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잘못은 우리 별에 있는 것이 아닐세. 우리 자신에게 있다네.' 우리 주위에서는 잘못이 무수히 많다. 무엇이 잘못일까? 아직 죽음을 논하기엔 이른 아이들이 암에 걸려 신체를 일부를 적출하거나 혹은 잃어버린 폐의 기능을 인공물로 대신하는,죽음을 앞두고 자신들이 잊혀지거나 혹은 남은 이들에게 상처를 줄까봐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 잘못일까. 죽음이란 어느 나이를 떠나서 두렵고 무섭고 '지금은 아니야'라고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죽음도 삶의 일부이고 연장이다. 영원한 것이 있을까. 나이를 먹어가고 부모님들의 부고소식을 하나 둘 접하면서 많이 듣는 말이 '가는데는 순서가 없더라'라는 말이다. 병원에 가면 나이 먹은 사람들보다 어린 친구들이 아프거나 안좋은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가 더 슬프다.아직 꽃도 피워보지 않았는데 그들이 죽음과 싸우거나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슬프다,하지만 그게 인생인것 같다.

 

16,17 사춘기에 한창 성장할 나이에 헤이즐과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말기암환자이거나 먼저 떠나간 이들이다. 강한 약으로 인해 방안에 있기 보다는 돌아다녀야 할 나이에 약과 병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집안에만 있는 헤이즐,그녀에게 친구를 사귀어 보라는 뜻으로 엄마는 서포트 그룹에 참여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알게 된 어거스터스,그도 암으로 인해 다리 하나를 잃어야만 했고 그녀의 여자친구도 잃었다. 비슷한 상황과 아픔에 처한 그들의 서포터즈 역할을 하는 사람 또한 암을 이겨낸 사람이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는 서로에게 반해 남은 시간들을 함께 한다.아니 지금까지 그들을 붙잡고 늘어졌던 지긋지긋한 '암'이 전부였던 삶에서 일반적인 사춘기 소년과 소녀의 삶으로 돌아가듯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을 나누고 감명깊게 읽은 책을 나눈다. 헤이즐은 그녀가 읽은 <장엄한 고뇌>라는 책을 어거스터스에게 권하기도 하고 맘에 드는 부분들을 나누기도 하는가 하면 이야기가 갑자기 결말도 없이 끝나 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작가에게 꼭 '결말'을 묻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인생도 자신이 원하던대로 결말을 쓸 수 없지만 소설이란 소설로 끝이나야 하는데 헤이즐을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비극적이었던 소설의 결말을 그녀는 어쩌면 자신과 닮지 않은 '해피엔딩'으로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지 모른다. 소설은 소설속에 또 하나의 소설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 소설 또한 암과 사투를 벌였지만 어린 나이에 죽음에 이른 소녀의 이야기가 나오는 듯,그렇다면 작가는 왜 소설의 결말을 내지 않고 소설을 끝내기도 했지만 미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도피를 하듯 떠나 살게 된 것일까.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에게 <장엄한 고뇌>는 그들의 병과 싸우는 동안 정말 '장엄한 고뇌'가 되고 만다. 산소탱크를 가지고 다니면서도 어거스터스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즐겁고 기분 좋기만 한 헤이즐,다리 하나와 여자친구를 잃고도 밝게 살려고 했던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작가를 만나러 암스테르담행을 강행한다.어린 암환자 둘이 먼 길을 여행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여행은 그들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는 상황,그들의 인생이기에 안전을 기여하며 모두가 그들의 여행을 돕는다. 하지만 어거스터스는 암이 다시 재발한 것.

