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한참 아이들과 영어책, 그중에서도 챕터북을 신나게(?) 읽어나갈 때의 일이다. 그때도 이미 읽을 만한 챕터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수입되고 있어서, 만약 어떤 엄마가 아이에게 영어책만 읽히겠다고 작정(?)을 한다 해도 그게 가능할 정도였는데, 그러다 보니 그 많고 많은 영어책 중에서 내 아이에게 맞는, 내 아이가 흥미를 느낄 만한 영어책을 찾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읽을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영어유치원은 물론이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 학원에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에서, 영어 학원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한 엄마는 그렇게 아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영어책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림책을 웬만큼 읽었지만, 두꺼운 소설책을 읽기에는 아직 부족한 아이에게는 챕터북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그에 속하는 책들 역시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했다. 더욱이 큰아이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내용에 감흥을 느끼지 않았고, 말괄량이가 주인공이면 더더욱 공감하지 못했다. 학교생활의 이런저런 에피소드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책들을 제하고 나니 이런 종류의 책들만 도전이 가능했다. 동물이 주인공인 책들 혹은 판타지물. 그렇게 우리는 힘겹게 네게 딱 맞는챕터북을 찾아 헤매었다. 내용을 알아야 추천할 수 있으니,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책들을 나도 같이 읽었다.

 


그중에 오래 기억에 남는 책이 있는데, 그건 바로 댄 그린버그의 <Zack Files>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잭의 미스터리 파일 1 : 벽장 너머의 세계>이다. 화장실 수납장을 열게 된 잭, 그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발견하고, 그 너머에, 화장실 수납장 너머에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평행 우주. 평행 우주론의 어린이 버전이다. 평행 우주, ‘우리가 속한 우주가 아닌 또 다른 우주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세계가 아닌 평행선상에 위치한 곳에 존재하는 다른 우주.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공간과 차원이 다른 수없이 많은 우주. 그리고 그 우주에 살고 있는 나. 혹은 로 보이는 어떤 존재.

 

 


열여섯 혹은 열일곱 살의 소년이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된 열다섯 살의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소년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다. 버려진 느낌과 황당함, 슬픔과 외로움을 담담히 감당하던 소년은 소녀가 말해주었던 그 도시를 찾아 떠나고, 그곳에서 그렇게 그리던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예전의 연인을 매일 만나면서 그는 그곳에서 잠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신에게서 떨어진 그림자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소년이 그리던 삶은 여기에 있다. 매일 소녀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소녀가 내려주는 쑥색 약초차를 마시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일과를 마친 후에는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삶.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세계에 있다. 도시의 불확실한 벽, 높고 두터운 벽 안쪽에, 그가 원하는 삶, 그가 바라던 삶이 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내가 만나는 소녀, 나와 함께하는 이 소녀는 실체일까. 혹 이전 세계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실체인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나는, 혹시 허구가 아닐까. ‘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나가 이제 곧 숨을 거두게 될 그림자가 나의 진정한 실체인 건 아닐까. 소년은 그림자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자신은 그 불확실한 벽 저쪽의 도시에 남아있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고 만다.

 


이쪽 현실세계에서 그는 중년에 접어든 특징 없는 남자다. 지방의 작은 도서관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 그에게 이제 새로운 우주가 열린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걸어서 출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다림질을 한다. 신비로운 존재인 이전 도서관장 고야스 씨와의 만남을 접점으로 그는 옐로 서브마린 요트파카 차림의 소년 M**와 더욱 가까워지고, 그를 통해 도시에 대해 듣게 된 서브마린 소년은 바로 그곳, 불확실한 벽 안쪽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의 임무였던 오래된 꿈 읽기, 도서관에서 보내는 일상을 서브마린 소년은 원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평범하면서도 담백한 하루키의 문장들은 하나의 의문, 하나의 질문으로 나를 이끌어간다. 어떤 세계가 진짜일까. 어느 세계 속의 내가 진짜일까. 내 행세를 하는 저 그림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특정한 기대나 사회가 원하는 일정한 역할의 수행자로서의 가 아니라, 그냥 나. 나는 어떤 존재일까. 소설 속 고야스 씨는 자신을 단순한 일개의 통과점으로 본다(380).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의 수정을 더해 자기 아이에게 물려주는 존재,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380)로서 말이다.

