게 됐다. 충치나 고혈압 등이 역진화의 예다. 이 질환은 원인이나 예방치료가 어려운 비감염성 만성질환이며 번식적합도에 적거나 무시할만한 효과를 지녔다. 원인 인자는 문화적 이점을 가져다준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는 어릴 때 전염병으로 죽는 대신 비전염병에 시달리며 오래 사는 역학적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튼 현대인의 몸은 과잉의 에너지 탓에 비만으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몸은 끊임없이 공급되는 잉여에너지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적응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섬유소 없는 가공식품은 간과 췌장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보다 빠르게 열량을 흡수함으로써 내장지방을 쌓게 만들고 이로인해 대사증후군으로 인한 각종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 몸이 살이 찌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들어오는 열량이 나가는 열량보다 많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은 음식의 종류가 바뀌면서 심해졌다. 포도당이 많은 음식, 포도당으로 분해하는 속도가 빠른 음식 탓인 것이다. 당 분해 속도를 늦추고 수송 속도 또한 늦춰주는 섬유소가 없는 포도당과 과당으로 인해 간에 급하게 많이 도달함으로써 과당은 지방으로 바뀌고 이것은 간에 쌓여 염증을 일으킨다. 이로인해 인슐린 작용이 방해 받고 간에 저장된 포도당이 혈류로 나와 인슐린이 분비된다. 여분의 포도당과 지방을 세포로 옮기고 지방세포와 동맥 등에 저장이 된다. 이런 음식의 변화의 중심에는 1970년대 발명된 고과당 옥수수 시럽이 있다. 반면 신체활동이 많으면 미토콘드리아 수가 증가해 지방과 당을 태우지만 현대인은 신체활동이 오히려 적어 비만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일구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타협으로 이루어진 몸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기 위해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단순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식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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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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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란 무엇인가? ... 삶이 왜곡되면 생리적 리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지순한 사랑의 파토스도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 건강은 삶에 대한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병을 지혜의 결핍으로 정의한다. 동의보감의 의학적 비전인 양생술은 원칙적으로 유불도 삼교회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수행의 핵심은 비움이다. 무지와 탐착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생술이란 무지로부터의 자유, 곧 내 안에 있는 지혜를 일깨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혜의 핵심은 소통이다. ...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병이다.

 

아프고 괴로우면 그때 비로소 세상과 타인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앓는 마음의 병은 놀랍게도 그 반대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해 왜 사람들은 나만 미워할까 등등. 오직 자신만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은 안중에도 없다. 그만큼 타인의 삶에 무관심하다. 더 정확히는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역지사지라는 윤리가 사라져버렸다. 대신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인정욕망은 하늘을 찌른다.

 

불행을 위해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생명의 본질은 비극이 아니라 명랑함이다. ... 존재 안에서 생명의 리듬을 찾아내고, 그걸 통해 사회적 표상과 통념을 날려 버리는 능력, 그것이 곧 유머요 명랑함이다.

 

연애와 성욕으로 이루어진 홈 파인 회로를 벗어나려면 혹은 가족이 타자들의 공동체가 되려면, 무엇보다 우정과 신의라는 가치의 복원이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우정은 윤리적 덕목을 넘어 정치적 명제에 해당한다.

 

마을은 공동체의 최소단위다. 마을을 움직이는 동력은 제도나 시스템이 아니다. 자치와 자율이다. 전자가 경제적 자립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윤리적 주권에 대한 것이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길, 가족주의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이것뿐이다. 121

 

잠을 잘 자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집중력이 생기려면 청심을 유지해야 한다. 부질없는 욕심을 덜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동의보감은 말한다. 심이 고요하면 신명과 통하여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밖을 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알게 된다. 그때 비로소 존재의 무게중심을 오롯이 걸게 된다. 마음을 비운 채 온몸으로 터득하는 것, 그것이 공부이자 곧 쿵푸다. 136

 

언어는 자신과의 소통이자 타자와의 능동적 교감행위이다. 이 소통과 교감의 욕망이 서사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서사는 그 자체로 집합적이다. 여기서는 다다익선의 법칙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더 핵심이다. 타자들의 시끌벅적한 향연, 그것이 곧 서사적 네트워크요 길이다. 따라서 이 길 위에선 늘 유머가 생성된다. 유머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다. 이 전복적 여정 위에서 또 다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고로, 서사와 유머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최고의 다리다. 169

 

