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코끼리는 멜론을 좋아해! 푸른숲 작은 나무 16
하이리 슈트룹 글.그림,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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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에서도 멜론이 열리고 제비꽃이 필 수 있을까? 얼음으로 뒤덮였다고 생각하는 몹시 추운 북극,그곳에서 꽃이 피고 멜론이 열린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날 교수와 정원사가 사람들은 모아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다. 교수는 열대과일인 멜론을 북극에서 키울 수 없다고 하고 정원사는 온도만 잘 맞추어 준다면 멜론도 키우고 제비꽃도 핀다고 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을까? 정원사의 말이 맛다면 큰 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정원사는 제비꽃뿌리와 멜론 씨앗을 들고 북극으로 향한다. 그곳에 온실을 짓고 제비꽃과 멜론을 심는다. 그런데 어느 날 뇌조와 바다코끼리가 그만 온실을 망가뜨리고 마는데 바다코끼리는 처음 맡아 보는 제비꽃 향에 취해 온실 고치는 것도 도와주고 정원사와도 친해셔 청어와 조개도 잡아다 주고 정원 일도 도와준다. 그 덕분에 멜론이 다른 곳보다 더 크게 자랄 수 있었다.


멜론을 먹어보지 못한 바다코끼리,처음 멜론의 맛을 접해 보고는 멜론에 빠졌다. 그런데 정원사는 교수와 한 내기에서 자신이 이겼기에 당당히 제비꽃과 멜론을 들고 자신의 도시로 돌아 간 것.바다코끼리는 제비꽃향과 멜론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정원사를 찾아 가고 싶다.아니 멜론이 어디에서 자라는지 그곳으로 가고 싶다. 지혜가 있는 북극여우에게 물어 보지만 여우는 꾀를 생각하여 반대로 말해 주어 바다코끼리는 북극점을 향하여 가게 되었고 그 길에서 북극곰을 만나게 되어 여우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을 알게 된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바다코끼리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가야만 멜론이 자라는 땅을 찾게 된다는 알게 되고는 여행을 시작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정말 엉뚱한 여행이다. 바다코끼리가 남쪽을 향하여 도시로 여행이라니.하지만 동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가는 길에 고래를 만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러다 제비꽃향과 멜론향을 맡고 배를 쫒아가 제비꽃이 아름답게 피는 땅에 도착을 한다. 하지만 정원사를 쉽게 만날 수는 없다. 우여곡절을 겪는 바다코끼리,그렇다 그는 도시가 아닌 북극에서 살았으니 도시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그가 본 것은 겨우 뇌조나 북극여우 북극곰 정도인데 여긴 차도 있고 사람도 많다. 어디로 가야할지 난감하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기도 쉽다.바다코끼리는 제비꽃향을 쫒아 가다가 사람들에게 잡혀 갇히게 되고 다행히 쥐를 만나 정원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앞까지 오지만 정원사에게 향하던 쥐가 그만 유모차에 치여 죽고 만다. 죽은 쥐의 친구들이 바다코끼를 도와 정원사를 만나게 되고 정원사는 북그에서 멜론을 키운 것이 거짓말이라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지만 바다코끼리가 나타나 그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받게 되고 상금도 받게 된다. 어쩌면 바다코끼리와 정원사는 서로 도움을 주는 그런 관계로 거듭나게 되고 그들은 다시 북극으로 돌아가게 된다.