 


700쪽이 넘는 두꺼운 소설을 따라 읽어가면서도 누가 진짜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불확실한 벽 저쪽의 도서관장이 진짜인지, 불확실한 벽 이쪽의 오래된 꿈 읽는사람이 진짜인지. 하지만, 이쪽 아니면 저쪽, 이 세계 아니면 저 세계를 고집하던 나의 옹졸함은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린다.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다던 소녀(110), 당신과 다시 한번 하나가 되고 싶다던 그림자(153), 그리고 본래에 가까운 당신 자신이 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서브마린 소년(722)은 하나로 연결된다. 나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열다섯 살의 소녀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애원하는 그림자이며, 하루종일 책만 읽는 그 서브마린 소년이다. 불확실한 벽 저쪽의 내가 인 것처럼, 불확실한 벽 이쪽의 나 역시 이다. 두 세계에 모두 속하는, 혹은 속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그 찰나, 지금 현재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고, 이 세계와 저 세계로의 나의 낙하를 받아줄 이는 바로 나, 나 자신뿐이다.

 

 


외출할 때도 굳이 이 두꺼운 책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는데, 다음, 그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씨름하는 순간마다 도서관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소설 속 중년의 가 만나는 새로운 우주 역시 도서관이다. 이곳은 안전하고, 시간이 멈춘 곳이고, 그리고 나의 낙하를 받아줄 이가 기다리는 곳이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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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29 1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곱번째 좋아요를 누른 사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의 리뷰를 단발머리 님이 써주실 줄은 몰랐는데, 뜻밖이라 그런지 더 좋네요. 저는 아직 절반도 못읽었는데 음, 리뷰를 쓴다면 이 방향이다, 라고 혼자 정한 건 있거든요? 그 방향과 단발머리 님의 리뷰가 너무나 달라서 또 놀라고 즐겁습니다. 감상은 역시 독자의 몫이구나 싶고요. 초반에 힘겹게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되어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단발머리 님의 리뷰도 아주 즐겁게 읽었습니다!!

단발머리 2023-12-29 10:3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좋아요,를 누르신 여섯분들과 이 영광을 ㅋㅋㅋㅋㅋㅋㅋ ‘좋아요‘의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솔직히 하루키를 많이 (사실은 거의) 안 읽었는데, 몇 권 읽으면서 느꼈던 거는...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정말 대단해요. 자극적이지도, 사건이 많지도 않은데, 이야기가 이리로 저리로 뻗어가는게 말이에요.
다락방님의 생각은 제 리뷰와 완전 다른 방향이라니 그 리뷰, 저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가능하면 31일 전에 리뷰 올려주시기를... 간곡히 바라 마지 않습니다.

다락방 2023-12-29 10:46   좋아요 2 | URL
제가 31일 전에 과연 쓸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어제도 야근에 오늘도 야근에 내일도 술 모레도 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화이팅!!

단발머리 2023-12-29 10:52   좋아요 0 | URL
아.... 연말에 야근이라니 ㅠㅠㅠㅠㅠㅠ
내일도 모레도 일정이 빡빡하시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화이팅!! (*5)

다락방 2023-12-31 14:23   좋아요 1 | URL
저 이 책 막 다 읽었고 마지막 부분에서 단발님이 왜 이렇게 리뷰를 쓰셨는지 확- 이해됐습니다. 어휴 ㅠㅠ 너무 좋네요 ㅠㅠ 저 하루키가 좋습미다 ㅠㅠㅠㅠㅠ

mytripo 2023-12-29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선생님 그래서 학원 없이 영어교육 성공하셨는지 막 여쭤보는 k-학부모..

단발머리 2023-12-29 15:41   좋아요 1 | URL
아이고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학원 없이 영어교육까지는 맞고요. 성공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똑같은 과정을 거쳤지만 두 아이의 영어 성적에 차이가 많아서요.. 결론은, 공부는 각자 하는 걸로.
이렇게 나버리고 말았거든요 😳😳😳

mytripo 2023-12-29 14:20   좋아요 1 | URL
저는 대댓글 왜 때문에 안써지는거죠?
학원 다녔어도 성적 차는 비슷했을 것 같아요. 고생하셨습니다.👍

단발머리 2023-12-29 15:42   좋아요 0 | URL
우앗! mytripo님!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귀한 말씀에 눈물이....😢😢😢
감사합니다!!