평생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하고 섹스와 번식 이외에 어떤 삶의 기쁨도 누릴 수 없었던 노예의 삶이 그토록 그립단 말인가? 또 사랑과 연애만 잘 되면 생로병사의 근원적 문제가 풀릴 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삶을 규정하는 그 같은 전제를 바꾸지 않고서 좋은 팔자란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을 다 가져도 결핍 아니면 공허다. 상처뿐인 영광 혹은 팔자.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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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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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마냥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도 각자의 독특한 방식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아무런 방식없이 살아간다'는 무방식도 하나의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방식이 죽을 때까지 고정된 것은 아니다. 수십년을 한결같이 살 수도 있지만 순간순간 방식이 변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방식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관여되고 있을 뿐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동의보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썼다. <몸과 인문학>이라는 책에서는 성형, 연애, 가족, 드라마, 영화 등등 일상 속 모습들이 동의보감이라는 안경을 쓰고 비쳐진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어딘지 모르게 병들어 있는 상태다. 동의보감이 말하는 건강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말한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 삶이 왜곡되면 생리적 리듬도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지순한 사랑의 파토스도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 병이 된다. .. 건강은 삶에 대한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 인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병을 지혜의 결핍으로 정의한다. 동의보감의 의학적 비전인 양생술은 원칙적으로 유불도 삼교회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수행의 핵심은 비움이다. 무지와 탐착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생술이란 무지로부터의 자유, 곧 내 안에 있는 지혜를 일깨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혜의 핵심은 소통이다. ...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병이다."

 

이런, 또 소통이다.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소통의 문제가 건강의 관점에서도 말썽이다. 소통의 부재라는 한탄은 결국 사회적으로 병이 들어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 또한 마찬가지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한없이 채우려고 하는 욕망들로 들끓어 있기에 소통의 공간이 부재한 것이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꽉꽉 채우려다 보니 욕망의 변비가 생겨 얼굴엔 일그러진 표정들 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비움이고 그 비움은 바로 명랑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은 고미숙이 줄곧 이야기해 왔던 박지원과 임꺽정, 그리고 동의보감으로 이어지는 서사와 유머라는 문맥과 상통한다.

 

고미숙은 말한다. "불행을 위해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생명의 본질은 비극이 아니라 명랑함이다. ... 존재 안에서 생명의 리듬을 찾아내고, 그걸 통해 사회적 표상과 통념을 날려 버리는 능력, 그것이 곧 유머요 명랑함이다."

 

생명이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생명들이 있다. 바로 슬픔과 고통 때문이다. 그렇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일단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겠다. 그러한 욕망의 표현이 바로 명랑함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명랑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명랑함은 곧 소통의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다. 비로소 건강함으로 가는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언어는 자신과의 소통이자 타자와의 능동적 교감행위이다. 이 소통과 교감의 욕망이 서사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서사는 그 자체로 집합적이다. 여기서는 다다익선의 법칙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과 차이가 더 핵심이다. 타자들의 시끌벅적한 향연, 그것이 곧 서사적 네트워크요 길이다. 따라서 이 길 위에선 늘 유머가 생성된다. 유머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다. 이 전복적 여정 위에서 또 다시 삶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고로, 서사와 유머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최고의 다리다. 169쪽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 좀 하며(만들어가며) 명랑하게 살아보자. 그런데 도통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혹시 마음억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면 건강을 위해 아침운동을 하듯 이제부터 명랑운동을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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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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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해 <콰이어트>라는 책이 꽤 높은 인기를 얻었다. 베스트셀러로 명성을 떨칠 때 개인적으로 이런 선입견이 들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성적 성격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은 이런 내성적 성격에 대한 긍정이자 그들을 위한 위로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가능성을 태생적으로 갖춘 셈이다. 그렇기에 궂이 이 책을 찾아 읽을 필요가 있을까. 나의 내성적 성격을 고칠 필요가 없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읽고 말았다. 이책 <콰이어트>를.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궁금해졌다. 나의 선입견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도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책의 내용은 기대 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와 그 다양성이 갖는 장점을 살리고자 하는 작가의 인식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는 지금의 세상이 외향적 사람들이 기세를 떨칠 수 있도록 변모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교육현장에서 토론식 학습의 장려와 확장, 직장에서는 유창한 말과 사교 능력이 창의성이 있다고 해석되어지는 현실은 외향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겐 천국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내성적 성격을 지닌 사람들에겐 적응하기 힘든 고역스러운 곳이 되어버렸다. 이런 외향적 시대의 배경에는 산업화, 도시화가 깔려 있다. 즉 모르는 사람들과 무수히 접촉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외향적 사람들이 빛을 발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인격의 문화가 성격의 문화로 대체되는 현상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모든 사람들이 외향적이라면 그 조직이 어떻게 될지.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모험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필요한가 하면, 그 길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꼼꼼히 뒤돌아보며 살펴볼 사람도 필요하다. 그런데 모두다 앞으로만 나아간다면 결국 모두 벼랑 끝 바다로 추락하는 레밍쥐 꼴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각자의 성격 특성에 맞는 조직 내 임무를 맡아 협업을 하는게 중요하다. 즉 알맞은 자리 배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외향적 사람들만이 승승장구하는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되 멈춰서 반성, 반추할 줄 알 때 그 조직이 생존, 발전할 수 있는게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향적 사람들이 항상 움츠러들며 수동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핵심목표가 생긴다면 행동의 한계도 뛰어넘는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특성에 맞는 자리를 찾아가고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핵심목표를 내세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때론 외향적인 척하는 연기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일은 무척 피곤한 일일 터이다. 그렇기에 이들 내성적 성격의 사람들에겐 회복환경이 필요하다. 외향적 사회에 발맞춘 피로를 회복하고 다시 세상에 뛰어들 그런 환경말이다.