동화는 바다코끼리가 단순히 멜론을 좋아한다는데서 시작을 했지만 어찌보면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그렇게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 세상인듯 하다.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진정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남을 속이는 거짓된 삶을 사는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남을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보면 세상은 바다코끼리처럼 '도전'을 하고 자신 스스로 노력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노력을 하다보면 자신의 힘보다 더한 함께 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도움을 받아 가며 더 큰 결실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곳이 세상이고 인생인듯 하다.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상상력과 희망을 주고 어른들이 읽어도 재밌다. 이론적으로 따지며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며 세상을 바라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덩치도 크고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바다코끼리의 조금은 무모한 여행인듯 했는데 읽다보니 참 따듯한 동화였다. 더불어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란 것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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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따뜻한 햇살에서 - 텃밭 옆 작은 통나무집 88세, 85세 노부부 이야기
츠바타 슈이치.츠바타 히데코 지음, 오나영 옮김 / 청림Life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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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의 노후엔 땅을 일구며 사는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활을 미리 경험하기 위하여 귀농을 하여 사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이 준비가 되었어도 생각과 다르게 전원생활이 맞지 않거나 혹은 귀농했다가 다시 돌아 오는 사람들 이야기도 적지 않게 보았다. 생각보다 땅을 일구며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도시 생활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시골의 생활이 생각보다 부지런해야 하고 농사 또한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만만히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귀농자들이 전원생활자들의 경험이 담긴 책이나 다큐를 통하여 접해 보곤 했지만 퇴직 후에 이렇게 노부부가 함께 건강하게 자식들이나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텃밭을 일구고 땅에서 수확한 것들을 모두에게 나누며 사는 소박하면서도 부지런한 삶은 노후에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 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타샤 튜더는 직접 땅을 일구고 꽃을 심고 땅에서 거든 것으로 입고 먹고 모든 것을 했다고 하고 그녀의 정원은 많이 알려져 있다. 사계절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정원은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꿈꾸는 정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넓은 땅보다는 정말 가족이 모두 나누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채소와 유실수를 심을 수 있는 땅만 있다고 해도 모두가 행복하게 나누어 먹을 수 있음을 슈이치 노부부의 삶을 통해서도 그리고 우리 부모님을 통해서도 알겠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텃밭과 그외 아버지가 일구실 수 있는 정도의 밭을 가지고 아버지는 살뜰하게 밭을 일구어 사형제들에게 골고루 먹거리를 떨어지지 않게 나누어 주셨다. 그것이 삶의 희망이고 마지막까지 당신의 기쁨이기도 하셨으며 보람이었다. 그것을 지금은 오빠들과 엄마가 나누어 하시고 계시는데 아버지만큼 밭을 유용하게 가꾸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밭을 놀리는 일이 없이 늘 작물들로 풍작을 이루셨는데 지금은 밭이 노는 경우도 있고 그때만큼의 작물을 거두어 들이지 못한다.땅을 일군다는 것은 보통의 부지런함으로는 부족하다. 슈이치 부부의 삶을 보아도 사시사철 몸을 놀리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건강 비결이 아닐까 한다.

 

건강한 삶이라 어디에서 오는가? 행복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슈이치 노부부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삶을 들여다보니 많은 것을 거두기 보다는 사시사철 텃밭과 그 주변의 유실수에서 거두어 들이는 과일들로 제철 먹거리와 저장식품을 만들어 언제 어느 때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을 뿐더러 자식들이나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복한 먹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일분 일초도 가만히 쉬지 않고 움직임에서 오는 건강함,그리고 텃밭에서 거두어 들이는 제철 재료로 건강한 먹거리를 먹기 때문에 누구보다 건강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많이 거두어 들여서가 아니라 나누어 먹는데서 오는 행복 또한 소소한 행복과 건강함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한다.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지런 하고 젊은 사람도 실천하기 힘든 정도로 무엇이든 직접 몸으로 해내는 노부부의 삶이 정말 닮고 싶고 언젠가는 꼭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다.부부란 서로에게 모자라는 부분을 메꾸어 주면서 그렇게 상호 보완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아내의 털털함에 남편의 꼼꼼함이 보태어져 어느 곳보다 정말 유용한 작으면서도 어느 밭보다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텃밭으로 거듭나기도 했지만 생활 여기저기에도 슈이치 할아버지의 정리정돈의 힘과 건축가과 요트생활이 보탬이 되어 더욱 노련미가 보이는 삶을 엮어 나가고 있지 않을까.그러면서 히데코의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 내는 요리솜씨며 직물솜씨는 정말 대단하다.