수이 2023-12-30 1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목을 보고 깜놀했는데 말이죠 단발님,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좀 뻔한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데 말이죠. 몸을 던지고 영혼을 던졌을 때 받아줄 수 있는 이가 나 말고 또 어딘가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보편적으로 말하면 일단 엄마라는 존재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그 엄마가 항상 모든 딸아들을 받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죠.

단발머리 2024-01-03 20:51   좋아요 0 | URL
나 말고 또 어딘가 나를 받아주는, 나의 낙하를 받아주는 이가 있죠. 제게도 있습니다. 그런 존재가 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님은 이걸 캐치해 내셨으니, 그런 존재의 존재를 아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수이님의 낙하를 받아줄 이!!

독서괭 2023-12-31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학원 안 보내기 결심.. 정말 어려운 결심을 하고 해내셨군요. 대단합니다👍👍👍 저도 학원을 많이 안 보내려고(공부학원은) 생각하고 있는데 막상 학년이 올라가면 어찌될지..^^; 아이들에 맞는 영어책 찾는 게 또 일이긴 하더라고요. 아휴.
하루키 리뷰 다들 자기 색깔이 있으셔서 재밌네요. 낙하를 받아줄 이라니, 제목도 너무 멋지고요. 도서관이야기라 조금 당기는 책입니다.
단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단발머리 2024-01-03 20:54   좋아요 1 | URL
영어학원을 안 보내기는 했는데.... (말줄임표 속에 많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학원을 안 가면서 공부한다는게 일단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거는 같아요. 어렸을 때 공부습관이 만들어지면, 괜찮을 거 같기는 하지만... (먼 산)
전 이번에도 하루키가 좋았습니다. 웃긴 구절을 좀 발견했거든요. 소소한 인물의 소소한 유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 내년에도 더 자주 뵈어요!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시고요!
 
강제적 이성애와 무성애의 섬 (feat. 수하님)

 















케이트 밀릿의 <성 정치학>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18년이었다. 이미 품절 상태였고, 친절한 알라디너님은 애인이 비싼 중고를 구해주었다 자랑하시기도 했다. 애인 없는 나는 원서를 구입해서는 2쪽 읽고 바로 고이 보관 모드로 들어갔고, <성 정치학> 2020년에 재출간되었다. 당시 책소개에 이런 문단이 있어 페이퍼에 적어 두었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알라딘 책소개는 좀 바뀌어 있어서, 그래24의 책소개를 가져와 본다.


《성 정치학》은 케이트 밀렛에게 크나큰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이러한 관심에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부장제의 기원에 의문을 제기한 밀렛에게 전통적인 이성애적 가정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저명한 비평가 어빙 하우는 “이른바 시대 정신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을 대충 어지럽게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면서 “배운 티를 내려 애쓰고 있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결정적으로 레즈비언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운동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1970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열린 컨퍼런스 도중 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부터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밀렛은 힘겹게 “레즈비언”이라고 답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여성 해방의 마오쩌둥”이라며 치켜세웠던 《타임》은 “페미니스트들을 레즈비언으로 치부하는 회의론이 강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밀렛의 고백 이후 많은 진보적 페미니스트가 등을 돌렸다. (<Yes 24 책소개>)   



나는 이걸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케이트 밀릿은 레즈비언이었지만, 그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는 꺼려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의 질문에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이 책 <여전히 미쳐 있는>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게 읽힌다.


















동성애자와 여성의 해방운동에 관한 어느 모임의VER패널로 참가했을 때는 한 청중으로부터 'L 워드'를 사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500명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레즈비언이에요? () 그렇다고 말해! 네가 레즈비언이라고 말해!' 라면서. 나는 네, 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니까. 마치 파시스트의 칙령처럼 융통성 없는 저 말은, 양성애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그렇다고,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 것이었다." (<여전히 미쳐 있는>, 205)



자신이 급진주의자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밀릿의 나는 레즈비언이라는 대답(206). 혹은 그러한 대답에 대한 압박은 페미니즘 운동이 불꽃처럼 타오르던 시기에 레즈비언니즘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티그레이스 앳킨슨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은 이론이며 레즈비어니즘은 그 실천이라는 의식이 급진적인 페미니즘 운동 전체를 좌지우지했고, ‘라벤더 위협의 힘으로 급진적 레즈비언 단체를 여성주의 운동과 분리시키고 싶어했던 베티 프린단 같은 세력의 반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런 저런 사정들로 인해 여성주의 운동가들 사이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됐다.


