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미쳐 있는>을 여전히 읽는 중이다.
첫인상은 매우 강렬하고 매혹적이지만 두께가 주는 압박감이 상당하기는 한데, 책을 펴서 읽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술술 잘 읽혀서 깜짝 놀라게 된다. 특히 도입부에 등장하는 힐러리 클린턴 이야기는 흥미도를 150%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공저자 두 사람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로 트럼프의 당선을 꼽았을 정도로 트럼프의 당선이 당대 미국 사회에 끼친 충격이라는 것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 듯싶다.
데본주에 있는 13세기풍 초가집 ‘코트그린’으로 이사한 실비아 플라스는 모든 걸 가진 듯했다. 원하던 남자 테드 휴스를 남편으로 맞았고, 천사 같은 아이 둘을 얻었다. ‘진실과 약속으로 가득 찬 크리스마스이브’ (114쪽) 같은 나날을 꿈꿨던 실비아. 하지만, 행복하고 소중한 나날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짧았다. 시골 생활의 외로움과 난방장치나 현대식 부엌 없는 오래된 집에서 두 아이를 돌보는 고단함(116쪽)이 두 사람을 덮친 것이다. 그다음 두 사람의 이야기는 책의 표현 그대로 ‘잘 알려져 있다’. 다른 여성과의 불륜 행각. 이를 알게 된 실비아. 강제로 쫓아냈던 테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린 실비아. 테드가 런던으로 떠난 게 1962년 8월이다. 그리고 1963년 2월 11일, 실비아 플라스는 침실 책상 위에 폭탄처럼 보이는 원고를 남겨두고는 가스 오븐을 틀었다. (112쪽)
기사로 읽은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에서는 <테드 휴즈-실비아 플라스 부부의 비극 속 조연으로 살다>에서 테드의 누나 올윈 휴즈를 다룬다. 실비아가 세상을 떠난 후, 법적으로 이혼 상태가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실비아의 모든 작품의 저작권은 당연히 테드의 몫이었는데, 실제로는 생전에 실비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이 실비아의 유작과 이후 실비아 전기에 대한 권한을 가지게 되면서 테드를 희생자로, 실비아를 ‘자기중심적 몽상’에 빠진 사람으로 ‘몰아가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최윤필은 BBC 프로덕션의 귀네스 펠트로 주연의 <실비아>에서 테드가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로 묘사된 데에도 이런 사연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실비아의 선택은 실비아의 것이다. 그녀의 절망에 테드가 미친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테드의 잘못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딱 잘라 파경의 가장 큰 원인은 테드의 불륜이라고 말하고 싶기는 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해 실비아의 우울함이 더욱 심해졌을 수도 있고, 재능 있고 명석한 여성이었지만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집안의 천사’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학적 성취에 대한 갈망과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 등은 예술에 천착하는 작가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실비아는 자신의 기쁨과 희망을, 절망과 탄식을 작품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어떤 진실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그 진실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사람은, 사건으로서의 사실 혹은 그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비아의 작품은 테드와 올윈에 의해 ‘편집’되었다. 실비아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테드와 올윈 때문에 죽음 직전 실비아의 ‘진실’에 끝내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테드는 죽었고, 올윈도 죽었다. 실비아에 대한 진실과 테드와 올윈에 대한 진실, 실비아의 실제와 그들의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실비아는 없고. 테드도 올윈도 없으며.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믿고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없다. 죽었다.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실비아와 테드, 올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진실에 대한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 진실을 들은 사람들, 그 진실에 대한 ‘수정본’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죽었다. 실비아는 1963년 2월 11일에 죽었다. 60년이 흘렀고, 오늘은 2023년 12월 1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