 

'이젠 저희 둘 모두 저 텃밭의 잡초처럼 강하답니다.' 잡초라는 것이 뽑아도 뽑아도 다시 살아나거나 다른 것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솎아내 버려져야 하는 습성을 타고 났기에 더 강한 생명력을 부여 받은 것일까? 아마도 땅을 일구며 노부부는 자연에서 건강하게 사는 삶을 몸으로 체득하고 또 금방 금방 텃밭에서 거두어 둘인 채소와 과일들이 그들의 건강에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땀을 흘리지 않고 거져 얻는 것은 없다. 내가 진정 흘린 땀으로 얻은 결실이야 말로 진정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내것이 될 수 있다. 자투리 공간까지도 버리지 않고 모두 활용하여 쓸 수 있도록 구획을 나누고 푯말과 꼬리표를 달아 놓은 노부부의 텃밭은 그야말로 노다지다. 두 부부의 인생을 책임지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전해주는 그런 텃밭이 되지 않았을까. 산다는 것은 별거 아닌듯 하다. 많은 돈을 들여서 건강을 다지기 보다는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일구며 땅을 밟고 직접 수확하며 건강한 먹거리와 함께 하는 소소한 행복이 가져다 주는 삶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다시 한번 더 느껴본다. 정말 노부부의 삶처럼 언젠가는 그렇게 살아 보고 싶다. 많은 것을 바라기 보다는 적은 수확이라도 나누며 사는 소소한 삶말이다. 노부부가 오래도록 건강한 삶을 이어가길,두 분의 건강한 웃음이 오래도록 함께 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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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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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는 것이 아닐세. 우리 자신에게 있다네.' 우리 주위에서는 잘못이 무수히 많다. 무엇이 잘못일까? 아직 죽음을 논하기엔 이른 아이들이 암에 걸려 신체를 일부를 적출하거나 혹은 잃어버린 폐의 기능을 인공물로 대신하는,죽음을 앞두고 자신들이 잊혀지거나 혹은 남은 이들에게 상처를 줄까봐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잘못일까. 죽음이란 어느 나이를 떠나서 두렵고 무섭고 '지금은 아니야'라고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죽음도 삶의 일부이고 연장이다. 영원한 것이 있을까. 나이를 먹어가고 부모님들의 부고소식을 하나 둘 접하면서 많이 듣는 말이 '가는데는 순서가 없더라'라는 말이다. 병원에 가면 나이 먹은 사람들보다 어린 친구들이 아프거나 안좋은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가 더 슬프다.아직 꽃도 피워보지 않았는데 그들이 죽음과 싸우거나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슬프다,하지만 그게 인생인것 같다.

 

16,17 사춘기에 한창 성장할 나이에 헤이즐과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말기암환자이거나 먼저 떠나간 이들이다. 강한 약으로 인해 방안에 있기 보다는 돌아다녀야 할 나이에 약과 병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집안에만 있는 헤이즐,그녀에게 친구를 사귀어 보라는 뜻으로 엄마는 서포트 그룹에 참여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알게 된 어거스터스,그도 암으로 인해 다리 하나를 잃어야만 했고 그녀의 여자친구도 잃었다. 비슷한 상황과 아픔에 처한 그들의 서포터즈 역할을 하는 사람 또한 암을 이겨낸 사람이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서로에게 반해 남은 시간들을 함께 한다.아니 지금까지 그들을 붙잡고 늘어졌던 지긋지긋한 '암'이 전부였던 삶에서 일반적인 사춘기 소년과 소녀의 삶으로 돌아가듯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을 나누고 감명깊게 읽은 책을 나눈다. 헤이즐은 그녀가 읽은 <장엄한 고뇌>라는 책을 어거스터스에게 권하기도 하고 맘에 드는 부분들을 나누기도 하는가 하면 이야기가 갑자기 결말도 없이 끝나 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작가에게 꼭 '결말'을 묻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인생도 자신이 원하던대로 결말을 쓸 수 없지만 소설이란 소설로 끝이나야 하는데 헤이즐을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비극적이었던 소설의 결말을 그녀는 어쩌면 자신과 닮지 않은 '해피엔딩'으로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지 모른다. 소설은 소설속에 또 하나의 소설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 소설 또한 암과 사투를 벌였지만 어린 나이에 죽음에 이른 소녀의 이야기가 나오는 듯,그렇다면 작가는 왜 소설의 결말을 내지 않고 소설을 끝내기도 했지만 미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듯 떠나 살게 된 것일까.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에게 <장엄한 고뇌>는 그들의 병과 싸우는 동안 정말 '장엄한 고뇌'가 되고 만다. 산소탱크를 가지고 다니면서도 어거스터스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겁고 기분 좋기만 한 헤이즐,다리 하나와 여자친구를 잃고도 밝게 살려고 했던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작가를 만나러 암스테르담행을 강행한다.어린 암환자 둘이 먼 길을 여행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여행은 그들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는 상황,그들의 인생이기에 안전을 기여하며 모두가 그들의 여행을 돕는다. 하지만 어거스터스는 암이 다시 재발한 것.