한국에서도 그런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화살표는 전후좌우 방향이 없었다. 남성이 여성을 검증(?)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묻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성이 여성에게 묻는 경우도 있었다. “당신 페미니스트야?” 대답은 Yes or No. 페미니스트에 대한 정의가 천차만별인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왜 당신은 대답하지 않느냐, 왜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느냐의 질문이 페미니즘의 고전을 저술한 사람에게까지 이어졌다. 밀릿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파시스트의 칙령같은 질문.




이성애는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강력한 버팀목 중 하나이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 그리고 남성과 여성과의 구별이 이성애를 떠받치고 있다. 하지만, 공기처럼 우리를 지배하는 이성애 가부장제 속에서 우리가 진짜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대답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저는 결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거짓 의식을 '세뇌당한' 상태로 헤맨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표현이 유용하거나 심오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호모포비아는 너무 널리 퍼진 용어라 이성애 페미니즘의 성적 유아론을 밝혀내고 대화를 나누기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에세이를 통해 저는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이성애 경험을 비판적으로, 나아가 적대적으로 검토해 보길, 자신이 속한 제도를 비평해보기를, 여성의 자유를 위해 그 규범과 함의를 놓고 투쟁하기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관점으로 제시하는 수많은 자료에 좀 더 마음을 열어주기를, 이성애 제도 안의 개인적 특권과 개인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자는 해결책에 안주하지 않기를 요청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284)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의 도전은, 나의 이성애 경험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남자와의 연애와 사랑과 섹스를, 그 경험을 적대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성애 제도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특권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마저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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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3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2-23 21: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엄머 찹쌀떡아이스 인절미?? 맛있겠네요 ㅎㅎ
제 지인도 몇년 전에 여자가 결혼을 꼭 해야하는가, 결혼제도 안에서 여성이 입는 불이익에 대해 말했다가 상대 여성이 “너 페미니스트야?”라고 물어서(검증어조로) 황당했다고 하더군요..
단발님 화이팅!!

단발머리 2023-12-24 17:51   좋아요 1 | URL
너무 맛있다는 소식입니다! 아주 맛나요! 그런 질문들은 그래도 뭔가(?) 아시는 분들이죠. 전 은근슬쩍 이야기하면 듣는 분들이 아~~ 그런가? 그렇네… 이런 분위기에요.
독서괭님도 화이팅!! 💕🎄

2024-01-16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16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커리어 그리고 가정

 


2012년의 이 옛날 사진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나서 첫 페이지를 찍어둔 것이다. 그때 써둔 페이퍼를 찾아보니 이 페이지가 특히(!) 마음에 들어 출판사에 전화를…. (제가 이렇게 자주 출판사에 전화하는 사람이었네요. 몰랐어요, 나도) 지금 사도 저 페이지는 똑같나요? 물었더니 초판 일부에만 저 부분이 들어간 거라고 해서 눈물을 머금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러니까 저 책이 내게는 장하준의 첫 번째 책이다. 인간의 이기심을 그대로 두지 말고 공정하게경쟁이 이루어지도록 공평한 경기장을 만들자는 주장이 너무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읽은 책은 대중에게 더 다가간다는 느낌이 강하다. 요리 혹은 식재료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도 이전의 관점을 놓치지 않고 주장에 대한 여러 경제학 통계와 그에 대한 장하준식해설이 곁들여 있다. 특히 아내의 권유에 따라 용기를 내어 기술했다는 <챕터 13장 고추>돌봄 노동부분이 눈에 띈다.

