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아도 책 구비에 진심인 사람인지라 오후 수업에서 신경 쓴 부분은 다양한 동화책을 준비해 놓는거였는데, 학교 도서관만 이용하기에는 권수가 부족해서 동네 도서관 두 곳의 책을 대출해 준비해 놓기는 했다.

 


이 책에서는 이 페이지가 제일 근사했다. 주몽과 세 친구가 부여 금와왕 아들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 책에는 시퍼런 강물이라고 나오는데, 연두색과 초록색의 조화, 아니면 에머랄드빛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두 페이지가 시원하게 하나로 엮여 바다를 멋지게 표현했다. 바다, 하니까 떠올라서 핸드폰을 뒤져보니 오키나와 갔을 때의 사진이 있어서 그것도 같이 올린다. 여름, 그립다.

 


 






주몽은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 주몽은 우리처럼 사람인데 어떻게 알에서 태어났나. 이런 이야기를,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자체에 몰입해야 하는데, 주인공의 난관에 같이 함몰되어야 하는데. 난생, 태생, 난태생. 우리 포유류는 난생이야, 태생이야? 오리너구리 이야기도 잠깐 해주시고.

 


길이길이 남기고 싶은, 알라딘에 박제하고 싶은 건 이 페이지다. 나는 이 이야기의 이 부분을, 이번에 처음 들었고 처음 알았다. 해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와 정을 통한 사이인데, 하백은 해모수가 영 마뜩잖았다. 해모수를 시험하기로 한 하백, 프랑스 파리의 한식 전문점에서 대통령이 재벌들 불려서 술 멕이듯, 해모수에게 술을 만땅으로 먹이고는 유화와 함께 가죽 상자에 가두어 두었다. 아침이 되고, 다섯 용이 황금 수레(해모수 자가용)를 끌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려고 부릉부릉 부르릉하니, 잠에서 깬 해모수는 깜짝 놀라




 

해모수는 얼른 유화의 비녀를 뽑아 가죽 상자를 찢고는 혼자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어요.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요!”라는 말을 남기고……

 


어머나. 혼자 간다, 해모수가. 아이구야. 화가 잔뜩 난 하백은 그 길로 유화를 집에서 쫓아내고. 그다음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이야기. 해모수가 떠나듯 주몽도 부여를 떠난다.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게 다들 떠난다. 남겨진 건 여자 그리고 아이. 혹은 엄마 그리고 아이. 해모수가 가죽 상자에서 탈출하려 할 때 필요한 게 유화의 비녀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유화 소유의, 유화를 위한 도구를 해모수는 자신의 탈출을 위해 사용한다. 그리곤 버린다. 유화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비녀는 저만치서 나뒹군다. 이런 이야기는 물론 하지 않는다. 어머, 해모수 혼자 간 거야? 정도에서 접는다. 지나친 개입은 옳지 않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고, 아이들이라고 그걸 하지 못할 리 없다.

 

 


계약 만료는 지난 금요일이라 이제 퇴사 2일차다. 집에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길었는데도 겨우 몇 개월만에 시간에 대한 개념이 바뀐 듯하다. 아니면 퇴사 2일차라 그럴 수도 있겠다. 자꾸 시계를 쳐다보게 된다. 지금 이 시간쯤에 나는 출근 중이었고, 다음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그리고 **이를 만나고 있었고. 지금 이 시간에는 책상을 닦고 있었다. 집은 안 치워도 책상 위는 항상 깔끔했던 나. 과거의 나.

 


오랜만에 집에서 커피를 내렸더니 너무 진하게 됐다. 물을 더 부어야겠다. 따뜻한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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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9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9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2-21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선생님으로 일하셨군요!! 국어수업? 독서교육? 너무 잘 어울려요. 퇴사생활에 다시 적응하시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알라딘 서재에서 더 많은 활동을 기대합니다.
집은 안 치워도 책상은 깔끔하셨군요. 전 책상도 안 치우는데.. 흠..
커피를 한약처럼 ㅋㅋㅋ

단발머리 2023-12-24 17:52   좋아요 1 | URL
국어수업도 하고요. 독서교육은 안 하지만 같이는 읽어요^^
알라딘 서재에서 더 많은 활동을 제가 계획했었지요. 계획을 했습니다. 그러나 ㅋㅋㅋㅋ
집에서는 아메리카노로 마시니까요. 과자 없으면 마실 수가 없습니다, 당최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