 

힘든 여행 끝에 만난 자신들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인 작가,그는 엉망이었다. 그가 왜 그렇게 엉망이 되어야 했을까? 그에게도 아픔의 상처가 있었던 것,어린 딸을 암으로 잃어야 했던,소설속의 아이가 그녀의 딸 이야기라면 소설은 그의 이야기일까. 상처를 그저 상처로만 안고 있는 작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인생을 허비하듯 술에 젖어 살고 있는 그를 보며 그 둘은 그들만의 즐거운 여행으로 마무리 하지만 어거스터스에겐 힘든 여행이었나보다. 헤이즐 또한 이 여행은 힘든 여행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그녀는 한 뼘 더 성장해 있다. 콕 박혀 있듯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녀가 어거스터스를 만나고부터 집에 있기 보다는 밖으로 향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상처와 남겨진 자들에게 남을 흔적에 대하여 조금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어린 나이게 감당하기 힘든 '죽음'과의 대치에도 어른 못지 않은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녀 또한 언젠가는 상처와 흔적을 남겨 놓고 사라져버릴 것이란,죽음이 그녀에게도 임박해 있음을 알기에 담담히 받아 들이고 있는 것 같은 아픔.

 

어거스터스의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 또한 남겨지는 부모님께 짐을 남겨 주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는 엄마대로 씩씩한 도전을 하고 있고 어거스터스가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흔적을 보면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 들이는 헤이즐의 삶이 너무 먹먹하다. '나 그 애를 사랑해요.그 애를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정말 행운아에요. 반 호텐, 이 세상을 살며서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고를 수 있어요.난 내 선택이 좋아요. 그 애도 자기 선택을 좋아하면 좋겠어요.'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와 그의 친구들이 원했던 삶은 '사람처럼 사는 게 좋고,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걱정은 죽음의 또 다른 부작용이다.' 평범한 삶을 살거나 죽음이 아닌 재발이나 전이가 아닌 지금 상태만 유지하는 것을 원했지만 암이란 녀석들은 아직 죽음을 감당하기 힘든 어린 생명들을 무참히 짓밟고 지나가 버렸다. 어거스터스에게서는 다리도 모잘라 그의 생명을 가져가 버렸고 헤이즐의 폐는 온전하지 못하다.누구의 잘못일까.

 