 


돌봄 노동에 대한 관점과 관행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 …. 셋째, 관점과 관행의 변화는 제도 변화를 통해 공고히 해야 한다. 무보수 돌봄노동에 대한 인정과 인식 변화는 복지체제의 변화로 공식화되어야 한다. 양성 모두에게 유급 돌봄휴가(어린이 양육하기, 노인 돌보기, 병든 친척과 친구 돌보기 등을 위한)를 더 길게 허용해야 하며, 집에서 풀타임으로 아이를 돌보는 부모나 보수를 받는 일을 하는 부모 모두에게 값싼 보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263)

 


보이지 않는 모든 종류의 돌봄 노동이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이것이 무료로 이루어지는 현실에 대한 진단. 돌봄 노동을 가시화하는 여러 방식에 대한 논의 또한 이어진다. 여성의 임금이 상승했을 때 가정 경제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주장과 논거가 이어지는데, 이 당연한 말을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않는다. 남녀 임금 격차를 좁히고,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적이었던 직군에 여성이 더 쉽게 진출할 수 있게 하는 것, 보수를 받는 돌봄 노동의 임금 상승을 위해 최저 임금을 올리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262). 202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라우디아 골딘의 <커리어 그리고 가정> 역시 성별 임금 격차의 핵심 원인을 밝혀낸' 책으로 주목받고 있다다정한 이웃님이 선물해 주셔서 고이 모셔놓고 있는데, 이어서 읽으면 좋을 듯하다.  

 

 
















2. 녹색 평론 184호 

 


일론 머스크가 내놓은 테슬라 로봇 옵티머스 2세대는 보완할 부분이 몇 가지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충분히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다. 물리적으로 완벽한 물체(신체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에 자신의 뇌를 다운로드해서 다른 행성(구체적으로는 화성)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의 꿈은 점점 더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지구가 녹색이기를 바라는 마지막 바람은 이 책에서 구체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녹색평론> 사서 읽는 사람 아닌데 정희진 선생님 글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구입했다. 물론, 다 읽지는 않고 정희진 선생님 글읽었다. [딜레마가 아닌 파국;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발전주의에 대한 비판과 기술 발달로 인해 인류가 얻게 된 핵무기라는 결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희망이라는 게 가능한가.

 


나는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 아류 러다이트주의자다. 다시 말해 '멈춤'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찰적 과학자의 질문, "다시 한번 묻는다. 인공지능 그리고 그다음을 이어갈 또다른 과학의 발전은 계속 인류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과학기술은 발전하면 할수록 인류를 불행하게 한다. 이익을 보는 이들은 지구를 버리고 화성에 가서 살고 싶은 극소수 자본가뿐이다. (198)

 


인류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끝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녹슬지 않는 새로운 몸을 입고 화성으로 이사 가려면, 일론 머스크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3. 트렌드 코리아 2024

 

베스트셀러 읽는 엄마라서(나의 끈질김을 보라. 우리 집 얘들은 제 글을 읽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하고자 합니다. 얘들아, 나의 끈질김을 보라!) 일 년에 한 번은 꼭 훑어본다. 자세히는 안 보고 쓱~~ 본다. 신문도 안 읽고, 주간지도 안 읽는 나여서, 그래서 본다. 2024, 내년의 트렌드는 무엇인가. 영어 알파벳 조합에 따라 키워드 10개를 꼽았단다. 여기에도 보이는 돌봄경제’.

 







 













4. 나일 강의 죽음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다섯 마리 아기 돼지

 


처음 읽는 아가사 크리스티. 작은애가 중학생일 때, 집 근처 새 도서관에서 반짝반짝 새 책으로 시리즈 빌려다 주던 사람이 바로 나인데. 이번에는 내가 읽으려고 빌렸다. 처음에 예상한 사람이 범인인 것은 맞았는데, 아가사의 설명 따라가다가 잠시 헷갈렸다. 두 권 정도 더 읽어야겠다 싶다.

 



 














5. Nine Lives / The Kind Worth Saving / The Christmas Guest  


 

피터 스완슨은 이 책까지 총 3권 읽었고, 두 권 더 주문해서 (알라딘 미안, 교보가 만원이 싸더라) 총 다섯 권이다.