 

힘든 여행 끝에 만난 자신들의 우상이나 마찬가지인 작가,그는 엉망이었다. 그가 왜 그렇게 엉망이 되어야 했을까? 그에게도 아픔의 상처가 있었던 것,어린 딸을 암으로 잃어야 했던,소설속의 아이가 그녀의 딸 이야기라면 소설은 그의 이야기일까. 상처를 그저 상처로만 안고 있는 작가,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인생을 허비하듯 술에 젖어 살고 있는 그를 보며 그 둘은 그들만의 즐거운 여행으로 마무리 하지만 어거스터스에겐 힘든 여행이었나보다. 헤이즐 또한 이 여행은 힘든 여행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그녀는 한 뼘 더 성장해 있다. 콕 박혀 있듯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녀가 어거스터스를 만나고부터 집에 있기 보다는 밖으로 향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상처와 남겨진 자들에게 남을 흔적에 대하여 조금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어린 나이게 감당하기 힘든 '죽음'과의 대치에도 어른 못지 않은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녀 또한 언젠가는 상처와 흔적을 남겨 놓고 사라져버릴 것이란,죽음이 그녀에게도 임박해 있음을 알기에 담담히 받아 들이고 있는 것 같은 아픔.

 

어거스터스의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 또한 남겨지는 부모님께 짐을 남겨 주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는 엄마대로 씩씩한 도전을 하고 있고 어거스터스가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흔적을 보면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 들이는 헤이즐의 삶이 너무 먹먹하다. '나 그 애를 사랑해요.그 애를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정말 행운아에요. 반 호텐, 이 세상을 살며서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고를 수 있어요.난 내 선택이 좋아요. 그 애도 자기 선택을 좋아하면 좋겠어요.'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와 그의 친구들이 원했던 삶은 '사람처럼 사는 게 좋고,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걱정은 죽음의 또 다른 부작용이다.' 평범한 삶을 살거나 죽음이 아닌 재발이나 전이가 아닌 지금 상태만 유지하는 것을 원했지만 암이란 녀석들은 아직 죽음을 감당하기 힘든 어린 생명들을 무참히 짓밟고 지나가 버렸다. 어거스터스에게서는 다리도 모잘라 그의 생명을 가져가 버렸고 헤이즐의 폐는 온전하지 못하다.누구의 잘못일까.

 

힐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헤이즐에게 남은 시간동안 그리고 어거스터스가 헤이즐과 함께 한 시간동안은 어느정도 그들에게 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이 되었을까. 마지막 부분은 약간을 추리적인 요소도 있고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로맨스가 있기도 하니 어떤 류의 소설이라고 정의하기가 애매하지만 '죽음'이라는 문제에 당면한 사춘기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라 그런가 무척 무겁기도 하고 생각할 것이 많다.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큰 문제이다.자신의 명을 다 살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좋겠지만 결말이 없는 소설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면 누구나 우왕좌왕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환자 곁에서 함께 하는 보호자들 역시나 우왕좌왕하게 된다. 나 또한 친정아버지를 폐암으로 보내 드리며 소설속의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해서인지 소설을 더 실감나게 읽게 되었고 어거스터스의 죽음과 그들이 고통을 느낄 때의 먹먹함과 울컥함이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구나. 그 소설은 종이에 몇 글자 끄적거린 걸로 만들어진 거야. 그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런 끄저거림의 바깥에서는 아무 생명력도 없어.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소설이 끝나는 순간 존재하기를 멈춰 버렸지.' 소설이 끝나는 순간에 소설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캐릭터들의 존재가 멈추듯이 인간 또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멈춰 버릴까? 자신이 살아왔던 아니 남겨진 사람들에게 '흔적'이 어떻게 남겨질까? 소설처럼 죽음으로 멈추어 버릴까. 0과 1사이에 존재하는 무한대의 무한대의 시간이 존재함을,흔적을 남겨 놓고 간 사람들과의 무한대의 시간은 존재한다는 것,죽음도 삶의 연장이기에 삶과 죽음의 연속선상에서 무한대의 시간 속에 존재했던 그들의 상처와 아픔의 시간들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을 듯 하다. 헤이즐의 해피엔딩으로 연장하고 싶었던 소설의 이야기처럼 그녀의 삶이 연장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소설을 덮는다. 삶도 죽음도 영원한 것은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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