힐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헤이즐에게 남은 시간동안 그리고 어거스터스가 헤이즐과 함께 한 시간동안은 어느정도 그들에게 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이 되었을까. 마지막 부분은 약간을 추리적인 요소도 있고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로맨스가 있기도 하니 어떤 류의 소설이라고 정의하기가 애매하지만 '죽음'이라는 문제에 당면한 사춘기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라 그런가 무척 무겁기도 하고 생각할 것이 많다.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큰 문제이다.자신의 명을 다 살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좋겠지만 결말이 없는 소설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면 누구나 우왕좌왕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환자 곁에서 함께 하는 보호자들 역시나 우왕좌왕하게 된다. 나 또한 친정아버지를 폐암으로 보내 드리며 소설속의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해서인지 소설을 더 실감나게 읽게 되었고 어거스터스의 죽음과 그들이 고통을 느낄 때의 먹먹함과 울컥함이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구나. 그 소설은 종이에 몇 글자 끄적거린 걸로 만들어진 거야. 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런 끄저거림의 바깥에서는 아무 생명력도 없어.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소설이 끝나는 순간 존재하기를 멈춰 버렸지.' 소설이 끝나는 순간에 소설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캐릭터들의 존재가 멈추듯이 인간 또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멈춰 버릴까? 자신이 살아왔던 아니 남겨진 사람들에게 '흔적'이 어떻게 남겨질까? 소설처럼 죽음으로 멈추어 버릴까. 0과 1사이에 존재하는 무한대의 무한대의 시간이 존재함을,흔적을 남겨 놓고 간 사람들과의 무한대의 시간은 존재한다는 것,죽음도 삶의 연장이기에 삶과 죽음의 연속선상에서 무한대의 시간 속에 존재했던 그들의 상처와 아픔의 시간들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을 듯 하다. 헤이즐의 해피엔딩으로 연장하고 싶었던 소설의 이야기처럼 그녀의 삶이 연장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소설을 덮는다. 삶도 죽음도 영원한 것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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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즐겁다 사계절 1318 문고 67
김이연 지음 / 사계절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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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인 사춘기에 자신의 색깔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듯 하다. 학교 진도를 따라가며 공부하기도 힘든데 나중에 무엇이 될까?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하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친구들이 몇이나 될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결정했다 해도 성적이 따라주지 않아 다른 과를 선택해서 대학을 결정해야 하는 난감한 현실앞에, 또한 자신의 적성에 맞는 학과를 나왔다고 해도 현실에서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어른들의 세대와는 다르게 청소년들은 자신의 적성에 맞고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한다. 그만큼 개성도 강하고 윗세대하고는 생각도 다르고 보는 것도 경험하는 것도 물론 다르다. 하지만 현실에서 따라주지 않는 이질감 때문에 가끔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음을 종종 접하게 된다. 현실과 너무 다른 교육앞에서 늘 좌절하고 상처를 입는 것은 아이들이다.

 

공부와 피아노를 병행하던 우리들,하지만 두가지를 모두 하기엔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 한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부모님의 뜻을 받아 들이기도 하고 현실에 따르기도 하여 피아노를 접고 공부를 하게 되었지만 사람은 버리거나 잃어버린 것에 더 애착이 가게 마련이다.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하니 피아노에 더 애착이 가고 집착이 생기고. 하지만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또 다른 꿈을 향한 출발선에 섰지만 마음은 늘 흔들렸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과연 나중에 어른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런 와중에 친구의 '고백'을 듣게 되었고 그 친구는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못한 고백을 알콜의 힘을 빌어 하게 되었다. '나 게이인가봐.' 그 말을 듣고 정말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지만 게이이기 이전에 너무도 친한 친구이다. 친구의 아픔을 감싸주어야 할 것만 같아서 친구와 함께 고민을 하고 부모님께 그런 친구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엄마의 말씀, '게이라고 다를게 없지. 다 같은 친구고 사람인데 어제와 똑같은 친구일뿐야.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니가 다르게 대하면 친구는 더 힘들어 할거야.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끼듯 그 친구도 어느 한부분 다를뿐이지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야.잘 감싸주렴.' 친구의 고백에 한참 혼자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도 별거 아닌 문제가 되었다.친구는 친구일뿐이다.

 