 

첫 페이지에 9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여남이 섞여 있고, 나이도, 직업도, 사는 지역도 제각각이다. 5분의 1 정도 읽으면서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는데 모두 ‘having an affair’, '불륜 중'. 전문 용어로 바람을 피고 있'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벌써 3명이나 죽었다. (이런!!) 유튜브에 오디오북이 있어서 어제는 찬찬히 읽다가 맘이 급해서 오늘은 줄거리만 따라 허겁지겁 읽어가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어렸을 때 읽던 책 이야기를 하는데 아가사 크리스티가 나온다. 한 명은 크리스티 소설을 다 읽었다고 하고, 한 명은 그 중에서 어떤 책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제목이 기억 안 난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 제목(<The A. B. C. Murders>)을 알려주는 훈훈한 장면이 이어진다. 아가사 크리스티 딱 한 권 읽은 사람이고, 내가 읽은 책은 언급이 안 되었지만 뿌듯한 마음에 혼자 웃었다. 아무도 없어서 크게 웃어도 되는데 조용히. 이럴려고 내가 아가사 크리스티를 한 권 읽은 거야.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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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22 14: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글 좋다고 쓰려다가 마지막 사진 보고 다 날아가버리네요. 사진이 너무 좋아서요. 뒤에 저 훌륭한 배경하며..!!
단발머리 님 열심히 읽고 계셔서 너무 좋네요. (저는 게을리 읽고 있습니다만..)

단발머리 2023-12-23 16:57   좋아요 0 | URL
제 책이면 좋을텐데요 ㅋㅋㅋㅋㅋㅋㅋ 도서관입니다. 저 자리가 원래 책상 자리였는데 오랜만에 가보니 편안한 스타일로 바뀌었더라구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찰칵! (소리 안 나는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ㅋㅋㅋ)
다락방님도 열심히 읽으세요! (촤락~~~~~~~~~~~~~~~~~~)

은하수 2023-12-23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헤. . . 글 너무 좋네요... 사진도요^^
더 이상 말이 필요없네요.
<커리어 그리고 가정>은 저도 읽는 중인데... 진도가 안 나가요.
어렵진 않은데 그러네요.
꾸준히 읽고 계신 모습 넘 멋지십니다!

단발머리 2023-12-23 16:58   좋아요 1 | URL
<커리어 그리고 가정>을 가지고 계시군요? 저도 곧 시작해야지 하고 일단 책장에서 꺼내 두었습니다.
꺼낸 다음에는 쌓아놓기는 하지만, 일단 2단계에 진입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은하수님의 격려 말씀 듣고 나니 더 꾸준히 읽어야겠다! 결심하게 되네요. (불끈!!)
 













읽지 않아도 책 구비에 진심인 사람인지라 오후 수업에서 신경 쓴 부분은 다양한 동화책을 준비해 놓는거였는데, 학교 도서관만 이용하기에는 권수가 부족해서 동네 도서관 두 곳의 책을 대출해 준비해 놓기는 했다.

 


이 책에서는 이 페이지가 제일 근사했다. 주몽과 세 친구가 부여 금와왕 아들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 책에는 시퍼런 강물이라고 나오는데, 연두색과 초록색의 조화, 아니면 에머랄드빛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두 페이지가 시원하게 하나로 엮여 바다를 멋지게 표현했다. 바다, 하니까 떠올라서 핸드폰을 뒤져보니 오키나와 갔을 때의 사진이 있어서 그것도 같이 올린다. 여름, 그립다.

 


 






주몽은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 주몽은 우리처럼 사람인데 어떻게 알에서 태어났나. 이런 이야기를,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자체에 몰입해야 하는데, 주인공의 난관에 같이 함몰되어야 하는데. 난생, 태생, 난태생. 우리 포유류는 난생이야, 태생이야? 오리너구리 이야기도 잠깐 해주시고.

 


길이길이 남기고 싶은, 알라딘에 박제하고 싶은 건 이 페이지다. 나는 이 이야기의 이 부분을, 이번에 처음 들었고 처음 알았다. 해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와 정을 통한 사이인데, 하백은 해모수가 영 마뜩잖았다. 해모수를 시험하기로 한 하백, 프랑스 파리의 한식 전문점에서 대통령이 재벌들 불려서 술 멕이듯, 해모수에게 술을 만땅으로 먹이고는 유화와 함께 가죽 상자에 가두어 두었다. 아침이 되고, 다섯 용이 황금 수레(해모수 자가용)를 끌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부릉부릉 부르릉하니, 잠에서 깬 해모수는 깜짝 놀라




 

해모수는 얼른 유화의 비녀를 뽑아 가죽 상자를 찢고는 혼자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어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요!”라는 말을 남기고……

 