물론 이런 외향적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세상으로 변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먼저일 지도 모른다. 서로의 개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개성에 맞춘 일을 할 수 있는 세상 을 위해 내성적인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IT의 발전으로 인해 내성적인 사람들도 그 꿈을 펼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얻게 됐다. 바야흐로 외향적인 사람들과 내향적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인정해 줄줄 아는 풍성한 세상이 될 수 있는 보다 나은 세상이 다가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 <콰이어트>를 통해 내성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긍정적 에너지를 세상에 맘껏 표출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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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2013-04-1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제 카페에 스크랩해갈께요..^^*
 
2015년, 빚더미가 몰려온다 - 최악의 시나리오로 내달리는 한국경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박종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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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권하는 사회다. 휴대폰으론 너도나도 돈을 빌려주겠다며 전화를 해대거나 문자를 보낸다. 은행이나 제2금융권도 돈을 갖다 쓰라고 유혹한다. 마치 눈먼 돈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빚은 훌륭한 자산이 됐다. 갚아야 할 짐이 아니라 빚을 지고 투자를 하면 그 몇배를 벌어들일 종자돈처럼 행세한다. 그러더니 결국 일이 터졌다. 빚과 함께오는 그림자, 즉 이자가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집값도 땅값도 주춤하고 주식도 원하는만큼 오르지 않다보니 빚을 빌려 투자한 사람들은 이자를 갚느라 허덕인다. 정부의 각종 세제 혜택 유혹에 넘어가 빚을 지고 살 집을 장만한 사람들도 허리 필 날이 없다. 2012년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1000조원, 1인당 2000만원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다. 또한 개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유럽은 물론 재정절벽의 위험에 처한 미국 등 전세계가 빚잔치에 빠졌다. 빚으로 풍요로웠던 삶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누구인가 "배 째"라며 모라토리엄이나 디폴트를 선언해 버린다면 세계 경제는 휘청일 것이다. 아니, 누군가 선언을 하지 않더라도 곧 선언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한 순간 그 공포심으로 인해 너도나도 빚을 거두어 들이려 한다면 경제는 산산조각날 수도 있다. 그 공포심이 도래한 순간, 그것을 우리는 임계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2015년 빚더미가 몰려온다>는 카오스 이론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복잡계 경제학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를 바라보고 있다. 복잡계 경제학은 경제를 안정되고 평형 상태에 놓인 시스템이라 보지않고 경제의 불안정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성이 계속 누적되면 나중에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임계상태에 다다르는데 저자는 이런 변수로 과도한 빚을 들고 있다.

그런데 빚을 지는 것이, 그것도 지금처럼 과도하게 지는 것이 가능한 것은 무엇때문일까. 바로 금융자유화 때문이다. 그리스 경제가 붕괴 위기를 맞게 된 것도 유로화 채택으로 국외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거품 경제를 조성한 데 그 원인이 있다 하겠다. 물론 이에 걸맞은 생산성이 따랐다면 그 빚을 청산했겠지만 부동산 거품만 불러오고 만연한 부패로 재정은 적자 상태를 면치 못한 것이다. 이런 유럽발 위기는 세계로 전염됐다. 금융강국이라 칭송받던 미국도 버블이라는 치명적 유혹에 빠져 금융위기를 불러왔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그나마 두터웠던 중산층이 무너져가면서 대붕괴를 부르고 있다. 소득 불평등이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고 이로 인해 투자의 불확실성이 커져 투자가 줄어들게 되는 현상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과 든든한 사회안정망, 활발한 계층 이동성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최전성기를 누렸던 지난 시대의 미국 사회가 현재 위기에 처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우리도 휘청인다. 경쟁은 불공정하고 사회안정망은 허술하고, 계층 이동은 꽉 막혀 있다. 더더군다나 우리는 2020년이 되면 생산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지금 경제의 기반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에서 살아남는게 몹시 힘들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이런 현상을 다양한 통계 수치로 설득해낸다.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든다. 빚더미에 몰린 한국경제를 새 정부가 어떤 길로 인도할 것인지 날 선 눈길로 바라보게 만든다. 지금 당장의 평안과 안도로 눈앞의 추락을 나몰라라 하면 안 될 일이다. 이 책은 앞으로 전개될 한국 경제 정책들과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 볼 눈금자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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