사춘기시절은 정말 공부도 그렇고 성적인 문제도 그렇고 이성이나 판단력등 어린이에서 갑자기 '어른'이 되는 시간이듯 하다. 지금까지 그냥 걸어 왔던 길에 무언가 뜻이 있어야 하고 목표점을 정해놓고 가야만 하는가 하면 책임감도 가져야 한다. 늘 자유로운 아이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자녀나 학생을 원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공부만 할 수는 없다. 공부가 길이 아닌 사람도 있고 다른 것이 자신의 색깔일 수 있는 친구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교육 현실은 그런 것을 인정해 주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이 똑같은 길을 가는 것을 원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란은 중2 학생이다. 그가 갑자기 '영양실조'라는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도 실은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한,수행평가를 이행하기 위하여서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안에 지금까지 그런 모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무대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신이 짜릿한 쾌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자신의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오빠 이락은 이름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정체성과 싸우고 있었다.그것도 혼자서. 아빠 혼자서 이란과 이락을 키우고 있는데 그런 아빠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이야기 했다가 더 혼란만 가져온다. '나 게이에요.' 그것을 받아 들일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사회도 이상한 '인간'으로 손가락질하며 보고 있는데 부모나 형제라면 아니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라면 어떠할까? 그리고 이란과 함께 하는 유미는 어린시절 뚱뚱하다고 놀림을 받다가 다이어트로 인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런 자신의 몸정체성에서 빠져 나오질 못하고 '거식증'에 걸린다. 청소년들이 한번쯤 겪어볼 문제들을 재밌고도 감동 한숟갈 보태어 잘 다루어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이것이 내게 맞는 옷인지 모르고 살 수도 있다.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자신의 성정체성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감지하지 못할 수도 분명 있다. 어른들의 입장이라면 '내 아이만은 아니길' 분명 모두가 그렇게 원한다. 받아 들이고 이해해 주기 보다는 '포기' 를 권한다. '이거 하지 마라.그거 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공부, 공부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말처럼 정말 사회는 성적순이 아니고 행복도 성적순이 아니다. 그런데 공부를 강요하는 세상이다. 그 속에서 벤드를 하겠다고 나 게이라고 하면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학교로부터 '무기정학'을 받는다면,아 정말 마음 아프다. 누군가 그들의 아픔을 감싸주기 보다는 '포기해.하지마'라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지금 넌, 너 스스로를 사랑하니?' '게이인 이락, 그대로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세요. 저희 아버지처럼 아들 하나 잃고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요. 가족은 그런 거잖아요. 언제나, 그 누가 뭐라 해도, 늘 한결같은 내 편, 그게 가족이잖아요.'

 

가족이란 무엇일까? '늘 한결같은 내 편.'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란의 가족 또한 오빠인 이락이 게이라고 하기 전에는 모두가 문제없는 '가족'의 밑그림을 충실히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빠가 '커밍아웃'을 하면서 혼자인 아빠도 흔들리고 벤드를 하는 이란도 흔들리고 물론 현실에서 '게이'을 인정해 주지 않는 친구와 선생님 학교와 맞써 싸우는 이락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란도 이락도 그리고 아빠도 아픔을 견디며 흔들림에도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고 굳건히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맞써 싸워서 이겨내려고 단단히 벼르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란은 자신이 발견한 '꿈' 을 향해 더 열심히 노력하기로 하는가 하면 이락은 자신의 현실과 맞써 싸우기로 했고 뜻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 곁에 많다는 것을,그리고 자신으로 우뚝 서는 방법을 찾아 나가는가 하면 아빠 또한 가슴이 시키는 일을 찾아 나선다. 모두가 흔들린만큼 한 뼘 더 성장을 하여 희망을 향한 출발선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말랐지만 살이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거식증의 유미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거식증에 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지금 넌, 너 스스로 행복하니?' 내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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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철원 창비청소년문학 44
이현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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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그곳의 해방 전 후의 표정을 청소년들의 눈을 통하여 참 잘 그려낸 역동적인 역사소설인 듯 하다. 땅에만 '분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38선'이 존재하듯 공산주의를 따르는 사람들과 조선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대립이 결국에는 서로의 불행으로 엮인 아픔의 땅 철원,그곳에서 아이들은 어떤 '해방'을 맞았을까.그들이 꿈꾸던 '해방'은 그들이 꿈꾸던 '희망'은 무엇이었길래 날개가 꺾인 채로 제대로 한번 날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 앉거나 삶과는 다른 길을 가야만 했을까?