어머나. 혼자 간다, 해모수가. 아이구야. 화가 잔뜩 난 하백은 그 길로 유화를 집에서 쫓아내고. 그다음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이야기. 해모수가 떠나듯 주몽도 부여를 떠난다.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게 다들 떠난다. 남겨진 건 여자 그리고 아이. 혹은 엄마 그리고 아이. 해모수가 가죽 상자에서 탈출하려 할 때 필요한 게 유화의 비녀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유화 소유의, 유화를 위한 도구를 해모수는 자신의 탈출을 위해 사용한다. 그리곤 버린다. 유화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비녀는 저만치서 나뒹군다. 이런 이야기는 물론 하지 않는다. 어머, 해모수 혼자 간 거야? 정도에서 접는다. 지나친 개입은 옳지 않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고, 아이들이라고 그걸 하지 못할 리 없다.

 

 


계약 만료는 지난 금요일이라 이제 퇴사 2일차다. 집에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길었는데도 겨우 몇 개월만에 시간에 대한 개념이 바뀐 듯하다. 아니면 퇴사 2일차라 그럴 수도 있겠다. 자꾸 시계를 쳐다보게 된다. 지금 이 시간쯤에 나는 출근 중이었고, 다음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그리고 **이를 만나고 있었고. 지금 이 시간에는 책상을 닦고 있었다. 집은 안 치워도 책상 위는 항상 깔끔했던 나. 과거의 나.

 


오랜만에 집에서 커피를 내렸더니 너무 진하게 됐다. 물을 더 부어야겠다. 따뜻한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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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2-21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선생님으로 일하셨군요!! 국어수업? 독서교육? 너무 잘 어울려요. 퇴사생활에 다시 적응하시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알라딘 서재에서 더 많은 활동을 기대합니다.
집은 안 치워도 책상은 깔끔하셨군요. 전 책상도 안 치우는데.. 흠..
커피를 한약처럼 ㅋㅋㅋ

단발머리 2023-12-24 17:52   좋아요 1 | URL
국어수업도 하고요. 독서교육은 안 하지만 같이는 읽어요^^
알라딘 서재에서 더 많은 활동을 제가 계획했었지요. 계획을 했습니다. 그러나 ㅋㅋㅋㅋ
집에서는 아메리카노로 마시니까요. 과자 없으면 마실 수가 없습니다, 당최 ㅋㅋㅋㅋㅋ
 

















<여전히 미쳐 있는>을 여전히 읽는 중이다.



첫인상은 매우 강렬하고 매혹적이지만 두께가 주는 압박감이 상당하기는 한데, 책을 펴서 읽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술술 잘 읽혀서 깜짝 놀라게 된다. 특히 도입부에 등장하는 힐러리 클린턴 이야기는 흥미도를 150%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공저자 두 사람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로 트럼프의 당선을 꼽았을 정도로 트럼프의 당선이 당대 미국 사회에 끼친 충격이라는 것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듯싶다.



데본주에 있는 13세기풍 초가집 코트그린으로 이사한 실비아 플라스는 모든 걸 가진 듯했다. 원하던 남자 테드 휴스를 남편으로 맞았고, 천사 같은 아이 둘을 얻었다. ‘진실과 약속으로 가득 찬 크리스마스이브’ (114) 같은 나날을 꿈꿨던 실비아. 하지만, 행복하고 소중한 나날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짧았다. 시골 생활의 외로움과 난방장치나 현대식 부엌 없는 오래된 집에서 두 아이를 돌보는 고단함(116)이 두 사람을 덮친 것이다. 그다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책의 표현 그대로 잘 알려져 있다’. 다른 여성과의 불륜 행각. 이를 알게 된 실비아. 강제로 쫓아냈던 테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실비아. 테드가 런던으로 떠난 게 1962 8월이다. 그리고 1963 2 11, 실비아 플라스는 침실 책상 위에 폭탄처럼 보이는 원고를 남겨두고는 가스 오븐을 틀었다. (112)



