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 리베카 솔닛의 책을 처음 접했을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한다는 ‘신념’을 ‘속담’으로 만들어 널리널리 전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1인으로서,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첫번째가 교통사고나 암과 같은 질병이 아니라 배우자의 폭행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여성들이 맘 편히 살 곳은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미국,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렇게나 스윗한 미국 남자들. 키가 크고 힘이 센. 그 큰 주먹을 아내와 여자친구, 전 아내와 전 여자친구에게 휘두르는.
부연하자면, 총에 맞아 죽은 여성들의 3분의 2 가까이는 현 파트너나 전 파트너에게 살해되었다. …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 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첫 번째다(49쪽).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현실에 대한 고발은, 읽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는 강간의 역사와 그 정치적 활용성에 대해, 『페미사이드』에서는 지구의 전 문화를 아우르는 여성살해에 대해, 『캘리번과 마녀』에서는 여성의 신체와 자본을 빼앗기 위해 이루어진 마녀사냥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여성에 대한 억압과 고통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들을 읽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여성 억압에 대한 역사가 아닌 현재에도 진행 중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었던 페미니즘 책과 구별되는 이 책만의 포인트를 나는 이 문단으로 꼽는다.
최근 이런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 여성에게는 여성해방이 필요 없다는 말을 여전히 들을 수 있다. 이 여성은 이미 해방되었거나,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 주장은 중산층 사이에서도, 제3세계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실을 무시한 경우이다. 이는 해방과 부를 경제주의적으로 동일시하는 한 예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과 다르게, 나는 저개발 국가에서건 과개발 국가에서건, 페미니스트 중산층운동은 절대적이고 역사적으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21쪽)
나는 내가 중산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 책들을 읽을 수 있고 이 시간에, 이렇게 한 줄이라도 글을 쓸 수 있는 정서적, 시간적 여유를 가졌다는 면에서 나는 어쩌면 중산층일 수도 있겠다. 중산층 가정주부, 사회적 일을 하지 않으면서 페미니즘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의 난처함과 고민을 저자는 ‘페미니스트 중산층운동은 절대적이고 역사적으로 꼭 필요하다’라고 정리해준다.
미소 블럭에서의 제1세계와 제3세계가 아니라, 근래 가장 중요한 가치 판단 기준인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했을 때 우리나라는 제1세계에 속한다,고 난 생각한다. 이번 코로나 대응에서도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제1세계 정도가 아니라 거의 지구 최고 수준의 의료시스템과 방역체계이다. 군대를 투입하거나 이동을 제한하는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급박한 상황을 이겨냈다. 정부도 칭찬받아야 마땅하지만 사재기 없이 차분하게 대응하는 국민들의 의식 수준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과 민주주의 발전 정도를 고려해 우리나라를 제1세계라고 가정할 경우, 제1세계와 제3세계 여성의 연대에 대한 저자의 제안을 주의 깊게 읽어볼 만하다.
첫번째는 식량의 자급. 국제분업이라는 미명하에 제3세계 국민들이 자신들이 사용하지도 않을 물건을 생산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되도록이면 직접 생산하는 것. 우리의 먹거리와 쓸 거리를 가능한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
두번째는 소비에 대한 자율권 행사. 소비자해방운동을 통해 중요한 소비 주체인 여성이 개인적 차원에서 즉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제3세계의 불량한 작업환경과 저임금, 18세에서 24세의 젊은 여성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싼 가격으로 제공되는 불필요한 사치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다. 술, 담배, 약, 수많은 사치스런 식품들과 과일, 꽃, 대다수의 컴퓨터, 비디오, 다른 매체, 음악, 텔레비전 등의 소비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별개로 화장품과 새로운 섹시한 패션 유행을 공개적으로 보이콧하는 것 또한 주요한 선택 사항이 될 수 있다(459쪽).
마지막으로 전 세계 여성이 자신의 삶과 몸에 대한 자율성을 요구하는 일에 제1세계 여성과 제3세계 여성이 연대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 즉 강간과 여성구타, 음핵절제, 결혼지참금 살해, 여성에 대한 성희롱에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서 인도의 사례를 통해 확인되듯이 여성은 카스트와 계급을 초월해 연대할 수 있다(469쪽). 성에 관련된 문제야말로 여성 사이에서 진정한 단결을 이룰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슈다. 가장 이해되기 쉬운 주제이며, 반대 주장이 전혀 설득력을 얻을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실천 1. 결혼 초부터 한살림을 이용해왔다.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고 키운 고기를 먹기 위해서였고, 결정적 계기는 ‘식량주권’이라는 단어가 인쇄된 팜플렛 때문이었다. 선택적으로 한살림 생산품을 사용하고 있다. 고기, 현미, 흑미, 귀리, 보리차 등은 한살림 생산품을 이용하지만 두부, 우유, 과자, 화장지 등은 마트의 물건과 혼용해 왔다. 가능하면 한살림 품목을 더 많이 사용해야겠다.
실천 2. 불필요한 사치품을 소비하지 않겠다. 올해 계획 중에 하나가 ‘1년 동안 옷 구입하지 않기’였다. 레깅스 하나와 티 하나를 이미 구매해 버려 좀 어긋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1년을 잘 버텨볼 생각이다. 사실 1년이 아니라 5년 동안 옷을 사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뻐질 수 없기에, 더 젊게 혹은 더 어려 보이려는 욕망을 내려놓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올 여름에 원피스를 구입하지 않는게 1차 목표다.
실천 3. 최근 가장 큰 공분을 일으키고 있는 n번방 사건의 범죄자들이 적법한 처벌을 받게 되는지, 이후 이를 보완하기 위한 법적 조치가 이루어지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백인남성 자본가가 백인남성 노동자와 백인여성, 제3세계의 여성을 착취하고, 황인 혹은 흑인 남성 유력자 뿐만 아니라 흑인 혹은 황인 남성 약자가 ‘자신의’ 여성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어떤 경제적 이득을 얻었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백인 여성도 마찬가지다. 백인여성 유력자와 약자 또한 식민지의 브라운 남성과 여성 약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 이득을 얻고 있다(306쪽).
페미니스트가 바라는 세상은 여자만의 세상이 아니다. 인간적인 행복 혹은 삶 그 자체를 원한다. 빼앗지 않고 빼앗기지 않는 삶을 원한다. 삶 그 자체를, 생명을 원한다. 당장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은 지속가능하다고 믿는다. 연대, 연대를 통해서.