 

친일파 아버지,그리고 본부인이 아닌 첩을 데리고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자신만 살겠다고 경성으로 간 아버지와는 다른 이념을 가졌던 막내 아들 기수,그는 아버지가 거느렸던 모든 땅과 곡식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다. 공평한 분배로 자신은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닥친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별채 디 사당에서 죽음을 택하고 말았다. 이땅에서 어쩔 수 없이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만 했던 기수, 그는 자신의 집에서 부모를 잃고 종살이를 하며 산 경애에게 '도련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한다. 이제 공평해 진 것이다. 어린시절 함께 어울려 놓았듯이 이제 다시 친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상하 관계가 아닌 평등의 관계로.도둑처럼 찾아 온 해방은 해방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 왔다.

 

주종의 관계를 벗어나 평등의 관계로 그리고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공산주의에 물들어 살아가야만 하는,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면서 어쩔 수 없이 선택되어 살아야 하는 땅 철원에서 주종과 양반과 평민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뼈 속까지 깊숙히 박힌 양반의 피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38선만 넘으면 양반의 딸인 공주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그리고 그런 삶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종교에 더 빠져드는 어머니 때문에 한집안의 가장이 되듯 하여 모두를 책임져야 했던 은혜,그녀는 38선을 넘어 그녀가 원하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누구는 경성의 삶을 버리고 철원 땅에 와서 정착과 진실된 삶을 살려고 하는데 누군 이 땅을 버리고 경성으로 목숨을 걸고 가려고 한다. 배롱나무집에서 종살이를 하던,주인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겨지게 된 경애의 꿈은 소박했다. 아버지가 손수 지은 집에서 언니들과 모두 함께 사는 것,꿈이 너무 거창했던가 큰언니는 남조선에 뜻을 두고 둘째 언니는 공산당에 적을 두었다. 그녀는 단지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사는 것뿐이었는데 서로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면 서로에 가슴에 총뿌리를 겨누어야만 했다.왜, 누구때문에.

 

해방은 모두의 삶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아니 뒤바꾸어 놓았다. 누구를 위한 해방이고 누구를 위한 38선인지 38선 하나로 모두의 삶과 희망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공산주의가 물들어 있는 이땅에 어느 누구의 소행인지 반대세력들이 등장하고 그 힘에 함께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쫒아 가며 살기 위하여 서로의 가슴에 총뿌리를 겨누며 내일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그들에게 내일이란 희망이 오긴 오는 것인가.철원의 해방 전 후의 모습을 청소년들의 눈을 통하여 너무도 실감나게 잘 그려냈다. 기수도 경애도 제영도 은혜도 분명 그 시대에 존재했을 법한 인물들인데 왜 하나같이 모두의 삶이 가슴 아프기만 한지.그들의 행복과 평화와 꿈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괜히 미안해지고 씁쓸하기만 한 역사,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아픔일 듯 하다.

 

해방과 분단으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가족이 흩어지고 친구가 적이 되고 이웃이 적이 되어 살아야만 했던 삶이 고난해 보인다. 그들이 이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인 청소년들이라 더 아프고 지켜주고 싶은데 왜 역사는 그들을 빗겨가지 못하고 급류에 휩쓸려가게 만든 것인지.기수가 은혜를 그냥 놓아 주었다면 기수도 살고 다른 이들도 살아 남았을까. 해방 전까지는 이웃이고 친구였던 그들의 등에 가슴에 총을 겨누어야 하는 현실 앞에서 거침없이 죽음에 휩쓸려 버린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비단 그들 뿐이겠는가? 역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이름들을 저자는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그때의 철원을 되살려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그곳에 누가 살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이 이어지고 있었는지.타인의 아픔은 쉽게 잊기 마련이다. 그 상흔이 아무리 깊고 크다고 해도 내것이 아니면 지워 버린다. 하지만 이젠 기수와 경애의 삶을 통해 은혜와 제영의 삶을 통해 그 시간 그 땅의 역사와 시간을 기억하게 되었다.앞으로 더 많은 희망이 꺾이지 않도록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역사와 숙제가 우리에게 남겨졌다. 그가 복원해 낸 그들의 꿈이 다시 날갯짓 하는 그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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