기사로 읽은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에서는 <테드 휴즈-실비아 플라스 부부의 비극 속 조연으로 살다>에서 테드의 누나 올윈 휴즈를 다룬다. 실비아가 세상을 떠난 후, 법적으로 이혼 상태가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실비아의 모든 작품의 저작권은 당연히 테드의 몫이었는데, 실제로는 생전에 실비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이 실비아의 유작과 이후 실비아 전기에 대한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테드를 희생자로, 실비아를 자기중심적 몽상에 빠진 사람으로 몰아가는데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최윤필은 BBC 프로덕션의 귀네스 펠트로 주연의 <실비아>에서 테드가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로 묘사된 데에도 이런 사연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실비아의 선택은 실비아의 것이다. 그녀의 절망에 테드가 미친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테드의 잘못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딱 잘라 파경의 가장 큰 원인은 테드의 불륜이라고 말하고 싶기는 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해 실비아의 우울함이 더욱 심해졌을 수도 있고, 재능 있고 명석한 여성이었지만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집안의 천사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학적 성취에 대한 갈망과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 등은 예술에 천착하는 작가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실비아는 자신의 기쁨과 희망을, 절망과 탄식을 작품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어떤 진실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그 진실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사람은, 사건으로서의 사실 혹은 그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비아의 작품은 테드와 올윈에 의해 편집되었다. 실비아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테드와 올윈 때문에 죽음 직전 실비아의 진실에 끝내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테드는 죽었고, 올윈도 죽었다. 실비아에 대한 진실과 테드와 올윈에 대한 진실, 실비아의 실제와 그들의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실비아는 없고. 테드도 올윈도 없으며.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믿고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없다. 죽었다.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실비아와 테드, 올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진실에 대한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진실을 들은 사람들, 그 진실에 대한 수정본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죽었다. 실비아는 1963 2 11일에 죽었다. 60년이 흘렀고, 오늘은 2023 12 18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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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18 1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전히 미쳐있는 을 여전히 읽고 있습니다. 어휴 단발머리 님 글 너무 좋으네요. 처음에 힐러리 얘기로 시작해서 저도 참 인상깊고 좋았어요. 단발머리 님이 말씀하셨듯, 책을 펼치고나면 생각보다 잘 읽히더라고요. 그래봤자 아직 조금밖에 못 읽었지만요. 자, 쭉쭉 읽어나가 봅시다!!

단발머리 2023-12-23 17:02   좋아요 0 | URL
전 이제 다시 펼쳤습니다. 쓰고 싶은 맘도 들고 더 읽고 싶기도 한데, 일단 케이트 밀릿 글을 한 편 썼고요.
쉬는 시간 후에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부릉부릉 부르릉!!

잠자냥 2023-12-18 14: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술술 읽히죠?!
저는 그래서 최윤필의 관점을 좋아합니다.
실비아 플라스가 오죽하면 머리를 오븐에..-_-

단발머리 2023-12-23 17:03   좋아요 0 | URL
여전히 술술 읽힙니다. ‘여전히 미쳐 있는‘, ‘여미처‘ 사이에 담담한 ‘잠자냥‘ 제가 발견했습지요.

공쟝쟝 2023-12-18 16: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미쳐 진짜 재밌죠? (재밋는 거랑 별개로 저도 읽다 맘ㅋㅋ 그런 책 천권있음) 저 관련한 글 읽었었는 데, (양효실 에세이였음) ...... 실비아의 대단히 멋진 아버지랑도 꽤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죽기 얼마 전에 아빠 개새끼 하는 시 쓰고 죽었음 ㅜㅜ)

단발머리 2023-12-23 17:04   좋아요 0 | URL
죽기 전에 쓴 ‘아빠 개새끼‘ 시를 저도 좀 찾아보려고요. 그렇게 욕하고 싶은 사람이 아빠 뿐만은 아니었겠지요.
양효실씨는 또 누구시랍니까........ 아, 할 거 겁나 많음요.

수이 2023-12-18 16: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환생해서 다시 시 쓰고 다시 소설 쓰고 다시 평론 써주면 좋겠다 싶은 이미 죽은 여성들 중 실비아 플라스는 단연 탑. 가슴 아픕니다.

단발머리 2023-12-23 17:05   좋아요 0 | URL
저도 딱 그 생각했어요. 더 썼어야 하는 사람, 더 오래 살았어야 하는 사람.
1. 실비아 플라스
2. 캐롤라인 냅

독서괭 2023-12-21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 실비아 플라스에 대해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군요? 흥미진진!

단발머리 2023-12-23 17:07   좋아요 1 | URL
저 반 읽었거든요. 독서괭님 달려 읽으시면 금방 저보다 앞서 읽으시겠군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진짜....
흥미진진하고 슬픈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